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일 신부님의 [복음의 기쁨] 강의 (4)


<복음의 기쁨>은 어떤 책인가



민경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바보의 나눔 재단 사무총장)

2015.3.9(월) 2교시 저녁8:06부터,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


 

<복음의 기쁨>은 신학적이라기 보다 사목적인 책입니다. 읽기 더 편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 번역된 부분도 꽤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 능력이 되시는 분들은, 예를 들어 박동호 신부님은 번역을 새로 하셨어요.

 

교황 권고가 아니라 사도 권고


이것은 회칙이 아니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의 지체들을 대상으로 수신자들로 정한 것입니다. 복음화의 원천이 복음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왜 이걸 교황 권고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탈리아 말인데, 영어로도 그런데, 사도의 권고문입니다. 사도좌의 후예로서 한 권고입니다. 교황님에 대한 표현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권위주의적 표현입니다. ‘교종이란 표현을


宗과 從


장익 주교님은 마루 종(宗) 혹은 으뜸 종(宗)자를 쓰셨고, 강우일 주교님은 따를 종(從)자를 쓰셨습니다. 그러니까 장익 주교님은 교종(敎宗)이라고 한 것이고, 강우일 주교님은 교종(敎從)이라고 한 것입니다. 종도(宗徒)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사도를 예전에는 종도라고도 했죠. (여기서 민경일 신부님은 강우일 주교님이 교종(敎從)이란 표현을 선택했다는 이유를 설명하며 '종도'를 徒라고 쓴다고 부연설명했다. 그러나 국어사전에서 종도의 한자는 宗徒이다.)


그런 의미로 따를 종 자를 쓰셨는데어떤 행보를 보았을 때, 황제라기 보다는 따라가는 제자의 모습이 더 어울려서 교종이 와닿기도 하는데, 교종, 교황을 떠나서 사도좌의 수장, 로마의 주교 등 여러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로마 교구장이 원래 시초잖아요. 그래서 어쩔 때는 이런 이름을 쓰기고 하고 저런 이름을 쓰기도 하는데, 이 책은 사도좌의 후예로 쓴 것이기 때문에, 솔직히 사도의 권고라고 하는 게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사도의 권고는 원래 신학적인 글이라기 보다는 본성상 사목적인 글입니다. 보통 시노드(주교 대의원회의)에 대한 답변서로 많이 쓰이기도 하고 혹은 시도느 없이 쓰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것은 이 분이 교종 선출된 것은 벌써 2주년이 되었어요. 재작년 20133월이죠. 벌써 2주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201210월에 주교 시노드가 있었죠.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시노드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서로 쓰신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의 많은 부분들은 교종 프란치스코 이전에도 많이 준비되었지만, 교종님께서 직접 쓰신 흔적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2015년 3월 9일(월) 저녁 8시 03분 촬영 @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 입구

 

목차는 책을 보면서 설명을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복음의 기쁨 [1]

1장 교회의 선교적 변모[19]

2장 공동 노력의 위기 속에서[50-51]

3장 복음 선포[110]

4장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176]

5장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259-261]

 

제일 처음에는 <복음의 기쁨>으로 크게 나오고, 서언이 나오고, 그 다음 첫 번째 (1) 교회의 선교적 변모가 있고, (2) 공동의 노력의 위기 속에서. 이것은 지금이 어떤 상황이냐를 지금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일이 있나 그래서 배척의 경제 안돼, 돈의 우상화 안돼.라고 주욱주욱 얘기하는 겁니다. 이 책은 현대 세계의 복음화에 대한 글들입니다. 현대 세계를 먼저 얘기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복음화를 얘기하는 데 먼저 누구에게 해야 합니까? 사목 현장에서 일하는 일꾼들이죠. 주교님들과 신부님들에게 하는 일갈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 (3) 복음선포. 누가 하나? 하느님 백성 전체가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성직자들을 주로 향하고 있어요. 강론까지 말하고 있어요. 성직자들이 하는 것이라서, 조금 센 말들은 성직자를 향한 것입니다. 지난 해 방한하셨을 때에도 프란치스코 교종님은 한국에 오셨을 때도 다양한 모습을 보이셨어요. 굉장히 따뜻한 모습, 다정하게 아파하시는 모습, 또 어떤 때는 선생님처럼 무서운 모습. 특히 아이들 만났을 때는 그렇게 자상한 할아버지가 없을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셨고, 세월호 유가족 등을 만날 때는 그분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지요


