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0주일, 2013 6 9일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사랑이 역설(逆說)이듯이

살아야 할 까닭은 역설이다.



우리 한국이 OECD 국가 중에 최상위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부끄럽고 참담한 심정이 됩니다. 그 자살률 가운데 노인의 자살 건수를 지방별로 살펴보면 제가 살고 있는 충청남도 지역이 전국 으뜸이라는 보도를 접한 일도 있습니다. 남의 동네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사는 동네이야기라는 생각에 섬뜩해집니다.


실제로 제가 사는 동네에서 가끔 그런 자살 사건 이야기를 듣고 삽니다. 제가 가끔 동네 장터에서 만나던 할아버지께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최근에 접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50대 초반의 남자가 저의 산책로 후미진 전봇대에 목을 매달아 죽은 일이 최근 한 달 전의 일이기도 합니다. 장터에서 가끔 만나던 할아버지는 몇 년 전에 부인이 돌아가시고 자식들은 객지 가서 살고 있는데, 오다가다 만난 여자를 만나 함께 사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농약 마시고 돌아가셨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할아버지의 처지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뒷이야기를 하다가 며칠 지나니까 이제는 그분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전봇대에 목매달아 자살한 50대 남자는 나름으로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빚더미로 허우적거리다가 갑자기 스스로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 사람을 잘 아는 교우 한 분이 그 자살 소식을 듣고는 저에게 와서 가슴을 치며 울먹였습니다. 자살한 사람이 그 교우 분에게도 수백만 원 빚을 진 사람이었는데, 그 이틀 전에 전화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더랍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얻어 쓴 빚이 수억 원이라면서 갚을 길이 막연하다는 말을 하기에, 왜 그러고 사느냐고 핀잔을 했답니다. 그러자 나 같은 사람은 죽어야 되지?”라며 되묻더라는 것입니다. 서로 친한 사이라서 하소연 하던 말인데 그 교우 분은 농으로 대꾸하여 그러면 죽어버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이틀 후에 실제로 그 사람이 자살을 한 것입니다. 사업 실패에 빚은 산더미요 아내는 살기 싫다고 가출해서 소식 없고, 동네 음식점을 전전하며 소주 마시고 신세 한탄이나 하다가 그리 된 것입니다.


며칠 전에는 대전 시내에 사시는 교우 자매님께로부터 끔찍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세대 원룸 주택을 운영하시는 분인데, 혼자 세 들어 살던 50대 남자가 자살하여 그 시체가 완전 부패한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저에게 전화로 전하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해 해시는 것이었습니다. 원룸에 40대 이상의 남자가 홀로 세입을 청하면 절대로 방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게 주택 업계의 통설인데, 설마 하는 마음으로 방을 내준 것이 후회스럽다면서 그 자매님은 흐느꼈습니다.

 

우리의 이런 현실을 대하면서 참으로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 시대를 병리현상으로 밖에는 달리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나의 주변에 절망의 한숨을 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하여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오늘 우리가 봉독 하는 복음서에서 어느 과부의 외아들 장례행렬 현장 상황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외아들의 시체를 떠메고 가는 상여꾼 행렬을 따르던 과부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최근에 저는 어느 교우 댁 할머니의 생신에 초청받아 가족 미사를 봉헌해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 할머니는 아들 하나에 딸을 다섯이나 둔 다복한 과부 할머니이십니다. 친손자 및 외손자의 무리가 군대의 한 소대 정도는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즐거운 미사 중에 그 할머니의 큰딸은 흐느껴 울기를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에 그 할머니께서는 저에게 미안하다면서 그 맏딸이 주책이라서 저렇게 흐느껴 신부님 기도를 방해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맏딸을 마당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무슨 슬픈 일이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50대 후반인 그 맏딸이 더욱 흐느끼면서 하는 말이, 친정어머니가 저렇게 딸의 심정을 알아볼 줄도 모르면서 주책이라고 원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녀간에 서로 주책이라는 것입니다


사연을 알고 보니, 그 맏딸은 남매의 자녀가 있었는데 작년에 대학생이던 아들이 자살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친정어머니는 잘 키워 성공하고 사는 아들(맏딸의 오빠) 있고 딸도 다섯이나 되니까 자기 같이 자녀 남매 중 아들을 잃은 심정을 공감할 줄 모른다면서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흐느끼는 말을 들으면서 저의 어머니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2년 전에 돌아가신 저의 어머니께서는 저를 포함해서 아들 4명을 낳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두 아들(저의 남동생 2)을 교통사고로 잃으셨습니다. 제가 유럽에 유학생활을 하던 기간 몇 년 사이에 연거푸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저는 집안 선산을 찾아가 조상들께 성묘하고 동생들의 무덤에도 절을 올리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위로한답시고, “저 애들은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별 죄도 없이 깨끗한 영혼으로 천당 갔습니다.” 하고 어머니께 말했습니다. 그 후 아버지 돌아가시고 과부되신 어머니께서 10년을 더 사시다가 당신도 살아 있을 날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 하시면서 저에게 문득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들 둘이나 먼저 보내고 살아온 세월 동안 미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야. 아들신부와 죽은 두 아들 위해 하루에 수십 번씩 묵주 기도를 바치면서 미치지 않고 버티었지.”


