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일, 2013 7 14일 9시 @도화담공소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참 이웃'이 없는 세상에서 

소중한 인간 사이에 서로 '착한 이웃'으로 만나자!



내 목숨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이 세상 전체, 아니 우주 전부와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내 인생입니다누구나 사람이라면 이렇듯 하나밖에 없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숨이요 우주보다도 소중한 자기 인생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는 하나이지만 인간들의 숫자만큼이나 수십억만의 우주의 숫자처럼 한없이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거기에 그 한없이 귀중한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 귀중한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 오늘 성서에서 우리가 볼 수 있듯 착한 이웃으로서 만나는 서로의 관계입니다.


그렇듯 착한 이웃으로서 만나는 값진 관계는 혹시라도 내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위태로운 순간에 만나게 되는 행운의 관계입니다.


지난 주간에 아시아나 항공기의 샌프란시스코 공항 사고착륙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사고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런 대형 인명피해 사고의 여객기가 우리나라 국적기라는 점에서 부끄럽기 그지없는데, 그보다 더욱 분통 터지게 창피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른바 메이저 언론기관이라는 동아일보의 채널A 방송에서 앵커의 뉴스 보도는 너무 어이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채널A의 방송을 제가 직접 시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도 앵커가 뭐라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그에 대해서 인터넷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읽었습니다


<채널 A의 윤경민 앵커는 여객기 사고로 인해 중국 여학생 2명이 사망했다는 보도를 하던 중 사망자 2명은 모두 중국인, 우리 입장에선 다행이다라는 말을 했다. 방송 직후 네티즌들은 문제가 있는 발언이라며 우려했다.>


이 방송보도에 따라 중국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실제로 중국의 언론매체와 중국 국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인 분노 그 자체입니다. “사망자가 한국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명에 대한 기본적 예의가 없는 발언”, “한국의 아나운서가 저런 발언을 하다니 수준 이하라며 중국 전체가 격앙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채널A의 유재홍 사장은 앵커가 피해자의 친지와 중국인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이런 말을 한 것은 명백한 실수이며 경솔한 발언이었다.”고 중국인들에게 공식 사과문을 띄웠답니다.


이러한 일련의 보도를 접하면서 저는 좀 우습게도 개인적으로도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망언을 한 앵커가 저와 같은 가라는 것이 창피합니다. 그리고 아시아나 항공사의 사장도 가인데, 왜 하필 좋지 않은 일에 저와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그 장본인들인가 싶어서 부끄럽습니다. 최근에 청와대 대변인으로서 창피한 스캔들을 일으킨 사람이 저와 같은 가이더니, 그러니 저의 이름에 가를 붙여서 말하기가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제가 가이기 때문에 다른 성씨 가진 사람들 앞에 창피하다고만 말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중국사람들앞에 창피하다고 말할 일이 아닙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제가 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모든 사람들앞에 창피하다는 생각을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비난 받는 채널A는 보도 자료를 통해 사망자 가운데 한국인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 입장에서는 다행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멘트였다. 하지만 생방송 중 매끄럽지 않게 진행한 점 사과드린다.”고 발표했다는군요. 이러한 사과문은 그 방송사의 사장이 표현한 중국인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이 매끄럽지 못 한 것이라는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변병 자체가 더욱 부그럽지요.


저는 채널A에게 묻고 싶습니다. ‘매끄럽지 못한 진행으로 중국인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인데, 채널A를 포함해서 이 시대의 우리 자신 모두에게 다시 묻고 싶습니다. “중국인의 심정을 포함해서 인류의 모든 구성원들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아니냐?”하고 말입니다.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는 중국인이나, 한국인이나, 또는 어떤 나라 어느 민족의 목숨이거나 똑같이 우주의 값어치보다도 무거운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 앵커는 그야말로 반인륜적인 망언을 했습니다. “사망자 2명은 모두 중국인으로 확인됐다우리로서는 다행이다는 뉘앙스의 코멘트를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떤 네티즌은 비난했습니다. “중국인은 죽어도 된다는 말?”,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술 먹고 방송하냐?” 라고 말입니다. 이 네티즌의 비난은 단어 몇 개 바꿔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옆집 아들은 죽어도 된다는 말?”, “네 아들 안 죽어 다행이라는 거야?”, “이거 사람이 하는 말 맞아?”

그렇습니다. 이번의 일을 놓고 생각해야 할 심각한 우리 자신들의 숨겨진 비인간적 내면이 폭로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내 식구, 내 아들 또는 우리나라 사람 아니고, 옆집 사람, 딴 집 아들 또는 다른 나라 사람 죽는 건 나와 별무 상관의 일이냐고 우리 모두 자신들에게 물어봐야 할 일입니다.


이러한 물음과 더불어, 오늘의 복음 성경에 예수님께서 예화를 드신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위를 깊이 반추하여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합니다.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은 중국 소녀들에게 있어서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그런 사마리아인이 아니지요. 우리는 살면서 그런 사마리아인을 만난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살다가 어려울 때 그 사마리아인같은 이웃을 만나지 못한다면 슬픈 일이고, 그 자체 비극이지요. 지난 주간에 미국에 연어연수를 위하여 가려고 탑승했던 중국 소녀들은,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예화로 드신 그 착한 사마리아인의 항공기가 아니라, 오늘 예화의 사제나 레위인이 속한 국적의 항공기에 탑승했던 것입니다. 그 중국 소녀들에게 있어서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목숨이 순간 날아갔는데, 꿈을 담은 그 인생을 옆집의 한국 사람들은 별 거 아닌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 비행기 안의 동승 한국인들은 참 이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소녀들의 죽음을 별거 아닌 것처럼 여기는 이 시대의 이 나라 사람으로서 저 자신도 하나의 구경꾼마냥 길을 비껴가는 비겁한 자인 듯합니다. 사실상, 오늘 성경 말씀에서 강도당한 사람을 피해서 지나간(루카 10, 3132 참조) 사제와 레위인 같은 비겁한 태도란 곧 이 시대 우리 모든 사람들의 태도인 것 같습니다.


