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의 원리 (2)



서천성당 주임 김용태 마태오 신부님

[대전사회교리 4주차] @ 하기동성당

2015년 3월 25일 저녁. 9시 10분. 기타연주로 두 번째 시간을 시작했다. 




재화의 보편 목적의 원리...사유재산과 충돌하나?


재화의 보편목적원리가 사유재산과 충돌하나?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재화의 보편목적에 충실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사유재산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성당의 본당 차량은 쉽게 망가집니다. 왜 그럴까요? 주인이 정해진 게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 다 타니까 관리가 잘 안됩니다. 내 차가 아닌 것들, 공동 자가 들어가면 쉽게 망가집니다.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보면, 관리가 잘 안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유재산이 필요한 것은 책임을 가지고 잘 다스리라고 하느님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책임 소재를 분명히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능력에 따라서 서로 간에 격차가 쌓입니다. 어느 쪽은 쌓이고, 다른 쪽은 패이게 됩니다. 농사를 지어도 풍년과 흉년이 다르게 생깁니다. 그러면 꿔야 합니다. 그러다 또 흉년이 들어서 또 꿔가다가 나중에는 종살이를 하는 지경에 갈 수 있죠. 처음에는 똑같이 시작해도 한쪽은 쌓이고, 한쪽은 깍이고, 시간이 지나며 격차와 차별이 생기면, 예수님 말씀대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공동선을 위해서, 우리 모두를 위해 산과 언덕을 깍아줘야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작업을 해줘야 합니다. 사유재산제도는 있지만, 거저주신 것이니만큼 거기 입각해서 생각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똑같이 공동 사용한다는 게 아니고, 주위 가난한 사람 있으면 사랑이란 가치 안에서 그리로 흘러가게 해주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재화의 보편목적 원리는 누구를 향하는가? 시간이 지날 수록 산과 언덕은 높아지고, 골짜기 깊어지면, 골짜기에서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산과 언덕이 뭔가를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스스로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부자가 먹여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가난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흘러가게 하는 게 재화보편목적의 원리가 됩니다. 돈 벌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부유해질 수 있습니다. 


부유함은 은총이다 


교부들은 부유함은 은총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이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느님이 책임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러한 소명은 부자들의 소명은 자신의 부유함을 가난한 이에게 먹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의 부유함 자체 문제가 아니라, 흘러가지 않고, 고이고 쌓인채로 있는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항상 공동선과 재화보편 목적의 원리에서는 누가 우선적 고려대상인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라자로를 알지도 못하는 부자는 왜 지옥에 갔나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를 때 바닥부터 채웁니다. 바다가 평평한 것은 물이 맨 밑바닥부터 채우기때문입니다. 이 시대 우린 가장 가난한 이에 대해 관심갖고 있어야 합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지옥에 갑니까? 지옥에 가는 부자는 라자로 것을 빼앗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부자가 지옥에 갔는가? 라자로가 부자 곁에 있었다는 이유입니다. 라자로를 몰랐습니다. 부자는 문간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겁니다. "전 몰랐는데요?, 잘못이에요?",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닌 거 아닙니까?"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무식함은 죄입니다."


나중에 라자로가 지옥에 갑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에게 간청합니다. 물을 찍어서 혀를 식히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뭐라고 그럽니까? 사이에 큰 구렁이 있다고 합니다. 건너가려고 해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이하 생략)


여기서 말하는 큰구렁이 뭡니까.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 세상 안에서 부자가 만든 넘지못한 구렁입니다. 이 세상 양극화. 빈부격차입니다. 그 큰 구렁이 결국 목도 축일 수 없는, 건너갈래야 갈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부자가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는 수 많은 구렁이 있습니다. 그럼 더 많은 것을 벌어들이는 게 아니고, 이미 있는 것을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은 나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두가지 방법


