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일, 2013 9월 8일 9시@도화담공소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나를 미워하라니...! 

네 가슴 속의 말을 들어보렴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여정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그 운명의 길을 가시고 계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도 사실상 예수님을 따라 그 상경 길을 동행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그 십자가의 운명을 눈치 채지 못하고 어떤 세속적 기대감 속에서 그분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그분이 가시는 길의 참 목표를 깨닫지 못하는 우리 모두가 함께 깨달아야 할 말씀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지난 6월 말 경부터 계속적으로 주일미사에서 루가복음서의 9장 이하에 수록되고 있는 예수님의 상경 여정의 가르침을 들으면서도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오늘 듣게 되는 말씀에서 심한 당혹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의 상식적 수준에서 볼 때 너무나 어이없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당신을 따르려거든 부모형제와 처자식은 물론이려니와 자기 자신마저 미워해야 한다는 오늘의 예수님 말씀은 정말 납득하기 어렵습니다(루카 14, 2527 참조). 나 자신까지 미워하라니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말씀은 동행하던 군중을 향하여 돌아서서 말씀하셨다’(루카 14, 25)는 기록으로 보아서 특별히 제자들에게만 따로 하신 말씀이 아니고, 즉 성직자나 수도자들뿐만이 아니라 신자라면 누구든지 그렇게 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처지는 예수님 당신 자신의 운명과 똑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강력한 촉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끝에 가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고 하십니다. 우리는 9순교자 성월을 지내는 가운데, 오늘의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서, 박해시대의 우리 한국교회 순교자들의 삶이 곧 오늘의 예수님 말씀을 철저히 따른 삶이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부모, 처자,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그 말씀에서 미워하다는 표현은 예수님 당시의 유다인들의 언어에서 애착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용되던 말입니다. 그러므로 미워하라는 말씀은 어떠한 것에 연연하는 마음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로 본능적 혈연관계에 연연하지도 말고 더욱 자기 자신의 욕망을 결연히 포기하라고 오늘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신 말씀(루카 14, 27 참조)은 그러한 세속적 및 본능적인 모든 것을 그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탑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철저한 계획과 치밀한 대처로 도모해야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루카 14, 2832 참조). 적당히 어정쩡한 태도로써는 당신을 따를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듯 세속과 자기 자신을 버리라는 말씀에 망대를 짓듯이 하라는 말씀을 붙이신 것은 철저한 자기 감시로 대처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찹을 세우기란 도둑이 숨어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긴장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긴장의 탑에 서있는 초병(哨兵)처럼 늘 곧추 세운 삶의 태도로 나 자신부터 감시해야 합니다. 혹여 나 자신 안에 더러운 세속적 유혹이나 본능적 욕망이 스며들지 않는지 늘 감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 나아가야 하는 나의 길을 늘 가로막는 것은 세속적 유혹에 흔들리는 나 자신의 본능적 욕망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위기에 빠뜨리는 원인은 곧 나 자신 안에서 솟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나의 원수는 사실상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의 욕망에 밀리기 시작하면 믿음의 걸음이 후퇴하게 되고 어느 듯 나 자신이 나를 속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덧없는 실패의 나락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이길 수 있어야 진정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그래서 나 자신을 끊임없이 버려나가는 길인 것입니다.


1970년 공산화되던 베트남의 트린이라는 어린 소녀와 그 오빠들을 포함한 그녀의 가족은 당시의 이른바 보트 피플에 섞여서 허름한 배에 몸을 싣고 망망대해로 나가 정처 없이 떠돌게 되었습니다. 그 부모는 전 재산을 급히 팔아 그 돈을 금으로 바꿔 포대기로 말아 몸에 걸친 옷에 꿰매달고 배를 탔습니다. 망망 바다의 한 가운데서 그 허름한 배는 거친 파도에 휩쓸리다가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트린의 부모는 물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그 금덩어리의 겉옷을 벗어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린 트린의 꿰맨 속옷 주머니의 금덩어리까지 버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적적으로 근처의 어선에 의해 구출된 트린과 그 가족은 빈털터리로 여러 달 동안 난민캠프를 전전하다가 국제난민구조단체의 도움으로 미국에 도착하게 되어, 아버지는 수위로 일하고 소녀 트린은 점원으로 가게에서 일하면서 몇 년 고생하여 가까스로 가정을 꾸려나가게 되었습니다. 트린은 어렸을 적에 고국에서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에 의과대학에 진학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에게 또 다시 비극이 발생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직장에서 돌아오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입니다. 그녀의 가정은 또 다른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는 작은 보트 피플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의과대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 트린은 생존의 전장에서 방황하던 중, 어느 날 저녁에 잠을 자다가 꿈속에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트린아, 네 가슴 속의 말을 들어보렴.”


트린은 잠에서 깨어나서 네 가슴 속의 말을 들어보렴.”하던 그 아버지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잃어버린 조국, 그리고 잃어버린 모든 재산과 그 마지막 금덩어리, 또 그리고 미국의 난민생활 중에 일군 가족의 삶도 잃어버리고, 삶의 기둥이던 아버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꿈을 펼쳐 보이려던 트린의 의과대학 공부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 절망의 망망대해에 버려진 자신에게 들려온 아버지의 음성은 트린의 가슴속에서 새로운 삶의 좌표를 제시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삶을 설계하게 되었습니다. 일을 하면서 어렵사리 문학공부를 시작하여 영문과 대학을 졸업하고, 그 잃어버린 자신의 과거를 새롭게 문학으로 되살리는 삶의 길을 풍요롭게 걸어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본의가 아닌 잃어버림이었지만 베트남 소녀 트린은 그 잃어버림에 대해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삶으로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 새로운 삶에서 깨달을 것이 있었습니다. 자신에게서 버릴 것을 버리는 순간에 삶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걸어가면서도 네 가슴 속의 말을 들어보렴.”하는 목소리가 곧 너를 묶어두는 너 자신의 것을 버려라.”하는 깨우침으로 계속 들려온다는 것입니다. 그리 할수록 삶은 진정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라 참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렇듯 나 자신 속에 나를 묶어두려는 본능의 덫이 도사리고 있음을 늘 살피면서 그 본능의 욕구를 버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사실상 신앙이란 나 자신의 욕망을 축으로 삼던 삶을 탈피하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삶의 축을 발견하여, 그 중심축을 나 자신에서 하느님께로 옮겨 살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 식으로 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서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고 하신 그분을 따라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모두 지워버려야만 예수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나의 속(나의 생각)을 몽땅 비워버려야 내 안에 하느님 생각을 넣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일의 지혜서는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지혜 9, 17) 하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사실상 나의 가슴속에서 진정 울려나오는 것이야 합니다. 주님의 목소리는 진정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 가슴속에서 들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버리고 나아가는 사람의 마음속에서라야 그 목소리가 생생히 들려옵니다. 그에 맞춰서 주님께서 제시하여 주시는 길을 가야겠습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46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