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일, 2013년 8월 11일 

9시 @도화담공소 & 10시@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진짜 웰빙 

비워야 채우지!



지난주일의 복음말씀으로 저는 삶의 안전망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답으로, 하늘에 마련해야 할 축나지 않는 보물”(루카 12, 33)이 곧 진짜 삶의 안전망이라면서 생각을 마무리했었지요. 축나지 않을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는 삶이란, 탐욕에서 벗어나는 데서부터 가능하다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생각의 틀을 맞추었었습니다. 사람은 돈을 소유할수록 더욱 돈에 얽매이게 되고 결국 물질이 인간성을 황폐하게 한다면서 이 시대의 금전만능 현상에 대한 반성을 촉구해보기도 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무조건 물질()을 업신여기는 것이 곧 탐욕으로부터의 자기해방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상, 물질()을 존중해야 합니다. 물질을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소유욕에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물질보다 한 사람인 나 자신의 소중함을 깨달아서 물질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당당함을 지닌 인간이 된다는 것이지요. 지난 주일에 예로 든 수탉의 우화에서처럼 말입니다. 그 당당함은 탐욕보다는 포기를 통해서 삶의 행복지수가 진정 높아진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그 바탕으로 합니다. 그렇다면 물질()을 업신여기고 낭비하거나 또는 돈 버는 일을 어려워해서 게을러지는 것이 탐욕에서부터의 해방이 아닙니다. 역설적이게도, 물질()의 소중함을 잘 깨달은 사람이야말로 그 물질의 힘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물질()을 소중히 아는 사람이야말로 그 물질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누릴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소중한 물질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루카 12, 33)하고 예수님께서는 물질에 대한 최선의 사용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우리는 루카복음서를 통하여 전해 듣고 있는데, 이 내용이 공관복음서인 마태오복음서에는 약간 다른 뉘앙스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의 첫 공식 연설이라고 볼 수 있는 산상설교(마태오복음서 57)의 중간에 오늘의 이 말씀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헌장을 공포하시는 말씀이 그 유명한 산상설교이지요. 그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 하늘나라 헌장을 준수할 구체적 지침이라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덕목을 제시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에 대칭되는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시민이 세상의 백성과 구별되는 행동지침을 준수하라는 말씀이었지요. 그래서 마태오복음서의 그 병행 구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 됩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 1921)


마태오복음서는 이렇게 하늘을 대칭시켜서 그리스도 제자들이 물질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는 루카복음서는 물질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약간 다른 방향을 제시하신 말씀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저장하라는 메시지는 마태오복음서와 동일합니다만, 현세적 물질을 처리하는 방식을 루카복음서는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루카 12, 33)라는 말씀을 우선 제시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루카복음서는 마태오복음서보다 현실인식에 있어서 실천성을 중시합니다.


마태오복음서에 있어서는 현세적인 것이 천상적인 것에 비하여 부질없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오늘의 루카복음서에서는 현세적인 것을 실제로 활용함으로써 천상적 차원으로 끌어 올림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루카복음서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현세의 물질을 값있게 활용하라고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두 복음서를 비교하여 악간 다른 뉘앙스를 느끼면서 저는 문득 저 유명한 안토니오 성인을 생각하게 됩니다. 수도생활의 탁월한 사부이신 3세기의 이집트 은수자 안토니오 성인의 깨달음(得道)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분이 아직 소년이었을 때 양친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린 여동생과 단 둘이 고아가 된 안토니오는 부모 별세 후 어느 주일에 성당에 기도하러 가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무엇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을까?” 이렇게 생각하다가 더 이어서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왜 모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사도들에게 맡겼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안토니오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성당에 도착하여 들어가니 때마침 성당 안에서는 다음의 복음말씀이 봉독되고 있었습니다. “너에게 아직 모자란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이 말씀에 이어서 또 들려왔습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이때 안토니오는 이 성서 구절이 특별히 자기를 위해 봉독된 것으로 믿고, 집에 돌아가자마자 부모님으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수십만 평의 땅을 팔아서 그 중 약간의 돈을 여동생을 위해 남겨두고는 나머지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런 안토니오가 그 다음주일에 성당에 갔더니,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마태 6, 34) 라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안토니오는 집에 돌아와 여동생을 위해 남겨 두었던 나머지 재산까지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동생을 믿을만한 동정녀들의 보호에 맡겨 교육하도록 부탁하고, 그 길로 사막에 들어가 고행의 은수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 10)고 하신 말씀을 늘 기억하며 열심히 일하고 얻은 수입 가운데 최소한의 식량으로 남은 액수는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안토니오였습니다. 이렇게 사신 그분을 본받아 수도자들의 무리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토니오 성인을 모든 수도회의 창시자로 추앙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예수님 말씀 가운데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라는 말씀에 이어서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하신 말씀을 현세의 삶 가운데 철저히 실천한 안토니오는 글자 그대로 물질을 소중하게, 그리고 물질에게 마음 빼앗기지 않게사는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준 성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수도자들의 최고 사부라고 일컫습니다. 그러나 수도회는 그 후 중세기를 거치면서 거대한 재력을 갖춘 집단들로 변질 됩니다. 그런 중세기의 현상을 개혁한 분이 아씨지의 프란치스코 성인이십니다. 프란치스코가 출가하여 수도자가 되는 과정 역시 안토니오 성인과 같습니다. 그리고는 절대적 가난을 몸으로 사셨습니다. 그런 프란치스코 성인 같은 분들을 중세기의 탁발 수도자라고 일컬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실행한 탁발은 우리가 불가(佛家)에서 듣는 탁발(托鉢)과는 그 출발점이 다릅니다. 불가에서 탁발하는 스님(托鉢僧)을 일컬어 구걸하는 승려(mendicant monk)’ 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합니다만, 본 의미는 보시(布施)와 또 다른 보시(普施)의 주인공을 일컬어 탁발승이라 합니다. 사람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스님에게 보시(布施)하면 그것이 중생 사이에 보시(普施)로 번져야 하는 데에 그 본래의 뜻이 있습니다. 이것을 쉬운 말로 풀이하자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십시일반(十匙一飯)’의 실행인 것입니다. 서로가 조금씩 나누면 굶는 사람이 없게 되겠지요. 스님이 조금씩 얻어다가 굶는 사람에게 준다는 뜻이 불가의 탁발에 근간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토니오 성인이나 프란치스코 성인의 탁발은 그 근간이 다릅니다. ‘얻어서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없애서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교 수도회의 탁발은 얻어서가 아니라 땀 흘려서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수도회는 프란치스코 성인과 도미니코 성인을 따르는 사람들이었고, 이어서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隱修士會)와 카르멜 수도회가 형성되어 절대청빈(絶對淸貧)의 실천으로 세상을 풍요하게 하는 수도자들이 중세기를 빛나게 했습니다.


