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노동 (1)


장경민 시메온 신부님 | 2015.3.23(월)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2015년 3월 23일(월) 저녁 7시. 8주차 주제 [인간노동] 강의가 시작되고 있는 모습. 서울 명동성당 옆 가톨릭회관 3층 강당


먼저 공지사항이 있습니다. (첫번째 강의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쌍용차 해고사태를 담은 책 <이창근 해고일기>에 관련된 상황 설명을 해주실 겁니다. 책은 해고노동자들과 여러 노동자를 위한 활동에 쓰입니다. 


노동하면 떠오르는 것

(장경민 시메온 신부님) 여러분, '노동사목'이란 말이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빨간색이 생각나나요? 저도 그랬습니다. 저에게 노동사목위원회에서 일하지 않겠냐고 처음 물었을 때, 저 또한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는 것으로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어디 나가서 투쟁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던 것이죠. 그것은 어쩌면, 우리나라가 오랫동안 분단되어 있는 영향과 80년대 노동운동이 크게 일어날 때,폭력적 방식이 반영되어 있었기때문에 부정적 이미지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노동이란 단어는 우리 삶에서 70~80%를 차지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일터로 나가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 일과의 대부분입니다. 그처럼 '노동'은 매우 고귀한 단어입니다. 심지어 가톨릭 역사안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라고 있습니다. 그것은 평신도 운동의 시초인데 1925년 시작되고, 유럽의 벨기에에서 시작하여 일하는 젊은이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으로 그리스도적 정체성을 잘 인식하면서 내가 일하는 일터를 복음적으로 바꾸자는 그렇게 사회를 바꾸자는 오래된 단체입니다. 거기서부터 관찰-판단-실천이라는 방식이 처음 나왔습니다. (가톨릭노동청년회 Young Christian Workers 더 알아보기)

한국에 와서는 70년대 커지다가 한순간 팍 죽었는데, 그 이후로 살아남지 못하는 이유는 노동이란 단어가 이름에 들어가면서 힘을 발휘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노동운동'이라고 하면 뭔가 공장에서 거칠게 하는 것을 말하는 의미가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공부하는 학생도 자신이 하는 공부에 대해서 귀중한 노동의 의미를 부여해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거리가 있습니다.

노동의 정의

노동이란 질문으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노동에 대해서 사목하는 입장에서 설명을 드렸는데, 사전적으로 몸을 움직여 일을 함. 육체와 정신을 써서 일을 하다. 브리태니커는 사회학의 용어로 사회유지에 필수적인 생산활동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보는 노동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공식적으로 노동이란 인간이 스스로 만든 도구, 노동수단을 이용하여 자연물을 채취하고 자연에서 얻은 소재를 개조하여 생활에 필요한 재료를 생산하는 인간의 활동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동하는 인간>이란 회칙(1981)이 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포한 회칙인데요. 노동이란 그 성격이나 환경이 어떵든간에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육체적 정신적 활동이며, 인간의 다른 피조물과 구별하는 특징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노동을 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의미는 사람이 사회를 상대로 활동하는 기능적이고 수단적 가치가 강조되고 있지만, <노동하는 인간> 회칙은 '인간 외에는 노동하지 않는다'라고 인간의 노동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호랑이가 사슴 사냥을 하면서 두 마리를 놓치고 세번째 겨우 잡아서 새끼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과연 노동일까? 그게 아니란 겁니다. 그건 단지 생명유지와 본능 외에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노동이란 인간이 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먹고 살기 위한 것이지만, 인간이 일을 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느끼고 보람과 행복을 함께 느끼는 것을 노동이라고 합니다. 

노동은 죄의 결과가 아니다

노동에 대한 성서신학적 이해를 보게 되면, 교회 내에서도 노동을 단지 죄의 결과며 벌이라는 정도로 평가절하여 온 것은 성서에 대한 폭넓은 이해나 신학적 반성이 부족하였던 데서 기인한다.