교종 프란치스코의 다양한 표정


그런데 딱딱한 모습을 보여주신 적도 있습니다. 어디냐면, 수도자 만남, 그리고 더 세게 한 곳은 주교회의 가서 제일 센 말씀 하셨습니다. 청와대에서도 부드럽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청와대에서는 평화는 정의의 실현이라는 사목헌장의 말씀을 다시 한번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교회의에 가서는 한국교회가 번영의 신학의 위험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수였겠지만, 주교회의에서 하신 연설문의 한국어 번역본을 첫 번째 올릴 때는 그 대목을 빠트렸습니다. 공식적으로 실수라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교리문헌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 다음에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4장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176])이라고 해서, 이른바 우리가 사회교리의 측면에서 볼 수 있는 내용들이 주욱 담겨져 있습니다. 다만 교종께서는 이 문헌이 사회교리 문헌은 아니라고 이야기를 분명히 하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교구의 가톨릭 사회교리학교에서 이 복음의 기쁨을 빼놓지 않고, 오히려 사회교리 문헌이었던 <진리안의 사랑>을 빼놓고서 이것을 말씀드리는 것은 여기 이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4장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176]), 특히 현대 세계라고 짚어본 위기상황이 우리 사회교리에서 다루는 부분이기 때문에 다루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선포자(5장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259-261])가 주욱 나갑니다현대 세계에 대해서 주욱 진단하고, 그것을 할 사람들이 어떤 이들인지, 복음선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게 어디로 가야하는지 바로 사회로 가야 하고,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하나?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것은 기도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죠. 마지막에 어머니 즉 성모님과 함께 (5복음화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해야 한다고 맺고 있습니다.

 

주된 주제 7가지


그래서 주된 주제는 17항을 보시면 7가지가 나옵니다.


) 교회 개혁과 선교활동

) 사목 일꾼들이 직면한 유혹

) 교회, 모두 복음을 전하는 하느님 백성 *

→ 하느님 백성 전체로서 이해되는, 복음화하는 교회

) 강론과 그 준비

) 가난한 이들의 사회 통합 *

→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회적 포용

→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을 포용하는 문제 (박동호 신부님)

) 평화와 사회적 대화

) 선교 영성의 활성화 *

→ 복음화 사명의 영적 동기

→ 복음화 사명 수행을 위한 영적 동기들(박동호 신부님)

 

이 중에서 제가 제목을 다시 쓴 것들이 있습니다25쪽에서 17항에 가, 나, 다, 라, 마, 바, 사가 있는데요. 그 중 제가 몇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별표(*)를 쳐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 교회, 모두 복음을 전하는 하느님 백성이것은 우리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려워서 하느님 백성 전체로서 이해되는, 복음화하는 교회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왜냐면, 교회가 무엇인가라고 했을 때, 교회는 바로 하느님 백성 전체로서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inclusion과 exclusion


그 다음에 ) 가난한 이들의 사회통합이라고 책에는 나와 있는데, 그것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회적 포용이라고 번역을 제가 새로 했습니다. 이것은 사회통합이 아니고, 영어는 inclusion(포함)이고, 이탈리아어로는 inclusione(인끌루시오네)입니다. 굳이 영어까지 안 보더라도, 앞쪽에서 현대 세계의 문제들, 2장에서는 현대 사회의 경제정의가 이뤄지지 않는 걸 말하면서, 문제점 중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배척'의 경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배척'이라기보다, '배제'가 맞습니다. 그래서 배제의 경제는 안된다. 그 반대로써 Exclusion하면 안되고, Inclusion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대구법(對句法)을 쓰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배척이라고 얘기하고, ‘통합이라고 얘기하면 댓구가 맞지를 않습니다.한 쪽에서 밀어냈으니까 다른 한쪽에서 끌어당겨줘야하니까, 의미적으로 보았을 때, 이것은 포용정도로 번역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배척’의 경제라기보다는 배제’라는 표현을 사회학에서 더 많이 씁니다.

 

포용과 통합은 다르다 


사회적 포용은 UN 등 다른 사회에서도 많이 쓰는 겁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의 사회통합>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회적 포용> 또는 박동호 신부님이 번역한 것처럼,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을 포용하는 문제>. 박 신부님은 아예 이것을 풀어서 번역하셨습니다. 여기서도 포용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통합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복음화 사명의 영적 동기


그 다음에 ) 선교영성의 활성화라기 보다는 복음화 사명의 영적 동기라고 다르게 번역했고요. 뭐냐면 영어로 Spiritual Motivations for Mission, 선교를 위한 영적 동기, 복음화를 위한 영적 동기 이런 것인데, ‘선교영성의 횔성화’? 약간 이상합니다. 이것은 Motivation이라서 영적인 동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데, 그래서 박동호 신부님도 마찬가지로 이 부분을 <복음화 사명 수행을 위한 영적 동기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제가 번역한 것은 <복음화 사명의 영적 동기>로 쓰면 좋겠다. ‘선교 영성의 활성화이런 말 없어요, 활성화라면 Activation 이런 단어가 있어야 하는데, 아니고, Motivation입니다. ‘동기입니다.

