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일 2013년 11월 10일 고양시 원당성당에서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한 빛이어라! 임께 다다른 숨! 

하부내포성지 홍보강론@고양시 원당성당



원당 본당의 교우님들께 인사 올립니다.


저는 대전교구 소속의 시골 사제입니다. 저는 과거 신학생 시절 혜화동의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서울에 산 것을 제외하고 줄곧 저의 출신 지역인 충청도에서만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저의 인생 사제생활의 마지막 기간이라 할 수 있는 노년에 접어들어 저의 고향 산골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곳은 충청남도 부여군과 보령시의 접경 산악지대입니다. 그곳을 일컬어서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하부내포지역이라 일컫고 있습니다.


1. 하부내포 지역이란?


그 해부내포는 충남 서남부 지역입니다. 현 행정구획으로, 보령시 부여군 청양군 서천군 지역과 논산시 일부 지역 내의 주로 산간 마을들이 옛 박해시대 교우들이 살다가 치명의 길로 간 사연을 담고 있는 곳들입니다. 금강의 북부 산맥을 전통적 산경표에 따라 금북정맥이라 합니다. 그 금북정맥을 일제 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차령산맥이라고 이름 붙였지요. 그 금북정맥의 북부 삽교천 유역의 홍성 예산 아산 당진 서산 지역을 일컬어 상부내포라 하고, 그와 구분하여 금북정맥 남부의 주로 서해안에 접하는 수계 형성의 지역을 하부내포라 하는데, 상부내포 지역의 주로 평야지대에서 신앙생활하기 어려운 박해상황에서 산간지대로 피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던 신자들이 이 하부내포 지역에 이주하여 살다가 결국 박해로 말미암아 치명의 길로 간 사연들을 남겼습니다.


2. 서짓골은 어떤 곳인가?


위와 같은 박해 상황에서 신자들은 산간에 신자 공동체를 형성하고, 주로 조와 담배 농사를 지어서 살아갔습니다. 이러한 신자들의 생활 실상을 최양업 신부님께서는 1850101일자 도앙골 발 사목 보고 서한(조선귀국 후 10개월 만의 첫 서한)에서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산간 지대 교우촌 가운데 하나가 서짓골입니다.


3. 병인(1866)년의 하부내포 지역 상황


흥선대원군의 대박해령에 의해 우선적으로 외국인들(선교사 프랑스인들)을 불법 밀입국하여 서학을 퍼트리던 죄목으로 대대적인 검거가 시행 되고 그들을 처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8663월 초순에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젊은 선교사들이, 중순에는 추가 체포된 다른 선교사들이 연이어 서울(한양)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서울과 충북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입니다. 동월 하순에는 충청지역(상부내포)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 된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베르뇌 주교 치명으로 교구장직을 자동 승계한) 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 및 오매트르 신부와 더불어 황석두와 장주기가 보령의 충청수영(갈매못)에 이수되어 330(주님수난 성금요일)에 군문효수 처형됩니다


이들 5인은 왜 보령 충청수영에서 처형되었을까요?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대부분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으로는, 어린 고종의 혼사 때문에 도성에서 멀리 보내 처형하라고 했다는데 이는 무리한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앞서 한양 도성에서 베르뇌 주교 등의 처형은 뭐란 말입니까? 더 신빙성 있는 근거로는, 다블뤼 주교 등에 대한 해읍정법(該邑正法)’ 적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충청 지역에 이른바 사교(邪敎)가 창궐하여 그 지역에서 불법 활동한 자들을 그 지역 사람들 앞에서 처형함으로써 경계(警戒)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를 추론하여, 하부내포 지역에 천주교 교우들이 그만큼 많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실제로 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조선 전국의 교우들 사목 구획으로 일곱 개 지역을 구획하였는데, 그 가운데 4개 구획이 충청남도 지역이었고, 그 중에서 충청 서남부 지역을 하부내포라 하였습니다. 그 하부내포에서 당시 홍산-남포-보령 지역에 신자 밀도가 가장 높았습니다. 그 신자들 은거하던 산간 중의 하나가 서짓골입니다.


4. 병인년에 서짓골에서는 무슨 일이?


병인년 330일에 갈매못에서 처형된 다섯 분의 치명자 머리는 규정대로 며칠 동안 형장의 장깃대에 걸어 전시되고 난 후에 그 몸체와 더불어 해변 돌무더기에 대충 묻혔습니다. 당시 홍산 삽티에 교우촌을 형성하여 조카들(양자들)에게 맡겨 보살피게 했던 황석두 루카 성인 회장님의 시신은 그 조카들(황천일 요한 황기원 안드레아)에 의하여 수습되어 삽티에 안장 되었습니다. 그런 중에 다블뤼 안토니오 성인 주교님과 오매트르 베드로 및 위앵 루카 성인 사제들과 장주기 요셉 성인 회장님의 시신은 방치되고 있었습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장노첨(장주기 성인의 아들)이 청양 다락골의 신자들을 찾아가 수습 협조 요청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락골 신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거절합니다. 그래서 장노첨은 서짓골에 살던 바오로 이화만(일명 이사심)을 찾아가 사정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화만과 그 아들 두 사람과 남포에 살던 신자들이 합세하여 갈매못에 가서 네 분의 치명성인 시신을 몰래 거두어 인근 오포리의 야산에 암장합니다. 그런 후에 그 암장지를 다시 가보니 짐승들이 건드렸는지 무덤 자리가 훼손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와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산 넘어 도앙골(현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에 살고 있던 김순장(요한 금구)이 분개하여 대책을 강구하게 됩니다. 김순장의 주도로 교우들 끼리 추렴하여 삭배를 내게 되었고, 이화만 부자 등 7명의 교우들이 오포리에 가서 네 분의 시신을 다시 염습하여 삯배에 싣고 12일간의 거친 항해로써 완장포(현 웅천 읍 옛 내륙포구)에 이르게 됩니다


밝은 낮에는 항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연안의 무인도 귀퉁이에 숨어 있다가 주로 어두운 시간(밤이나 새벽)에 폭풍과 맞서 항해하여 완장포 인근에 사람들 눈을 피해 접안하게 됩니다. 그리고 산길 이십오리(10Km)를 넘어 서짓골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화만의 담배 농사짓는 밭에 네 분의 성인 유해를 안장하게 됩니다. 그해 여름 725(음력)이었습니다.


