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5일 수요일 저녁 8시, 하기동성당에서 개최된 대전사회교리학교 13기의 제4주차 사회교리의 원리 강의에 강사로 초대된 김용태 신부님은 '마음이 지쳐서'를 기타연주하며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마음이 지쳐서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사회교리의 원리 (1)


서천성당 주임 김용태 마태오 신부님

[대전사회교리 4주차]


사회교리는 복음적 가치를 비추는 것


(8시08분 강의시작) 반석동 성당 떠난지 5년째입니다. 반갑습니다. 오늘은 「사회교리의 원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사회교리?" 하면, 뭔가 특별한 사람들, 빨갱이스러운 사람들, 평소에 개량 한복 많이 입고다니는 사람들... 이런 부류들이 주로 하는 것. 혹은 반정부활동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닌가?


사회교리도 그냥 '교리'다


아닙니다. 사회교리는 복음적 가치를 세상 두루두루 비추는 것입니다. 사회교리는 이미 우리가 배우는 내용들을 다시 배우는 것입니다. 사회교리가 따로 있고 복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동안 배웠던 것이죠. 신앙이 안방에서, 교회 울타리 안에서, 성당 안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고, 사회를 비추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리는 복음과 성서에서 끌어낸 원리와 이치인 것입니다. 사회교리는성서에서 이끌어낸 원리들을 말합니다. 따로 떨어져서 사회교리가 존재한다는 건 아니죠.


2015년 3월 25일(수) 오후 8:02분 하기동 성당 모습. 강연에 앞서 기타연주로 노래를 함께 불렀다.


그런데 왜 '사회교리'라고 말하나


우리가 예비자 교리를 배웁니다. 예비자 교리와 사회교리가 다릅니까? 그것도 안 다릅니다. 그런데 왜 특별해 보였나? 그만큼 복음을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삶에 적용하지 않고, 세사을 다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해서 '사회교리'가 특별해보인 것일뿐입니다. 그래서 굳이 '사회 교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서 설명하는 것이지, 사회교리는 그저 교리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잘 사는 삶인가? 이것이 예수님 말씀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행복한 삶이 안방에서도 이루어지나요? 물론 안방에서도 이루어지겠죠. 때로는 은밀하게. 하지만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곳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교리란 말을 쓰는 것도 좋은 게 아닙니다. 


모든 게 다 예수님 말씀이다


정의평화위원회, 정의구현사제단 이런 말 쓰지만, 모든 사제들은 정의를 구현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은 정의를 구현하는 사제입니까? 당연한 겁니다. 신부는 정의를 구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투신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정의평화, 정의구현을 말할 때 그걸 빨갱이스럽게 보이는 게 이상한 것입니다.


'하루에 밥 세 끼 먹었습니다.'가 이상한 말인가?


정의와 평화란 단어, 정의란 단어가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이 세상에 정의가 희박하다는 증거이고, 그것이 교회 안에서도 특별히 보이는 것 교회 안에서조차도 제대로 서있지 못하다는 걸 반증하는 겁니다. 제가 오늘 밥 세끼 먹었어요?란게 특별하지 않고 당연한 것이지만, 이 세상 안이 복음화되지 못하고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가 특별히 보일만큼 세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교리는 그냥 교리입니다. 따라서 예비자교리 때 마땅히 배웠어야 할 내용이 사회교리입니다.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과 우리 하느님이 같은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사회교리의 하느님과 교리의 하느님이 서로 다른 존재인 것처럼 여겨서는 안되는 것이죠. 다 같은 것입니다. 늘상 신부님들이 강론 때 하는 말씀들과 복음이 다 같은 것입니다. 사회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고 특별하게 보이는 것은 이 세상에 정의평화 생명의 가치가 그만큼 망가져있다는 겁니다.


