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와 사회교리 (1)

버드내성당 주임

한정현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성서를 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저는 3년째 (대전)교구에서 이뤄지는 사회교리의 한 파트를 맡아서 합니다. 그 주제는 [성서와 사회교리]입니다. 처음엔 부담이 많이 되었는데요. 비록 제가 (로마에서) 성서를 공부했고, 그 중 구약, 구약 중에도 성서가 쓰여진 언어 전공자라서, 구약성서의 언어와 쓰여진 언어의 주변언어, 문화들 이런 것들 전공한 사람이라서, 많은 성서를 공부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분들도 고백하시겠지만, 우리가 성서를 안다고 말할 자신있는 사람 많이 않으니 계속 공부해나가는 단계, 끝까지 계속 될 것인데, 덧붙인 말이 사회교리 아닙니까? 


'사회교리'란 오래전 부터 쓰여진 흔한 단어였다


안타깝게도 프란치스코 교황님 뿐만 아니라, 그 전 교황님들도 사회교리란 말을 많이 쓰셨는데, 저는 신학교에서 사제가 되기 전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이후로 서품을 받아서 사제로 살면서, 또 외국에 (유학) 가서 공부를 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사회교리에 대해서 공부 자체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저희같은 세대가 신학 교육을 받을 때에는, 그래서 예비자 교리의 일부분인 줄 알았습니다. 어떤 파트 중의 한 파트로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조금 공부해보니, 어마무시하더군요, 이게 "와아!, 사실 성서를 다 이 안에 포함시킬 수도 있겠다!"고 여겨질 정도로 굉장히 중요했는데, 외부의 힘이던지, 내부의 힘이던지, 제대로 접해본 적이 없습니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방한하셨을 때, 함께 자리한 한 스테파노 신부님의 모습. 

출처. 버드내성당 다음카페


부족함은 교회가 채워준다


그래서 지금도, 제가 교구에 돌아와서 3년째 이 말씀을 드리면서도, 제가 뭘 가르쳐드릴 수 있다? 대단히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성서와 사회교리]를 어떤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한지 말씀드리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다만 부끄러우면서도 위안이기도 합니다. 모든 부족함은 교회가 다 채워준다는 말이 성사론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부족한 것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리란 희망을 갖고 강의를 하겠습니다. 성서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부분에 대해 묵상하고 성찰하겠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Catechesis와 Doctrine


개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요. 

Catechesis ... 카테케시스 , 교리란 말입니다. 교리를 받는다. 오랜 역사를 통해서 신앙공동체의 지식적 측면으로 알려질 만한 것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이론적 측면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Doctrine ... 이것은 뼈대가 정확히 있는 원칙을 세울 때 선언되는 것, 그것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교도권의 가르침, 그래서 교의라고 씁니다. 단순히 이론 뿐만 아니라, '교리'의 이(理) 자는 지식적인 걸 안다는 것이고, '교의'의 '의(義)'자는 자연스럽게 뼈대 있는 걸 통해서 행동을 한다라는 실천이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교리는 social dictrine 라고 합니다. 사회교리라고 하지만, 교리라는 말 뜻에는 지식적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뼈대가 우리 삶 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 그런데 교리와 교의에 대해 인터넷을 찾아보면 교리를 doctrine, 교의를 dogma로 구분하기도 한다.)


2015년 3월 18일(수) 저녁 8시05분 휴대폰으로 촬영한 하기동 성당 2층 성전 모습. 대전교구 사회교리학교 제13기의 3주차 수업이 막 시작되려고 하고 있다. 강사로 나선 버드내성당 주임 한정현 스테파노 신부님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


성서와 사회교리


성서와 사회교리가 이 시간 제목입니다. 이것은 꾸준히 강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와 사회교리, 즉 ① 성서가 존재하면 사회교리와 비교를 해보라는 것인가? 아니면 ② 성서의 내용 중에 사회교리에 쓰일 수 있는 것만 추출해서 다뤄보라는 건가? 아니면 ③ 사회교리 중 이론적으로 정착된 것 중에 이론적 근거 만들기 위해 성서를 활용해보려는 것인가? 뉘앙스의 차이이기도 합니다만, 아마도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포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 성서와 사회교리라고 제목을 지은 것 같습니다. 양쪽 다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성서 내용 중 사회교리만 뽑는 것도 위험하니까요. 전체를 봐야합니다. 이론적 근거를 대는 것은 더더욱 위험합니다. 


