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일(2013년 623) 우리 교회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바치면서, 그리고 특히 주일미사를 남북통일 기원미사로 봉헌하는 입장에서 아래와 같은 저의 21년 전 글을 교우님들께 드려봅니다. 1992년도에 당시 대전교구 사목국장님(당시 유흥식 신부님 : 지금은 대전교구장 주교님)의 당부에 따라 대전교구 구역반장 교육 강사로서 강의하고 대전교구의 구역반 모임 교재에 그 개략적 내용을 게재했던 원고입니다. 이 원고에서 본문은 원문 그대로이고 밑에 첨부한 각주는 약간 고치고 덧붙인 것이 있습니다2013년 올해는 6·25전쟁의 매듭으로 휴전을 한 1953년으로부터 만60년이 되는 해입니다. 휴전한지 60년이 되는 오늘까지 남과 북이 마치 원수처럼 지내온 세월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서로의 적대감은 누그러지지 않고 남북의 정권 담당자들은 양쪽 백성을 적개심으로 무장시켜 단지 정권체제를 공고히 하려고만 합니다. 민족적 양심을 바탕으로 하고 그리스도인다운 반성으로 기도하고 우리 자신 생각의 바닥을 추슬러야겠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저의 21년 전 생각을 여기에 다시 진술하면서, 오늘 남북통일 기원미사의 강론을 대신합니다.



북한 선교의 과제 

1992년 9월 발표자료

윤종관 신부 (대전 대동 본당 주임)

1992 9 / 대전교구 구역반모임 교재 제84 34


1. 교회의 관심


금년(1992) 3월에 있었던 주교회의 춘계 총회는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Directorium Pastorale Coreae)’를 확정하여 교황청에 이에 대한 인준 신청을 하였다


1) 이 사목지침서()200-203조에는 한국교회의 공식적 관심과 지역 교회법적 규범으로 북한선교의 의의와 포괄적 활동지침을 천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분단된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형제적 나눔을 실현하면서 민족의 평화통일에 대비하여 북한교회의 부흥과 북한동포의 복음화를 위한 사목적 역량을 갖추는 교회의 활동북한선교라고 정의하고 있고, 그 활동 방안으로서 기도와 사랑의 나눔 운동과 홍보 및 신자교육과 관련연구소 설치, 통일대비 활동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활동방안을 실행하기 위하여 매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행사를 하며, 교구마다 북한선교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선 사목현장에 그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장려하고 있다.


위와 같은 시목지침서()가 교황청의 인준으로 발효하게 되면 구체적으로 일선 사목현장(본당 단위)에서 북한선교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리라고 전망하여 볼 수가 있다. 이런 전망이 사목지침서라는 법률적 선언문항에서 그 실현 가능성을 진단하는 것이어서는 무의미하여진다. 그럴 경우 공염불에 그치고 만다. 교구적으로도, 본당적으로도 각 구역 반별로도 할 수 있는 일을 구체적으로 시작하여야 한다. 그러한 구체적 활동에 대하여 사목지침서라는 규범은 합법성을 뒷받침하여 주는 것일 뿐이다. 요는 교회와 신자들이 무엇인가를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교회가 지금까지 무엇인가를 하긴 하였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 그렇다면 과연 하여온 일이 어떤 것이었나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2. 반성할 점


우리 민족의 반쪽을 위하여 그리고 그 반쪽의 복음화를 위하여 교회가 과연 어떠한 일을 어떻게 하여왔는가? 이것은 우선, 우리 민족의 분단비극에 관한 교회의 역사적 관심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나를 반성하여 보는 것으로써 솔직한 답을 얻으리라는 전제를 요청하는 질문이다. 교회가 반성할 점을 자세하게 모두 나열할 지면이 부족하기에 개략적으로 아래와 같이 가장 중대 사안이라 볼 수 있는 몇 가지를 들어 본다.


(1) 민족분단 이전의 암울했던 시대에 교회는 민족 사랑의 일에 소극적이었다. 물론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의 박해 기간에 신앙의 선조들이 복음으로 우리 민족의 잠을 깨우고 삶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하여 순교로써 투신했던 적극적 역사를 자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초기를 제외하고는 그 후 전반적으로 민족 자체적인 투신의 역사가 아니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단적인 지적을 하자면 서양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기점으로 하여2) 교회는 우리 민족의 고뇌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지 않고 교회 자체의 고뇌에만 집착한 역사를 걷게 되었다는 점이다.3) 


이 점은 용기 있는 서양 선교사들의 순교 역사를 과소평가 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교회가 그 제도적(교계적) 속성의 바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한계성을 역사적으로 표출하였다는 근원적 관점에서 반성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말기에 신교(信敎)의 자유를 얻은 후에도4) 이 나라 민족 전체의 고뇌를 파악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고, 그 후 일제의 강점 시기에도 이 민족의 해방운동 노선에 적극적으로 함께 하는 교회가 되지 못하였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교회가 일제 말기에는 일제의 침략정책에 협조하다시피 한 것이다. 이러한 부끄러운 교회의 역사를 반성할 수 있을 때에 오늘의 분단 반세기 상황에서 교회는 자신의 투신 방향을 제대로 찾을 수 있다.


