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인권 강의 (1)


김녕 서강대 교수 | 2015.3.16(월) 


일과 삶의 의미와 방향 찾기


가톨릭 사회교리를 공부하겠다는 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톨릭 사회교리의 의의와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가장 먼저, [일과 삶의 의미와 방향찾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2015.3.16(월) 저녁 7시02분 촬영. 수업이 막 시작되는 모습


저 먼 산의 소나무를 보고 걸어가라


어떤 신부님 강론 말씀에서 들은 것인데, 어떤 사람이 소를 끌고 쟁기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쟁기질을 하며 주욱 가는데, 비뚤비뚤해서 왜 그런가 하니, 옆에 있는 사람이 말하길, 소 엉덩이만 보고 가니 그렇지. 어떻게 하면 될까? 저 길 건너에 있는 딴 소를 가라. 그래서 그 멀리 있는 소를 바라보고 갔는데 역시 비뚤비뚤합니댜. 그래서 소를 보고 가면 안되겠다. 뭐를 보고 가면 될까? 생각하는데, 그 때 정답을 얘기합니다. 저 먼 산의 소나무를 기준으로 삼고 보고 걸어가라. 그러면 똑바로 걸어갈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정말 우린 무엇을 목표로 살아가는가? 그리고 그 목표는 합당한 기준인가? 그것이 정확히 흔들리지 않는 좌표가 되는 것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목표들은 비뚤비뚤하거나 남에게 맞추거나 시류에 맞추거나 아니면 여론이나 남의 눈치, 이런 것에 맞추어 가다보면 비뚤비뚤합니다.


이성으로 생각하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묻는다


그런데 가톨릭 사회교리는 분명히 계시와 이성이 합쳐진 것입니다. 어찌보면 가르침 중에서는 가장 멋있는 것이 사회교리입니다. 하느님의 계시와 인간의 이성이 합쳐져서 최고의 걸작이 만들어진 것이 사회교리이다. 복음에서 시작하고 가톨릭의 모든 전통과 교부들의 가르침을 꿰뚫는 것으로, 그 근본에는 하느님의 계시와 하느님이 뜻이 담겨있고, 그것에 관련된 모든 문헌의 총체가 사회교리의 토대가 되고, 이 세상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을 제공하고, 여러가지 사회과학적 지식의 토대가 되는 것이며, 세상의 이치를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하면서도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묻는 것이 바로 사회교리입니다. 하느님의 계시와 인간의 이성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올바른 기준. 그렇게 굉장히 멋있는 것이 가톨릭 사회교리입니다. 그리고 보면, 우리가 살면서 많은 도덕교과서나 여러가지 문헌들이 있지만, 정말로 우리에게 어떤 기준 설정해주는 것들이 너무나 구태의연하거나 너무나 추상적이거나, 너무나 어려운데, 가톨릭사회교리는 특히 오늘(7주차부터) 공부하는 <가톨릭 사회교리 주제편>은 굉장히 싶게 쓰여진 것입니다. 


2015년 2월 2일(월) 저녁 7시 첫 시간에 앞서 나눠준 교재 2종. 7주차 수업부터 <가톨릭 사회교리>의 <주제편>을 공부한다.


예를 들어, 정치를 바라볼 때, 뭐가 가장 중요할까? 경제생활을 하면서 알아야 할 원리는 무엇인가? 노동은 왜 중요하나?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의 핵은 무엇인가? 이 세상 평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나? 이런 커다란 질문에 대해서 몇 장 안되는 짧은 챕터로 쉽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교리는 판단 기준이다


이처럼 쉽게 얘기하는 것의 의미는 큽니다. 우리 추구하는 기준, 그 기준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신문이나 잡지나 뉴스를 보면서 내리게 되는 어떤 판단의 기준이 곧 사회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치경제, 사회문화, 인류공동체가 움직이는 여러가지 원리와 지향해야 할 목표 등의 기준이 곧 사회교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회교리는 구체적이다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성서에서 보면,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굉장히 좋은 말이지만, 구체적으로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신부님, 하느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이 오늘 이 시점에서 이 세상에서 어떤 것을 구하라는 걸까요?" 그러면 "기도하세요. 성경 읽으세요. 성서 안에 답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믿음이 약하십니까? 하느님이 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기도하세요!"라고 하는 게 아니라, 사회교리 안에 답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서 안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와 정의라는 것을 현실과 중간접목 시키는 다리가 필요합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복음과 현실을 이어주는 게 그런 다리 역할을 하고, 구체적으로 사회교리에서는 정의란 이런 것이다. 예를 들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주어져야 하고, 학생들은 배울 권리가 존중되어야 하고, 나이많은 분들은 사회보장제도가 지켜져서 늙어서 외롭고 병들어도 의료서비스 받고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권리가 있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다, 또 농부들이 적당한 자기 땅에서 소작할 권리가 있다는 것. 이런 것이 다 제대로 이루어진 상태가 바로 '정의'이다.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각자의 몫


