연중 제12주일, 2013년 6 23일 10:30 @ 규암성당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예수님을 오해하지 말자! 

그 분을 따르지 않으면서 그 분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오늘 우리가 봉독 하는 복음서의 핵심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루카 9, 20)라고 표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이어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르려면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매일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신 말씀(루카 9, 23 참조)입니다.


오늘의 이 내용이 수록된 루카복음서 91824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앞뒤의 내용(context)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레아 전도를 마무리 지으시고 앞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여정을 제자들에게 준비시키시는 내용이 오늘의 우리가 읽는 루카복음서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동안 복음을 전하시고 수많은 기적을 보여주시면서 당신을 따라다니는 제자들을 가르치신 과정이 오늘의 우리가 읽는 부분 이전의 루카복음서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어지간히 훈련된 제자들이었기에 그들에게도 또한 당신처럼 마귀를 제어하는 권세와 기적을 행하는 능력까지 주시면서 전도를 하도록 파견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9, 16 참조). 그러한 제자들이라면 이제 복음전파를 하는 사도의 위치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파견 받은 제자들이 돌아와서 성과에 대한 보고를 드리고, 다시 예수님께서 따로 제자들을 데리고 벳사이다로 가셨는데(루카 9, 10),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모여옵니다(루카 9, 11 참조). 여기서 우리들은 교회를 보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사도직을 수행하는 교회의 일꾼들이 예수님의 분부대로 사명을 수행하게 되면 사람들이 교회가 어디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주님의 성찬을 베풀게 됩니다(미사전례 참고). 그렇듯이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빵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신 사실(루카 9, 1117 참조)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루카복음서는 곧 이어 오늘 우리가 읽는 내용(루카 9, 1827)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서 모여오며, 예수님의 소문이 퍼져나가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이란 과연 어떤 분이신가 하고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확인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오늘 고백한 그 신앙입니다. 이는 오늘의 우리의 믿음 즉 교회의 신앙이지요. 그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루카 9, 20) 라고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진정한 의미는 그분께서 고난을 받고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야 드러난다는 것을 루카복음서는 연결하여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그분의 제자들도 그분처럼 시련을 당해야만 그분을 닮을 수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루카 9, 2227 참조).


그러한 다음에 당신이 누구이신가를 제자들에게 깨닫도록 산에서 당신의 영광스런 변모(루카 9, 2836 참조)를 체험케 하시고 재차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고 나서(루카 9, 4445 참조) 예루살렘으로의 상경 길에 들어가시는 것으로 이 루카복음서의 후반부가 이어집니다(루카 9, 51 이하 참조). 이제 그분을 끝까지 따라가서야 그 분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되는 체험이 이루어질 것임을 루카복음서는 그 951절 이하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렇듯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나선 삶인 것입니다. 그분이 가신 길 즉 수난과 죽음으로써 부활에 이르는 길을 가고자 하여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을 교회와 더불어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그 신앙은 오늘 읽는 복음서에 수록된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루카 9, 20)를 믿는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직접 뵈옵고 따르던 열 두 제자들도 사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을 체험하기까지는 그러한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분의 부활 이후에 가서야 그러한 신앙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사도행전 참고).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여 세례 받은 삶의 길을 가는 까닭은 그렇듯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전해준 신앙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 신앙의 삶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그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진실로 깨닫지 못하던 제자들의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체험한 후의 사도들이 걸었던 신앙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들 가운데는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길을 간다면서도 아직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체험한 삶에 이르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 경우란, 신앙을 마치 현세적 삶의 한 방식으로 또는 도덕적 테두리의 것으로만 여기는 태도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사회현실에 대한 적응방편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의 경우가 그것입니다. 군사독재 치세하의 인권회복과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한 교회의 사회운동을 칭송하며 그 운동에 가담하기 위해 세례 받은 사람들 가운데 정치적 성공 후에 가서는 정치현실에만 열중하면서 참 신앙의 길은 저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권운동가로서의 길에서 만난 교회 성직자를 따라 세례를 받았던 변호사가 정치적 성공을 거둔 지도자로 변신한 후에는 신앙을 저버린 경우가 그런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신앙의 길을 마치 세상살이의 방편인양 여깁니다.


제가 우리 천주교 신자 정치인한테 당한 어이없는 일이 있습니다. 30년 가까이 지난 일입니다. 제가 지내던 시골 본당에 영세만 하고 성당에 다니지 않는 냉담 교우가 있었습니다. 당시 군사독재 치하에서 체육관 대통령을 뽑는 대의원 노릇을 하던 지방 유지였습니다. 그분은 성당에 나오지는 않으면서도 서울이나 대전 등에 출장 다녀오면 저에게 들러서 거기서 만난 그 지방 출신 국회의원의 인사를 저에게 전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일요일에 그 냉담 신자가 역시 이미 세례 받은 딸의 결혼식을 주례하도록 그 지방 예식장에 그 국회의원을 초빙하여 예식을 치룬 후에 역시 신자인 그 국회의원을 모시고 저에게 인사차 찾아왔습니다. 그분들은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주일미사 참례할 신앙생활은 아예 생각에도 없고 그 신자 딸의 혼인성사 절차도 없이 신자로서 교회법을 거스르는 결혼식을 치르고 저에게 체면치례로 인사차 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점입가경으로 저에게 그 국회의원이 인사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가끔 이 대의원에게서 신부님 고생하시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전에서 주교님을 뵙게 될 때마다 신부님에 대해서 잘 말씀드리곤 합니다. 신부님께서 여기서 고생을 하실 만큼 하셨으니 주교님께서 곧 좋은 성당으로 영전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분들의 그 어이없는 언사 때문에 그 다음에 이어졌던 불미스런 대화에 대해서는 이 강론에서 차마 그분들의 명예를 감안하여 소개하지 않겠습니다만, 사제들의 사목생활을 그런 식으로 세속적인 생각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사제가 시골 성당에 부임하게 되면 어떤 분들은 그 사제가 능력 부족이라서 좌천당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이없는 일이지요. 그런 생각을 하는 분에게 제가 반문하곤 합니다. “사제를 누구로 보십니까? 공무원으로 보십니까? 회사원으로 보십니까?”하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보느냐? ()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루카 9, 18 20)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루카 9, 19 참조)을 오늘날의 우리로서 바꾸어 표현해봅시다. 예수님을 오해하지 맙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베드로처럼 대답합시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개는 옛날의 훌륭한 현자로 또는 공자나 석가모니와 같은 지도자로 봅니다만, 우리는 세례 받은 사람답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해주시는 구세주요 하느님으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신앙의 식별력으로 예수님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한 시대 인기를 누린 도올 김용옥이라는 억지주장 철학자의 TV 강의를 기억합니다만,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그 김용옥 씨의 주장처럼 한갓 도학자나 기철학계의 잣대로 예수님을 평가 비판하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용옥 씨처럼 예수님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와는 달리 우리 인간들의 죄악을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부활하신 예수님이시기에, 우리 또한 자신을 끊어 십자가를 지면서 죄악에 죽고 다시 새로운 삶 즉 부활에로의 길로 나아가고자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따르기로 하는 신앙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그분을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따르는 신앙으로 세례 때와 같이 매주일 미사에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또 한 주간을 그렇게 살아가기로 다짐하면서 세상의 일터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을 구세주(그리스도)로 알아보는 것은 지식(철학)으로가 아니라, 믿음(신앙)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경지에 들어가기란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름”(루카 9, 23)으로써만 기능한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33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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