아담과 하와 때,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서 하느님께 벌을 받아서 쫓겨나면서 너는 땀흘려서 먹을 것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이 중세와 근대에 올 때까지 인간이 죄를 지어 벌을 받은 게 노동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근현대로 넘어오며 그런 해석은 성서신학적 성찰이 부족했다고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성서적 노동관을 말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노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인근 문화와 구별되는 고유의 가치관은 인간의 일과 활동을 모두 하느님과의 관련 안에 두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을 하는 게 단지 먹고 사는 방편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할 때는 언제나 하느님과의 관련을 둔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예로 '창조질서 안에서의 노동관'을 들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8 ...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창세기 2,15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

그래서 노동은 하느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행위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이것이 미완되어서 창조사업을 계속 인간에게 하라는 게 아니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피조물을 노동이란 행위로 더 아름답게 가꾸고 발전시켜 나가라고 하나의 소명으로 주신 것을 노동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노동가치의 변화를 가져온 근대 산업혁명

영국의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은 노동가치의 변화를 가져온 그야 말로 '혁명'이었습니다. 산업 혁명 이전에는 노동하는 것과 노동력을 구분해서 보지 않았습니다. 일 자체로 저 사람이 이렇구나 라고 보았지만, 산업혁명 시대가 와서는 노동이 노동'력'이 되면서, 그것이 돈의 가치로 환산된 것입니다. 돈으로 값어치가 매겨지고, 노동력이란 단어가 되면서 한시간에 노동력을 100을 발휘한다거나, 한시간에 노동력을 80 밖에 발휘하지 못하는가? 등으로 값이 매겨집니다. 그래서 인간이 맺는 모든 관계는 노동의 가치가 계속 떨어지며 신자유주의 시대에 와서 노동은 바닥을 기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산업혁명 시대에는 어린이 노동이 굉장히 많았습니다다. 산업혁명 당시 공장은 사람이 일을 잘 편안히 기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조건이 없었습니다. 단지 노동력을 끌어올리는 방식. 어린이 노동도 일반적이었고, 뛰어나가 놀만한 나이가 되면, '너도 돈 벌러 나가라.'고 한 것이죠. 게다가 당시 안전 개념이 없었기에 사고로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동영상을 하나 보시겠습니다. (아래 동영상은 실제 강의에서 보여준 것과 다른 것입니다.)


당시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기때문에 오늘날의 풍요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부터 인간 존엄성의 가치는 하락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상황도 노동자들의 처우가 점점 더 형편없어지고, 노동력은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교리도 산업혁명이후 형편없는 노동자의 삶을 보면서, 1891년 레오13세가 산업혁명을 <새로운 사태>로 보고, 이대로 보기만 해서는 안된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회교리 원리들

노동의 원리에 대해 소개하고, 노동사목하는 신부로서 노동현장에서 사목을 하다 보면, 사회 교리의 방법적 원리들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함께 보겠습니다.  

첫번째 원리는 인간존엄성입니다. 가톨릭사회교리의 근간이죠. 천주교 신자들이라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첫번째로 중요하고, 두번째는 세상을 살며 인간의 존엄성을 깨달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근간에 존재하는 인간존엄성의 원리에서부터 천주교 활동이 시작됩니다. 

(간추린 사회교리 108)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인 인간을 창조질서의 중심이자 정점에 두셨다. 하느님께서는 사람(히브리말로 '아담')을 진흙('아다마')으로 빚어 만드시고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 따라서 "인간 하나 하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녔으므로 존엄한 인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단순히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인격'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피조물인 만큼 모두가 동등한 존엄성을 지닌다. 하느님의 영광이 모든 사람의 얼굴에 비치고 있기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 지닌 존엄성은 인간이 다른 사람 앞에서 갖는 존엄성의 기초가 된다. 


인간존엄성이란 가치에서 노동의 중요성도 같이 공부하게 됩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사회 문제를 보면, 비정규직과 간접고용 문제가 있습니다. 노동사목위원회가 주요 현안으로 삼고 있는 일 중 하나가,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노동자분들입니다. 그분들 모두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입니다. 