나를 위로해주는 성서 한 구절이 갖는 의미


내가 신앙인으로 살며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하고, 위로받고 격려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성서의 전체를 함축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내 심리상태가 어떤 상태인데, 성서를 넘기다보니, 내 마음을 전하는 구절이 있다고 보면, 그 말씀을 나의 것 화(化)시키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서와 사회교리]란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이라도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한번이라도 읽으신 분은 성서는 그 자체로 사회교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겠다고 생각합니다.


성서 그 자체가 사회교리


저는 적어도 구약성서 안에서는 그렇게 느끼고요. 신약성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걸 다 드러내시는 삶을 몸으로 살아내신 것이니까요. 감히 말하건데, 이 두가지 말을 다 성서에 붙일 수 있다고 이 교리도, 이 교의도, 그러면서 성서 전체가 사회교리의 기본적인 흐름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원래 사회교리학교에 가서는 정말 뛰어다니는 식으로 말씀드렸지만, 이전 사순은 왜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나? 오늘은 지난 2년간 강의록도 안 가져오고, 사순시기를 보내는 저를 지난 주 생각하면서, 성서 안에서 우리가 일관되게 우리 신앙과 사회교리 측면에서 함께 나눠볼 수 있는 주제가 혹시 있을까? 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성서는 강한 권력자의 언어였나


가만히 보면 성서가 강한 사람의 언어인가 아니면 약한 사람들의 도움이 되는 입장으로 말해지고 행동되었는가? 2분법이 아니라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가? 그 의미를 본다면 사회교리가 더 분명히 다가올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과거를 선물로 주십니다. 조금전 지금 제가 드린 말씀과 시간과 오늘의 일상은 과거라는 단어로 모두 포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과거 때문에 힘을 얻는 사람, 힘을 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힘을 잃는 건 후회의 감정이 남습니다, 그 때 잘할 걸, 한마디라도 더 해줄 걸, 그런 후회죠. 잘했다면, 잘한 걸 뿌듯해하며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어찌되었든, 지나간 것, 흘러간 것은 다 흘러가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바로 5분 뒤, 아니면 조금 더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그런데 어떤 힘을 주님께서 주셨냐면, 기다리고 희망하는 힘을 주신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는 이 육신은 지금 이 순간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는 데에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나의 결정인가?


오늘을 돌아보았을 때, 자랑하고 싶은 게 있으신 분?, 후회가 있으신 분?  그러면 지금 이후에 희망하는 게 있으신 분 있겠죠? 뭐가 그런 게 있나요? 그런데 나는 어디 있는가? 난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게 누구의 결정입니까? 전 저의 결정일까요? 성서는 나의 이야기인데, 나를 잠깐 빼놓으라고 우릴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내 말이라면, 내가 그 말을 선택하고 결정한 게 아니라,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를 잠깐 떼어놓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끌어주신 분이 주님이라고 성서는 계속 고백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지금의 개인의 역사는 내가 결정하고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렇게 되도록 만든 주님의 결정이고 선택이라는 것.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우리가 단순히 나의 것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주님의 힘이 나를 통해 살아지도록 그렇게 나를 그분의 도구로 만든다는 측면에서, 성서에 나오는 거의 모든 인물들은 내가 이걸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야훼 하느님께 조금씩 혼납니다. 그러나 그 혼나는 것도 매를 맞는 게 아니라, 그걸 깨우치도록 혼이 난다는 겁니다.


야훼 하느님께 혼이 나야 하는 이유


그래서 성서를 단 한마디로 말하면, 주님이 개인의 역사와 공동체의 역사를 통해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 당신이 역사하시고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이끌어가시는 데에 내가 내맡긴다고 고백하는가? 아니면 항거하고 반대하고 거부하는가? 따르는가 따르지 않는가? 믿음이란 내가 선택해서 이 만큼 된 것이라고 고백하면 좋지만, 그렇게 대부분 신앙인들은 내가 나를 성장시킨다는 위험에 빠집니다. 내가 노력해서 이만큼 되었다고! 그런데 인간은 응답을 했을 뿐이지, 그걸 이끌어가는 분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 정말 많이 고백하는 분이 있습니다. 또 어떤 때 그렇다고 생각하다가, 그건 돌아서면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서를 볼 때는 그래서 내 힘을 빼고, 날 비워놓으라고. 그 수많은 역사와 스토리와 수많은 인물을 통해서, 나의 힘을 쥐어서 이어가는 게 아니라, 주님의 매순간순간 부르심에 지금 이 순간을 살면서, 주님의 개입하심과 역사하심을 매 순간 느끼는 존재로 살아가라고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힘을 빼고, 날 비워라