기본적으로 각자가 누려야 할 몫을 각자가 누리고 있는지에 대한 사항. 이것이 정의로운 상태입니다. 각자의 몫이 중요합니다.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것이 각자의 몫입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런 정의의 핵심이 인권입니다. 인권이 잘 보장된 상태가 정의로운 상태이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게 평화로움. 이런 것을 평화라고 합니다. 평화는 갈등 없는 상태로 '소극적 평화'라고 부르고, 갈등의 근원조차 해결이 된, 그래서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모순까지 해결이 된, 말하자면 정의가 실현되고 그 토대인 인권이 다 보장된 상태. 그래서 사람이 살기 편안하고 따뜻하고 온화한 느낌을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상태. 그래서 저절로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흘러나올 정도의 상태가 평화입니다. 그래서 평화의 핵심은 정의고 정의의 핵심은 인권이다.


평화의 핵심은 정의이고, 정의의 핵심은 인권


그래서 인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절대로 정의나 평화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기본이 인권이다. 인권은 세상의 빛이 되는 기준이고, 세상의 소금, 세상이 더 이상 부패하지 않도록 기준이 되는 것도 인권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말씀드릴 테마는 [신앙의 성숙과 사회적 실천을 위한 길잡이]입니다. 빛과 소금은 교회 안의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빛과 소금입니다. 세상을 비추는 빛, 그것의 의미와 뜻을 생각하기 위해서 사회교리를 공부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교회 안에 머물지 않고, 세상과 존재하고 세상고 여물며 세상과 함께 아파하는 그런 신앙인으로 거듭 나고, 항상 사회적 실천방안 고민하는 것 그런 것이 성숙된 신앙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빛과 소금을 염두에 두어야 쇄신된다


그 다음에 세상의 빛과 소금을 늘 염두에 두는 교회는 쇄신되기 마련입니다. 『복음의 기쁨』에서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하시는 바와 같이, '교회는 야전병원이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의 가장 변방으로 나가라. 그리고 성직자들 계급장 다 떼고 사람들과 똑같이 가서 땀 흘려라. 땀 범벅이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만나라. 그리고 모든 걸 다 벗어던지고, 가장 맨 앞으로 가서, 전쟁터에서는 사람들이 가장 피흘리는 곳에 달려가는 게 교회여야 한다. 바로 여기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란 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란 화려한 네온사인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아프고 어두운 곳으로 달려가는 빛과 소금!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관찰 - 성찰 - 실천


그 다음으로 [관찰-성찰-실천]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말하는 3단계인데요. 세상에 대한 관찰은 사회과학적 지식 동원해서 세상에 대해서 올바로 분석하는 것이고, 보통 그 다음에는 실천으로 가는 것이 시민운동이나 사회운동하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보통 관찰 다음에는 실천으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가톨릭사회교리는 성찰이라는 두번째 단계의 토대가  됩니다. 세상 문제를 바라보고, 사회교리에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회교리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다운 실천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기때문에, 성찰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보통은 문제제기 다음에 행동으로 가서는 나중에 잘못된 경우가 많고, 교회다운 신앙인다운 실천인가? 아닌가?에 대한 비판과 반성으로 넘어가는데 그 이유가 바로 가톨릭 사회교리적 성찰이 부족할 때 벌어지는 겁니다.


사회교리를 알고 모르고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사회교리를 알고 모르고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회교리란 말을 모르고 어렸을 때부터 오늘날까지 성당을 다니는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저도 50여년 성당을 다녀보았지만, 신부님에게서 '사회교리'란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바로 사회교리의 증인이시자 그 자체이시죠. 교황님의 모든 행적과 발언과 사상이 그대로 사회교리입니다. 사회교리가 사람의 모습을 띤다고 할 때 바로 교황님 모습을 보면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곧 사회교리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교리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저렇게 훌륭하신 분이 가르치실까? 저렇게 구체적으로 우리 마음에 다가올까? 예를 들어서 '무관심의 세계화'란 말은 놀랍습니다. 이 세상의 누가 그런 이를 위해 울어줍니까? 울어주는 마음을 잃어버린 세상.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이 무관심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는 말씀. 그런 것을 타개하기 위해 필요한 게 사회교리 공부입니다.


