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인권 강의 (2)


김녕 서강대 교수 | 2015.3.16(월) 


세계인권선언 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세계인권선언을 줄이고 줄여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1조  우리는 모두 형제 자매다.
제2조  차별은 안 돼!
제3조  안심하고 살아간다.
제4조  노예는 없다!  

제5조  고문이나 모욕은 싫다.

제6조  법의 보호를 받는다. 

제7조  법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제8조  억울할 때는 법의 도움을 청하라.

제9조  제멋대로 잡아가둘 수 없다.

제10조 재판은 공정하게

제11조 잡혀도 반드시 유죄라고 볼 수 없다.  

제12조 나만의 세상을 가질 수 있다.

제13조 떠나고 돌아올 수 있다.

제14조 도망치는 것도 권리다.

제15조 어느 나라 사람이든 될 수 있다.

제16조 사랑하는 사람끼리

제17조 재산을 갖는다.

제18조 생각하는 것은 자유다.

제19조 표현하는 것도 자유다.

제20조 모일 수 있다.

제21조 선거할 수 있다.

제22조 사회보장제도를 누릴 수 있다. 

제23조 마음 놓고 일하기 위하여

제24조 쉬는 것도 중요하다.

제25조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

제26조 배울 수 있다.

제27조 즐거운 생활

제28조 이 선언이 바라는 세상

제29조 우리의 의무

제30조 권리를 짓밟는 권리는 없다. 


1조와 2조. 모두 형제 자매이며, 차별하지 않는다

제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제2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으며, 이 선언에 나와 있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제1조는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얘기하는 것이 1조이고 또한 2조에서도 나옵니다. 1조에서는 모두가 존엄하다고 말합니다. 저 사람이나 나나 다 존엄하다. 내가 조금 더 존엄한 건 아니다. 특히 2조는 차별은 안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피부색이나 성별, 언어, 국적 등으로 차별하지 말라는 것이 제2조입니다. 


제3조 모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다.
제4조 어느 누구도 노예가 되거나 타인에게 예속된 상태에 놓여서는 안 된다. 노예제도와 노예매매는 어떤 형태로든 일절 금지한다. 

3조와 4조. 안심하고 살아가고, 노예는 안 돼!
세번째 제3조는 '안심하고 살아간다'입니다. 우리는 생명에 대한 위험 받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안전한가를 생각한다면, 그다지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4조는 노예가 없다는 것에 대한 사항입니다. 노예가 요즘 세상에 어딨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노예 처지가 많습니다. 내가 정말 먹고 사는 게 아니면 이런 처지 감당 못해. 내가 처자식 때문에 이러고 있지 이건 인간다운 대우가 아냐 이런 얘기할 수록, 4조가 침해되는 것입니다. 노예 처지에 처하거나 노예같은 대우를 받아서는 안되지만, 그렇게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을 돈으로 사고 매수하고, 몸을 주고 파는, 게다가 노예처럼 요즘도 팔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5조  어느 누구도 고문이나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모욕, 형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 
제6조  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
제7조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며, 차별 없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5조  고문이나 모욕은 싫다.

제 5조는 고문이나 모욕은 싫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문이나 가혹하거나 비인도적이거나 모욕적인 처우와 형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문에 익숙해 있습니다. 아이가 어머니와 TV 사극을 보고 있으면 역사극에서 주리를 트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 아이가, "엄마, 저거 주리 트는 거네?" 하면, 엄마는 "그래. 아프단다. 몹시 아파. 곤장도 몹시 아프단다. 다음 장면 봐!"라고 하지만, 고문 장면이 너무 많이 나옵니다. 부모가 밖에 나갔다 들어왔는데, 뭐가 아끼던 것이 깨져있으면, 집에 있던 아이를 붙잡고 이렇게 말하죠. "너가 그랬지?" 그러면 아이는 "아니요!" 그 다음에는 팔을 붙잡고 팔을 비틀고 꼬집으면서 "이래도 그래? 진짜로 너가 안 그랬어?" 그러면 아이가, "안 했다니까욧!" 그러면 부모는 "너 정말 큰 일 날 아이로구나!" 하면서 온갖 괴롭힘을 아이에게 주는 자기자신을 바라보며 우리는 세계인권 선언 제5조 앞에서 부끄러워 합니다. (장내 웃음) 고문하는 것이 우리 몸에 밴 것은 아닐까요? 너무나 익숙합니다.