사회교리와 '잘 살아보세'


사회교리는 예수의 복음적 가치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적용하는 공식입니다. 하느님 말씀과 복음말씀을 가지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과 신앙의 대주제는 무엇입니까? 바로 '잘 살아보세'입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구호가 아니라, 성서의 대주제입니다. 두꺼운 성경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잘 살아보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잘 살 수 있습니까? 하느님 안에서만 잘 살 수 있고 하느님을 벗어나면 잘 살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신앙의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면 우린 잘 살 수 없다. 우린 죽는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냐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살리신다. 우리는 그래서 가장 멋있고 아름답고 의미있고, 보람되고 가치있게 사는 건 하느님 안에서, 그 분이 이끄시는 길을 따라서 걷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풍요롭고 충만하게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만들었던 그 좋은 모습으로 사는 것. 누구안에서? 바로 하느님 안에서. 바로 이것이 신앙의 내용입니다. 




성서를 한마디로 줄이면 '삶'


성서를 한 마디로 줄이면 삶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분명하게 보여주셨어요. 그것이 성서 전반의 이야기이면서, 특별히 예수님께서 특별하고 명쾌하게 말씀과 온 삶으로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내용에서 모든 교리가 우러나옵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복잡하고 다양합니다. 복잡다양한 세상에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세상에는 60억의 인구가 있습니다.  60억 인구의 삶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가지고 삶을 조명해보고, 내 삶이 얽켜있을 때에, 복음을 가지고 삶을 비출 때 서로가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가는가?라고 생각할 때 나오는 공통 원리들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여러 문제가 있는데, '복음을 적용하면 되겠구나!'하는 것. 마치 수학공식같은 원리, 이게 사회교리 원리입니다. 사회교리에서 생소한 단어들 나오지만, 그것은 명칭을 갖다 붙인 것이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미 '서로 사랑하십시요!'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사랑의 계명'안에 다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그것을 공식화하면서 복잡한 삶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적용시켜 나갈 때 여러가지 상충되는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적용하는 원리들에 대해서 특별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원래 다 아는 것들입니다.


원리를 알아야 잘 풀린다


세상에 돌아가서 뭔가 헷갈릴 때 원리를 알면 잘 풀수 있습니다. 원리를 모르고 답만 안다면, 세상이 충돌하는 것들에 대한 분석이 어렵습니다. 공식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본질을 안다는 것이죠.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수많은 조문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구구단을 외웠지만, 그 곱하기 원리는 몰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쉬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쉼'의 본질은 몰랐습니다. 본질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쉬는 날인데, '쉰다'는 것은 바보같은 율법한자들은 쉰다는 걸 곧 일 안하는 걸로 생각해서, 이 일도 안돼고, 저 일도 안 안돼고...  


숨과 쉼과 삶은 같은 말


쉰다는 것은 일을 안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 숨 돌릴 틈도 없는 사람들 숨 돌리게 하는 것이 쉬는 것이고, 안 그러면 숨이 멎습니다. 숨이 멎는 다는 것은 곧 죽는 것입니다. 숨을 통해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숨과 쉼과 삶은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살리는 것. 안식일 쉬는 날이 일 안하는 날이 아니고 살리는 것이 본질이고, 그걸 아시는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 본질에 충실한 것인데 율법학자는 어겼다고 여기고 죽이려고 모의한 것입니다. 


하느님 법에 충실하다는 것


법치국가에는 두 부류의 인물이 존재합니다. 법을 지키는 사람과 법을 어기는 사람이죠. 그런데 제3의 인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법 없이 사는 사람이죠. 그것은 법 본질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같은 사람이죠. 그래서 예수님같은 분을 법 조문에 얽매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법을 어긴 사람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은 법 원리를 알기 때문에 오히려 법에 더 철저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일점 일획도 법을 어기려고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다. 난 법을 완성하러 왔다. 그러니까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은 법을 완성시키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법을 초월해서 원리를 아는 것, 인간이 인간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본질을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국가법에 의해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지만 마음 안에서는 하느님법(神法) 안에서는 떳떳한 사람들입니다. 국가법을 어기고 법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벌, 처형된 정치범입니다. 우리나라 순교자들도 다 정치범으로 순교하셨습니다. 법에 의해 처형당했지만 하느님 법에 충실한 모습. 우리들이 그래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원리에 충실할 때, 이세상 법을 초월해서 법 없이 사는 사람. 즉, 하느님 법에 충실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회교리의 원리들