사회복음화의 토대는


그 다음에 우리가 <사회복음화>라고 할 때,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한 기준이 사회교리입니다. 그것은 양적 선교가 아니라 질적 선교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하는 것이나, '교회 나오세요!'하는 것은 양적인 선교의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사회복음화'는 질적인 선교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의식과 문화와 풍조 자체가 복음에 걸맞게 바뀌도록 하는 것이죠. 가치의 역전현상이 벌어져 있는 세상에서 사회 전체가 새로운 기운으로 거듭나는 것이 사회복음화라는 표현이 가능하고, 바로 그 토대가 사회교리인 것입니다. 사회교리 가르침대로 이 세상이 완성되어 피어날 때 분명 이 사회는 다른 세상이 될 것이고, 그 사회는 분명히 복음에서 말하는 하느님 나라와 굉장히 닮은 가까이 있는 나라로 바뀌어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영성과 사회적 실천


그 다음으로, <신앙의 영성과 사회적 실천>, <신앙의 쇄신, 교회의 쇄신, 시회의 쇄신>... 이런 것들도 다 사회교리를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사회교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강조합니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동하라로 끝나죠. 교회가 항상 강조하는 게 신자들을 교회에 머물게 하는 게 많아서, 교황님이 여러차례 강조를 하셨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누가 맡아서 할 것이냐? 현세, 이 세상을 맡는 것도 너희 몫이 아니냐? 성서에서 말하고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상이 바뀌도록 누가 세상에 나가서 활동할 것인가? 성직자나 수도자가 나가서 할 수는 없지 않느냐? 너희가 바로 가서 그 뜻을 행하라. 파견하는 게 매번 미사 때마다 하는데 우린 과연 파견된 사명을 사는가! 세상에 나가서 뭔가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뭔가 바꾸는데 투신을 해야 하지 않나? 이런 고민과 정확히 닿아있는 것이 사회교리입니다. 또 사회교리는 굉장히 멋있습니다. 


한국 민주화 발전에 끼친 사회교리의 영향


저는 예전에 박사논문을 쓰면서, 고민고민하다가 민주화운동 관련해서 쓰다가 한국의 가톨릭이 민주화 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 쓰다가, 교회와 국가가 갈등을 일으켜가면서 어떻게 한국 사회에 민주적 발전에 가톨릭이 영향을 미쳤는지의 주제로 논문을 썼습니다. 그 당시 제가 본 문헌 중에 김수환 추기경님 말씀이나 정의구현 사제단의 성명서나 시국성명서 등을 보면서,  아! 여기에 정말 멋있는 말이 있구나!하면서 ... 그걸 보면은 <지상의 평화>,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이런 말들이 가슴을 쳤습니다. 예를 들어서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76항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는 정치체제에 얽매이지 않으나 인간의 구원,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의 구원이 위태롭게 될 때에는 교회는 그런 질서에 대해서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게 가능하다. 


굉장히 멋있는 말입니다. 교회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그런 걸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민주주의나 다른 걸 해도 상관없다. 다만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이 무너지면 안된다.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질서, 그리고 인간이 기본권을 누릴 수 있는 질서, 이것이냐 아니냐는 따지겠다. 말하자면 인간의 기본권 중에서 특히 인권이죠. 굉장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정치체제 누가 다스리나 상관없다. 다만 인권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다로 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권과 부딪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유신정권이나 전두환 독재정권과 부딪쳤죠.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렇게 인권이 무너질 때 교회가 가만 있으면 교회가 아니다. 따라서 교회는 외쳐야 한다고 사회교리는 가르치고 있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화, 복음화, 민주화 이런 것들이 합쳐지고 중복되고 교묘히 상호작용하는 게 멋있다고 생각한 적 있어요.