6조와 7조  법의 보호를 받고, 법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제 6조는 법의 보호를 받는 것에 대한 문제입니다. 과연 모든 사람이 똑같이 법의 보호를 동등하게 받고 있을까요? 돈 있는 사람과 돈 없는 사람이 다른 것은 아닐까? 제6조와 제7조는 법이 과연 평등한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8조  억울할 때는 법의 도움을 청하라.


8조  모든 사람은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침해당했을 때, 해당 국가 법원에 의해 효과적으로 구제받을 권리가 있다. 

제9조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 체포, 구금, 추방을 당하지 않는다.

제10조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범죄인지 아닌지를 판별받을 때, 독립적이고 공평한 법정에서 공평하고 공개적인 심문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제11조 범죄의 소추를 받은 사람은 자신을 변호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보장받아야 하고, 누구든지 공개재판을 통해 유죄가 입증될 때까지 무죄로 추정될 권리가 있다. 


제 8조는 억울할 때는 법의 도움 받으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뭔가 억울할 때에는 인권이 침해되었다는 말입니다. 잘못한 게 없는데, 나한테 잘못했다고 그래 그래서 '나 억울해' 그러면 법의 도움을 받고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9조  제멋대로 잡아가둘 수 없다.

그 다음에 제9조. 함부로 잡아가둘 수 없다. 그냥 길거리를 걸어가는데, 잠깐 갑시다 하고 잡아가두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걸 막기 위해 영장을 발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잡아가두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인권입니다. 


10조  재판은 공정하게

제10조는 재판은 공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재판이 공정하지 않은 경우가 있죠. 가난한 사람은 불리하고, 돈 있는 사람은 무죄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정말 가난한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는 법정이 가능할까? 그러면서 법조인의 사명감이 중요해지는 것이 제10조입니다.


11조  잡혀도 반드시 유죄라고 볼 수 없다... 너가 깼지? 이래도?

제11조 잡혀도 반드시 유죄는 아니다. 그러니까 아까 그 어린 아이가 유리병 옆에서 놀고 있었다고 해서, 그 아이가 병을 깼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증거가 있기 전에는 단정할 수 없는 게 인권입니다. "너가 깼지?"라고 유죄로 단정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유죄 입증 전에는 무죄 추정의 원칙입니다. 인간은 원래 죄를 짓지 않는다를 전제로 하자는 것입니다. 원래는 무죄다. 그런데 어쩌다 죄를 짓는 것이지, 항상 죄를 짓는 게 인간은 아니다. 그러니 첫째는 무죄로 추정하고, 정말로 유죄 입증 증거 나오면 유죄라고 해야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단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만들어서 법률로 처벌받지 않는다는 2년형 살다가 갑자기 법이 바뀌어서 5년형으로 소급해서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인간을 보호하려는 원칙입니다. 형벌 불소급의 원칙이죠. 소급적용하지 않는 것도 인권 보호입니다. 


제12조 개인의 프라이버시, 가족, 주택, 통신에 대해 타인이 함부로 간섭해서는 안 되며, 어느 누구의 명예와 평판에 대해서도 타인이 침해해서는 안 된다.

제13조 모든 사람은 자기 나라 영토 안에서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서든 살 수 있다. 또한 그 나라를 떠날 권리가 있고, 다시 돌아올 권리도 있다.


12조  나만의 세상을 가질 수 있다. ... 노크 좀 해 엄마!