SK브로드밴드, LG 유플러스의 비정규직 문제

일반 소비자는 잘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콜센터에 서비스 신청하고, 그저 신청해서 보고, 문제되면 서비스센터 연락하고 하는데, 그런 분야 기술자분들이 LG나 SK브로드밴드 정직원이 아닙니다. 외주를 주는 겁니다. 그렇게 하청을 한번 줍니다. 하청업체에서 서비스를 맡아서 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곳에서 또 재하청을 주면, 다단계식 하청을 주면서 결국 노동자가 가져가는 임금은 형편없는 액수가 된다는 겁니다. 지난 해 삼성 서비스센터의 기사분들도 비슷한 문제로 농성을 한 적이 있는데, 그곳의 기사들 경우는 시급이 아니고 분급으로 몇백몇십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하청을 하게되면서 그것이 재각각이어서 분급이나 건당 얼마 등으로 되면서 연간의 생활 안정이 되지 않고, 선풍기나 에어컨을 돌리는 한 여름에 피크가 좀 되다가, 가을부터 겨울까지를 보릿고개식으로 배를 곪으면서 오늘날 산다는 것입니다. 


2015년 1월 1일 교황님 평화의 메시지에서 인신매매와 성매매를 비롯해서 노예노동에 대해서 말한 바 있어요. 아직도 노예의 신분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하청과 간접고용, 비정규직 등이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의 노예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즐거움은 차치하고라도 생존권도 보장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설치기사가 전봇대를 올라가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안전복을 지급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안전장비도 원청에서 제공해주는 것도 아니고, 하청에서 하청으로 갈 수록 그 사장님들도 열악하니 안전장비를 주는 것도 못하고 교육도 못시키니까 그냥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떨어지거나 삐면 산재보상도 못받고 기브스한 대로 일을 다닌다고 합니다. 그것이 핸드폰을 쓰면 알만한 통신사에서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삼성의 경우... 8점 이하면 깍인다

작년 삼성의 경우, 그 때 문제는 농성장에서 노동자들 얘기를 들어보니, 매뉴얼을 다 준다고 합니다. 복장에 대한 규정이 있어서, 양복 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어야 하고, 콜센터로 연락오면 그 복장으로 가는데, 다 체크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딩동딩동 했을 때, 나오면 "안녕하십니까! OOO전자 콜센터 누구누구입니다."라고 인사하는 메뉴얼에서부터 처리 서비스까지 모든 것을 매뉴얼대로 해야 하고, 그 집을 나올 때까지 메뉴얼대로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수리기사이다 보니까, 에어컨 실외기를 수리해야 하는 경우에, 베란다에 매달려서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답니다. 그런데 그런 때에도 양복바지에 구두를 신고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매뉴얼대로 일을 하고 나오면 이 노동자 분들이 그다음 일을 잘하고 나서도 벌벌 떤다고 합니다. 일을 하고 나오면 단말기로 본사에 연락이 하면 집에 전화해서 서비스 어땠냐고 묻는답니다. 그런데 그 때 8점 이하로 내려가면 돈이 깍인다. 그래서 해피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전화해서 물어본답니다. "어떠셨어요!" 하면서 고객을 다독이는 겁니다. 좋은 대답을 해주도록 유도하는 겁니다. 

이처럼 매뉴얼대로 하는 하청업체 직원을 삼성 직원으로 보는 게 맞는데, 법원으로 가서 고소하고 하면 고용노동부에서 실태조사 나가면, 기업에 유리하게 평가를 한다는 것이죠. 실제 원청 소속 작업지시에 의해 일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라고 하니 노동자는 계속해서 불리한 것입니다. 다행히 삼성 내부의 분위기가 지난해 바뀌면서 의외로 빨리 정리되고, 노동자 목소리 들어주고, 임금을 분 단위나, 건당으로 처리하지 않고, 어느정도 기본급으로 준다는 것으로, 몇가지 노조가 원하는 몇가지를 삼성이 들어주겠다고 하면서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입니다. 그런데 지역별 하청업체 사장들이 이걸 다 들어줘야 하는데, 그래야 끝이 나는 것인데, 그걸 못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여건상 그래서 지역별 해결 못한 곳도 많다고 합니다. 



