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일, 2013년 6월 16일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보속 유감
고해성사 자체가 보속(補贖)이지...
저는 지난주일(6월 9일)에 이웃 본당인 보령 동대동 공동체의 야외미사에 참석했습니다. 그 본당의 주임신부님 초청으로 거기 참석하게 되었지요. 저에게 있어서 일요일이면 여기 제가 살고 있는 만수리 공소 교우님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저의 통상적인 ‘주일 지내기’입니다. 그런데 매월 두 번째 일요일에는 이 공소가 소속된 금사리 본당의 주임신부님께서 관례적으로 오후에 여기 오셔서 미사를 집전하십니다. 본당 주임신부님으로서 일종의 ‘월례 공소사목방문의 날’이라 할 수 있지요. 지난 주일이 바로 그 두 번째 주일이었습니다.
그러한 매월 두 번째 주일에는 이웃 동대동 본당의 관할 지역인 도화담 공소에 가서 제가 미사를 봉헌해드립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에는 동대동 본당의 전 교우님들이 인근 성주산 숲에 모여 야외미사와 더불어 ‘본당의 날’ 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화담 공소에 가서 미사를 봉헌할 임무를 변경하여 자연스레 그 공소 교우님들과 함께 그 동대동 ‘본당의 날’에 휩쓸릴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거기에 참석하여 미사 후에는 교우님들이 준비하신 점심 식사를 푸짐하게 즐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공짜 식객으로 잘 얻어먹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그 동대동 본당 교우님들께 푸짐한 점심을 무조건 공짜로 얻어먹었다고만 평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거기 가서 저 나름의 몸으로 수고를 한 게 있거든요. 수십 명 교우님들께 미사 전 고해성사를 해드렸기 때문입니다. 30분 넘게 고해성사를 해드렸는데, 아마 짐작으로는 40명가량의 교우님들께서 저에게 고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평균 1명당 1분미만의 고해성사를 제가 집전한 셈이지요. 어찌 보면 스피디하게 성의 없이 고해성사를 집전했다고 비난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나무 밑에 의자를 두 개 놓고 집전한 그 고해성사 현장을 멀리서 바라보던 교우님들께서 그렇게 스피디한 걸 간파하시고는 아마 ‘이때다’ 생각하셨는지 고해 대기선 줄에 우르르 몰려와 서계시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 초고속으로 많은 인원 고해성사가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저는 그 고해성사 대열을 모두 해결(?)하고는 뿌듯한 심정으로 미사성제의 공동 집전 제단에 설 수 있었고, 미사 후 당당하게 교우님들의 푸짐한 점심 제공을 받을 수 있었다고 자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식사 중에 몇 분 교우님들께서 저의 식사를 방해(?)하시는 거예요. 저에게 슬며시 다가와서 살짝 질문하시는 교우님들이 몇 분 계셨습니다. “신부님, 아까 고해 때 보속을 안 주셨는데요, 무얼 해야 하는지 말해주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질문에 저는 귀에 대고 속삭이는 식으로 대답했습니다. “고해성사 보신 것이 보속입니다.”
저의 이 대답을 의아하게 생각하신 교우님들은 연거푸 질문합니다. “아까 보속을 안 주셨다니까요.”
저는 다시 대답합니다. “성사 본 게 그게 다 보속 끝난 거라니깐요.”
그래도 다시 고집스런 질문이 옵니다. “성사 보고 해야 할 보속 말입니다. 그걸 아까 안 주셨다니까요.”
제가 다시 우겨(?)댑니다. “오늘은 딴 보속 없고, 성사 본 그게 보속이라니깐요. 오늘 다른 사람들과 재미있게 지내시는 걸 보속 대신 생각하세요.”
이렇게 끝까지 우겨대는 저의 말에 교우님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셨습니다.
저는 사제생활 40년 가까이 지나온 지금 고해소에서 성사를 집전하는 저의 태도가 많이 변했다고 저 스스로 생각하면서 부끄러운 과거를 회상합니다. 과거 저의 젊은 시절엔 교우님들의 고해하는 태도에 대해서 많은 경우 나무라는 식으로 충고(야단침?)를 하였습니다. 저의 그런 과거 고해신부로서의 태도는 교우님들에게 사실상 진정 참회하는 정신을 가르치고자 하는 욕심(?)에서 그랬습니다. 타인의 죄를 고발(?)하는 이야기나 혹은 자신에게서 비롯된 탓이 아닌 듯 변명을 나열하는 고백을 하지 말고 자신의 진정성 있는 참회를 하라고 고해자에게 권고(나무람)하곤 했습니다. 저의 그러한 충고(야단침)에 대하여 고해자들이 부담스러워한 나머지 저에게 고해성사를 보지 않으려고 꺼린다는 소문을 간접적으로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저에 대한 악소문과 함께 흐른 세월이 부끄러워지면서 고해소에서 고해자의 죄를 듣지 않으려고 노력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세월을 통해 제가 터득(?)한 것이 있습니다. 교우님들이 고해성사를 보러 온 그 자체가 이미 대단한 고역을 치르러 고해소에 들어온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해소에 들어온 그 행위 자체가 이미 보속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저 자신 사제로서 선배 혹은 동료 사제께 고해성사를 보는 경우 그것 역시 저도 일면 고역을 치르면서 고백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자신의 죄를 스스로 고백하는 그 태도 자체가 이미 보속(補贖)입니다. 그런 보속을 하는 현장의 당사자에게 무슨 또 보속을 하라고 해야 하나요? 저는 그래서 이 나이 먹어가는 처지에 고해소에서 고해자에게 되도록 ‘보속’이라는 것을 정해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저의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오늘의 복음 성경에 수록된 일화를 음미해봅니다.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다’라는 단락의 제목이 붙어있는 루카복음서 7장 36∼50절의 내용이 곧 오늘의 ‘복음’입니다. ‘복음’, 그것은 무엇입니까! ‘기쁜 소식’이지요. 죄 많은 사람이 죄로부터 해방된다는 소식, 그것보다 더 큰 기쁜 소식 있겠습니까? 감옥에서 풀려나는 소식이지요. 교도소에 갇혀 징역살이를 하고 있는데 문득 교도관이 나의 감방 문을 열어주면서 “000번 죄수, 오늘 석방이요.” 하는 말을 하는 순간 그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고해소를 나갈 때의 심정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복음서에서 보도된 이상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고을의 명사 댁에 초대받아 파티에 참석하신 예수님을 그 고을에 더러운 ‘죄인’이라고 소문난 여자가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이 분이야말로 죄 많은 나를 이해해 주시겠지!” 