12조. 나만의 세상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은 바로 사생활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정말 많은 경험을 합니다. 집에서도 노크 안하고 문 열면 "엄마 노크 좀 해" 이것이 바로 사생활을 침해한 엄마와 딸의 대화인 겁니다. "엄마는 노크도 못해!"라고 말하는 게 사생활을 침해당한 딸이 자신의 인권을 보호하고, 항거를 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함부로 문자가 휴대전화 메시지를 보는 것, 그래서 엄마가 "너 요즘 누구 사귀는지 내가 봐야 하겠다!"라고 하는 것과, "내가 너의 위치를 추적하면서 얼마나 행복한 줄 몰라!"라고 하는 것, 또 "너 요새 글씨가 작아졌더라!"라고 하면서 남의 것을 간섭하거나 도청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비밀을 가질 권리도 인권입니다. "나 말하고 싶지 않아! 비밀이야!"그러면 "그래 비밀이구나! 알았어!" 그래야지, "내가 반드시 너의 비밀을 밝혀주마!" 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사생활을 보호받을 권리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요즘 사생활의 침해가 엄청나게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곳곳에 CCTV가 있어서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찍히고 있다는 것은, 안전하다는 것과 더불어 우리가 잠재적 범죄자로 여겨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비밀이 없이 우리 모습이 블랙박스까지 포함해서 하루에 몇 번이나 찍힐까를 생각한다면, 과연 인권이 보장되는 걸까? 생각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13조  떠나고 돌아올 수 있다.

13조는 떠나고 돌아올 수 있다. 즉 거주이전의 자유입니다.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못한다. 잘 생각하고 떠나라. 고향 갈 때도, 집안 정리가고 다 청산하고 가야될 필요가 없는 것. 그것이 거주 이전의 자유입니다. 


제14조 모든 사람은 박해를 피해, 타국에 피난처를 구하고 그곳에 망명할 권리가 있다.

제15조 누구나 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다. 누구든지 정당한 근거 없이 국적을 빼앗기지 않으며, 자기 국적을 바꾸거나 다른 국적을 취득할 권리가 있다.

제16조 성년이 된 남녀는 인종, 국적, 종교의 제한을 받지 않고 결혼할 수 있으며, 가정을 이룰 권리가 있다. 결혼에 관한 모든 문제에 있어서 남녀는 똑같은 권리를 갖는다.


14조 도망치는 것도 권리다. 

14조. 도망치는 것도 권리다. 괴롭힘을 당하면 다른 나라 가서 살려줘 하면 도와줘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쁜 짓을 하고 도망친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끄러워할 문제는 바로 탈북자 문제입니다. 탈출해서 북한에서 도망치는 동포들을 우리는 외면하고 있지 않나? 참 부끄럽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탈북자가 외면당하는 것입니다.


15조 어느 나라 사람이든 될 수 있다... 인류 전체가 한 가족

그리고 15조. 어느나라 사람이든 될 수 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런 말이 있죠. 딸이 외국에서 돌아오면서 엄마 모처럼 추석에는 같이 지낼려고 가는거야? 결혼할 사람 데리고 갈게? 그래서 추석명철에 가족 친지가 모인 자리에 딸이 "띵동"하고 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딸이 애인을 소개시키면서, "엄마! 인사할게요. 여기 리차드야." 하니까, 키가 아주 큰 서양 사람이 "짬모님! 안뇽하슴니깜?" 그러면 어머니가, "와, 우리 사위감 국제화되어서 좋다. 국제화 사회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지! 환영하네!" 이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국적이란 부모와 자식이 똑같을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각자이고 유한하고 유일하니다. 그래서 누구나 국적을 바꿀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 전체적인 차원에서 바라볼 때, 이 쪽에서 저쪽 가는 것이 금 하나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누구 밑에서 태어나서 그 국적을 갖고 있어도, 금 하나 차이로 국경이 존재하는 것인데, 이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는 주입을 당한 것이지만, 크게 생각하면, 인류전체가 한 가족인데, 국경이 문제인가? 바꿀 수 있다. 서른살까지 한국에 살다가 그 다음에는 벨기에인으로 살고 싶어. 그러면 "그래라"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국적을 바꿀 권리는 자녀의 권리고 얽매일 이유가 없다. 자녀는 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인류의 가족으로 살아갈 때, 국경을 넘어서서 살 수 있다. 그래서 당연히 그렇지. 그런 것이고요.


16조  사랑하는 사람끼리

16조.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것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돼!'와 관련된 얘기이죠. 인종, 왜 하필이면 백인이야? 하필이면 개신교야? 불교야? 이럴 때 그것이 결혼을 막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성인 남녀가 합의를 할 경우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은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강제결혼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혼할 때에도 여자와 남자는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17조 모든 사람은 혼자서 또는 타인과 공동으로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재산을 정당한 이유 없이 남에게 함부로 빼앗기지 않는다.