절대청빈으로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는 것은 타당한 말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중세기의 탁발수도자들은 포기소유를 동시에 실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의 재물을 배척하거나 나쁜 것으로 보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것을 은총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역설(아이러니)이지요. 이에 대해서 이미 바오로 사도께서 천명하셨지요. “우리는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2코린 6, 10) 그렇습니다. 내가 가진 것 없어야 세상 모든 것이 나에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들어오는 모든 것은 세상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포기는 가장 큰 소유를 가능케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카 12, 3334) 이 말씀 따라 사는 게 사실 웰빙입니다.


너도나도 사람들이 웰빙을 추구합니다. 그 웰빙 바람 앞에서 모두가 속없이 깨춤을 추고 있습니다. ‘웰빙(Well Being)’이란 도대체 뭡니까? 저는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이 말의 뜻이 잘 잡히질 않았습니다. 이 서양말을 언론계에서 순수 우리말로 쓰자는 취지로 그에 대한 적절한 한국말을 공모했다는데, 어느 젊은이가 참 살이라는 말을 제시하여 많은 공감을 얻었다 합니다.


그렇다면 참 살이는 과연 어찌 살아야 참으로 잘 산다는 것일까요?


이것을 흔히 보다 고급스럽고 보다 세련되게, 즉 새로운 표준으로 소비생활을 업그레이드 하여 사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웰빙이라는 유행의 바람에 휩쓸리는 우리 사회의 천민적 작태들은 무작정 몸에 좋다는 어떤 것을 좇는 근성 때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몸에 좋다는 어떤 것의 추구는 또한 어떤 열등감을 해소하고자, 이른바 급격한 신분상승으로 만회하고자 하는 일종의 한풀이의 양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양상의 웰빙을 어느 신부님께서는 졸빙이라 일컫고 있습니다. 졸부들이 그럴싸한 고급 수준의 생활양식으로 치장하는 짓들이라는 것이지요. 옛적에 있었음직한 이야기처럼, 돈으로 양반지위를 사서 거드름 피우는 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너도나도 양반행세를 하는 꼴이 이른바 웰빙인 듯한 양상입니다.


하지만, 진짜 웰빙이란 순수의 삶에로 돌아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깨끗이 비우는 데에서부터 가능한 순수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 나 자신의 존재 자체가 충족된 존재인가?” 하는 물음 앞에, 유행 따라 휩쓸리는 모습으로가 아닌, 진정 비어 있는 순수로써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숨을 내쉴 수 있어야 숨을 들이쉴 수도 있듯이, 마음에서 탐욕을 버려야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그러한 순수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로 하셨다.”(루가 12, 32) 그래서 포기하고 베푸는 사람들은 자신 안에 이미 하늘을 담아 넣고 있습니다. 나 자신을 씻어내고 비워서 비로소 해지지 않고 좀 쏠지 않는 보물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웰빙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41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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