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일, 2013년 11월 10일
만수리 공소 윤종관 신부
'홀로서기'란?
오로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살기
오늘 우리는 루카복음서 20장 27-38절에서 우리네 상식의 귀로는 참으로 듣기 거북한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이른 바 수혼법(嫂婚法)이라고 하는 해괴망측한 이야기인데,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명쾌한 답으로 물리치십니다. 오늘의 이 일화는 단순하게 질문과 대답의 내용으로만 이해할 일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반대하고 그분을 올가미에 걸어서 제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파상적인 공격을 해왔는데, 그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진정 누구이신가를 우리에게 깨우쳐주시는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난주일의 복음 성서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던 길에 예리고라고 하는 관문도시를 지나시다가 부도덕한 세관장 자캐오를 회두시키시고 그에게 구원을 선언하여주신 기사(루카 19, 1-10)를 읽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필히 예리고를 거쳐 가야 하는데 또한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태생소경을 신앙으로 눈을 뜨게 하여 주기도 하셨는데(루카 18, 35-43), 예리고라는 그 도시란 옛적에 이스라엘 백성이 오로지 신앙의 힘으로 성벽을 무너뜨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한 길을 열었던 곳입니다(여호수아기 6장 참조). 그러한 예리고에서 소경과 자캐오에게 새로운 삶을 안겨주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이끌고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루카 19, 28 이하 참조).
그런데 그 예루살렘은 태생소경과도 같이 참 삶의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과 회두하기 전의 자캐오가 살았던 것과도 같은 불의한 사람들이 판을 치는 도시였습니다. 그러한 예루살렘의 성전에서는 부정한 물품거래가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그 성전에서 부패한 장사꾼들을 몰아내셨습니다(루카 19, 45-46 참조). 그러자 예루살렘의 부정한 실력자들은 예수님 제거를 획책합니다(루카 20, 1-19 참조).
율법과 경건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로마 제국의 권력에 빌붙어 사는 성전 당국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로마제국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의 여부를 예수님께 물어 그분을 진퇴양난의 함정에 몰아넣으려 합니다. 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시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루카 20, 25)하는 그 유명한 말씀으로 그들의 간계를 통쾌하게 물리치십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성전 당국자들과는 노선을 달리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또 다른 난처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오늘의 그 루카복음서 20장 27-38절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던진 그 해괴망측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손(孫)을 보지 못하고 죽은 형의 대를 이어주기 위해서 동생들이 차례대로 과부 형수와 혼인했다는 억지 소설인데, 그 망측한 이야기는 그것이 사실이었든 아니든 간에 구약성서에 나오는 수혼법(嫂婚法)이라는 것을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각색한 내용입니다.
창세기 38장에 보면 유다가 자기 아들들에게 지시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더욱 그 유다가 저지른 그 다음의 더욱 해괴한 사건은 제가 여기서 이야기하기가 심이 거북합니다. 그리고 신명기 25장에 보면 그런 수혼법을 법제화하고 그에 따르지 않으면 ‘신발 벗긴 집안’이라는 오명을 씌우라는 내용이 있는데, 오늘날 우리네 상식으론 정말로 망측하기 짝이 없는 것이 그 수혼법이지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그런 해괴한 수혼법을 들고 나와 부활 신앙을 거부하였습니다만, 그와는 반대로 우리 가톨릭의 사제나 수도자의 독신 생활을 비웃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개신교 신자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천주교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독신 생활을 하느님의 법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는데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범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유교적 전통으로 보아서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분들 가운데는 부모로부터 태어난 인간으로서 부모의 대(孫)를 이어드리지 않는 것은 불효막심한 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 아들을 낳지 못한 사람이라 할 경우에는 양자라도 들여서 가문을 이어야 불효를 면하는 것이라 하지요. 개신교 신자들이건 유교적 보수주의자이건 간에 그 분들의 눈으로 보면 천주교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독신 생활은 해괴한 것이지요.
헌데, 예수님께서는 저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수혼법 고수와 개신교 신자 분들이나 유교 전통적 보수주의에 대하여 정면 돌파의 답을 제시하십니다. 이번 주일의 루카복음서 20장 27-38절 가운데는 생략되었습니다만, 그 병행 구절을 마태오복음서나 마르코복음서에서 찾아보면 예수님께서 단도직입적으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주장을 내치십니다. “너희는 성서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마르 12, 24 및 마태 22, 29) 하시면서 말입니다.