제18조 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제19조 모든 사람은 의사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제20조 모든 사람은 평화적인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제21조 모든 사람은 직접 또는 자유롭게 선출된 대표자를 통해, 자국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자기 나라의 공직을 맡을 권리가 있다.

제22조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가 있다.


17조  재산을 갖는다... 8개국은 왜 기권했나?

17조. 재산을 갖는다는 것.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 같은 나라는 이 조항 때문에라도 반대는 못하고 기권을 했습니다. 그래서 58개국 중에서 2개 나라가 불참했고, 나머지 56개국 중 8개국이 기권을 하고 나머지 48개국이 찬성를 해서 통과가 되었습니다.  58개국-2-8=48개국인데, 기권한 나라는 사회주의 국가들인데, 사유재산 제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때문에 세계인권선언을 반대할 수도 없다. 그래서 '기권'을 행사해서 직접적 반대없이 통과가 되었습니다. 재산을 갖는다는 것도 중요하죠. 흔히 세계인권선언을 작게 보았을 때, 설날에 어린 자녀가 벌어온 세뱃돈을 엄마가 가질 권리가 있는가? 너 결혼할 때 줄게. 애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죠. 아기가 인간의 말을 배우기 엄마 아빠 다음이 내거라고 해요. 인간 본성 중에 자기 것을 갖고 싶고, 자기 것을 뺏기고 싶어하지 않는게 중요합니다. 재산을 갖는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재산을 못갖게 해서 무너지는 경험을 한 것이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사회주의 정권들이 붕괴한 큰 이유 중 하나가 재산 못갖게 한 것이었습니다. 


18조  생각하는 것도 자유다... 대체복무의 시급성

18. 생각하는 것은 자유다.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를 갖는다. 이것은 부모와 자식이 다른 종교를, 남녀가 다른 종교를 가질 수 있따. 한 쪽 종교를 갖도록, 흡수통합되도록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리고 반성문을 쓰라고 하면, 저는 반성문을 쓸 수가 없습니다. 왜 안 쓴다는 것이니? 반성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양심적으로 떳떳합니다. 그래? 할 수 없다! 이렇게 나와야 하는데, 보통 "너 반성문 안 써봐라! 내가 가만 있나 어디 보자!"라고 하죠. 무슨 근거로 반성해야 하는 가? 양심의 자유가 중요합니다. 진정 양심의 자유에 어긋난 것인지를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국방의 의무를 얘기하면서 '양심적 병역거부'의 논쟁이 있죠. 여호아의 증인 청년들이 감옥에 많이 갑니다. 총을 들지 못하는 교리 때문에, 군대에 가면 훈련을 받아야 하니, 병역기피로 몇년씩 감옥에서 삽니다. 그래서 병역 대체복무제 얘기가 나오다가, 그런 때에 TV에 예비역 장성 같은 분들이 등장을 하지요. "남자로 태어나서 군대를 안 가요? 말도 안됩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의 양심과 종교에 따라 행동하려고 할 때 인정해줘야 하지 않나? 그래서 탄광에 가서 4년 근무하거나 소록도에 가서 나환자촌에서 3년 근무해라 하면, 총만 들지 않으면 가겠다고 하면 보내라고 할 수 있어야 하겠죠. 이미 그런 나라들, 독일이나 대만 등지에서는 병역대체 복무제가 시행중입니다. 우리나라는 유독 안된다는 것. 그래야 되나? 공익근무도 많이 하는데, 그렇게 힘든 것으로 병역을 대체하게 하고, 감옥가지 않게 하면서 그들의 양심의 자유를 지킬 수 있게 하는 게 과연 힘든가?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상의 자유. 이것은 대한민국에서는 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헌법에서도 대한민국 국민은 사상의 자유가 있다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북한과 남한의 관계와 사상의 문제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인 겁니다. 