가난한 사람을 우선 선택해서 나눈다고 할 때는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불우이웃 돕기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간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웃을 불우하게 만들지 않는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까지는 잘 알죠. 이웃에게 빵을 나눠주는 것은 잘 합니다. 그런데 이웃을 불우하게 만드는 모든 잘못된 제도들을 없애는 것에는 신경도 안쓰고 관심도 없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것인데, 가난한 이를위해 형제적 사랑으로 나누는 것에는 관심이 있지만, 그렇게 만드는 제도에는 소홀해 진다는것입니다. 이게 무엇이나면, 사회적 정치적 차원입니다. 사회구조, 정치구조, 이 안에서 더 가난하게 만들고, 더 부자로 만드는 구조를 없애는 것도 가난한 이를 위한 노력이 됩니다. 이 부분 열심 노력하는 이들을 좌파와 빨갱이로 종북으로 비난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빨갱이, 좌파, 종북이라면 예수님이야말로 대빵 좌파, 종북이 될 겁니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브라질의 유명한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성인'이라고 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왜 먹을 것이 없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사회주의자'라고 부른다.  


왜 가난한가? 가난하게 만든느 것들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게 중요합니다. 공동선을 위해,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를 위해 나눔을 실현하고, 이웃 사랑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이웃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없애는 게 중요합니다. 이웃이 울고 있을 때, 달래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웃을 때린 사람들이 더 때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달래주는 게 전부인 줄 압니다. 그리고 때리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워서 어쩔 줄 몰라합니다. 그것이 훨씬 더 본질적인 것임에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 주는 게 전부인 줄 알지, 정당한 빵을 빼앗아가는 이들을 말리는 이들, 이런 일들을 하려고 하면, 신부와 성직자들을 빨갱이로 매도하는 방송, 언론들이 있습니다.


거짓 평화


사람들은 잘 믿죠. 그러니까 나쁜 권력자일 수록 언론을 장악하려고 듭니다. 가난한 사람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정책, 제도, 세력은 끝까지 저항해서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하지만, 너무 소홀히하고, 교회가 앞장서야 하는데, 우리가 순교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다 정치범으로 권력자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권력자에 대항한 것이죠. 구약 예언자, 예수님, 이땅 순교자들. 사학죄인, 사학괴수, 그 당시 왕권에 대항한 것으로 보았죠. 이 시대 우리가 당연히 그렇게 죽어야 하는데, 그 죽음을 거부한다면 거짓 예언자, 거짓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린다는 것은 거짓평화입니다. 이에 대해서 지혜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들의 운명(지혜서 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이하 생략)



진짜 죽은 것은 마치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 같은 너희들이 죽은 것이고, 의인들은 평화를 누린다는 걸 분명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완전히 끝장난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사는 것은 그 의인들이란 말씀입니다.  이걸 분명히 얘기합니다. 교회가 이러한 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가다가 살아나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너희가 가진 것을 주어라


성 그레고리오 교황 사목규정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돌볼 때,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비의 행위를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정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뭘 주는 게 대단한 뭔가를 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들 것을 주는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이 나를 통해서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요한 금구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재물을 나누어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 재물은 우리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가 나오는 것입니다. "난 아무 것도 안 했는데? 난 라자로한테 해꼬지한 게 없는데? 난 그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별거 한 것도 없는데?"라고 항변하겠지만, "너가 가진 걸 줬어야지!" 바로 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바티칸공의회 문헌 평신도교령 8항에 보면, 정의에 따라 이미 주었어야 할 것을 마치 사랑의 선물처럼 베풀어서는 안 된다. 이미 줬어야 하는데, 주면서 잘난 체 하는 게 아니란 거죠. 이게 바로 재화보편목적의 원리입니다. 



3. 보조성의 원리


재화의 보편목적의 원리도 이것을 위해서 국가권력이나 상위집단의 규제가 필요합니다. 공동선 차원에서 순전히 자발적인 것에만 맡기면 안됩니다. 산과 언덕을 깍아서 골짜기를 메꿔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필요합니다. 이런 정치들이 필요합니다. 정당한 세금을 대기업에게 매겨야 하는 데, 부자감세를 하고 그 세금 모자른 것을 골짜기를 더 긁고 긁어서 긁다긁다 강바닥까지 다 긁어버리는 일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가진 상위권력집단은 이러한 원리를 가지고 이 원리에 입각해서 조절해나가는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우는 마음이 보조성의 원리이다