이 정면 돌파의 예수님 말씀은 사두가이파 사람들뿐만 아니라 앞서 예를 들은 개신교 신자 분들이나 유교 보수주의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말씀이지요. 단적으로 말해서, 부활에 대한 믿음은 종말 신앙과 동일한 것입니다. 부활과 종말에 대한 믿음이 우리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라 함을 깨닫지 못하면 사제나 수도자의 독신 생활의 참 뜻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지요. 그리고 부활과 종말에 대한 신앙과 사제 및 수도자의 독신 생활이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깨달으려면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죽는 일도 없다.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루카 20, 34-36)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결혼하지 않는 까닭을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에 효율적으로 봉사하기 위해서 그리고 오롯한 마음으로 도를 닦기(똑바로 수도하기) 위해서 독신으로 살 수도 있지요. 바오로 사도께서도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에 마음을 쓰게 되어 마음이 갈라집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나 처녀는 어떻게 하면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남편이 있는 여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에 마음을 씁니다.”(1고린 7, 32-34)
그렇지요, 수도와 효율적 봉사를 위해서는 독신이 좋지요. 헌데, 바오로 사도는 이 말씀을 하시기에 앞서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 3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우리의 신앙’을 독신의 삶으로 증거 한다는 것입니다. 즉 종말 증거의 삶이 독신 생활의 본질적 목적인 것입니다.
달리 말하여, 이러한 독신 생활로 세상을 이긴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손을 두어서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자 하기보다는, 그리고 세속의 평판으로 삶의 바탕을 이루기보다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로서 천사들과 같이 죽는 일도 없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루카 20, 35-36 참조)을 추구하라는 오늘의 예수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독신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독신(정결)의 덕을 종말적 삶 즉 새로운 삶의 길을 증거 하는 ‘복음덕’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성서 구절의 예수님 말씀 가운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 즉, ‘부활’은 재생(再生)이나 환생(還生)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의 원어를 직역하자면 ‘부활하다’란 ‘일으켜지다(ἐγεἰρω․raise up․auferstehen)’라는 뜻입니다. 저는 그래서 독신(정결)의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세상에 뿌리내지도 않고 세속에 바탕을 두지도 않듯이 현세의 바닥에 붙어(깔려)있지 않고 ‘일어난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즉, ‘현세가 전부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 독신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저의 설명이 일반 신자들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사는 사제나 수도자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께서도 이 세상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자기들 처지대로 증거 해야 합니다.
저는 사제로서 저 자신에게 질문해봅니다.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사제 생활이므로 정말 여인의 도움 없이도 살고 있는가? 꼭 여자가 밥을 해주어야 하는가? 방 청소나 빨래를 나 혼자 해결해도 불편해 하지 않는가? 다른 말로, 일종의 ‘홀로 서기’로 길들여져 있는가? ‘홀로 서기…!’ 그것은 세상에서 ‘일으켜진’ 그런 것 아닌가…? 타인의 도움이 꼭 필요한 삶, 즉 누구에겐가 의지하고 살아야 할 그런 삶이 아닌 사람으로 사는가…?
이러한 저의 자문(自問)은 얼핏 보면 교만한 생각 같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번주간 그 해괴한 질문에 대하여 결론적 대답으로 천명하신 말씀을 깨닫기 위한 몸부림이어야 하겠기 때문에 저 자신을 채찍질 해보고자 던지는 자문입니다. 이번주일의 결론으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 37-38)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전문 성서학자께서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사실 모두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정양모 신부님의 루가 복음서 번역 참조)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이라는 증거로 저는 사제 생활을 해야 하겠지요. 세상(사람들)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하겠지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잘 이해해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서”(루카 20, 38) 살아야겠지요.
허긴, 사제가 아니라도 그리스도 신자라면 모두 세상의 힘으로 또는 세상으로 말미암아 살기보다는 그렇게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참 신앙인이겠지요. 사제나 수도자가 아닌 평범한 신자 분들도 처지 나름대로 생활의 바탕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져야 하겠지요. 우리 신앙의 핵심인 부활과 종말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 때마다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하며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과연 누구이신가를 깨닫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뭇 사람들로부터 반대의 표적이 되시고 처형되어 세상에서 제거되신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에 뿌리내려 연명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세상으로부터 들려 올려지신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부활하시는 분 그리고 종말의 주인공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56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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