19조  표현하는 것도 자유다... 대체복무의 시급성

19조는 표현하는 것도 자유라는 것이죠. 이것과 관련해서 두 가지 자유가 있어요. 음악, 미술이 외설이냐 예술이냐, 과거 장발 단속, 금지 가요 등이 해당이 되죠. 머리를 물들이는 것도 자유라고 할 때, 가만 생각해보면 '그래 네 자유다'라고 인정하는 정도까지 가야하는 건 아닌가? 네 멋대로 표현해라. 그렇게 표현하면 표현하는 것이지, 그러나 심각한 위험과 위기를 자초하거나 국가안보 흔드는 정도는 안되겠지만, 그가 가진 개성 표현은 인정해줘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


20조  모일 수 있다... 어서 가서 행복해라

20조는 모일 수 있다는 것인데요. 19조가 개인적 차원이라면 20조는 집단적 차원입니다. 모일 수 있다. 혼자서 의사 표현이 약할 때, 집회와 결사로 표현할 수 있다. 말하자면 표현의 자유의 집단적 표현 혹은 집합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죠. 집회할 자유가 있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집회하면 거부감이 있다. 그러나 반대의견이 있으면 모여서 의견 제시하고 얘기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겁니다. 단체를 만들 권리가 있다. 대학에서 보면 우리 동아리 들어라고 하면서 동아리 소개를 하죠. 거기서 동아리 들게 하는 건 좋지만, 몇 달 지나다가 신입생이 생각이 바뀌어서 "선배님, 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다른 동아리 가겠습니다."라고 할 때, 그 때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선배가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옥상으로 올라와!, 너 혼나야 되겠구나!"라고 하는데, 여기서 인권적 측면이란 이런 것입니다.


"아하! 그래, 너가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구나. 다른 동아리가 너의 마음을 끌었다니, 약간 섭섭하면서도 기쁘다. 그래 너와 함께 한 시절이 그립지만 어쩔 수 없구나. 어디를 가든지 행복해라."라고 해야 정상이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탈퇴할 때 얼마나 자유로운가? 이것이 결사의 자유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가입되기는 쉽지만 탈퇴가 어렵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1조  선거할 수 있다... 안 뽑아도 되나?

제21조는 선거할 수 있다는 거죠. 참정권입니다. 1987년 6월 항쟁은 3.1운동 때보다 더 큰 규모로 반독재 투쟁을 벌였던 것이 6월 항쟁입니다.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렸것이고, 그 때 모토가 '대통령 직선제'쟁취하자는 것이었고, 그래서 회복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정치에서 아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난 이번에 대통령 후보 다 마음에 안들어서 안 뽑았어!'라고 하면 아무 상관이 없어지나요? 아닙니다.  그걸 피해서 골방에 들어가 있다고 해도, 정치는 여전히 흘러가고 영향을 안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에게 골고루 행복하게 하는 정치인이 나타나는 것, 그런 정치인을 뽑는 게 공동선입니다. 사회교리에서 말하는 정치공동체는 공동선 실현에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에게 똑같이 혜택이 돌아가는 질서, 그런 조건이 공동선이고, 그런 것에 근접한 이를 뽑는 게 신앙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22조  사회보장제도를 누릴 수 있다... 자선의 대상이 되지 않을 권리

22조는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난해서 , '나 배고프다. 등이 배에 붙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넌 참 말을 멋있게 표현하는구나!"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사회보장제도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나 배고프다!, 정부, 나 좀 먹여살려. 정부라고 하면 그러면 안되잖아. 국민이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줘야지!'하는 게 22조이고, 적극적 권리를 말합니다. 사회보장은 은혜를 구걸하는 게 아니라 국가에게 당당히 요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초생활수급권도 권리로서 국가에게 요구하는 당당한 권리입니다. 사회보장 제도는 권리입니다. 내가 굶어죽는다, 정부 뭐하나? 당장 따져야지. 우리 애가 아픈데 의료비가 비싸서 진료를 못해. 그게 무슨 정부야! 가서 따져야지. 이런 식의 사회보장제도를 받을 권리,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굶어죽거나 비참하게 죽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제22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죠. .누구나 자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자선의 대상이 안 될 권리가 있는 것, 당당히 먹고 살 권리를 말합니다. 


제23조  모든 사람은 일할 권리,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권리, 공정하고 유리한 조건으로 일할 권리, 실업상태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차별 없이 동일한 노동에 대해 동일한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다.

제24조 모든 사람은 노동시간의 합리적인 제한과 정기적 유급휴가를 포함하여, 휴식할 권리와 여가를 즐길 권리가 있다. 

