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일, 2013년 5월 5일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아담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
'위대한 소멸' 그리고 '감추어진 현실'
이것이 '사랑의 거울'이다.
마산교구의 구병진 신부님께서 쓴 ‘웃으면 천당 가요’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성당의 주일학교 미사 중에 강론을 하던 신부님이 어린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했답니다. “아담이 낙원에서 어떤 죄를 범했지요?”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한 어린이가 번쩍 손을 들더니 일어나서 대답했습니다. “아담은 하와의 말을 듣고는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죄를 졌습니다.”
신부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네, 아주 대답을 잘 했습니다. 헌데 그 때문에 아담은 어떤 벌을 받게 되었나요?”
꼬마 녀석은 자신이 없는 듯 머뭇거리다가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저어… 아담은 그 벌로 하와하고 결혼하게 되었지요.”
이 우스개 이야기 속에는 혼인이란 죄의 벌인 양 어쩔 수 없이 맺어지는 수도 있다는 뜻이 숨어있는 것 같습니다만, 한편 상대방의 원의를 따르다 보면 무거운 짐을 함께 지는 결과까지 얻게 되는 사이가 된다는 뜻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꼬마 녀석의 엉뚱한 대답을 달리 해석하여, 아담은 하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하와가 시키는 대로 죄를 지어 벌을 받게 되었다는 우스개를 덧붙여봅니다. 하와가 아담에게 그 금단의 열매를 먹으라고 하면서 아마 다음과 같이 말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당신, 나를 정말 사랑하나요? 그렇다면 하느님 말씀보다는 내 말을 들어줄 수 있겠지요? 그러면 이 열매를 나와 함께 먹어보세요.” 이렇게 하와는 아담에게 요구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본래 남편이 아내의 말을 무조건 들어주어야만 그게 사랑의 징표라고 생각하는 여자들의 근성을 잘 아는 아담은 그렇게 하느님께 벌 받을 것을 깜빡 잊어먹고 그 실수를 하게 되기까지 우매한 남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남녀 간의 사랑은 맹목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여자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가 그 사랑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떤 무모한 행위를 서슴지 않기를 기대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래서 TV 연속 드라마에서 보면, 여자가 성질내면서 우겨대면 상대 남자의 표정은 처절하리만치 비굴해지는 게 드라마의 시나리오입니다.
아마 그래서 하와는 정말 아담이 자기를 사랑하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금하신 일까지 자기를 따라 해보라고 강요한 것 같습니다. 그렇듯 남자들은 본래 여자의 강요를 미련하게 따르게 될 만큼 착각 속에서 여자를 사랑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남자가 그렇다는 것을 최초의 여자인 하와는 이미 간파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최초의 남자 아담이 최초의 여자 하와를 만난 순간을 창세기가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셔서 데려다 주시자 아담은 오래도록 간절히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하고 사랑을 고백했습니다(창세 2, 21∼23). 그래서 남편의 사랑 고백이 진실인가 아닌가를 확인하고픈 마음이 아내의 심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정말 나를 그렇듯 사랑한다면 하느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내 말을 따를 수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라는 식으로 하와가 아담에게 앙탈을 부리는 바람에 흔히 남자들이 여자 앞에서 무모한 짓을 해서라도 여자의 환심을 사려는 그 만용을 부린 것이 아담의 실수였을 것 같기도 합니다. 불쌍한 남자들의 모습이지요.
제가 덧붙인 이 우스개를 가지고 오늘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을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아내 하와가 하느님 말씀보다는 자기 말을 더 따라주어야만 남편 아담이 진정 자기를 사랑해주는 것으로 앙탈을 부렸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렇듯이 현실적으로 눈앞에서 요구하는 사랑에 우리 인간은 아담처럼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연약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양심에서 들려오는 꾸짖음에 귀를 막고 죄를 짓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우리 신앙인들이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고 비리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게 나쁜 짓인 걸 다 알면서도 저지르는 것이 인간의 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꼬임에 빠져서 인간은 죄를 짓습니다.
