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일, 2013년 4월 28일, 10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사랑하기 때문에 죽어야...
"사랑은 주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주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다.”
지난주일, 즉 ‘착한 목자 주일’의 강론에서 저는 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지요. “내가 착한목자인가?”하고 말입니다. 이 질문을 저 자신에게 던지면서 진정 대답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이 저에게는 ‘착한목자콤플렉스’가 있다는 변명조의 고백을 하였지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사랑의 새 계명’에 관한 주제로 강론을 하려 하니 또 다른 저의 콤플렉스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어느 교우님을 심하게 나무란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 교우님이 저에게 항의조로 하시는 말씀이 “강론하면서 사랑을 말씀하셔야 할 신부님께서 어찌 그렇게 야단을 치십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항의 말씀을 듣고부터는 제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가지고서는 정말 사랑을 말할 자격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을 주제로 하는 성경 구절을 대하게 되면 마음속에 늘 부담을 느낍니다. 그게 바로 저의 또 다른 콤플렉스입니다. 일컬어 ‘사랑 콤플렉스’라 할까요…!
저는 그러한 ‘사랑 콤플렉스’를 지닌 사람으로서 오늘 예수님의 ‘사랑의 새 계명’에 관한 주제로 저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한 말을 인용하여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그것은 “사랑은 주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인기 탤런트 김혜자 씨의 말입니다. 김혜자 씨가 10년 전에 펴낸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만, 그 말에 기억(ㄱ)자 하나 더 붙여서 “사랑은 죽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다.”라고 들리기도 합니다. 그 책은 전쟁과 빈곤 가운데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찾아다니며 자기 나름으로 사랑의 손길을 펴면서 얻은 김혜자 씨 자신의 체험담을 수록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 책 속에서 저자는 그리 대단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꾸밈새 없이 평이한 이야기로 독자들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안겨줍니다.
배고픔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만나볼 때마다 미어지는 한 여성의 가슴에서 억제할 수 없이 흘러나오는 말들로 그 책은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말들은 그래서 어떤 거창한 화두를 던지는 것도 아니고 매끄러운 논법으로 독자를 설득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아픈 가슴을 토로할 뿐입니다.
그 글들을 읽으면서 저는 그 어떤 사랑의 이야기보다도 더 사람의 가슴을 저려주는 것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어떤 설명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란 주는 것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다.”라는 그 책 저자의 말은 사랑에 대한 이러저러한 표현들 가운데 압권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일진대, 그저 내가 주는 사랑이 아니고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표현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책의 저자는 그 단순하고 강렬한 표현을 조금 더 진하게 가슴에 와 닿게 하기 위하여 토를 달고 있습니다. “종은 누가 그걸 울리기 전에는 종이 아니다. 노래는 누가 그걸 부르기 전에는 노래가 아니다. 사랑은 주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소리를 낼 목적이 아니고 그저 장식처럼 달려있대서야 그게 무슨 종이겠으며, 부르지도 않는 노래 곡조를 악보로만 가지고 있대서야 그게 무슨 노래이겠으며, 주지 않고 말로만 해서야 그게 무슨 사랑이겠습니까! 그래서 사랑은 몸으로 실천하지 않고서는 사랑일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한 사랑을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라는 말씀으로 다 말해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사랑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설명 밖에 더 할 말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준 사랑일 뿐입니다. 해서 “너희도 그렇게 사랑하여라.”라고 하신 말씀이 곧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사랑의 새 계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거두절미하고 일언지하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로 밖에 표현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랑함에 있어서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한 사랑은 그저 절절한 마음으로 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사랑이란 마음 없이 물건으로 때워지는 것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작가 최인호 씨가 자기 어머니를 회상하여 펴낸 두 권의 책을 저는 가끔 읽어봅니다. 반복해서 여러 번 읽었습니다. 한 권은 ‘부끄러움에 관한 명상’이라는 제목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하여 자신의 과거 잘못을 후회하면서 쓴 글을 모은 책입니다. 또 다른 한 권은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라는 제목인데, 어머니께 불효한 아들로서의 부끄러운 과거에 관한 고백을 바탕으로 하여 성모 마리아님께 향한 신심으로 승화하는 신앙고백의 글이라 할 수 있는 책입니다. 저는 이러한 최인호 작가의 책을 자주 읽어보면서 저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곤 합니다. 읽을 때마다 돌아가신 저의 어머니와 최인호 씨의 어머니를 동일한 어머니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후회로 최인호 씨와 같은 심정이 되어 울곤 합니다.
최인호 씨가 젊은 시절 외국에 가서 지내던 때에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일이 있답니다. 수십 년이 지나버린 옛적에는 어머니의 그 편지를 받고 어머니가 그 무슨 잔소리를 늘어놓는 글인가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떠나신지 오래 된 어머니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그 편지를 다시 읽어보면 그때는 들리지 않던 어머니의 그 사랑스런 음성이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게 모두 아들 사랑하는 어머니의 말씀으로 비로소 읽혀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자식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말로 할 수 없는 깨달음을 이제야 깨우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란 어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일 뿐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렇듯이 진짜 사랑은 그저 주는 것일 뿐입니다. 마음과 몸으로 몽땅 주는 것이 그런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에 대해서 뭐라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그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간단한 말씀으로 그렇게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곧 그분의 “사랑의 새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렇게 강론으로 사랑에 관하여 여러 말을 늘어놓는 것 자체가 사랑의 실체를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말로 강론하지 말고 온 마음을 다하여 몸을 바치는 실천으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실 사랑에 대한 강론은 부질없는 언설일 뿐입니다. 사랑은 실천으로 보여야 하는 것일 뿐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그렇듯 실천으로 먼저 보여주시고 그렇게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의 주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을까 합니다.
우리 각자는 나름대로 자기 식의 사랑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랑 방식은 그래서 어떠한 것이라고 일반화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방식으로 하자”고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 방식”이란 곧,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으로 깨우쳐질 것입니다. 다른 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죽는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럴까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여라.”고 하신 말씀은 곧 죽으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하시던 자리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 3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전해주는 요한복음서는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그러한 예수님 말씀을 회상하는 가운데 새롭게 깨달은 제자들의 고백으로 전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앞서 최인호 씨가 어머니의 수십 년 전 편지를 꺼내 읽으면서 이제야 어머니의 사랑스런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아들의 귀가 열려서 그 글을 처음처럼 읽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거기 예수님의 제자 됨이 식별 되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되어야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게 곧 내 제자라는 증명이다.”라는 말씀 속에 부활하여 우리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그렇게 지금 들립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도 사랑하기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 방식으로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이라면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 곧 예수님 제자의 사랑 방식일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사랑이란 주기 전에는 사랑이 아니라는 말과 같이, 사랑하기 때문에 죽을 수 있기 전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처럼 사랑을 말할 수 없으리라는 깨달음의 사랑 실천일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5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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