인간 존엄성이란 얘기에서 차별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언급한 이야기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 모든 사람은 하느님과 닮게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예를 들면 사회사목 중에서 교정사목 신부님들이 교도소에 가셔서 우리가 사형수라고 쉽게 부르는 최고수를 만날 때에나 그럴 때 밖에서는 극악한 범죄를 저지렀더라도 이런 분들도 하느님이 빚었기에 일말의 인간의 존엄성이 있기때문에 회개시키고 다독이며 하느님께로 오게끔 하는 데 그 바탕이 인간존엄성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공동선
인간은 사회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사회가 인간다운 사회가 되려면 사회는 인간의 존엄, 일치, 평등에 근거한 공동선의 원리를 실현해야 한다. 공동선을 달성해야 할 책임은 특별히 국가에게 있다.

공동선의 원리를 언급할 때,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 함께 따라옵니다. 기업을 운영하는 분들이 기업 운영의 목적을 오래전부터 이윤극대화, 이윤창출로 보고 있을 수 있죠. 예전에는 우리나라 전체 경제발전이란 큰 틀을 생각하며 열심히 하셔서 우리 기업이 잘되면 우리나라가 잘되고 국민도 잘된다는 보편적인 인식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성실하다는 평판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분들에게 공동선이란 단어는 몰라도, 의식은 존재했던 겁니다. 열심히 하면, 당장 수익은 나에게 들어와도 이것이 최근 교황님이 비판했던 '낙수효과'가 있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낙수효과? 물이 꽉 차면 통을 키운다

그 당시에는 낙수효과의 기대치가 있었던 겁니다. 어떤 기업이 돈을 많이 벌면, 그 수익이 그 사회에 긍정적 효과를 미치고, 어려운 사람들도 어느 정도 잘 살게 된다는 게 낙수효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서는 거짓말이 되었습니다. 낙수효과의 효과를 기대할 수가 없고, 물이 꽉 차면 통이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으로 흘러내려가는 물은 없고, 기업만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선에 대한 오늘날 기업들의 인식은 점점 더 옅어지고, 기껏해야 내 기업 울타리의 직원들을 위해주는 것인데, 사실 그렇게 직원들까지라도 생각하면, 나와 함께 일을같이 하는 사람들이라도 생각해준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많은 기업가들이 생각해주는 사람들이란 게 투자자들이나 이사들의 수익인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은 더 해서 CEO와 이사진의 배당금은 어마어마하고 노동자들은 얼마 못 받습니다. 

보편목적을 잃어버린 돈, 화폐, 재화

공동선에 대한 인식이 점점 더 없어지고 있는 겁니다. 재화의 보편목적을 말할 때, 재화는 곧 '돈'을 말하죠. '화폐'입니다. 이건 사실상 존재목적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삶의 도구입니다. 또 삶의 수단으로 보는 것이죠. 노동의 수단이고, 돈과 화폐도 인간이 살아가며 발명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데, 그것이 보편목적을 잃어버리고 최종목적이 되고, 최고가치가 되어버렸습니다. 

동영상을 한편 시청하겠습니다. (핀란드의 조세 정의에 대한 동영상. 인터넷에서 못찾았음)

시속 20 km를 과속한 차량에게 속도위반 벌금을 매기는 과정을 보여줌. 경찰차량 안에서 데니스 경위는 과속 운전자의 소득을 가장 먼저 파악한다. 범칙금을 계산하는 기본 과정인 것이다. 데니스 경위는 세무서에 연락해서 위반자의 연간소득총액을 알아낸다. 통상 연간소득총액의 14분의 1을 범칙금으로 정한다고 한다. 핀란드에서는 이것이 공평과 정의이다. 실제로 핀란드의 최고 기업 노키아의 부사장(안시 반요키, 2001년 10월 당시 43세)은 오토바이를 (50km 제한구역에서) 시속 75km(25km 속도초과)로 몰다가 과속딱지를 떼었다. 그런데 그의 벌금 기준액은 1999년의 연간수입인 1400만 유로 가량되었고, 대략 14분의 1에 해당되는 11만 6천유로(약 1억3천만원~1억6천만원)의 범칙금을 부과받은 것이다. 또 어떤 부자는 40km 속도 위반으로 2억 6천만원의 벌금을 부과받기도 했다. 핀란드 국민들의 GDP 대비 조세부담율에 대해서는 아래 이미지 참조. 

