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일, 2013 9월 15일 10:30 @대전 법동성당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눈을 감으시는 아버지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아버지의 집'



어머니를 자모(慈母)’ 또는 자당(慈堂)’이라 일컬으면서 아버지를 엄친(嚴親)’이라 일컫는데, 그렇듯 아버지란 실제로 엄하고 두려운 분일까요?


십여 년 전 IMF 체제의 경제위기 때에 직장을 잃고 거리를 배회하던 수많은 가정의 아버지들의 딱한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들은 자신의 실직 사실을 가족이 알까봐 아침마다 정장을 하고 출근하는 척 집을 나가 오갈 때 없어 산에 올라 하루를 보내기도 했답니다. 자신의 좌절을 가족에게도 넘겨주기란 차마 못할 일이라 하던 것이 그 아버지들의 참담하던 심정이었던 것이지요.


이웃친구의 아버지보다 지위가 낮은 아버지의 자녀는 그 이웃친구 앞에서 당당하지 못하지요. 더구나 아버지가 직장에서 퇴출당하고 어깨가 축 처져 있으면 그 자녀들 또한 밖에 나가 풀 죽게 되지요. 더더구나 아버지 없는 자녀라면 오죽 하겠습니까!


저는 어렸을 적에 625로 인하여 전쟁터에 나가 계시던 아버지를 몇 년 동안 보지 못하여 동네의 제 또래 아이들이 자기 아버지와 함께 길을 가는 걸 보면 너무너무 속상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때와 학교의 운동회 때 학교에 나타난 다른 아이들의 아버지들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었던지! 그리고 학기말에 성적표(당시 통신표라 일컫던 것)를 받아들고 집에 돌아오던 날의 추억은 나이가 70살 가까워진 오늘에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전쟁터에 계시는 나의 아버지가 나의 그 성적표를 보시지도 않았는데 이웃집 친구아이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서 성적표를 받아 보고나서 저의 집에 찾아와 저의 성적표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게 너무너무 속상했습니다. 헌데 그 친구의 아버지는 저의 성적표를 보고나서 퉁명스런 말투로 어째서 네껀 그렇게 잘 나왔다냐?” 하면서 기분 나쁜 얼굴로 휭 가버렸습니다. 그 이웃집 아저씨가 왜 그렇게 기분 나빠해 했는지 저는 그 까닭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반에서 1등인 반면에 그 집 아이는 중간도 못 갔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 성적표를 아버지께 보여드릴 수 없는 것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계셔야 나의 모든 것이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눈길로 말미암아서야 아들에게 힘이 솟는 것입니다. 단단한 어깨의 아버지가 널찍한 양팔의 권위로 감싸 안아주실 때 아들은 세상에서 무서울 게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들은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권위를 버거워하기 일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예화의 작은 아들처럼, 어느새 머리가 커버린 아들은 아버지의 눈길을 피하여 세상에 나가려 하지요. 그러나 세상인심은 아버지처럼 나를 감싸 안아주지 않습니다. 객지에 나가 시련에 부딪친 아들에게는 그래서 아버지의 집’(루카 15, 17)이 그리워지게 됩니다. 해서 야박하기만 한 세상을 알게 된 아들은 우리가 오늘 화답송으로 읊듯이 나는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리라.” 하고 발길을 돌려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그는 누구입니까? 그야말로 그제야 제정신이 든’(루카 15, 17) 아들이지요.

돌아오는 그 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어떠한 분이신가요?


아버지의 슬하가 싫다면서 먼 고장으로 떠나가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로 자기 재산을 허비했든(루카 15, 13 참조), 제정신이 들어 집으로 돌아왔든(루카 15, 20 참조), 그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나의 귀염둥이이다.”(예레 31, 20)하며 그 아들을 껴안는 분이 아버지입니다. 재산을 나눠 달라고 보채는 아들에게 아무런 꾸중도 하지 않고 재산을 갈라 주셨던(루카 15, 11 참조) 아버지께서는 그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고생하는 작은 아들을 늘 기다리고 계시다가(루카 15, 1319 참조), 드디어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이 보이자 무조건 달려가 껴안고 입을 맞추십니다(루카 15, 20 참조).


그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십니다.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즐기자. 나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은 게로구나.”(루카 15, 2224)


기뻐하시는 이 아버지의 말씀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특히 반지를 끼워주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아버지의 아들 자격이 없습니다.”하고 말하는 그 못된 아들에게 아들의 자격을 되살려주시는 선언인 것입니다. 반지란 그 가문의 상속자라는 표시인 것입니다. “분명히 나의 아들이다.”라는 확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착한 아들이건 못돼먹은 아들이건 아버지에게는 그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자식일뿐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서 그 잘잘못을 기준삼아서 아들이고 아니고를 구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심정을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이 예화로써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오늘의 이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 1132)는 그 앞의 되찾은 양의 비유’(루카 15, 47)되찾은 은전의 비유’(루카 15, 8-10)와 더불어, 하느님은 바로 그러한 분이시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양 한 마리라도 그리고 은전 한 닢이라도 그렇듯 간절하고 소중한 마음으로 찾아 나서듯이, 그렇게 집을 나간 아들을 애절하게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가 그러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하나하나를 그렇게 애지중지 사랑하신다고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그렇듯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모습일까요? ‘엄친(嚴親)’이라고 일컫는 말처럼 우리에게 엄격하고 두렵기만 한 분이 하느님이실까요?