먼저 죽은 아들들 생각으로 정신병 걸리지 않은 게 이상하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모성의 심정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참으로 목석 같은 아들이 저였습니다. 저 스스로 자녀를 낳아본 어머니가 아니기 때문에 그 모성의 심정을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이 세상에서 저의 옆에 계시지 않는 어머니의 심정에 대해서 뒤늦게 어림짐작으로 후회스런 생각을 해보면,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와 품에 안기는 꿈을 매일 밤 꾸는 게 죽은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 심정 쯤(?) 아니었을까 하여 마음이 아픕니다.


죽은 아들의 시신 운구를 따르던 오늘 복음 성경 보도의 과부도 그러했을 것 같습니다. “땅에 묻히러 실려 가는 나의 하나뿐인 저 아들이 되살아 품에 안길 수는 없을까?” 아마 그 과부의 마음속은 이런 불가능한 희망(절망)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 과부의 심정을 간파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오늘의 복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보도합니다.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그 아들을 살아나게 하시고)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루카 7, 1315 참조)


그렇습니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절망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단박에 그 절망을 지워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것은 그 과부의 심정을 당신 것으로 삼으셨다는 뜻이겠지요. 두 아들을 잃은 저의 어머니에게 입에 발린 위로 한 마디 밖에 하지 못한 저는 어머니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을 줄 몰랐던 것입니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절망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는 분이기에 예수님께서는 그 죽은 외아들을 살려내시는 초능력(기적의 힘)을 발휘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의 지점에서 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덧붙여봅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사람이라야 절망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을 먼저 보낸 어머니들이 그런 사람들이겠지요. 그런 절망의 처지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겠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따라 죽고 싶다고 하는 말이 그 뜻이겠지요. 그래서 아마도 자살하는 사람들의 실존적 상태란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에 자기 삶을 포기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는 상황일 것입니다. 역설적(逆說的) 상황이지요. 그 역설의 상황이 벼랑으로 닥쳤을 때 인간은 거기 추락하는 것 같습니다. 그 벼랑 아래에 죽음이라는 허무(虛無)가 깔려 있다면 그것으로 끝이겠지만, 어머니의 품 같은 사랑이 깔려 있다면 추락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죽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이 같은 논리가 뜬구름 같을까요?

하지만, 오늘 복음서의 보도를 읽으면서, 저는 우리 시대의 자살 만연 풍조가 사랑 실종의 현상이라고 진단하여, “이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남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서로 만나는 사람들끼리 늘 좋아하는 사람으로 대하는 풍조를 조성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역할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 하나 없이 외톨이라고 여겨질 때 벼랑 아래 허무가 깔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 인간이란 누구나 언젠가 생을 마쳐야 할 길을 걸어가면서도 주변에 좋은 사람을 남겨두고 생의 길을 마칠 수 있다면 지금 걷고 있는 순간들이 행복할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들이 먼저 늙어 죽어가면서도 진정 사랑하는 자녀들을 남겨두고 행복하게 눈을 감을 수 있는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일 것입니다. 그런 어머니들처럼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다가 세상을 마칠 수 있는 삶을 이루어야겠습니다.


저는 어머니 노릇을 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의 이런 말들이 부질없는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의 복음서 보도 상황을 접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이 그 외아들 잃은 과부의 마음과 똑같은 마음이었기에 그 아들을 되살려 놓으신 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아무리 세상의 절망적 상황을 접한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절망이 물러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캄캄한 절망이 닥친다 하더라도 사람이 사람 하나라도 좋아할 까닭을 발견할 수만 있으면 죽어야 할 까닭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 역시 우리가 살아야 할 까닭입니다. 그 까닭 또한 역설입니다. 본래 사랑은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죽더라도 죽지 않는 것이 사랑의 역설입니다. 죽은 외아들을 살려 그 과부에게 되돌려주신 예수님께서는 모성적 사랑의 역설을 군중들 앞에서 인정하시는 말씀으로 울지 마라.”(루카 7, 13) 하고 이르셨던 것입니다. 죽은 아들을 두고 울지 마라.’하시는 역설로 예수님의 손은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셨던 것입니다(루카 7, 14참조).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31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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