5. 그 후의 서짓골 사정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홍산 삽티에 안장해드린 그분의 조카들, 그리고 서짓골에 네 분의 치명성인 유해를 안장해드린 이화만과 그 아들들은 그해 가을 이후 체포되어 그들 역시 죽음으로 신앙을 고백한 치명자들이 되었습니다. 이화만과 그 두 아들은 서울(한양)에 끌려가 맞아죽었다고 그걸 목격한 사람이 그 가족들에게 알렸는데, 그들의 시신은 한양 어디에 버려졌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로써 서짓골의 이씨 가족들은 일부 강경으로, 다른 일부는 더 깊은 산속 거칠’(현 부여군 외산면 화성리)에 이주하였습니다. 그 이씨 아들 중에 병인년 당시 어린이었던 이치문(히라리오)의 증언과 작업에 의하여 1882년에 조선교구 부주교 블랑 신부의 명에 따라 서짓골 네 분의 성인 유골 일부가 수습되고, 일본 나가사끼 파리외방 선교회 극동 지부에 보관되다가, 1894년 용산 신학교 성당에 이전 되고, 후에 1900년 명동 대성당 지하에 모셔졌는데, 1960년대 언젠가 슬며시 절두산 성지에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이치문(힐라리오)의 후손으로 두 사람이 1920년대에 신학생이 되어 1940년대에 용산 신학교에서 사제가 되었습니다. 이완성(요왕) 신부와 이우철(시몬) 신부가 그들입니다.


그리고 삽티와 서짓골은 교회에서 철저히 잊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하부내포 지역에 대한 대전교구의 새로운 인식에 따라 성역화 하여 후손들에게 그 역사를 전하고자 시도하고 있습니다. 서짓골과 삽티에 병인년 갈매못 치명 성인들의 육신이 진토 되어 오늘 그 정확한 안장 지점을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을 모셔 안장하고 역시 죽음으로 그 값을 치른 평신도 교우사람들의 신앙은 더욱 값진 것이라는 점을 저는 강조하여 후세에 전하고 싶습니다.


6. 그래서


그리하여 최근 몇 년 동안 저는 교구장 주교님의 지시에 따라 하부내포지역의 숨겨진 사연들을 찾아 이곳저곳의 순교자들과 옛 교우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나갔습니다. 그래서 최양업 신부님의 은거지였으며 수많은 순교자들의 교우촌이었던 도앙골3년 전에 조그마한 땅을 마련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네 분의 치명성인이 안장되신 서짓골에는 보령시의 협조를 얻어서 국유지에 성인들의 무덤을 형상화한 기도처를 마련하고 지난 1031일에 그 축성 봉헌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우리 평신도 교우님들 1,300여명이 찾아와 함께 기도했습니다. 저는 그 교우님들을 초대하는 글을 다음과 같이 썼었습니다.


짙은 단풍의 가을입니다.! 147년 전의 가을도 이러했을 것입니다. 성 안토니오 안 주교님, 성 베드로 오 신부님, 성 루카 민 신부님, 그리고 성 요셉 장주기 회장님 치명하시어 여기 서짓골에 묻히셨던 그 병인년의 가을도 이러했을 것입니다. 그 치명성인들을 모셔 안장해드린 서짓골 신자들은 그러나 이러한 가을을 맞이하지 못하고 또한 형장에서 단풍잎처럼 붉게 물들어 스러져갔습니다. 여기 성인들 묻히신 터를 찾아, 병인년의 그 서짓골 신자들을 대신하여, 단풍 물들 듯 기도하시러 오늘의 신앙인으로 오시지 않겠어요?”


이렇게 글을 써서 인터넷과 대전교구 주보에 올렸더니 그날 1,300명이나 오셨어요. 저의 가슴이 콱 막히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오늘날에도 병인년의 그 교우들과 같은 모습의 교우들이 이렇게 열렬한 신앙을 살고 있구나 하며 감격해하는 저의 눈에 그 서짓골 아래 보령 호수의 가을하늘에는 치명성인들과 옛 교우들이 천상 기도로 화답하듯 흰 구름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여기 원당 본당의 여러 교우님들, 여러분들께서도 그런 열심한 신앙의 주인공들이시지요. 우리의 이 신앙을 굳건히 이어 후대에도 전하는 증표로써 하부내포 지역의 그 신앙유적을 보전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마음이 함께 하여 주시리라 저는 굳게 믿습니다. 마침 오늘 주일미사의 말씀에서 일곱 형제들의 치명 장면을 들었습니다. 그 형제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기꺼이 죽는다.’고 말입니다(2마카 7, 14 참조). 그렇듯이 150년 전의 우리 신앙 선배들께서도 그렇게 기꺼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치명성인들과 또한 그분들의 유해를 모셔드렸다가 이어서 치명한 교우님들을 기리는 비문을 다음과 같이 서짓골에 새겼습니다.


한빛이어라, 임께 다다른 숨!”


이러한 저의 표현을 '光榮爲主致命'이라는 한자어로 자연석 대형비(巨石碑)에 새겼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들은 지금 주님과 함께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선 다음과 같이 천명하십니다. 하느님,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카 20, 38)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57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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