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면서 그 발에 키스하고 자기가 가장 아끼던 향수를 부어드렸다는 오늘 성경의 보도 내용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제가 한 사제로서 우리 본당 지역에서 뭇사람들 앞에 고고하게 처신하려면 이른바 불량한 사람들과는 절대로 상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랬다간 저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제가 여기 만수리에 살면서 알음알음으로 10여명 동리 사람들과 한 달에 한번 만나 식사하는 한 모임에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저 나름으로 그분들을 꼬셔서(?) 예비자로 만들어보려고 그리하여 몇 년 되었습니다만, 아직 성과가 없습니다. 만나서 소주 마시면서 세상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로 지내고 있지요. 이러한 저를 두고 몇몇 교우님들이 저에게 에둘러 충고를 합니다. “신부님,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시는 것 잘 살펴서 하세요. 신부님이 사람들과 술 마시다가 구설수에 오를까 염려 됩니다.”하고 말입니다. 사실 제가 그 모임의 사람들과 술 마시다가 정치 이야기가 나와서 옥신각신 한 일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몇 교우님으로부터 말을 들었습니다. “신부님은 박근혜를 미워하신다면서요?”라고요. 제가 “이 시대에 우리 한국 국민들이 독재자의 딸을 국가원수로 두고 있다는 게 나 개인적으로는 부끄럽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게 화근이지요. 이렇게 사람들과의 어울림과 말 나눔에 있어서 까딱하면 흉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된 걸 어찌 하겠습니까! 사람들과의 어울림이 그토록 모험을 동반하고, 또한 실수 아닌 실수라도 구설수에 오르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서에서 웬 요망하고 더러운 여자의 야릇한 도전적(?) 스킨십을 예수님께서는 태연하게 받아드리셨습니다. 참 민망하기 그지없는 광경입니다. 추행의 현장 보도입니다. 바리사이가 비난한 것은 아주 정당하지요. 구설수에 오른 예수님의 처지입니다.
그런데 그 민망스런 상황의 비난을 예수님께서는 뛰어넘으십니다. 그 더러운 여자의 참회를 이미 간파하신 분이시기에 그러셨습니다. 고매한 척 거드름 피는 사람 바리사이의 파티초대란 애시 당초 가식적 사랑(진정성이 없는 호의)이라고 예수님께서 지적하시고(“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하시면서), 그와는 달리 죄 많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여자가 보인 눈물(진정성을 보인 참회)은 가장 멸시 받는 처지에서라도(발에 키스하면서서라도) 사랑의 향기(향유)를 발산한다고 말씀하십니다(루카 7, 44∼46 참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죄를 용서 받음이 얼마나 큰 사랑 받음인지에 대하여 그렇게 깨닫게 해주셨습니다(루카 7, 48).
오늘의 이 복음서 보도는 용서가 가장 진한 사랑임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고해성사를 보는 신자에게서 그만큼 큰 사랑을 얻을 자격이 있음을 저는 뒤늦게 나이 먹어가는 사제로서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교우님에게 무슨 보속을 하라는 짐을 지어주고 싶지 않습니다. 자기 죄를 고백하러 온 자체가 이미 보속을 다 치렀고 이제는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순서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해성사를 완성하는 조건으로 제시하여 가르치는 성사 교리를 거스른다고 제가 이단자로 지목받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징역살이를 마치고 석방된다는 선언을 듣는 순간에 감옥에서 나간 후 벌금을 또 내라 한다면 그게 무슨 꼴인가 하고 저는 반문을 하고 싶습니다. 용서하여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더 묻지 않고 깔끔하게 우리의 죄를 지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의 체험을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이단자로 몰릴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보속’이라는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고 싶습니다. 고해성사 자체가 이미 보속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둘 것이 있지요. 나의 죄를 고백함에 있어서는 참으로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성이 있는 고백이어야지요! 오늘 복음 보도의 저 죄 많은 여인처럼 말입니다. 그러한 진정성 있는 고백에 따라 붙는 업보(業報)처럼 ‘보속’이란 우리를 진정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부과하시는 짐이 아닐 것입니다. 참회자로서의 결심을 견고히 하라는 교회의 가르침이겠지요.
사실 참회는 그 자체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지속적 삶 자체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죄악 속에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참회하면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우리의 삶 자체가 늘 ‘보속’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죄인들(불량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그 상황 자체를 초연히 뛰어넘어 죄인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험한 이 세상살이에서 절망하지 않고 우리의 발걸음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옆의 사람들을 바리사이처럼 단죄하면서 살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 죄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라고 늘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서 말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32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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