2012년 자료. OECD 평균 조세부담(국민부담률)은 35.5%, 한국은 그보다 낮은 26.8%이다. 한국보다 낮은 국가는 호주, 미국, 칠레, 멕시코 뿐이다. 핀란드는 44.1%. (출처. 한국지방세연구원 <OECD 주요국의 조세체계 비교분석> 보고서 (2014.6.30 발행) 중 32쪽 그래프 이미지


특히 핀란드의 고소득자에 대한 최고세율은 54%에 이르러 소득의 반 이상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 핀란드에서 최고 소득자로 알려진 한 사람은 지난 해 우리돈으로 1200억원을 벌어서 절반이 넘는 620억원을 세금으로 냈다. 당연히 고소득자들의 불만이 터져나올법한데 그렇지가 않다. 경영컨설턴트 회사를 운영하는 한 핀란드 인은 지난해 150억원의 소득에서 절반인 75억원을 세금으로 납부한 고속자이다. 그는 "세금을 사랑한다"라고 말한다. 2차 대전후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핀란드는 불과 60년만에 복지가 가장 잘된 나라가 되었다. 경제성장이 밑바탕이 되었지만, 높은 세금을 감수했던 국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동영상 소개 끝)

(관련 기사들 참고)

(장경민 신부님) 이 동영상에 나오는 국가의 시민의식을 보시고, 우리가 생각하는 공동선의 범위는 어디인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세금을 많이 내자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고, 핀란드에서는 많이 벌면 많이 낸다는 것이 "함께 잘 살자"는 것이고, 소속된 사회에 기여한다는 공감대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 많이 벌면 더 많이 기여한다는 의식이 큰 것입니다. 꼭 공동선이란 단어는 몰라도 함께 잘 살자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것을 기업가들이 좀 더 의식해주고, 최소한 자신의 기업 노동자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하는데, 그것이 잘 안됩니다. 나라의 정책들은 점점 더 기업에게 유리하게 해주고 있으며, 큰 대의 명분은 기업에게 잘해줘야 나라경제가 산다고 수십년째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년째 그렇게 하지만 성장하는 건 기업 뿐이고, 노동자들의 삶은 좋아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세상은 더 양극화되어가고 있는 것이죠. (1교시 끝)(곧이어 잠시 책소개하는 분이 등장) 


2015년 3월 23일(월), 가톨릭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진행하는 제109차 사회교리학교의 여덟번째(8주차) 강의가 열렸다. 서울 중구 명동2가 1번지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에서 변함없이 열린 8주차 강의는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이신 장경민 시메온 신부님이 강사로 나섰다. 강의 주제는 <인간 노동>이고, 위 기록은 이 날 강의 중 1교시(약 50분) 내용이다. 

위 내용은 강의 정리자의 기억과 기록을 바탕으로 재편집된 것이므로 실제 강의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한 분의 안내멘트) 오늘 이창근 동지가 굴뚝에서 다행히 내려왔습니다. 저는 기분이 좋습니다. 싸움을 이겨서 내려온 것은 아니지만, 위에 혼자 놓아두면 굉장히 위험하거든요. 그래서 어제 100일째 되는 데 오늘 내려온다고 해서 너무나 행복합니다. 이창근 동지에게는 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도서관을 짓는 것입니다. 해고된 노동자들와 가족들이 편히 와서 쉬는 곳을 마련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책의 수익금은 모두 도서관 짓는데 쓰게 됩니다. 



가슴을 찢으면서 볼 수 밖에 없는 책이다. 고통의 기록이며 죽음 위에 피어나는 실날같은 희망의 보고서다. 

참고링크 굴뚝 위의 그가 말한다. <이창근의 해고일기> - 민중의 소리 2015.2.11


'굴뚝 농성', 쌍용차 노조 이창근, 101째인 오늘 내려온다 - 한겨레 2015.3.23

굴뚝 위의 101일 ... 이창근 "너무 고통스러웠던 시간" - 프레시안 2015.3.23

이창근 "굴뚝에서의 101일, "고통스럽고 외로웠다" - 미디어오늘 2015.3.23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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