제25조 모든 사람은 먹을거리, 입을 옷, 주택, 의료, 사회서비스 등을 포함해 가족의 건강과 행복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다. 


23조  마음 놓고 일하기 위하여

제 23조는 마음 놓고 일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독재정권 시대에 가장 무섭고 커다란 것이 국가보안법이자 정치적 자유였다면, 1997년 12월 IMF 경제위기부터 현재까지 가장 커다란 인권침해는 실업입니다. 23조입니다. 사람은 자유롭게 일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일할 자리가 없는 데 어떻게 하나. 그래서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인권침해는 국가보안법보다 실업의 문제입니다. 모두에게 다 걸려 있습니다. 직업을 자유롭게 골라서 일할 권리가 있고, 노동조건은 일하는 사람에게 공정하고 유리한 것이어야 하며, 일터를 잃지 않도록 보호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차별없이 동일 노동에 대해서는 동일 임금을 받을 권리를 갖는 것입니다. 일에 대한 대가는 일한 사람과 그 가족이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고 참여할 권리를 갖게 합니다. 


그런데 일자리가 없어서 직업을 자유롭게 고르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일자리가 없는데, 노동조건은 아무렴 어때, 공정하지 못하고 유리하지 못하면 어때, 어차피 일터를 잃으면 보호받지 못하는데!, 차별있으면 어때, 비정규직 정규직 따질 계제가 아니잖아.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일에 대한 대가는 못해도 어때, 우선 먹고 살아야지. 인간다운 생활을 못해도 일단 일하는 게 어디야. 그래서 제 23조가 국민 전체의 문제이고 그것이 바로 인권침해이고 인권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4조  쉬는 것도 중요하다

24조는 쉬는 것도 중요하다. 놀 권리, 쉬는 권리. 아이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제대로 쉴 권리가 있다. 정기적인 무급휴가가 아니라, 유급휴가를 받을 권리가 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죠. 공부만 하는 게 아니고 놀 권리가 있습니다. 


25조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

25조.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 권리. 실업, 질병, 장해, 사별, 노령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보장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이 깨지고 있습니다. 노숙자부터 독거노인 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자살 등은 절망의 표현입니다. 어머니와 아이들은 특별한 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다. 특히 더 약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말하고 있습니다. 


26조 모든 사람은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초등교육과 기초교육은 무상이어야 하며, 특히 초등교육은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부모는 자기 자녀가 어떤 교육을 받을지 ‘우선적으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

제27조 모든 사람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예술을 즐기며, 학문적 진보와 혜택을 공유할 권리가 있다.



26조  배울 수 있다

26조도 만만치 않습니다. 배울 수 있다. 너는 교육받지 말고 살어. 그 하고 싶지 않은 공부 안 해도 되겠네? 그러면 이러겠죠. 엄마 나도 배우고 싶어. 요새 평생학습의 시대라고 해서 교육 욕구는 커지고 있습니다. 배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클까?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인데, 우리나라처럼 입시 위주의, 학벌 위주의 사회 속에서, 그것이 깨집니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키고 인권이 소중하다는 걸 배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육은 인권과도 별로 관련이 없는 교육이 되었다. 그리고 교육을 통해서 다른 모든 사람과 종교간 화해를 터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배울 수 있어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교육 내용인가도 중요한 것입니다. 교육이 어떤 인재를 양성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죠. 


27조  즐거운 생활

27조는 즐거운 생활을 할 권리입니다. "야! 문화생활이라면 배부른 거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자고 하지만, 그것만 할 때 사람은 허전해지고, 이것이 전부가 아닌데, 사람은 분명히 문화적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배부른 소리가 아니고, 어떤 이에게는 먹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예술 위해 목숨 바치는 사람도 있고, 예술가들은 그것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예술을 감상할 권리, 과학의 진보를 누릴 권리, 그 다음에 과학이나 예술작품을 만든 사람의 권리, 저작권 보호권리 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동네에는 왜 도서관이 없어요? 도서관이 있는데 왜 읽을 책이 별로 없어요? 또는 우리 학교에는 공부하는 거 말고, 시나 소설책이 왜 없나요? 우리도 문화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는데요 라고 말할 권리가 있다는 거죠. 


