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대축일, 2013년 5월26일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들꽃 처럼!
태양때문에 사는 들꽃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루하루 사는 동안 수없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한 우리의 신앙을 특별히 축제로써 고백하는 오늘을 일컬어 [삼위일체 대축일]이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의 머리로는 ‘삼위일체’라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삼위일체’란 그 말 자체로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려니와, 하느님 당신 자신의 신비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론으로(철학적으로) 해독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어느 신학자가 말하기를, 인간이 하느님의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있다면 그런 하느님은 믿지 않겠다고 했는데, 저는 그 말에 공감이 갑니다. 아빌라의 성녀 대 데레사는 더 나아가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하였는데, 그런 심정이 진정 우리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는 모든 기도에 항상 성부․성자․성령이신 삼위일체의 신비, 즉 세 위로 한 분이시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을 부르면서 기도합니다. 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삼위일체 대축일]에만 이 신비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적인 삶 전체로써 매일같이 이 신비를 고백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이해할 수 없다 해서, 이 신비를 터득하지 못하고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이론으로가 아니라 믿음의 삶 속에서 이 신비를 체험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말씀하기를, 우리는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로마 5, 2 참조).
언 손을 녹이기 위해서 불속에 손을 넣는다면 손을 태워버리고 말겠지만, 불에서 일정 거리에 물러앉아 불을 쬘 때 불의 열기로 손을 녹일 수 있듯이, 믿음으로 얻는 진리도 그러합니다. 믿음이란 오만한 과학적 실증과 철학적 논증을 따라서라기보다는 겸손한 삶으로써 얻는 터득인 것입니다. 태양의 온도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직접 태양에 다가가서 온도계를 찔러보아야 하겠다고 오만하게 주장하기보다는, 이 땅 위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한 인간의 자세로써 간접적 측정 방법을 통하여 태양의 온도를 알아내 보는 것이 타죽지 않을 인간과학의 지혜로운 겸손입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과학을 꾀하는 인간들과는 달리 연약한 들꽃들은 태양의 열기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더 잘 터득합니다. 차가운 흙 속에 묻힌 꽃씨가 햇볕을 감사하며 움터 올라 자신의 꽃을 피우고 옹골지게 열매를 익혔을 때 그 꽃씨는 더도 덜도 아닌 충만으로 태양열을 터득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 모습은 태양을 생명으로 체험한 모습입니다. 태양으로부터 얻는 그 들꽃의 생명 체험을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삶은 땅을 떠나서 태양을 향해 솟구치는 오만이 아닙니다. 그러한 삶이 아닌 오만으로 하느님을 대하는 인간이라면 그 오만으로 스스로 뿌리가 뽑힌 채 곧 말라죽고 말겠지요.
그와 같이 무모한 추구보다는 딛고 서있는 이 땅 위의 존재답게 태양 빛을 쏘이며 터득하듯 태양 같으신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계시의 빛을 받아드리는 태도로 터득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능력․성자․예수 그리스도)을 통하여(창세기 1장 및 요한 1, 3 참조)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흙에서 빚어진 몸(아담․인간)에게 당신의 숨결(성령)을 불어 넣으셨듯이(창세 2, 7 참조), 죄악으로 죽어 흙 속에 묻혀야 할 몸(인간)에게 당신의 숨결(성령)을 되 불어 넣으시어(요한 20, 22 참조), 우리 인간(몸)을 살려(부활시켜)주시는 사랑의 역동적 모습으로 당신을 알려주시는 신비가 태양 같으신 그분의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여 주심으로써 우리가 당신을 알아보도록 활동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이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우리 인간이 감히 가까이 대할 수 없을 만큼 한없는 위대함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그리고 더욱 우리와 동질적으로 생명을 함께 하시기 위해서 드러내시는 당신의 모습이 곧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인간들끼리는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쉬 드러내려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불신하는 가운데 세속적 계산이 깔린 사이에는 자신의 참 모습을 그늘에 묻어두고 가면을 내미는 게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니라 실상 서로의 마음의 거리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은 날이 저물어 밤의 암흑이 깔리면 나그네가 갈 길을 더 이상 갈 수 없는 그런 것보다도, 사람이 서로의 본심을 감지할 수 없을 때 서로 만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 경우처럼, 우리가 서로를 알 수 없는 불신이란 우리들 사이에서 마음의 벽이 가로막아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는 머나먼 마음간의 사이가 문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물리적인 거리를 뛰어넘어 서로의 친밀함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태양을 만져보지 않고도 태양의 따뜻한 빛으로 새 싹을 틔워서 태양을 바라보는 들꽃이 자신과 태양과의 관계가 사뭇 가깝다고 증거 하는 것처럼,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도 그렇듯 가까운 사이라는 우리의 증거적 행위가 요구됩니다. 태양을 증거 하는 들꽃의 자태가 드러내주는 증거란 그 들꽃의 생명인 것입니다. 그 생명 있음을 자신의 태양과의 관계로 증거 하는 들꽃의 모습으로, 즉 그 가녀린 자태 그 자체로 자신의 생명력을 제 딴에는 100% 들어내는 그것이 그 이름 따로 내밀지 않고 피는 들꽃의 존재 전부가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이름없는 꽃들의 아름다운 존재를 우리 신앙 처럼 간파하신 고 최민순 신부님은 '두메꽃' 이라는 시를 남기셨습니다.
여기 하부내포성지의 홈카페에 그 멜로디와 함께 제가 소개해드렸던 최민순 신부님의 '두메꽃' 처럼, 그렇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삶 자체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누구이신가를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형태로써 너무나도 쉽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에 대하여 말로 또는 이론으로 증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눈으로 보고 그분은 어떤 분이시더라고 인간이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기운을 우리 속에 품어 우리의 생명력으로 뿜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이신가를 증거 하는 존재가 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6, 13 참조).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다 당신의 것이라 하시면서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분이신데 우리가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만,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된다면 그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6, 12∼15 참조).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하여 알 수 있으려면 하느님의 기운 즉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는 인간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기운을 얻어야만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려한다면 그 순간 인간의 눈은 타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 이사야 예언자는 이제 하느님을 뵙고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이사 6, 5 참조).
이사야의 고백이 그렇듯이, 하느님은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는 분”(1 티모 6, 16)이시면서, “자비와 은총의 신”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출애 34, 6∼7 참조) 아버지이시기에,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셔서”(요한 2, 16) 당신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오신 외아드님(성자)께서 부르시던 [아빠 -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우리들도 “아빠 -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 가르쳐주십니다(로마 8, 15 참조).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성자로써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성령을 우리 안에 넣어주심으로써 당신을 알아볼 수 있게 하여 주십니다(로마 5, 5 참조). 다시 말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을 체험하는 인간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시는 분의 모습이 곧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듯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혼자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에게 항상 창조와 구원의 생명을 주시고자 활동하시는 분이시라서 곧 성삼위의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일컬어 우리는 “사랑을 베푸시는 아버님과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2 고린 13, 13)이 우리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미사의 개회 인사 참조). 그러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는 분으로 머무시는 분이 아니시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언제나 당신의 생명에 참여시켜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그러하기에 오늘 같은 [삼위일체 대축일]일수록 우리는 실감나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들꽃이 태양을 체험하여 꽃을 피우듯, 나약한 우리 인간이, 그리고 더욱 죄 많은 우리가, 감히 하느님 그분의 삼위일체 신비를 체험하는 감동의 신앙을 고백해야겠습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9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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