인간과 인권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회교리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인권입니다. 오늘 공부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오늘 주제는 <인간과 인권>인데요. 인간은 왜 존엄한가요? 인간이라면 모두가 똑같이 존엄하고 동등하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성서와 사회교리 시각에서 우리사회의 인간의 존엄성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가톨릭 사회교리 - 주제편> 41쪽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인간 존엄성의 근거는 창세기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357항)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 하나하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녔으므로..."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타고나기를 삶 전체에 걸쳐 하느님을 찾고 갈망하며 하느님과 가장 심오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게 되어 있는 인격체이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이라는 그 자체로, 바로 인간이기때문에 존엄하다.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지성이 결여되었든, 배아나 태아이든, 인간인 이상 하느님을 닮아 존엄하다. (조규만, '신학적 관점에서 본 생명' 참조)


모든 인간 안에 하느님이 담아있다. 인간이 우주보다 존엄하다. 이 우주도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 안에 하느님이 담겨져 있다. 우리가 그런 말을 많이 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이다. 인내천 사상도 있고요. 과거에 미국에서 링컨 대통령 당시에 흑인도 영혼이 있는가? 노예제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흑인은 영혼이 없다. 동물이나 마찬가지다. 노예폐지를 주장하는 자들은 흑인도 영혼이 있다. 그렇게 논쟁 벌였습니다. 히틀러 당시에 유태인은 사람이 아니었죠. 병균과 같은 존재였고, 세상을 더럽히는 박멸되야 할 존재였습니다. 특히 몸이 약해지거나 병들면 더 가차없이 살 이유조차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여러가지 이름으로 사람 값을 매기고, 사람이다 아니다, 사람 대접을 할 필요가 없다는 역사가 계속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인간인가? 저 사람도 인간이고 너만큼 존엄하다! 너가 아무리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도 똑같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딸이다. 그래서 너가 그에게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하느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서운 반성을 하게 합니다. 


인격 ... 단일성과 초월성


그 다음으로 <인격>에 대해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인격을 지닌 인간의 특성을 '단일성'과 초월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단일체이다. 이것이 단일성이고, 초월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뭔가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존재이다. 다른 동물은 갖고 있지 않은 영적인 것을 갈망하는 배고픔과 갈망. 동물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늘과 이어지는 초월성.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을 향해 가도록 저희를 내셨기에, 주님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편치 않나이다."(1장 1절)


굉장히 훌륭하고 깊은 말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택하는 중요 기능은 다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주님 안에서 느끼는 평화, 안도감, 소속감, 이런 것들이 분명히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깊을수록 성직이나 수도자를 택할 확률이 높고, 또한 그런 갈망을 저버리려고 해도, 언젠가 인간 마음을 두드린다. 아무리 몸과 정신이 건강해도 뭔가 혼이 빠져서 뭔가 울부싶거나 외롭거나 이것이 아닌 데 싶은 어떤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초월성을 그리워하는, 하느님 품을 그리워하는 순간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여기서 고백록 처럼, 하느님 안에서 이상의 편한 순간이 있을까? 그 이전에는 완전히 편하지 않다는 걸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이성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인간


인간의 특징의 두번째는 인격을 지닌 인간은 이성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며, 의지로써 선택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성을 지니고 있다. 이성을 가지고 판단한다. 의지를 갖고 움직인다. 그리고 세번째는 인간은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원래 어울려 지내는 존재이다. 그리고 네번째로 인간은 되풀이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인간의 딱 한번 왔다 가는 사람, 일란성 쌍둥이라도 다릅니다. 영혼이 한 번 뿐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부모가 자식에게 너는 내 뜻을 이어서 살아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 따로 자식 따로입니다. 한번 살아가는 존재들의 만남이란 생각을 한다면, 자녀의 인권에 대해서도 조심스러워집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도 독립적이고 서로 존중해야 할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의지