제28조 모든 사람은 이 선언의 권리와 자유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체제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다.

제29조 모든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 한 인간으로서 의무를 진다. 

제30조 이 선언에서 말한 어떤 권리와 자유도 다른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짓밟기 위해 사용될 수 없다. 어느 누구에게도 남의 권리를 파괴할 목적으로 자기 권리를 사용할 권리는 없다.



28조  이 선언이 바라는 생활

28조는 이 선언이 바라는 세상이라고 해서, 이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질서에 대해 말합니다.


29조  우리의 의무

29조는 의무입니다. 제29조가 없으면 세계인권선언은 권리를 나열한 것에 불과한데, 이것은 모든 권리의 근거와 토대로서의 의무를 이야기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유와 권리를 누리도록,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며 공동체를 생각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서 필요한 경우 나의 자유와 권리를 때로는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30조  권리를 짓밟는 권리는 없다.

30조는 권리를 짓밟는 권리는 없다. 대표적인 게 자녀의 교육은 부모가 우선권을 갖는다는 잘못된 메시지가 되면, 자녀 교육에 대한 우선권이란 게 대치동 학원 선택해서 보낼 수 있다는 게 됩니다. 그렇게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공교육이 힘든 아이들에게 홈스쿨링이나 대안교육을 원한다고 할 때, 국가는 부모가 더 잘 아시겠죠. 그래서 그렇게 하세요 라고 우선권을 준다는 것이지, 자녀의 교육을 부모가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또 종교의 자유를 빙자해서 가정을 파탄시킬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계인권선언에서 말하는 인권을 빌미로 다른 사람을 짓밟으면 안된다는 것이 제30조입니다. 


요새는 국제 테러문제, 마약문제, 대량 살상문제, 다국적 기업에 의한 인권침해, 그리고 환경문제도 많고, 세계인권선언은 1948년 만들어져서 부족한 게 많지만, 중요한 것은 인권에 대해서 전세계 국가들이 합의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이다. 제2차세계대전과 히틀러 같은 사건이 벌어지지 않도록, 이제는 우리가 약속을 해야 하겠다. 국제간 약속, 국제간 규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서 적어도 이런 인권 필요하다는 합의 그런 걸 선언했다는 의미로 큰 것입니다. 이 후에 유엔과 세계 모든 나라들은 인권에 대해 말하고, 여러가지 협약을 하고, 인권을 위해 노력하게 된 계기가 세계인권선언입니다. 


(다음은 김녕 교수님의 책 <인권생각>에 나오는 글 '인권감수성'과 '신앙'의 글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강의 중 직접 읽은 내용만을 발췌해서 소개한다.)


글, '인권감수성'과 '신앙' 중에서

인권을 가르치는 일은 머리보다 가슴에 대고 하는 것 ... 인권 감수성의 계발이 인권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 ... '인권 감수성'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다양한 자극이나 사건에 대하여 매우 작은 요소에서도 인권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적용하면서, 인권을 고려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인권 문제가 개재되어 있는 특성 상황에서 그 상황을 인권 관련 상황으로 지각하고 해석하며,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인식하는 심리과정"이다. 이렇게 인권감수성은 "인권을 옹호하는 행동을 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동과정"... 



Hwabyung(화병)은 미국의료계의 정식 질병 명칭


그래서 인권 감수성을 우리가 계발하자고 말하는 것이죠.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감정이입을 해보자는 겁니다. 거기 보면 한국인만의 독특환 질환이라는 '울화병', '화병' ...이것은 미국의료협회에서 정식으로 등록된 질병의 명칭으로 '화병'을 쓴다고 합니다. HWABYUNG라고 해서 우리나라 주부들에게 독특하게 나타나는 질병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주부들이 느끼는 울화와 반대되는 행복추구권, 휴식에 대한 권리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라면 중간에 쉬고 싶고, 친구들과 영화도 보고 싶고, 집에 혼자 있고도 싶고 자기 방도 하나 있고 싶다는 식의 생각을 애들은 한번도 해 본적이 없다면 아이들은 인권감수성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효가 지났는데 왜 그러세요?