해서, 그러한 인간인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한다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 23)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하와가 아담에게 했음 직 한 저의 앞의 상상과 같은 뜻으로 오해하진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어서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여 내 말을 지키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나와 아버지께서) 그에게 가서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 2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더욱 중요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 25∼26)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와가 아담에게 자기 존재를 알아달라는 식으로 맹목적인 요구를 했음 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증표라기보다는 아버지의 사랑을 얻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 말씀을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눈앞의 사랑에 눈이 멀었던 최초의 인간 아담 이래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제쳐두고 맹목적으로 현실만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깨우침을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은 아버지의 사랑을 앞세워서 이제 성령의 무대 뒤로 사라지시는 분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요한 14, 27∼28)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요한 14, 3 및 28 참조) 여기서 예수님의 ‘떠나심’과 ‘되돌아오심’의 양상을 우리는 잘 살펴야 합니다. 이것을 저는 ‘위대한 소멸’과 ‘감추어진 현실’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위대한 소멸’이야말로 참 사랑입니다. 오늘이 마침 ‘어린이 날’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어버이 날’을 맞이합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참 사랑’입니다. 왜냐면, 부모는 자녀 앞에 자신을 다 바치고 사라짐으로써 그 자녀 사랑을 다합니다. 그 사랑은 ‘위대한 소멸’입니다. 그 사랑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다만 그렇게 자녀를 위해서 살다 가는 부모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그렇듯이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무대’ 자체에서부터 사라지시고 ‘위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뒤로 숨으십니다. 그렇게 숨어버린 그분의 사랑을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역사’로써 현실화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 사랑은 눈으로 감지되는 것이 아닌 듯 ‘감추어진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그 모습을 보면서 ‘위대한 소멸’과 ‘감추어진 현실’로 우리 안에 사랑으로 계속 남아 계신 분, 즉 ‘되돌아오신 분’이라고 그분을 일컫고 싶습니다. 이렇게 그분은 ‘떠나심’과 ‘되돌아오심’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분, 즉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그 ‘부활하신 분’을 우리는 이제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알아 뵈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신비를 충만케 하는 성령강림절이 다가오고 있는 이 부활절의 끝 무렵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묵상을 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아직 이 세상에 속하는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현세적 유혹에 쉽사리 이끌리곤 합니다. 하지만 피조물 가운데 우리 인간은 육체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 육체적인 한계 너머에 인간이 건너갈 수 있는 그 능력을 일컬어서 인간의 영성(靈性)이라 합니다. 즉 물질적 및 육체적인 테두리를 초월하는 그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육체적 한계성을 함께 지닌 동물들과는 본성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듯 육체적 현실의 한계성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 본성을 인간으로 하여금 새롭게 성취하도록 하는 것이 곧 부활의 신비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영적 본성을 먼저 보여주신 분이 곧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현세적 상황에서 알게 된 바를 통하여 이제 현실 너머에까지 이르는 영적 깨우침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영적 단계에 이르는 것이 곧 본래적 인간의 참 본성 회복인 것입니다.
그 인간의 참 본성인 영성을 회복하게 될 때에는 곧 하느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진정 알아듣는 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를 옳게 되새기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 단계에 이르도록 예수님께서는 그 보호자이신 성령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주실 것이라고 보증해주신 것입니다(요한 14, 26 참조). 우리에게 있어서 영적인 주도를 해주시는 분이 곧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적 주도자이신 성령으로써 인간의 본성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창세 1, 27 참조), 그러한 인간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창조주 아버지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그 영적 주도를 하실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로써 이제 우리에게는 성령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써 전에 떠나갔다가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약속에 대하여(요한 14, 28 참조)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이루어주십니다. 그 부활하신 분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새로이 회복된 인간상을 이루시는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그 부활하신 분이 우리 인간 안에 성령으로 이루어주시는 구체적인 새 인간상은 진정 평화를 얻은 삶인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이 인간의 꾀에 넘어감으로써 하느님 말씀을 거역한 이래 우리 인간 자신 안에서 상실된 평화가 진정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참 평화란 곧 인간이 하느님과 이루는 평화입니다. 즉 성령께서 깨우쳐주시는 대로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참 삶의 길로 돌아서는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여, “나를 사랑한다면 내 말을 들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모두에 우스개로 제가 풀이했던 바대로 아담이 사랑하는 하와의 말을 들어서 하느님을 거역했지만, 이제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줄 앎으로써 그분을 사랑한다는 증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새로운(부활 신비의) 삶을 주도하실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 성령의 주도하심에 따르는 삶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듯 성령을 받는 세례 때 고백했던 믿음은 곧 주님 사랑을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믿음이란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행위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부활 신비 가운데 다시 고백하는 우리 믿음은 그래서 하느님을 향한 우리 ‘사랑의 거울’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6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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