1. 공동선의 원리 ...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해 흘릴 피


생소해보인 단어라도, 이미 복음 안에 있는 말들을 도출하고, 이런 말을 붙인 겁니다. 공동선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이 공동선을 알기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와 모두를 위해서 흘릴 피다." 이게 공동선의 원리입니다. 너 한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한다는 것' 이것인데, '공동선'이라고 하니까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라는 거죠. '너희의 죄를 사해주려고 모두를 위해 흘릴 피' 특정 인물이나 단체를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모두를 위해서. 우리가 잘 살게 되는 게 선이고, 공동을 붙여서, 어느 한사람이나 부류, 부분에 국한된 게 아니고 모두 다 살아야 한다는 것. 너만 잘살라는 게 아니다. 너만 배불러서는 안된다는 것. 사회적으로 이기심때문에 이해못할 수 있지만, 한 집안에서 엄마나 아빠가 아이들 생각하지 않고 혼자 먹으면서 행복해지나요?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달라진다


그런데 말도 안되는 짓거리를 세상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다. 가족이란 테두리에서는 이해되는 것이 이 세상 일로 넓어지면 이해를 못할까요? 너는 죽든 말든, 바다에 빠져 죽던 말든, 이제는 다 잊어버려요. 1년이 지나도록 아무 것도 된 게 없는데, "이제 다 잊어먹고 새로 시작합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세월호 참사로 자식잃은 사람들을 또 한번 죽이고 또 죽이며 비수로 찌르고 죽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자기 가족 안에서 이해되는 일을 가족에서 벗어나 이 세상으로 넓히면 그런 일이 벌어지나요? 나만 살면 된다.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것... 그래서 공동선을 이야기하는 거죠.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을 확대시키는 겁니다. 나쁜 놈들이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싶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확대시켜야 합니다. 자식과 가족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을 확대시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루카 6,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다른 이의 아들도 내 자식처럼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것이 공동선인 것이죠. 늘 복음에서 듣고 있는 것입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단군왕검이 말한 홍익인간도 같은원리입니다. 


편차를 봐야 한다


그런데 공동선은 1인당 국민소득같은 얘기가 아닙니다. 단순한 합산이 아닙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불, 3만불이라는데, 전체 인구가 각자 그만큼 버는 게 아니라, 평균을 낸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이는 3천불도 못 받죠. 그런 편차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누릴 것 이상으로 누리고 있는데, 만일에 평균치를 내서 1인당 3만불이니까 행복지수가 높다고 말하는 것은 공동선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야 합니다. 한 쪽은 높이 쌓여있고, 한 쪽은 없는데, 공동선이 있지는 않습니다. 산과 언덕을 깎아서 골짜기를 메워야 공동선이 되는 것입니다. 단순 수치상 평균을 잡는 행복지수는 허구입니다. 그래서 공동선은 단순한 합산이 아니죠. 인간이란 존재자체가 인간은 그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것을 전제합니다. 인간의 참된 완성에 이르는 것은 스스로 혼자 완성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기 이전에, 한자에서도 한자 획 두개로 사람(人)을 표현했습니다. 저 사람이 살아야 나도 산다. 우리가 추구하는 좋은 것들은 다 좋아야. 


국가와 정치단체의 역할


그런데 사람은 욕심과 이기심을 타고났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 때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중재하고 조절하고 조율해줄 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국가공권력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계약을 맺고 만들어준 게 공권력이죠. 수많은 이해들의 충돌 속에서 국가가 중재를 해야한다는 것이고, 정치공동체의 과제는 수많은 이해관계를 조율해주는 역할입니다. 그래서 규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규제 완화,  규제 철폐'를 말하지만, 규제를 없애버리면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힘이 있는 사람이 다 가져갑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입니다. 그것은 '무한경쟁시키자'. '경쟁해야 발전한다'. '인류발전, 국가발전은 경쟁을 통하는것'이란 생각. 능력있는 사람은 살아남고 게으르고 능력없고, 무능한 이는 도태되는 것. 인류 진화를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는 것은 사실상 그럴듯한지만, 실체를 뜯어보면, 백이면 백 힘센 사람이 다 가져간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승자독식입니다. 