이번에는 인간의 자유, 자유의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해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커다란 선물이 자유같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때 가장 큰 선물을 줄 때 가장 크게 줄 게 자유같습니다. 예를 들어, 남녀가 사랑하다 헤어질 때 어떻게 대하는가가 중요한 거죠. 그런 얘기하죠. 멋있게 헤어질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잘 만난거다. 그런데 저 사람 헤어질 때 어떨까 상상을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 사람 얼마나 화를 낼까? 죽을 때까지 쫓아다니면 무서워. 그럴 수 있습니다. 공지영이 쓴 말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 멋있게 헤어질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잘 만난거다라고 공지영 책에 나옵니다. 저는 헤어질 때 자유를 주는 사람, 헤어질 때 너 마음대로 해, 자유롭게 결정해 하면서 모든 아픔은 가슴에 담는 것. 그렇게 자유를 주는 것은 '떠나고 싶은 자는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이것은 강은교 시인의 시 「사랑법」의 첫구절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제가 예전에 좋아했고, 그대로 해봤습니다. 시의 마지막 구절로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고 하는 말을 하는데, 그러면서 세월은 많이 흘렀습니다. 어찌되었든,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그 사람이 떠나고자 할 때 떠나게 하는 것. 자유롭게 떠나게 해주는 것. 그리고 남는 것은 멋있게 남고자 했는데, 사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너는 나만을 사랑하라고 컴퓨터 칩처럼 만들어도 돼는데,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면, 넌 나를 저버려도 돼, 날 떠나가도 돼. 날 떠나가고 싶으면 떠나가. 마음이 아프지만, 이것까지 주마, 그것이 자유의지라고 봅니다. 그래서 가장 큰 선물이 자유고, 그런 것들이 큰 선물이었다고 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문을 두드리는데, 문고리가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 있는 그림이 기억에 납니다. 그 문을 여는 것도 우리가 선택하게 하는 것처럼, 그만큼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죄로부터의 자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이 영원한 자유다. 그래서 하느님을 벗어나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벗어나면 자유로운가? 


하느님을 벗어나는 게 자유로운 것일까요? 신앙인은 하느님을 알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죄로부터의 자유를 주시는 영원한 자유를 주시는 분이란 게 우리의 믿음인데,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걸 죄책감을 느끼거나 부담스러워하면 하느님을 멀리하거나 냉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을 귀하게 여겨서 주시는 자유는 죽음도 벗어나고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시고, 자유의지를 통해서 하느님을 선택하게끔 하는 이유가 바로 인간이 그렇게 귀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선과 악에 관한 진리 - 양심의 판단과 자연법


자연법은 인권에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정법보다 더 강력한 법입니다. 상당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형폐지를 주장할 때에 그 사형제도라는 실정법을 자연법에 기대어 비판합니다. 생명을 주시고 거두어가시는 것은 야훼 하느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국가권력이 대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강조합니다. 모든 법 중에 인간의 자유와 양심을 억누르는 법은 그것이 아무리 실정법이라고 해도 잘못된 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 법은 지키지 않아도 되고 폐지되어야 한다. 그 근원은 자연법이어야 하기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죄와 죄인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죄라는 것이 갖고 있는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이 있는데, 모든 차원은 개인의 것이지만 동시에 사회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죄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우리는 죄인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누가 누굴 죽였다고 할 때, 가해자와 피해자는 존재하지만, 죄는 미워해도 죄인은 미워하지 마라.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은 죄인도 죄의 희생자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해자 역시도 사탁이나 악의 구조 속에서 희생된 사람이고, 피해자는 희생된 가해자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라고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악의 구조 속에도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하게 합니다. 


오른쪽 죄수는 왜 구원받았나


저는 사순절에 골고타 언덕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좌측과 우측의 십자가들에 매달린 두 명의 죄수가 등장하는 성서 구절을 참 좋아합니다. 여기서 왼쪽 죄인이 껄롱껄렁한 조폭같은 대화를 합니다. 당신이 하느님 아들이라면 애들 좀 풀어서 우리도 살리고 당신도 살려보시오. 그런데 오른쪽 죄수가 너, 말조심해라. 이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그 다음에 하는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주님, 주님이 낙원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요. 그 다음에 더 중요한 말씀이 예수님 말씀입니다. 뭔 말이냐 이놈아! 너의 처지를 알아랏!하고 말하는 게 아니라 딱 한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저는 그 짧은 대화 속에서 더 이상이 없을 만큼의 완벽한 이치가 있다고 봅니다. '주님, 주님이 낙원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요.'라고 그 말을 한 순간, 예수님은 듣자 마자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그 말을 한 순간, 사형수는 죄인으로 '죄+인'이었는데, '죄'를 털어내고 한 인간으로 하느님을 영접하게 된 순간이고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을 예수님이 구원해주십니다. 그래서 사람을 바라볼 때, 죄인도 구원받을 사람이고, 언젠가 그 죄인도 참회를 통해 죄를 털어버릴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죄를 짓는 사람은 뭔가 불운한 사람입니다. 특히 경쟁사회에서 내가 가진 걸 저 사람이 못 가지면 불행해집니다. 내가 잘 살면 구조적으로 한 쪽이 못 사는 구조에서, 구조적으로 불우한 가정과 불우한 교육을 통해서 욱하고 저지른 범죄, 이런 상황에서 우리도 잘못이 없다라고 말할 수 없는, 그가 죄짓게 하는 원천적인 이유가 되는 그런 구조 속에서 가만히 보고 내버려뒀던 탓도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런 맥락에서 죄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잘못한 사람이라도 인권은 있다. 그리고 당장은 밉더라도, ... 이런 말이 있죠. 