그 강도당한 사람을 보면서도 그냥 지나쳐간 사제와 레위인은 그 상황에서 어찌 할 수가 없는 처지라고 변명할 것입니다. 속수무책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속수무책의 상황이란 마음을 쓰지 않은 것이지, 그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변명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을 관장하는 사람들인데 피를 흘린 사람을 보았다든가 시체에 손을 대고서는 제물을 가까이 할 수 없다는 율법을 존중하여 그 강도당한 사람의 피 흘리며 죽어가는 현장에 접근조차 하지 않고 지나쳐 가버린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내 나라 사람들이 아니므로 크게 서러워 할 일이 아니라고 우리는 말하고 있습니다.


헌데 오늘 성경에서 강도당하여 죽어가던 사람에게는 지나쳐 가던 동족과는 달리 원수지간으로 지내던 사람이 다가와 목숨을 구해줍니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본래 서로 상종하지 않는 원수지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강도당했다는 유다인을 동족인 사제나 레위인이 지나쳐갔음에도 불구하고 원수지간이었던 사마리아인이 돌보아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하는 점에 우리는 더욱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루카 10, 3335 참조). 그것은 곧 진정한 이웃이란 어느 관계의 사람인가 하는 점인 것입니다.


혈연이나 지연이나 국민 동족간의 사이에서가 아니라 진정 사람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인간애의 관계가 참 이웃이라는 점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강조하십니다. 한 목숨에 있어서는 동족이다 아니다가 관건이 아닙니다. 더구나 정치적, 경제적 혹은 법률적 이유란 한 목숨 앞에서는 명분 거리가 아닙니다. 저 유다인의 사제나 레위인이 율법적 명분 때문에 지나쳤던 것처럼 말입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한 사람의 목숨이란 내 가족 또는 내 나라의 사람이냐가 아니라 참 이웃으로 볼 것이냐를 예수님은 오늘 성경 예화에서 강조하고 계십니다. 조국과 동족 가운데서가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서 참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강도당하여 죽어가던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원수지간의 나라 사람인 착한 이웃을 만나게 된 행운을 얻었지요. 그 강도당한 사람에게 다가간 적국의 사마리아인사람으로서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우리 세상에는 사람으로서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깔려있지 않다는 현실을, 불행하게도 그 채널A의 앵커가 발설한 우리 한국 사람들의 부끄러운 속내 표출로 깨닫게 됩니다. 섬뜩한 현실입니다.


우주보다도 더 귀중한 인간의 목숨을 살리는 데에 최우선을 두는 것이 진정 인간애일 것입니다. 사람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사이가 좋은 이웃들 간의 관계입니다. 그러한 좋은 이웃들 사이에 산다면 그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실상 사람은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함께 걸어가며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래서 참 이웃과의 인생길이어야 진정 즐겁고 행복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참 이웃은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희로애락을 늘 함께 하는 사이이면서 특별히 어려울 때 기꺼이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면 그게 착한 이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다운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의도를 진정 알아들어야 이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의도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누가 나에게 진정으로 이웃이 되어주기를 바라기 보다는 내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말미에 예수님께서 던지시는 반문이 그 점을 곧 깨닫게 합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 36)하는 이 반문에 어떻게 대답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 사마리아인이었다고 대답할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경청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대답할 것입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 37)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러한 대답을 하기에 이른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율법 교사였습니다.


그 율법 교사는 예수님을 못마땅해 생각하는 사람이었지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해서는 아니 되는 일을 서슴없이 하시는 것을 보아온 율법 교사였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몸을 쓰는 일을 하면 아니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낫게 하시는 일을 하기도 하시고 율법으로 단죄 받은 죄인들과 어울리기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만 영생을 얻으리라고 믿던 율법 교사는 아마도 예수님을 율법에 대하여 무식하거나 무뢰한일 것이라고 판단하여 그분을 떠보는 질문을 던진 것이지요(루카 10, 25 참조). 그 때 예수님께서는 반문으로 응수하십니다.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예수님의 반문에 대하여 그 교활한 율법 교사는 대답합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율법의 요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한 대답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0, 2628 참조). 그러자 그 실천 대상의 이웃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되묻는 그 교활한 율법 교사에게 예수님께서는 이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루카 10, 2935 참조).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은 우리에게 스스로 착한 이웃이 되어 이웃에게 다가가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는 율법의 그 이웃을 예수님께서 보실 때는 내가 어려울 때 나에게 다가와 주기를 바라는 이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내가 다가가 주어야 할 어려운 이웃입니다. 그 어려운 이웃에게 다가가는 나는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루카 10, 37) ‘참 이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착한 이웃이 되어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오늘날 자기중심의 이익과 편리주의 그리고 집단이기주의와 국가적 명분과 경쟁으로 참 이웃을 만나기 어려운 우리의 세상입니다. ‘참 이웃이 없는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 즉 이웃사람 하나하나의 소중함이 망각되어진 이 시대에 우리는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너 자신의 몸이 소중한 것처럼 이웃사람이 또한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아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하게 대하는 사람으로 서로 착한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진정 사랑하는 것이다.”고 예수님은 오늘 말씀하신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진정 추구하고 실천할 일은, 소중한 인간 사이에 서로 착한 이웃으로 만나 서로를 살리는 참 이웃의 세상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37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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