힘 센 사람이 힘 없는 사람이 도와주는 것, 힘 센 집단이 힘 없는 집단을 도와주는 게 바로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보조성의 원리는 말 그대로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공동선을 추구하고 재화보편목적원리 추구함에잇어 가난한 사람도 물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모두가 함께 추구하는 것이니까요. 남녀노소할 것없이 모두가 함께 추구해야 하는 것이지만, 과연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우선 먼저 능력을 발휘하도록 키워주는 게 중요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먹을 것만 주면 아이가 제대로 크나? 낚시하는 법 가르쳐줘야지. 고기만 잡아주면 부모님 돌아가시면 어떻게 사나요? 아이가 할 것까지 다 부모가 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하도록, 스스로 해나가도록 도와주는 것. 함께 추구해나갈 때,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같은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잘 할 수 있도록 


하나하나 가르쳐주면서 공동선을 위해 뭔가 하도록 돕는 게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보조성의 원리란 말이 어려워 보여도,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하는 게 보조성의 원리입니다.그냥 놔두면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치유되어 멀쩡해 지도록 돕는 것. 이미 복음 안에 나오는 것들입니다. 보조성은 라틴어로 전방부대를 후방부대가 도와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대신 싸워주는 게 아니고 잘 개척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걸음마를 하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 마음처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잘 할 수 있도록. 꼭두각시처럼 만드는 건 보조성의 원리가 아닙니다.


보조성의 원리와 참여는 동전의 양면


처음에는 약하고 가난하고 그러다가 그 다음에 키워주면 잘 하게 되었을 때, 공동선과 재화보편적 원리에 한 몫 담당하게 큰다면, 이 단체나 사람은 참여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조성의 원리와 참여는 동전의 양면이 됩니다. 보조성의 원리가 커가면서 하나하나 참여하게 됩니다. 애들은 어리니까 주제넘게 참여하는 데가 적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참여할 곳이 많아지고,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개진하게 됩니다. 


참여의 반대 ... 무관심과 배척


우리 세상 안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너네들이 뭘 안다고 그래!" "끼지마!" 배제시킵니다. 도와주고 키워서 주체로 모든 의사결정을 하도록 해줘야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곳에 참여하도록 키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여의 원리의 반대는 무관심과 배척입니다. 무관심은 자기 스스로 관심없어서 선거 때도 놀러가는 것.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이죠. 내가 마땅히 참여해서 나를 피곤하게 하는 제도와 관행들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뭘가? 그것이 투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돈 없다고 배제시키는 것은 참여를 거부당하는 것. 무관심은 스스로 참여하지 않는 것이라면, 참여를 방해하는 우민화정책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농촌에 계신 할아버지 어르신 분들 중에서 FTA로 쌀 개방이 되어서 농촌에 입은 피해 등에 대해서는 잘 모르십니다. 그냥 올해 쌀 수매값은 얼마인가? 이런 것은 아는데, FTA 뭐니 하면서, 졸속협상 등으로 우리나라 농촌 다 망치는 그런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을 좋다고 뽑아 줍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는 자신이 뽑아준 그 정치인들이 어떤 사람인 줄 모릅니다. 그들이 농촌을 망치고 있지만, 자신이 허리 꼬부라질정도로 일해도 피폐해진 이유가 자신이 뽑아준 그 사람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참여를 못하게 하는 것. 그리고 참여를 못하게 국가기관은 모든 걸 총동원해서 방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세상 일 복잡하니까 넌 야구나 봐!", "TV나 봐!" TV를 켜면 막장드라마가 막 나오죠. 어느날 봤더니, 결혼하려고 하니까, "걔는 네 동생이야!" 이렇게 자극적이고 말초신경에 빠져서 세상 사람들 죽어나가는 것을 "왜 그런가?" 생각하게 안한다는 겁니다. 유병언이 하나 잡으면 모든 상황이 끝날 것처럼 몰아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 사람 하나 족치면 세상이 끝나나? 그냥 아무 생각없이,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뛰는 처지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응당 참여하고 따져야 할 일들을 따지지 않습니다. 부패한 권력일 수록 참여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해합니다. 참견하면 번거로워지니까, 재미있는 거 틀어주면서, "다 알아서 할테니까 너희는 걱정하지 마세요."라면서 우민화 정책을 펴는 것입니다. 