용서는 신적인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건 인간이지만, 용서를 하는 것은 신적인 것이다. 우리 안에 초월성이 있따고 하면 잘못된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하느님 같은 속성이 분명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골고타 언덕의 그림에서 좌도를 볼 때, 죄도와 인간이  있다는 것. 아까 사순절에 골고타 언덕의 좌도와 우도를 보며 죄와 인간이 분리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차별에 대해서


다음으로 차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동등합니다. 장애인이나 여러 어두움에 처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리고 인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인권이란 모든 조건과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그 자체로 갖고 있는 보편적인 권리입니다. 양도할 수 없는 것이죠. 세상에 살아있는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UN의 <인권선언>과 요한 바오로 2세


1948년 12월 10일, UN이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이 있습니다. 잠시 후 살펴보도록 하고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 선언이 "인류의 도덕적 진보의 길에 나타난 진정한 이정표"라고 (제34차 국제 연합 총회 연설, 1979.10.2.)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이 UN에 가셔서 세계인권선언에 대해서 공감과 감사와 연대를 표시한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추구해야 할 길을 UN이 잘 제시한 것이고, 그 길이 바로 가톨릭이 가려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함께 간다고 하신 겁니다.


참고. [사회교리 일문일답 25] 사회교리에서 말하는 인권이란 무엇인가요?   

2011.7.4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그 다음으로 <지상의 평화> 회칙(1963)이나 회칙 <백주년>(1991)에서도 인권에 대해서 잘 나와 있습니다. <지상의 평화>에서는 생존과 품위있는 생활 수준에 관한 권리, 종교자유에 관한 권리, 집회와 결사의 권리 같은 기본 인권을 자세히 나열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하느님의 모상을 근원으로 하는 것이기에, 모상성의 인격을 가진 인간의 권리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백주년>에서는 생명이 잉태된 이후부터 인권은 함께 등장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인간으로서 자신의 초월적 존엄성에 따라 살 권리로 이해되는 종교자유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인권의 이해>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가장 먼저 '인권에 대한 오해와 깨달음'에 대해서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제(김녕)가 쓴 책 『인권생각』에 나오는 것이니 참고하시면 됩니다.


[정보] 김녕의 인권생각 (선, 2013)

요한의권장도서 2015/03/20 01:00



'인권'이란 싸우자는 뜻인가?


이런 겁니다. 아마 여러분도 이런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인권이란 싸우자는 거다. 인권이란 뭔가 무서운 것 같아. 그리고 '인권'이라고 하면 왜 인권이 뭐? 인권이 어쨌다는거야? ... 그런 오해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예전에 김수환 추기경님의 명답 중 하나가 생전에 기자들이 물어보면, "추기경님은 자꾸 인권, 인권 하시는데 혹시 좌파세요?"라고 물으니, 멋있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고, 인간의 존엄성이 실현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인간존엄에 대한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계인권선언에서 보이듯이, '인권'에는 좌파적인 것도 있고, 우파적인 것도 있습니다. 사회보장제도는 매우 좌파적인 요소이고, 재산권 인정, 재산축적의 자유 등은 우파적입니다. 그래서 좌파와 우파를 나눌 것 없이 최소한의 요건인 인간의 존엄성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기준이 인권입니다. 그리고 내가 인권 침해의 가해자일 수 있나 피해자일 수 있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다양한 인권들을 동시 침해당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런 사람들이 바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춘향이가 겪은 인권침해 사례


그리고 춘향이는 어떤 인권을 침해당한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한 것, 변호사 선임권도 없이 감옥에 잡혀간 것. 왜 잡혀갔는지도 모릅니다. 함부로 체포나 감금 당하지 않는다. 영장도 있어야 하고 재판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받지 못했고, 매질당하는 것은 고문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차별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수청(守廳)을 들어라'라고 할 때, '내가 왜 수청을 들어야 하나요?'라고 말하는 것이 인권의 권리인데, 당시의 신분제도가 그런 것들을 정당화하는 분명 잘못된 사례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인권 침해라는 것입니다.