지나간 과거는 역사로 남습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는 예상할 수 있든 없든 다가오지 않은 그 희망으로 그대로 남습니다. 이 두가지에 반대방향의 양화살표(과거⇔미래)를 과거와 미래로 이렇게 적은 이유는 지나간 것과 다가올 것이 서로 긴장된 관계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살아있음이란 바로 긴장입니다. 과거에는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방향을 알았고, 이후로는 또 나침반으로 방향을 알게 되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나침반은 고장난 나침반입니다. 멈춰서있다면 제대로가 아니죠. 제대로 된 나침반이라면, 미세하게 계속 흔들려야 합니다. 정확히 딱 서있으면 고장난 것입니다. 우리 삶 속의 그런 긴장과 떨림, 때로는 하느님을 두려워한따고 표현하는 그런 두려움. 그런 게 없으면 편하게 살겠다고 말하는 사람 의외로 많습니다. 그 녀석만 없으면 살만하겠다. 이것만 해결하면 살만하겠다. 그 녀석을 보면 한 대 쥐어박아야 겠다. 그런 생각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래서 뭔가 딱 멈춰서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인간본성상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두렵고 떨림이 인간을 지탱해줍니다. 


인간을 지탱해주는 건 두려움과 떨림


그래서 사회교리란 '확답을 주는 것처럼 말하는 것의 취합'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금 내가 불안하고 떨리고 두려운 이것을 통해서 나침반이 살아있는 것처럼, 동방박사를 인도한 별이, 궁창에 어둠이 있어야 빛이 발하듯이, 개인의 역사, 공동체의 역사, 국가의 역사에도 모든 것이 완전 해결될 것 같은 확답을 통해 우리 인간사에 행복을 주는 게 아니라, 어둡고 떨림을 통해서 매순간 하느님은 개입하시고 이끌어가신다는 측면에서 성서는 계속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981년 요한 바오로 2세는 [노동하는 인간] 회칙을 발표합니다. 이것은 레오 13세가 발표한 [새로운 사태](1891) 반포 90주년을 기념해서 내신 것입니다, 거기에 3항에 보면, 실상 사회교리 근원은 성서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특히 복음서와 사도들의 사건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 [기쁨과 희망]이라는 교회 헌장 23항 보면, 그리스도교계시는 창조주께서 인간의 도덕적 본성에 새겨준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이 우리 사회생활의 법칙이고, 그 안에서 이루어진 것들이 사회교리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이미 교도권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동과 인간] 노동 문제는 사회 문제의 관건

3. 사회의 객관적인 현실을 진단하든지 (중략) 인간의 노동에 관한 문제는 자연히 빈번하게 대두된다. 이 문제는 사회 생활에서도 교회의 가르침에서도 이제는 불변의 요소가 되었다. 더욱이 교회의 이러한 가르침 속에 노동 문제가 언급된 것은 훨씬 오래된 일로 최근 90년 동안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실상 교회의 사회 교리는 그 근원을 성서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특히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간에 두고 있다. 처음부터 사회 문제는 교회의 가르침에 속해 있었다. 교회는 사회 속에서 인간과 생명을 인식했으며 특히 각기 그 시대의 필요에 따라 사회 윤리를 다루었다. (이하 생략)



창세기를 보라


특히 구약성서를 보면, 창세기를 통해서 그리스도 인간학의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성찰한 것입니다. 특히 앞부분을 보시면, 인간이 창조되고, 어떻게 자신의 나약함에 빠지고, 나약함에 빠지고 나서도, 자신 스스로의 양심에 거스르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타인도 나약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걸 죄라고 합니다. 죄는 나혼자 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죄는 기본적으로 공범이 있다


아담과 하와의 첫 얘기가 그렇습니다. 이 열매만 먹지 말라고 했는데, 나중에 아담아 너 어디있느냐 하니까, 히브리 원문을 보면 '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 대답은 '예, 여기있습니다,'인데, 하브리 원문은 '예'라는 말을 하다가 흐지부지하게 끝납니다. 뭔가를 잘못한 아이가 있을 때,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그 아이를 부릅니다. "누구야!"라고 불렀을 때, '예!"라는 대답이 조금 시원찮은 아이들처럼, 자신이 뭔가 잘못한지를 안 것처럼, 아담도 그런 태도였던 것입니다.


남 탓이요! 남 탓이요!