교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


교회는 정치에 관여하지말라? 웃기지마! 참여해야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상을 복음화시켜야 할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복음화를 안방에서만 하나요? 성당 울타리 안에서만 하는 것인가요? 우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하느님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부분에서 복음화의 사명을 이룬다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정치는 최고로 복음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장 복음화되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복음화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가난한 사람 계속 가난해지지 않게 하려고 가장 먼저 복음화되어야 하는 것이 정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라


사제가 이런 얘기하면, "불편하게 그런 얘기 하지 마시요!"라고 합니다. 그냥 "하느님께 기도하세요!"라고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12월에 불우이웃 돕기 한번 하는 것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그러나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불편한 겁니다. 그럴 때 우리 잘못을 보면서, 십자가를 계속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편안한가요? 그 안에 하느님 사랑이 담겨있고 동시에 우리 죄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봐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 담긴 우리의 죄, 잘못, 무관심, 배척, 이런 죄들이 그 안에 들어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해주신 하느님을 상기하고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사 1시간 30분 보고 끝. 그래서 종교는 성당 안에 있어야 한다. 안방에 있어야 한다. 안방에 십자가가 있죠. 그런데 제일 좋은 자리에는 TV가 있어요. 그 다음 좋은 자리에 십자가가 있죠. 아무튼 자꾸 하느님을 가둬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제야말로 가장 정치에 민감해야 하고, 교회가 가장 정치에 민감해야 합니다.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은 무식한 겁니다. 또 어떤 때는 악의를 가지고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든 민주주의는 참여입니다. 교회도 중요한 민주주의의 한 축입니다. 민주주의에서 더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명으로, 두루두루 참여해야 합니다. 그런데 참여를 방해하는 이들, 가로막는 불의한 시도들이 있다면 없애려고 저항해야 합니다. 수많은 불의한 시도들, 심지어 부패한 권력이 있다면 끌어내려야 합니다. 이것이 참여의 복음입니다. 


4. 연대성의 원리


연대는 함께 협력하는 것입니다. 어우러짐이죠. 연대성의 원리를 쉽게 표현하면 어우러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유기체 교회론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코린토 1서 12장 12절부터 31절까지입니다. 


하나인 몸과 여러 지체(코린토 1서 12,12~31)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15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6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7 온몸이 눈이라면 듣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온몸이 듣는 것뿐이면 냄새 맡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18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생략) 

25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26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이하 생략)

 

홀로 존재하듯이 살아야 할까

이 말씀은 연대성의 원리에 바탕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다 이겁니다. 우리는 홀로 독립된 저 사람 삶과 무관한 존재가 아닙니다. 저 사람 죽어도 나만 살아도 되고, 저 사람이 불행해도 나만 행복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저 사람이 죽으면 나도 죽을 것이고, 저 사람이 불행하면 나도 불행해 질 것이란 말입니다. 우린 하나의 생명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곧 유기체입니다. 각자 고유한 존재하지만 완전 독립되어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두 거대한 생명으로 이루어져 유기체로 있다는 것입니다. 홀로 존재하듯이 살아서는 안된다는 게 연대성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각각 개개인들이 상호 협력 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solidáris(솔리다리스)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인데, 굳게 결합한다는 것, 우린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이가?"란 말이 정치적으로 악용되기도 했지만, 종교적으로 볼 때, 우린 남이 아니고, 우린 한 몸입니다. 한 가족의 차원을 초원해서 한 몸. 그래서 연대성의 원리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생각하라. 결국 저 사람 고통이 무관해보이지? 아니다. 너가 행복해지려면 저 사람도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게 연대성 원리의 핵심입니다. 