'나무꾼과 선녀'의 범죄정당화 논리


<나무꾼과 선녀>를 봐도 그렇습니다. 굉장히 아주 나쁜 소설입니다. 온갖 범죄를 다 정당화하고 있죠. 보면은 선녀들 목욕하는 걸 누가 쳐다보라고 했나요. 그것도 걸립니다. 또 절도죄가 성립합니다. 선녀의 옷을 훔친 것이죠. 또 사랑하지도 않는 선녀를 하늘에 못 올라가게 해서 애를 셋이나 낳게 하는 것도 사랑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온전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토끼와 거북이를 보면 '장기적출죄'가 성립할 수 있습니다. 토끼가 자신의 간을 빼앗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동화를 비뚤어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인권차별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거나, 저 장면은 분명히 인권침해야. 그런 기준이 딱 서게 되는 것이 바로 '인권'이 가져다주는 가르침입니다. 세상에서 정의를 판단할 때 가장 명백한 기준은 인권입니다. 인권을 침해하는 것은 존엄한 기준을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방향은 바로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방향입니다.


인권 교육이 부재한 현실


그리고 우리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왜 인권교육을 제대로 못받았을까? 여러분 세계인권선언 내용 보신 적 있으십니까? 참 심각합니다. 1948년 12월 10일 반포되면서 전 세계 모든 나라와 섬나라에서 세계인권선언을 가르칩니다. 우간다와 파푸야뉴기니에서도 초등학생에게 세계인권선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한번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왜 인권을 안 가르쳤을까? 우리나라 역사가 반 인권적인 역사가 오래되었습니다. 군부독재, 쿠데타, 광주민주화운동 등 수많은 전투경찰, 안기부, 국가정보원하면서 국가권력이 인권을 눌렀던 역사에서 국민에게 인권을 안 가르친 측면이 있습니다.


나대지 마라


그러면서 우리나라 도덕교육은 순종하는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문제제기하는 교육을 가르치지 않았따는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때 학생들이 안타깝게도 많이 죽었는데 가만히 있어라라는 방송에 가만히 있는 게 옳은 것인가? 가만히 있는 게 옳은 것이다? 한계상황에서도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있으라는 게 생사를 갈랐다는 것이 비통한 일입니다. "어떻게 가만히 있어?"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애들이 살았고, 그냥 가만히 있는 학생들은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가만히 있어라 대표적인 말이 나대지마라. 정말 안좋은 말입니다. 참여민주주의가 '나대라.'입니다. 참여하고 봉사하는 나대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는데, 우리나라 교육은 '나대지 맛!' 입니다. '가만히 있어!'가 교육이었고, 그러다보니까, 인권하면 나대는 것으로 간주하고, 문제제기하지 못하도록 인권을 가르치지 않고, 주로 의무와 국가를 강조하고 개인과 권리를 말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우선인가? 인권이 우선인가?


그러면서 사회교리는 인권을 공부하라, 인간존엄이 모든 삶의 목적이다. 경제발전과 국가발전의 목표는 인간존엄이다. 인간의 행복이다. 인간은 경제발전이나 국가안보다 우선이다. 인간이 목적이고 모든 게 수단이고, 우리는 거꾸로 인권이 희생될 수 있는 것처럼 교육을 해왔고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거꾸로 말합니다. 인간이 정부를 만들고, 인간이 국가를 다스린다. 그리고 국가도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리고 인간은 정치인을 뽑아서 국가를 구성할 권리가 있고,잘못된 정치인을 끄집어낼 권리가 있다. 인간이 주인이고 인간의 주권!, 즉 우린 국민주권을 말하면서 국가주의와 혼동하는 교육을 받아왔다. 국가란 이름에 주눅들 필요는 없습니다. 민주주의에서 국가는 국민을 위해서 봉사하는 조직에 불과한데, 우리에게 국가는 신처럼 초월적 존재처럼 우리를 엄습하고, 우리를 주눅들게 만드는 것도 뭔가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말하자면 국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가 충성을 바칠 국가도 있지만, 흔히 말하는 국가는 행정당국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된 통치에 대해 이의제기하는 게 당연한데, 그것이 국가 결정에 따라야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인데, 인권보다 국민의무를 강조한 것은 아닌가? 그래서 인권 교육이 설 자리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헌신하는 자원봉사적 인권존중 ... 그것이 다인가?