(2) 1945년 해방 이후에 교회는 민족 일치를 위한 노력을 실제적으로 소홀히 하였다는 점을 반성해야 한다. 해방 이후 주변 강대국(특히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단 정책과 더불어 민족 내부의 정치 집단간 좌우 혼란 시기에 교회는 교회 본연상 반공정책의 강력한 추구자 노릇만 하였을 뿐 민족적 일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이북을 버려둔 채 이남 만의 단독정부 수립 지지만 하였다. 그 후에 실제로 교회는 이북을 망각하고 이남 안에서만 한국교회의 실체가 건재한 듯 반세기를 살아온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점을 반성할 줄 알 때에 민족일치를 위한 투신을 향하여 교회는 의식을 찾을 것이다.


(3) 민족분단의 현실 속에서 교회는 아직도 안이한 모습이라는 자신의 실상을 깨우쳐야 한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복음 선포는 늦장부릴 일이 아니다. 기다렸다가 여건이 호전될 때에 가서나 할 일이 아니다. 이북의 형제자매들을 찾아갈 일이 정치, 사회적으로 가능해질 때에나 할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루가 9, 3 참조). 우리는 이북 당국이 신교(信敎)의 자유를 허용할 때에나 혹은 그쪽 공산정부가 망하고 통일된 후에나 복음 선포하러 갈 일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아닌 서양 선교사들도 모든 악조건 하에서 조선에 잠입하여 복음을 선포했음을 그분들(순교 성인들) 앞에서 오늘의 교회는 반성해야 한다.


3. 하여야 할 일


앞서 제시한 교회의 관심항에서 지적했듯이, 교회가 사목지침서라는 법규 선언을 한다 해서 일이 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아니 된다. 구체적으로 지금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앞에 제시한 반성꺼리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곧바로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 지면이 부족하여 다 적을 수 없기에 간략하게 아래와 같이 우리들이 할 일을 제시하여 본다.


(1) 우선 북한선교의 과제란, 교회의 웃어른들(교계적 상부)의 지시만을 기다려서만 할 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5) 복음 선포는 제도가 명령하는 일이 아니고 복음 자체가 명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제도권에서도 실천적 의지를 지녀야 되겠지만, 평신도로부터 성직자, 수도자 등의 자발적, 자생적, 주체적 소명으로 모두 북한선교를 위한 기도와 행동을 해야 한다.


(2) 반세기 동안 이북에 한 명의 비밀선교사를 파견한 일이 없다면 민족의 역사 앞에 한국교회는 죄를 지은 것임을 새롭게 인식하고,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비밀 선교사를 파견하여 이북 형제자매들에게 성사를 볼 기회를 주어야 한다.6)


(3) 반세기 동안 이북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실제적으로 선교 자금을 보낸 일이 없다면 민족의 역사 앞에 이 또한 한국교회는 죄를 지은 것임을 자각하고, 지금이라도 헌금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서 그것을 이북에 보내야 한다. 그것이 직접 이북 형제자매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속 보내야 한다. 통일 전의 서독 교회가 수십 년 동안 동독 교회에 헌금을 모아서 보냈음을 한국교회는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7)


(4) 교회는 공산주의자들을 적대시 하지 말고 인내롭게 대화하고 우선적으로 민족의식에 따라 기회를 다각적으로 찾아야 한다.8)

(5) 황해도는 서울 대교구 지역이고 휴전선 이북 강원도는 춘천 교구 지역임을 간과했던 지난날을 반성하고 교구 현황 등에 이북 교회를 매년 새로 파악 표기하고, 이북의 옛 본당에 대한 주임신부를 임시로라도 임명하여야 한다.9) 이것은 지금까지 이남의 교회만을 한국교회인 듯 잘못 생각했던 것을 깨우치고 의식전환을 하자는 뜻이다.