저는 오래 전 러시아를 여행한 일이 있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예레미따쥬(Hermitage Museum)’라는 박물관에서 네덜란드의 17세기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의 그 유명한 작품 돌아온 탕자를 직접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복사본으로 보던 그 그림의 원본 앞에서 저는 한참동안 넋을 잃은 듯 서 있다가 그 작품 속에 들어있는 작가의 신앙적 고백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가 렘브란트가 인생 말엽에 마지막 작품으로 완성했다는 돌아온 탕자의 주인공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점을 핵심으로 삼은 그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작가의 다른 수많은 작품 가운데 이 그림이야말로 신앙고백의 절절한 표현입니다.


그 작품 속의 아버지는 눈을 감으신 채 돌아온 탕자를 양팔로 끌어안고 계십니다. 작가는 아버지의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그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보시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루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끌어안는 그 늙은 아버지의 오른손은 뼈마디가 굵고 우람하게 넓은 남성의 손인 반면에, 그 왼손은 조그맣고 부드러운 여인의 손입니다. 자식을 먹여 살리느라고 손에 거칠게 굳은살이 박인 아버지이시지만, 그 마음으로는 어머니와 똑같이 불쌍한 아들을 쓰다듬고 그 상처를 어루만져주시는 부드럽기 그지없는 손을 지니고 계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렘브란트의 그 작품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아버지 앞에 돌아와 무릎 꿇고 흐느끼는 아들이 바로 작가 자신임을 스스로 고백하기 위해서 그 자신의 인생 말년에 심혈을 기우려 완성한 것이 그 그림이라 합니다. 신앙적으로 성숙한 인생의 말년에 그런 고백을 하는 작가는, 그러나 큰 아들이 들에서 돌아와 연장을 세워 잡고 아우와 아버지를 째려보며 서있는 모습을 그 그림 속의 오른편에 그려 넣고 있습니다. 아우의 참담한 모습과 아버지의 주책 같은 모습을 비웃는 태도이지요. 참회하는 형제를 그리고 자비 가득하신 하느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야박스런 세상 속물의 눈이 그런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하느님의 본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을 렘브란트는 또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에서 냉소적 태도의 큰아들 모습을 오려내고 아버지와 돌아온 작은아들의 모습만 담아 인쇄한 상본을 유통시키는 짓은 렘브란트의 메시지를 엉뚱하게 각색하는 왜곡인 것입니다. 그것은 돌아온 아들을 주인공인양 왜곡시킨 각색인 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아들이 뭐 잘못 했기로서니 그것으로 마음 상하실 분이 아닌 분, 그런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그 하느님은 아들과 함께 사시기만 하면 되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이실 뿐인, 그런 분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속 좁게 토라진 큰 아들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 32)하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그 심정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잘했건 잘못했건 그런 것은 문제를 삼지 않는 분입니다. 아들이 아버지 당신 자신과 함께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으려 하지 않는 아들이 문제인 것이지요. 아들이 함께 있기만 하면, 당신 것이 따로 있고 아들 것이 따로 있을 그 어떤 이유도 생각하시지 않는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다 탕진한 재산이란 터럭만큼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들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것만이 기쁨의 전부인 것입니다. 나갔다가 돌아온 아들이든, 계속 집에 함께 있던 아들이든, 그저 아들들이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 그것만이 아버지의 행복입니다.


그런데도 아들들은 아버지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합니다. 차지할 재물, 그리고 자신들의 명분을 더 중요시 하는 것이 아들들의 생각이지요. 오늘날의 모든 아들들이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자체보다도 세상 재물에 더 연연해하는 것이 오늘날의 자녀들인 것 같습니다. 루카복음서 15장의 두 아들들이 모두 그런 아들들이었지요. 그렇듯이 우리현대인일수록 흔히 하느님과의 관계보다도 세상의 것에 몰두합니다.


이렇듯이 하느님과의 관계보다도 세상의 것만을 집착하는 현대인은, 그럼으로써 두 가지 중요한 것을 자신에게서 분리시킨 불행을 당하고 있다는 지적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두 가지를 상실한 점에 대하여 미국 미시간 대학의 심리학 여류학자인 수잔 놀렌 혹스마 박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Susan Nolen-Hoetsema, ‘Women who think too much’, 한국어번역본<생각이 너무 많은 여자>, 한언 2004, 314-342쪽 참조).


현대인은 첫째로, 가족이나 친구들이나 또는 이웃들과의 공동체 구성원이기를 거부함으로써 삶의 위기에서 홀로 지탱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망각하다가 결국 파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현대인은 자기 자신의 능력만을 믿음으로써 종교적 믿음 즉 하느님을 상실하여 고통이나 위기가 닥칠 때 더 이상의 버팀목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와 그리고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즉 나 자신만이 아닌 하느님과 우리 이웃과의 사이에 믿음의 관계 안에서 언제라도 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 거기에 우리는 형제로 만나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보다 더 큰 위로와 믿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잊고 있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아버지로서 늘 우리 하나하나의 자녀를 소중하고 애절하게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언제라도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그 아버지의 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잘못 했다하더라도 그것을 보지 않으시려 눈을 감고 나를 얼싸안아 주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집으로 나는 언제라도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우리 아버지 하느님에 관한 예수님의 메시지를 말하면서, 하부내포지역 산골에 살았던 박해시대의 옛 신앙선조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여기 법동 성당에 왔습니다. 그 주제는 <오로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위해서 오지 산간에 살았던 사연>에 관한 것입니다. 박해 속에서 혹여 자신들의 신앙이 흔들릴까 하여 열심한 신자들끼리 산골에 이주하여 오로지 거기 아버지의 집에서 지내듯이 살다가 치명하신 분들의 사연입니다.


<위의 원고는 법동성당 홈페이지에만 올리고실제 강론시간에는 하부내포의 교우촌들과 순교자들의 삶에 관하여 강론함.>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47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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