그리고 우리가 인권을 생각해보면, 얼핏 느끼는 것은 인권하면 싸우라는 것 같다는 질문을 하신 분이 있는데, 어느 고아원에 가면서 맛있는 식사와 따뜻한 옷과 행복한 선물을 싸가지고 갈거야. 난 이 마음 변치 않을거야. 너흰 나만 기다리면 돼! 그러면서 계속적으로 간다고 할 때, 참 아름다운 자선이고 나눔이고 봉사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내가 가면 저 아이가 행복하다! 저 사람이 오면 우리가 행복하다! 그런데 왜 안 와! 그것이 다 인가? 가톨릭 교회에서 사랑의 실천 중에 크게 자선과 정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계속적으로 가서 나눠주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돔 헬더 까마라 브라질 대주교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자선을 비풀어라 하면 성인이시군요 라고 하다가, 아무리 자선을 베풀어도 가난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라고 물어보니까, 웅성웅성하면서 사회주의 빨갱이아니냐라는 말이 상징적입니다.


자선으로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


자선으로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이에게 뭘 자꾸 갖다준다고 가난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 구조를 없애야 하고 그게 정의의 실현입니다. 교황님 말씀처럼 정치가 가장 큰 자선이다.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정치가 바뀌면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간다. 올바른 대통령과 올바른 국회가 주는 혜택을 말 할 수 없이 큽니다. 그런데 어떻게 정치에 무관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정의의 실현 중 가장 큰 혜택인데, 자선도 좋지만 그것은 결국 얻어먹는 사람을 만들지 않을까? 얻어먹는 버릇을 만들지 않을까? 


그것보다는 아이들에게 가서 아동의 권리가 있다. 배울 권리가 있다. 올바르게 커갈 권리가 있다. 그것이 바로 너희가 갖고 있는 인권이다. 너희는 인권의 주체다. 너희는 앞으로 인권을 주장하며 살아가라. 너희를 도와줄 많은 인권단체들이 함께 하겠다. 너희는 결코 배고프지 않을 권리가 있고 배우고 싶다고 주장해라. 그러면 너희 권리를 찾아가게 될 거야. 그러면 우리가 함께 할 게. 바로 그것이 더 커다란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물고기를 잡아다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는 것처럼, <어린왕자>를 쓴 생떽쥐베리가 한 말 중에서 인용을 제가 잘하는 것은 "배만드는 법을 가르치지 말고, 바다를 사랑하게 하라." 이 말은 배 만드는 것을 가르치는 교육보다 더 큰 교육은 바다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배를 만드는 법을 깨닫고, 물고기 잡는 법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다를 보고 싶어서 배를 만든다는 겁니다. 


세상에 대한 긍정적 확신을 심어주는 길


인권이란 것도 모든 사람들에게 세상에 대한 희망, 세상은 인간 존엄의 가능성이 있고, 그런 투쟁들이 있고, 점점 더 실행되어 왔다. 그것이 세상이다.  항상 인권은 답답하지만 실현되는 쪽으로 갔지 거꾸로 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노예 해방, 여성 해방, 식민지 해방 등, 점차로 해방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우리나라도 1960년대 노동 운동을 하면 빨갱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점차로 노동권이 인정되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점차로 포함되지 않았던 사람들이 인권에 포함되는 쪽으로 가고 있다. 그것이 잠시 후퇴되더라도 다시 진전한다. 인권은 이 세상 사람들의 양심이자, 도도한 흐름이며 시대의 징표이다. 이런 것들이 주는 희망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살만한 세상에서 자신있게 살아볼거야.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확신을 심어주는 것도 인권이란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특히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인권을 강조하는 것도 굉장한 힘이 되는데, 구체적이고 명확한 것이 바로 인권이고 인권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명령이다. 그래서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신앙의 실천이라는 말씀들이 굉장한 힘을 주지 않나 생각합니다. 


세계인권선언이 어떻게 만들어졌나 잠깐 보시고 1교시 마칩니다. 

국가인권위원회 제작 동영상 <세계인권선언> 약 8분



2015년 3월 16일(월), 가톨릭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진행하는 제109차 사회교리학교의 일곱번째(7주차) 강의가 열렸다. 서울 중구 명동2가 1번지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에서 열린 7주차 강의는 서강대 김녕 교수님이 강사로 나섰다. 강의 주제는 <인간과 인권>이고, 위 기록은 이 날 강의 중 1교시(약 60분) 내용이다. 


위 내용은 강의 정리자의 기억과 기록을 바탕으로 재편집된 것이므로 실제 강의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