천 조각의 불완전함


그래서 어우러짐이 중요합니다. 보신각 종을 비유로 들면, 머리부분을 탕 때리면 어느 부분이 울릴까요?  (묵묵) 다 울리지! 아랫부분 때리면? 다 울립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의 거대한 생명이고 유기체로 이뤄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은 어우러짐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천개의 불완전함... 직소 퍼즐을 예로 들면, <최후의 만찬>이라는 직소 퍼즐을 보면, 조각 하나하나 보면 천개의 불완전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우러지다보면 한 그림에 빈공간 없이 완전한 하나의 그림이 됩니다. 하느님이 인간세상을 그렇게 창조한 것입니다. 홀로 존재하지 않고 어우러짐으로써 완전해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홀로 한조각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우린 하나의 거대한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혼인잔치의 비유가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모두가 참여하는걸 강조합니다. 어우러짐. 거대한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지 좋았다'고 하셨지만, 오늘날 사회는 수천조각이 불완전함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본래 만드신 세상은 어우러진 세상입니다. 다른 사람 불행에 귀막고 눈감고, 너가 배고프든 말든 상관없이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된 것입니다. 연대성의 원리 안에서 기꺼이 산과 언덕을 깍아서 메꿔주는 것입니다. 너를 채워주는 것은 곧 나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다 망합니다. 


액수가 아니라 격차


지금 핵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게 조금이라도 잘못 되면 우린 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 덜 가지고, 조금 불편해도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이 연대성의 원리입니다. 사람들은 연대성의 원리를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평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산과 언덕을 깍아서 골짜기를 메워주면 되는 데 그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이걸 싫어하고, 차별과 격차를 원합니다. 부자가 되고 싶고 힘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00억이 있으면 부자인데, 이 세상 개념에서는 부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전세계 60억 인구가 100억씩 갖고 있다면 부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세상 개념 안에서 부자의 개념은 내가 1억을 가지고 있어도 상대가 나보다 덜 갖고 있어야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액수가 아니라 격차가 중요한 것이죠. 내가 왕이면 남은 비천해지고 내 밑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왕인 것이죠. 


지옥을 누가 만들었나?


하느님 나라는 개념이 반대입니다. 모두가 부자고 모두가 왕이고, 모두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거부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고, 지옥으로 기어들어갑니다. 지옥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느님? 아니,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격차와 골, 너와 나 사이에 구렁이 만들어져 있어서 건너갈려고 해도 건너갈 수 없다.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격차를 좋아합니다. 그러다보니 산과 언덕을 깎아서 골짜기를 메꿔줄 생각을 안 합니다. 내가 부자가 되려면 저 사람은 없고, 나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차별과 격차를 좋아하죠. 


거지들끼리도 갑과 을이 있다


심지어 가난한 사람 마음에도 그것이 들어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도 부자들이나 대기업을 배불리우는 정당이나 정치인을 찍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난한 이들 중에도 처지는 가난하지만 마음 속에는 똑같은 마음, 격차와 차별을 선택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하철 노숙자들 사이에도 갑과 을이 있어서, "거긴 내 자리야!, 저리가!"라고 툭 차기도 하고, 거지들 사이에서도 갑과 을, 감방 안에서도 갑과 을, 격차 안에서 차별 안에서 존재를 확인하려는 게 세상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점점 더 시간이 갈수록 골만 깊게 만들고 결국 다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연대가 될까


그래서 연대성의 원리는 우리는 하나다. 이 모든 것을 가족의 틀 안에서는 다 이해되는 데 그 울타리를 뜯어내면 이해하지 못하고, 남의 것 빼앗고 무관심하게 눈감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연대성의 궁극은 무엇입니까? 바로 어우러짐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연대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죄를 짓고 그럴 때 다 없애고 새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서 오신 것이 바로 최고의 연대성의 원리입니다.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저 높은 곳의 하느님. 인간과의 격차가 가장 큰 창조주께서 당신이 그 격차를 없애고 나와 똑같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연대입니다.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와 똑같이 되신 것이 연대성의 극치입니다.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창조주께서 이걸 당신이 없애시고 똑같이 되신 것. 차별과 격차를 없애시고. 그런 모습을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되시고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 바로 연대입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희생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냥 저절로 연대가 될까요? 앞서 말한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처럼 부자들이 더 힘을 써줘야 합니다. 부자들이 내려가 줘야합니다. 연대의 원리는 가난한 이들보고 "너희들이 올라와!" 한다고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부족한 것을 남은 사람들이 끼워줘야 채워지는 것입니다. 연대는 그렇게 밑으로 내려가는 사랑 안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마무리하면서