아담은 그걸 하와에게 돌립니다. 우리 말로, 저는 절대로 그럴 생각이, 하느님 말씀을 거스를 마음이 요만큼도 없었는데, 지어미가 그러니 따르는 게 도리일까 싶어서, 내 생각은 아니지만, 저사람 의견을 따라야 할 것 같아서? 그러자 순수하신 하느님은 다시 하와이게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그런 잘못을 하도록 전가받은 인간은 그 순간부터 죄가 나의 것만 되지 않고, 누군가 다른 이에게도 똑같이 되도록 만들어진 겁니다. 그 얘기를 안 들었을 리 없습니다. 그러니 나를 구해주기는 커녕, 나를 궁지로 몰아넣는 지아비의 얘기를 다 들었을 하와는 그걸 말할 수 없는 존재에 전가시킵니다. 나는 당신이 아시는 것처럼 그런 일을 할만한 사람이 아닌데, 뱀의 간계에 넘어간거라니까요. 


정리정돈이 원래적 상태


뱀이 우리의 가장 사회적인 현상, 사회생활에서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중에, 꼭 생각해야 할 것은, 나의 것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겁니다. 죄는 원래 성서적 의미는 정리가 잘 되어있어야 하는데, 무언가 정돈되어 있는 상태를 흐트려트려 놓은 것, 무질서한 것으로 만든 겁니다. 원래 인간이 창조된 본성은 주님의 마음을 살도록, 주님의 마음으로 정돈되어 있도록 한 것을 스스로의 계획으로, 선택과 결정으로 어그러트린 것, 그것을 최초의 원죄에서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이거은 가정과 사회로 확대해서 묵상하면 엄청난 것들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 현상을 한번 보십시요. 요즘은 하도 세월호 얘기를 많이 한다고 하면서걸 귀찮고 싫어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애들이 왜 거기 있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사회생활하다가 우리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은 체험을 합니까? 내가 지금 여기 있어야 하는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그것은 물리적 위치일 뿐만 아니라, 내 내면에서 함께 흘러나가는 고백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스려라'의 의미


내 마음은 어디있어야 하는가? 몸은? 그것은 내 모든 역사에서 하느님은 매순간 바로잡고 정돈사켜가시려고 개입하고 계시고, 인간은 흐트려 트려놓으려고 본성상 그러는 건 아닌가? 그래서 인간학의 첫번째 사고들이 나오는 창세기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세상 모든 것을 다스려라'라고 번역하는데, '다스린다'는 말을 요즘 이해하기 쉬운 말로 옮긴 것이, 원래는 '다스린다'는 말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가장 쉬웠던 모얍니다. 그 히브리어 동사를 제대로 번역할 현대어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서가 그렇게 번역하는데, 쉽게 말씀드리면, '세상 모든 것의 가이드를 잘해라'하는 의미입니다. 


세상 모든 것의 가이드를 잘해라


성지순례와 여행을 다닐 때에 내가 모르는 곳을 여행하면 가이드가 필요합니다. 가이드는 어떤 사람입니까? 설명을 잘해주는 사람? 좋은 가이드는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해달라는대로 다 해주는 사람? 이 가이드가 지니는 의미, 성서적 의미는 그곳을 처음 가보는 사람을 위해서 그곳을 미리 가본 사람입니다. 그것이 원래 가이드에게 쓰는 말입니다. 내가 처음 가보는 곳을 미라 가본 사람,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세상을 다스려라고 했을 때, 세상에 대해서 가이드를 잘하라고 인간을 보내셨는데, 인간이 그 세상에 대해서, 내가 너희를 어느 곳이든 보내면, 그곳에 너희들이 알고 느끼고 깨달을 체험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마련된다는 걸 함축한 단어가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요즘같으면 차라리 다 이 세상도 잘 좀 다스려주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가본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그런데 먼저 가본다는 것은 세상에서 우리를 다스린다는 사람도 그 부분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우리들 삶의 모습에서 오는 희로애락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가본다는 것은 그곳의 정보를 아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느끼게 될 모든 감정들, 즉 희로애락을 거기에서 미리 체험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닌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창조된 인간의 소명은 주님이 던져주신 곳에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그 주님의 뜻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것이 그리스도교 인간학의 처음이고 사회교리의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시편 8장 6절과 7절을 묵상


하느님 안에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시편 8장에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8,6절 말씀입니다. 


6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7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시편 8장 7절에서 나오는 '다스림'도 그런 뜻입니다. 



2015년 3월 18일(수) 하기동성당 저녁 8시 52분. 대전교구 사회교리학교 제13기 3주차 수업 [성서와 사회교리]의 1교시 종료. 한정현 스테파노 버드내성당 주임신부님. 이 강의는 필자의 기록을 토대로 재정리된 것으로 실제 강연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강의신부님의 의도와 맥락에서 벗어난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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