가족의 개념에서 생각해본다면, 가족 중 병들고 약한 아이가 있다면 아프든 말든 그 아이를 수용소로 보냅니가? 오히려 더 신경쓰고, 그 아이한테 집안의 삶의 방향을 맞춥니다. 이걸 조금만 확대하면 가족의 울타리 밖에서도 이런 태도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이해를 못합니다. 왜 우리가 그런 사람들 때문에 손해를 봐야합니까? 내가 왜 기다려야 합니까? 희생해야합니까?


희생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희생자가 생긴다


잘 걷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걸어주고, 기다려주는 것 그것이 공동선입니다. 경쟁사회 안에서 과연 나는 온전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희생자가 왜 생기는가? 아이러니하게도 희생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희생자가 생깁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 공동선의 가치를 널리 펴야 하고, 국가는 공동선의 원리에 입각해서 목발을 짚고 오는 사람들을 기다려서 같이 오도록 개입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국가의 규제는 100미터를 9초에 뛰는 이들, 부자, 재벌, 기업, 힘있는 사람을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국가, 정치공동체는 힘없는 사람, 목발짚은 사람을 향해 규제를 외치고 있는 꼴입니다. 목발 짚고 걷는 이에게 목발을 버리고 따라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동선의 최고 가치


그렇다면 공동선의 최고가치는 무엇이죠? 그건 하느님입니다. 인간의 참된 삶은 하느님과 하나되는 것.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지막 종착역은 과연 어디인가? 바로 하느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는 인간을 하느님처럼 만드는 것, 그래서 우리 삶이 하느님 안에서 완전해지도록, 그것이 공동선의 궁극적 목적입니. "나는 길이요." 예수님이 제시해 주긴 그 길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생명에로 도달해 가는 것이 공동선의 궁극적 모습입니다. 



신화(神化)와 성화(聖化)


신화(神化)라는 말이 있습니다. 라틴어로 dĕĭficátĭo(데이피카티오)라고 합니다. (영어로 Deification, 디이업휘이슌), 그리스 말로는 테오시스(Theosis)라고 하는데요. 옛날 옛날에는 이말(신화, 神化)란 말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신화(神化)된다고 하니까, "어떻게 인간이 신이 되냐?"고 오해를 많이 하면서, 이제는 '성화(聖化)'란 말을 많이 쓰게 되었습니다.  라틴어로 sanctifícĭum(상티피치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원래는 신화(神化)가 궁극적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이 공동선의 원리의 최고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2.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


두번째 원리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입니다. 이렇게 무슨 원리라고 하니까 어려워보이는데, 이것은 사목헌장 69항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목헌장에서 말하는 원리


[사목헌장] 69.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사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 공정하게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8) 다양하고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민족들의 합법적인 제도에 적용된 소유권의 형태가 어떠하든, 언제나 재화의 이 보편적 목적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하 생략)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  모든 것들을 어느 특정한 사람 아니라 모든 사람들 다 사용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사람, 어느 단체에 속한 그들을 위해서만 사용되면 안되고, 모든 이가 두루두루 골고루 누려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한쪽은 산과 언덕이 쌓여있다면 그것을 깍아서 골짜기를 메워줘야 한다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인 것이고, 이것은 공동선을 위해서 하느님이 주신 것을 골고루 쓰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것을 한 사람이 다 갖고 있고, 다른 쪽은 쫄쫄 굶고 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공동선 원리에 입각해서 창조된 모든 재화도 너희와 모두를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즉 그러한 보편적 목적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 두번째 원리가 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바탕에는 이 세상 모든 것 주인은 너희가 아니라 하느님이란 것입니다. 하느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입니다. 은총의 라틴어는 bĕnĕfícĭum(베네피치움)입니다. 이것은 원래 공짜로 거저 준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것이 재화의 보편적 목적 원리입니다. 네 소유라고 주장하는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것이다. 너희 것이 아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창조할 때 아담과 이브는 어떻게 하고 있었습니까? 발가벗고 있엇지.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다 누리고 있었습니다. 왜? 하느님 안에 머물고 있었기때문에. 


원죄의 의미는 무엇인가? 