이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모습. 공동선, 재화의 보편적 목적의 원리, 보조성의 원리, 참여, 연대성의 원리 등 이 모든 내용들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서로 사랑하십시요." 바로 이겁니다. "내가 사랑한 것처럼, 자기 이웃은 몸처럼 사랑하십시요. 가진 것을 줘라. 먹을 것을 줘라. 받아먹어라. 이 내용이 다 사회교리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 범위를 확대시켜라. 그래서 가족들에게 하는 그것을 바로 이웃에게도 하라는 게 지금가지 내용의 요약입니다. 가족들에게 적용하고 실천하던 이 모든 원리들을 이웃에게도 적용하고, 울타리 넓혀라. 가족끼리 하고 있는 걸 이웃에게도 하라는 것이 오늘 강의의 요약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용 23장의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其次는 致曲 曲能有誠이니, 誠則形하고, 形則著하고, 著則明하고, 明則動하고, 動則變하고 變則化니, 唯天下至誠이아 爲能化니라


기가 막힌 얘기입니다. (다들 웃음) 몰라요. 이거? 이것은 영화 <역린>에 나오는 얘기이고, 그 주제입니다. 뜻은 이렇습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라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자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 정성을 다하자는 것. 여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공동선의 원리, 연대성의 원리 그러니까 "그래 그거야!" 하면서 거창하게 '남북회담'이나 '6자회담'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모든 것은 바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주위를 밝히라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밝히라는 게 아닙니다. 촛불 하나 켜면 내 앞과 뒤에 있는 사람들을 밝힐 수 있습니다. 작은 것에 정성을 다할 때, 결국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왜 망했습니까?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망한 것입니다. 우리가 대한민국란 나라를 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버티는 이유는 어딘가에 의인 열 명의 역할을 누군가가 있기때문입니다. 작은 촛불 켜고 있는 이들이 있기때문에 안 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4년 4월 30일 개봉. <역린> 누적관객수 3백85만명. 영화는 정조 즉위 1년, 왕의 암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엇갈린 운명과 역사 속에 감춰진 숨가쁜 24시간을 담고 있다. 100억원이 총 제작비가 투입되어 이에 따른 손익분기점은 보통 관객수 400만명 이상이어야 하지만, 흥행 선전을 위한 의도였는지 몰라도 320만이 돌파된 5월 13일경, 손익분기점 관객을 돌파했다는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나 하나 죽인다고 세상이 바뀌나?


빵 다섯개 물고기 두마리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이백데나리온 어치의 빵이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으로 옆 사람은 먹이라는 것이지, 오천명을 먹이라는 게 아니다. 나같은 사람 천명이면 오천명을 먹이는 것. 내가 열명을 먹일 수 있으면 오백명만 있으면 오천명을 먹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것에 충실해야 합니다. 영화 <역린>의 말미에 보면, 정조대왕이 나쁜 놈 '광백'(조재현 분) 인간백정의 소굴을 찾아가서 아이들을 구출합니다. 그 때 광백이 뭐라고 하냐면, "아이쿠, 나 하나 죽일려고 왕까지 왔네? 나 하나 죽인다고 세상이 바뀔 거 같아?"라고 말을 하자 마자 정조대왕은 그를 확 죽여버립니다. 이 마지막 장면이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 하나 죽인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은 것 하나에도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너부터 먼저 죽이자!"라고 한 겁니다. 


세상을 바꾼다고 거창한 것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내 앞의 작은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나가는 겁니다. 사랑이란 옆 사람에게 던지는 작은 미소, 옆에서 주눅든 사람의 등을 두드려지는 것. 하늘의 태양이 될 생각을 하지 말고 작은 촛불이 될 생각을 하기 바랍니다. (끝)


2015-3-25 수요일 저녁 10:09 종료



2015년 3월 25일(수) 하기동성당 밤 10시 09분. 대전교구 사회교리학교 제13기, 4주차 수업 [사회교리의 원리]의 두번째 강의가 끝났다. 이 강의는 필자의 기록을 토대로 재정리된 것으로 실제 강연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강의신부님의 의도와 맥락에서 벗어난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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