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생활] 강의


김어상 전 서강대 교수 | 
2015.3.30(월)


무한한 욕망, 유한한 수단

인간의 욕망은 한 없이 무한한데, 충족수단은 유한하기때문에 거기에 경제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희소성때문에 경제학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 하버드 대학교나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는 경제학 교수를 더 이상 뽑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경제'가 등장한 원초적 원인은 '원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는 희소성이란 게 없었고, 처음부터 충분하게 모든 것이 널려 있었는데, 원죄를 짓고 그 결과로 '경제학'이 학과로 등장한다는 것이죠. 경제학이 왜 생겼나? 원죄를 짓고 낙원에서 추방된 이후로, 남정네들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도 일을 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즐겁고 보람있는 일이었지, 뭔가가 모자라서 했던 것은 아니란 것이죠. 

모든 것은 원죄의 결과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원죄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경제생활과 우리 노동이 그 자체로 괴로운 것이 된 것입니다. 미국이나 영국 등지의 순수 경제학계에서 현재 반성하고 있는 것은 우리 교회의 내용과 그대로 연결이 됩니다. 왜 경제학이 생겼을까? 영국의 경제학 교수는 그것이 '원죄의 결과'때문이라고 말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불교나 천주교나 다 마찬가지 입장일 것입니다. 불교의 내용에서 보면, 처음에는 세상에 죄가 없었고 그냥 땅만 파먹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만나를 먹는 식으로 땅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나서 땅을 먹는다는 것, 흙을 먹는다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지요. 불교 측에서 '원죄'란 표현을 쓰지는 않지만, 인간의 죄, 잘못으로 인하여 풍성하고 풍부한 것이 줄어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경제생활도 원죄의 결과이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원죄의 결과로 현재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죠. 그러니까 '경세제민'이란 말은 'Economics'란 단어를 동양말로 번역했던 것이라기보다는, 그 바탕이나 내용이 논어, 창세기, 불교적 관점에서도 뭔가 인간이 잘못을 저질렀기때문에 그 때부터 생긴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제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와 직결된 것이지만, 신앙과 무관하지도 않은 것, 즉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제와 윤리는 별개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박한 세상 속에서 경제와 윤리는 전혀 별개의 두 분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문으로 경제와 윤리를 칠판에 쓰고서) 어찌보면 이것을 결부시키면 정신병자인가 생각할 수 있고,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 본다면, 얼음과 불의 관계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레오 교황의 첫번째 회칙 <새로운 사태>은 가치중립적인가?

그런데 왜 이런 책이 나왔을까요? 비참한 노동자의 산업혁명 이후 생활에 대해 사목자로서 썼지만, 그 내용은 처음부터 경제와 윤리는 별개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초등학교부터 배우는 것은 경제는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학문은 처음부터 '가치'에 대해서 일체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요? 학문이란 가치중립이어야 할까요? 객관성을 갖기위해서?

이제 우리는 레오 13세 교황이 <새로운 사태>라는 회칙을 쓰시면서 그 배경으로 "그것이 잘못된 것이다!"라는 것, 즉 공부했다고 하는 사람이 자기들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갑질하기 위해서 '학문은 가치중립'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경제학이란 학문이 중립적인가요? <새로운 사태>란 문헌의 발표에 대해서 독일 쪽에서 처음으로  <경제 이성의 전환>이란 논문을 쓰신 분이, "경제야 말로 가치 자체를 다루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박사학위를 합니다. 경제학의 기본 개념은 무엇일까요? 언뜻보면 무미건조한 개념으로 보입니다. 시장 가격이 얼마인가? 물가는 얼마인가? 물가가 마구 뛰어오르면 인플레이션되고, 그런 게 가치와 무관한 것은 아닐까? 

고용은 가치중립적인가?

그리고 고용에 대해서 말하자면, 지금이라면 고용이 가치와 직결된다고 느끼죠. 멀쩡한 사람이 사람구실을 못하는 것이 자신의 일자리입니다. 고용이 되어 있으면 떳떳하게 구실을 하고, 대학을 졸업해도 대학교 5학년 6학년이 되어도 일자리를 갖지 못하면, 남의 눈치를 보게 되고, 그런데 과연 '고용'이란 것도 가치중립적인가? 사람이 일자리를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를 생각했을 때, 그것을 '가치중립'의 영역에서 다룰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것이 경제학의 매우 기본적인 개념입니다. 

인플레이션의 일화

2차 대전 후에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2차 대전 이전에 두 형제가 살았습니다. 동생은 부지런하고, 형은 게으름뱅이였습니다. 그 형은 아버지, 엄마, 동생에게까지 신세를 지면서 맥주만 마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기 스스로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보았을 때, 형과 동생은 매우 대조적인 상황으로 전개될 것이죠. 그런데 전쟁이 났습니다. 인플레이가 10%, 20%가 된 것이 아니고 몇 천 %가 되었습니다. 걷잡을 수 없은 인플레이션에서 그동안 여태까지 몇십년을 저축해서 돈을 모았는데, 조그만 점포라도 내려고 했는데, 엄청난 돈을 찾았지만, 그 단위는 엄청나지만, 가치는 형편이 없어져버렸습니다. 돈 조각이 전쟁 이후에, 종이조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반면에 형은 게을러빠져서 동냥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그는 뒷뜰에 던져놓았던 잔뜩 모여있던 빈 술병들이 엄청난 돈으로 변할 가능성이 생겨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동생은 무일푼이 되어버린 셈이고, 형은 백수건달이었는데, 맥주병의 가치가 올라가면서 큰 소득을 얻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랬을 때, 경제학의 용어로 등장하는 '인플레이션'은 가치와 무관할까요? 이 일화에서 보면, 인간성 자체의 붕괴를 가져오는 경험을 동생은 하게 됩니다. 