(6) 이남의 각 본당은 통일 후에 이북에 성당 하나씩 세울 계획으로 지금부터 자금 확보를 해나가야 한다.10)


(7) 통일 후에 이북 형제자매들이 이남의 성당 규모나 이남의 신자들이 사는 생활모습을 보고 이질감이 들지 않도록 가난한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8) 이북의 실상에 대하여 정부의 발표 자료만 믿을 것이 아니고, 교회와 민간 개인 차원의 연구 노력을 하여야 한다.


(9) 이북 형제자매들과의 접촉 시도를 외국(혹 교포들)을 통하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이남의 교회가 직접 접촉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11)


(10) 국가보안법 등, 이남의 체제가 민족 화해를 저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도록 교회와 신자들이 앞장 서야 한다.12)


---- 아래 각주


1) 한국천주교사목지침서()에 대하여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장관 요세프 톰코 추기경 명의로 1995123일부 인준서한(Prot. 2188/92)이 당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이문희 대주교에게 발신되었고, 이에 의거하여 동 지침서에 대하여 동년 부활절인 416일에 이문희 대주교는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교령 제95-50호로 동년 성령 강림 대축일인 64일부로 사행을 선포했다.


2) 1831년 조선교구(대목구) 설정으로 프랑스의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교계제도적인 한국교회를 맡게 된 시점을 뜻한다.


3) 당시 박해 하에서 교회 자체는 박해를 헤쳐 나가는 일이 가장 급선무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4) 1886년 한불통상조약으로 완전한 신교의 자유를 보장 받았다.


5) 교계제도의 뜻을 거스르자는 뜻이 아니다.


6) 여기서 비밀선교사란 마치 19세기에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국 정부의 승인 없이 비밀리에 밀입국(?)하여 선교했듯이 북한에도 남한 교회가 비밀리에 사제들을 파견할 의지가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혹 그런 사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하여 공개적 및 공식적인 발표를 할 수 없겠지만, 그런 사실이 전혀 없었다면 차후 역사 기록에서 부끄러운 과거로 비판 받을 것이라고 본다.


7) 실제로 서독 교회는 ‘Bonifatius Verband'라는 기구를 통하여 동독의 교회를 위한 지속적 지원을 했다. 그것을 동독의 공산 정부의 승인된 통로를 통하여 전달되도록 했기 때문에 이른 바 '배달사고'가 많았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실제 동독 교회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의의를 삼으면서 지속함으로써 동독교회를 유지토록 공산정부에 대한 일종의 압력의 효과도 있었다는 증언을 필자가 통독 전의 현지에서 들은 바 있다.


8) 그렇다 해서 필자가 공산주의에 동조하자는 뜻이 아니다.


9) 황해도는 실제로 서울 대교구이며, 평양교구와 함흥과 덕원교구 및 연길(연변과 만주 지역) 교구에 대하여 그 교구장 서리가 임명되어 있는 실정인데, 그렇다면 교구장 서리들은 그 해당 지역의 옛 본당들에 대한 주임신부(서리)를 임명함으로써 북한 지역을 적어도 상시 기억하여 사목 대상으로 삼는 의지를 지녀야 하는 것이다.


10) 필자는 봉직하던 본당들에서 북한선교회를 결성하여 지속적으로 기도와 성금 모으기를 하였다. 모으는 성금의 지향은 북한의 옛 본당을 자매결연한 것으로 하고(일명 짝사랑 자매결연이라 함 - 북한의 현지인들을 만나지 못한 결연이므로), 어느 날이던지 그곳 성당을 복구할 때 즉각적인 시행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적립해가는 것이었다. 필자가 그런 본당들을 떠나온 후에 북한선교회는 흐지부지 없어지고 그 모아가던 성금은 용도변경으로 사라졌다는 씁쓸한 소식을 듣고 있다.


11) 정부나 적십자사 주도의 남북 이산가족 만남을 통해서 북한의 신자들을 접촉할 수 있으면 공식적인 것으로 바람직하지만, 한편 남한의 교회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든지 북한의 신자들을 파악한다든가, 남한 교회의 특별한 축제에 북한의 신자들을 초청하는 마음을 가져봐야 할 것이 아닌가? 적어도 한국천주교 200주년이나 성체대회등의 행사를 하면서 임진각에 북한 형제자매들을 모셔올 대절차량이라도 몇 대 보내서 남북 당국간에게 이를 알리는 열성이라도 보였어야 하지 않았는가? ‘한국천주교회라 함은 북한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나의 한국천주교회라는 뜻을 표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12) 인권운동의 차원에서 볼 때 신앙의 자유 또한 기본적 인권이므로 북한의 신자들이 신앙의 자유를 누리도록 남한 교회가 접촉하고 지원하려면 남한의 체제적 걸림돌 또한 우리의 해결 과제인 것이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34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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