전세 계약에서 못하는 것은 베란다 트고, 방 두개 트는 것은 원주인 허락없이 할 수 없고, 2년동안 주인처럼 살지만 못하는 게 있다면 주인이다 아니다? 에덴동산도 하느님 것이란 것. 못하는 게 있다는 것. 마음껏 누리지만 못하는 게 있다는 것은 소유주가 하느님. 그래서 원죄는 소유. 소유하지 않았을 때 모든 걸 가졌는데, 소유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겁니다.


원죄를 진 이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은 옷을 입는 것이었어요. 지어입기 시작한 옷에는 주머니 달려 있습니다. 들어가기만 하고 나오지 않는 소유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원죄이고, 이세상 모든 죄의 뿌리는 소유. 전쟁, 살인, 이런 모든 것들. 주진 않고 내 것으로 만들려는 것. 아담과 이브의 이 모습은 하느님 안에서 다 누리는데, 욕심 때문에 결국 한쪽 쌓이고 한쪽은 패이면서 아름다운 세상이 지옥처럼 변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만들고, 원래없었던 죽음을 인간이 스스로 끌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내용 요약입니다.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가 벗어나려고 하는 것 


그런데 지혜서 내용을 보면, 하느님은 인간을 불사불멸의 존재로 만드시고, 인간을 정말 잘 살으라고 창조하셨지만, 그런데 죄가 우리에게 들어와 죽음이 들어왔다고 지혜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죄는 소유를 시작한 것입니다.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는 바로 이것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거저주셨으니 우리도 거져 줄 주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낙원상태의 아담과 이브의 모습입니다. 이 상태로 되돌리려는 게 재화의 보편목적의 원리가 됩니다. 예수님이 가진 것을 다 나누어주어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받아먹어라. 그렇게 다 주십니다. 오천명의 기적을 행할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죠.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그런데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저희 돈이 없어요.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모자르겠습니다."


풍요는 이미 가진 것을 나누는 것 


풍요는 이미 가진 것을 나누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제자들은 더 많은 돈을 얘기합니다. 제자들이 말한 것처럼,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이 있어도 모자르겠다는 것은 지금 광야에서 예수님이 받은 세가지 유혹 중에서 "돌을 빵으로 만들어 봐라."는 것이 제자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악마는 도망가죠. 예수님이 악마를 물리쳤을 때.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풍요는 더 많은 빵에서 오는 게 아니라,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이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돈을 골짜기로 흘러내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풍요의 원리는 이미 가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유혹을 유혹이란 걸 압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끌리고, 빨리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주고 싶기도 하고요. 그러나 풍요는 더 많은 돈에서 오는 게 아니라, 이미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에서온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성체 성사의 숨은 뜻


그래서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자신을 빵으로 만듭니다. 이게 바로 성체성사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너희도 나를 기억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먹을 걸 더 달라고. 이백데나리온 어치도 모자르다는 제자들. 악마는 다시 제자들 입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눔의 신비로, 장정만 오천명인데, 기적이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뭡니까?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들은 하느님이 공짜로 준 것이란 뜻, 이걸 먼저 초대한 겁니다. 하느님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은 공짜로 거저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겠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모두가 동참하였고, 배불리 먹고 나서도 열두광주리가 남은 것입니다. 만일에 여기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음식물 쓰레기 잔뜩 남을 수도 있는 것이죠. 


그래서 재화의 보편 목적의 원리는 가진 것을 서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받아먹어라 했지, 잡아먹어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주셨으니 너희들도 주라고 하신 겁니다. 부자되세요라고 은행에서 말 많이 하지만, 주지도 않으면서, 줘야 부자되는 거죠. 돈 가지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이 오히려 '부자되세요.'라고 합니다. 



2015년 3월 25일(수) 하기동성당 저녁 8시 55분. 대전교구 사회교리학교 제13기 4주차 수업 [사회교리의 원리]의 1교시 종료. 김용태 마태오 서천성당 주임신부님. 이 강의는 필자의 기록을 토대로 재정리된 것으로 실제 강연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강의신부님의 의도와 맥락에서 벗어난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날은 중간 휴식시간 간식으로 약밥이 넉넉하게 준비되었다. 배고파서 3개는 먹은 거 같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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