그리고 정신지체를 포함한 장애를 지닌 이들의 인권, 그들이 처한 어려움과 억울함. 홀로 남겨진 노인들의 사랑과 성(性)에 대한 권리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사랑에 대한 욕구는 변함이 없는데, "벌써 시효가 지났는데 왜 그러세요?"라고 대하고 있는지는 않는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령인구가 많아질 수록 더 중요해지는 것이 '사랑의 권리'입니다. 


그리고 인권감수성을 말할 때 보통 TV 드라마의 비유를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화면 안에서 말을 탄 장군이나 고급 승용차를 탄 미남미녀 등을 쳐다보지만, 발이 불편한 군화와 녹슨 창 하나 들고 굶주리며 죽음의 공포와 싸우는 보병들, 사극 같은 거 보면, 말탄 장군 보지 말고, 뒤에 있는 보병들, 미남미녀가 아닌 수많은 무명의 행렬들이 중요하고 모두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보병들을 쳐다보라!


그리고 자주 눈에 밟힌다는 말을 합니다. 우리 주변의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우리 눈에 자주 밟히는 것이 의미가 있고,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고 말이나 차에서 내려와서 먼지나는 길바닥에서 같은 눈높이에서 사람들의 가난을 가슴 뻐근해지도록 느끼는 것이 분명 필요합니다. 여기서 우린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작은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님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권감수성을 가장 많이 가지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40)  


지극히 불쌍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말씀처럼, 나자로의 죽음 앞에서 흐느끼시고, 병자들을 보면 가다가도 돌아오셔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나서야 길을 이어가셨던 예수님을 생각하고, 막달라 마리아를 생각하시며,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던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 가슴 안에도 인권감수성이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인권감수성은 '지극히 불쌍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깨닫게 하여 그쪽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많은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래서 그 사람이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그 사람에게 달려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가르침을 주는 게 인권감수성입니다. 노숙자 중에서도 성폭력까지 당하는 여성 노숙자들, 정신 지체 노숙자는 더 그렇겠구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환자 중에도 에이즈와 한센병 환자들은 억울하게 취급당하는 것이고, "차례로 줄을 서시오"라는 말에서도 상처받는 휠체어 장애인들,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라는 말을 문자쓰듯이 이용할 때, 진짜로 냉가슴을 앓는 청각장애인들이 있습니다. '소년소녀가장들' 칭찬하기에 앞서 반성부터 해야 합니다. '소년소녀'가 어떻게 '가장'이 되란 말인가? 이주노동자 자녀들, 청년과 중년 실업자들. 이들이 인권문제이므로 가슴아파하고 연대하고 하고자 하는 행동이 인권감수성이며, 그런 것과 신앙이 함께 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처음에 사회교리가 중요하다고 말씀드렸고, 그러면서 사회교리 중에서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이 바로 인권이라는 것. 인권은 정의의 기초이자 평화의 실마리가 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사회교리를 통해서 신앙이 깊어지고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본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인권에 대해 가진 오해와 세계인권선언을 통해서 간단히 정리하고, 인권에 관련된 웹사이트도 잠깐 소개해드렸고, 인권 중에서 인권감수성, 힘든 사람에 대해 먹먹해하고, 자꾸 눈에 밟히게 되는 것은 머리보다 가슴의 작용이고, 예수님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마음아픔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말씀드렸습니다. 


2015년 3월 16일(월) 제공된 간식. 10개는 집어먹은 것 같다.




2015년 3월 16일(월), 가톨릭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진행하는 제109차 사회교리학교의 일곱번째(7주차) 강의가 열렸다. 서울 중구 명동2가 1번지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에서 열린 7주차 강의는 서강대 김녕 교수님이 강사로 나섰다. 강의 주제는 <인간과 인권>이고, 위 기록은 이 날 강의 중 마지막 2교시(약 55분) 내용이다. 

위 내용은 강의 정리자의 기억과 기록을 바탕으로 재편집된 것이므로 실제 강의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김녕 교수님. 서강대학교와 미국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공부하였고 정치학박사 학위 취득 후 1997년부터 현재까지 서강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권교육, 시민교육, 평생교육, 가톨릭 사회참여 관련 과목 등을 가르치고 있다. 아울러, 학술활동과 함께, 인권연대, 사회정의시민행동, 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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