경제학 용어들은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기본 개념들이 하나같이 가치가 내재된 것인 것입니다. 물가, 고용, 완전고용 그런 정도로만 얘기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인간자체, 인간성 자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울리히(피히트너 울리히?, 정확하지는 않다)는 뭐라고 말을 하냐면, 기본 개념만이 아니라, 예를 들어, 공급이 부족해서 삶이 핍박해졌다면 해결방법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공급을 증가시킨다면 외국에서 수입해서 물가를 안정시킬 수도 있듯이, 공급을 늘리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하면 일자리를 창출해야 하는가가 중요한데, 그런 방법에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러한 여러가지 방법 중 어떤 것을 우리 사회가 선택할 때 가장 적절한 경제적 행위인가? 하나 밖에 없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가지 중 어떤 것이 최우선적으로 한국사회에 가장 효용성이 있을까에 대한 걸 판단해야 합니다. 그 때 판단기준은 무엇인가? 그럴 때에도 '가치'가 등장합니다. '인간'에게 가치를 둘 것인가, '물질'에 가치를 둘 것인가? 그래서 가치를 개입시키지 않으면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경제학이란 학문이 왜 등장하는 겁니까? 가치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쓰고 있는 안경을 예로 든다면, 잘 보게끔 하려는 것이죠. 그것은 잘 보고 판단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무미건조한 과학이라고 해도, 학문의 존재이유는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즉 인간사회의 올바른 실현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속적으로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부를 가지고 사회를 맘대로 만들려고 '학문은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의사, 변호사 등 어려운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독점적인 지위의 유지를 위해서 자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땠을까요? 똑같았죠.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똑같았습니다. <새로운 사태>에서 레오 13세는 밖에서도 잘못했지만, 우리도 잘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세시절 교회에서도 멀쩡한 사람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마녀'사냥을 한 적이 있습니다. 

1931년의 <40주년>은 1929년 경제대공황이 있었구나. 은행 문닫고 기업이 도산하는 등, 그 바탕에서 사회질서 엉망이로구나 그래서 두번째 문헌이 40주년 회칙이 나왔습니다. 1931년입니다. 교회에서 40년은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팎의 변화를 담은 것입니다. 한 세대가 지났으니, 40주년은 그 '40'이란 뜻에서 의미가 내적으로 있고, 당시는 경제가 피폐해진 시절이었습니다. 노동헌장이라고 알려진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에 이어서 두번째로 <40년>이 나왔습니다. 그 때 각국에서는 [사회질서 재건의 회칙]이라고 불렀습니다. 사회질서가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연대성의 원리가 밑바탕이 되고, 보조성의 원리가 나왔습니다.

인격성, 연대성, 보조성, 공동선이 희미하게 나와있지만, <40주년>은 75문항에서 보조성의 원리를 아주 자세히 서술한 것입니다. <지상의 평화>라는 1963년 문헌에서 비로소 밖에서 이상하게 번역하게 나오니까, 아예 바티칸에서 문항을 붙여주자라고 했고, 1891년 새로운 사태. 노동헌장이라고 기본바탕이고, 1931년 40주년, 1961년 어머니와 스승... 세속사회, 특히 경제사회는 획기적 탈바꿈을 하고, 그런 때마다 교회가 얘기를 합니다. 교회에 몸담고 있는 평신도들이 자기 삶에서 실천해볼 수 있을까?

[어머니와 스승]에서는가난과 풍요라는 물질과 소비생활에대해서 어떤해석을 내렸을까?  창세기부터 우리가 가진 모든 성경과 [새로운 사태]부터 [복음의 기쁨]까지 사람이 낭비하고 물쓰듯 쓰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보면 끊임없이 잘못하고 회개하고 용서받고 그런 반복은 지금도 똑같은 것입니다. 이 점을 경제생활이란 측면에서 보는 것 보다는 최대 현안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교회 안팎을 통해서. 



2015년 3월 30일(월), 가톨릭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진행하는 제109차 사회교리학교의 아홉번째(9주차) 강의가 열렸다. 서울 중구 명동2가 1번지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에서 열린 9주차 강의는 김어상 전 서강대 교수가 강사로 나섰다. 강의 주제는 <경제생활>이고 강의는 지루하게 늘어졌다. 


위 내용은 강의 정리자의 기억과 기록을 바탕으로 재편집된 것이므로 실제 강의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2시간동안 김어상 전 서강대 교수는 [경제생활]을 주제로 하는 강의를 가톨릭회관에서 했다. 이 강의는 [사회교리] 기본과정의 9주차 강의였기때문에 수강생들은 기본적으로 [사회교리]에 대한 입문과정을 벗어나는 순간에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지만, 강의 내용은 '개론적'이고, 강의속도는 느렸으며, 필자의 개인적 입장에서는 가장 별로인 강의였기에 노트 정리를 포기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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