 

<복음의 기쁨>의 주요 메시지


이제 문헌의 주요 메시지는 뭔가? 복음의 기쁨은 도대체 무엇인가? 복음의 기쁨은 온 세상에 기쁨이 가득차도록 하는 복음 선포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복음 자체가 기쁜 것이니까요. 복음은 기쁜 소식이란 뜻이죠. 복음의 기쁨은 풀어서 말하면, 기쁜 소식의 기쁨이죠. 중의적 표현이긴 하지만, 우리 말로는 기쁜 소식이라고 했지만, 원래 이 제목은 가우디움하고 에반젤리, 에반젤리움이 복음이죠. 영어로 굿뉴스로, 또는 가스펠로, 굿 스펠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죠.


그 자체 기쁜 소식이란 뜻이 있는데, '에반젤리움'은 기쁨이란 표현보다는 하나의 특정 용어, 고유명사 되어버렸기 때문에, 우리 말로 복음을 그대로 기쁜 소식이라서, 기쁜 소식의 기쁨이지만, 그 자체가 기쁜 소식이라서 복음화 자체는 기쁜 것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화, 선교, 보통 '선교'라는 용어보다는 '복음화'라는 용어가 더 사용하는데, 복음 자체는 기쁜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것을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고 힘이 없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 자체가 기쁜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메시지는 두가지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 책에서 전반적으로 말하는 것은 교종께서 말씀하시는 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교회의 내적 쇄신이고, 하나는 앞으로는 인류가 이야기해야 할 것들. 그러면서 경제문제와 평화문제를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회교리 문제는 경제문제와 평화문제다


여태까지 이전의 사회교리 문헌들을 훑어드릴 때도 말씀드린 것처럼, 대부분의 사회교리는 평화와 경제문제가 대부분입니다. 지금까지 보시면, 첫 번째 <새로운 사태>도 경제문제와 평화 문제가 대부분입니다. 여기서도 다시 한번 말하는 것이죠. 교회가 그렇게 부르짖어도, 세상 경제정의와 평화는 오지 않았다는 것. 그 다음에 복음 선포가 기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뻐야 한다는 것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고, 가까운 미래에 사목적 지도와 안내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된다


또 선교의 내적 동기로 기도의 삶이 강조되고,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 안된다. 이거 굉장히 중요한 표현이니다. 유엔이 2015년 올해 9UN 총회 때, 뭔가 굵직한 것을 발표할 예정이랍니다. 20009UN 총회 때 한번 했었어요. 이른바 유엔의 새천년 선언. 밀레니엄 디컬러레이슌이라고 하는 걸 발표했습니다.


20000918_UN_Millenium Declaration.pdf


2015년까지 빈곤을 줄이자?


그것은 지구촌이 너무 가난하니, 지구촌의 빈곤을 반으로 줄이자는 선언을 전세계의 정상들이 모인 UN 총회에서 한 겁니다. 유엔의 회의들이 항상 정상회의는 아닙니다. 그런데 적어도 5년에 한번은 정상회의를 합니다. 2000, 2005, 2010, 그리고 2015년에 올해 9월에 총회를 정상회의 진행할 차례인데, 2000년에 전세계 정상들이 모여서 약속한 것은 전세계 빈곤을 줄이자, 언제까지? 2015년까지라고 약속했어요. 이제 그 한계가 왔기 때문에, 2015년 이후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그 발표를 올해 9월에 한다는 것입니다


불평등에 태클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이미 준비문헌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재작년 8월에 나왔던 반기문 사무총장의 보고서에서 유엔 공식문헌 중 최초로 불평등에 태클을 걸어야 한다.라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연속으로 콤보로 two 콤보로, 교종님께서 바로 불평등의 경제는 안된다. 불평등에 대해서 제대로 또 말씀하신 겁니다. 불평등이 악의 뿌리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옛날에는 불평등 직접 이야기하는 게 너무 진보적이지 아니냐? 국제사회에서도 그런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2015년까지 가난을 없애자고 말하면서도 불평등을 얘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이번에는 그게 들어가지 않을까? 그런데 2015년에 공식적으로 들어갈 때, 벌써 우리 교종님께서 그런 얘기 하셨으니, UN 문헌에 그게 들어가진 않겠지만, 교종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걸 우리는 아는 거죠.

 

선교복음화에 대해


또 선교 복음화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합니다. (23페이지) 14항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의무를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쁨을 나누는 사람, 아름다운 전망을 보여주는 사람, 그리고 풍요로운 잔치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개종 강요가 아니라 매력때문입니다. * 베네딕토 16세 미사 강론(2007.5.13.) 인용.

 

그 이야기는 뭐냐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가 먼저 기쁨을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먼저 기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복음을 나누는 사람이고 그런 걸 줄여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기뻐요. 우리는 복음을 알고 있기때문에, 그리고 그 복음을 살고 있기때문인 겁니다. 그런 내용을 담고 있고요. 특히 이것은 개종강요가 아니라 매력으로 이루어진다. 교회가 성장한다


아이를 성당에 다니게 하는 방법


저는 이것을 간혹 성당에 안다니는 자녀들을 성당에 다니도록 강요하는 부모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성당에 다니는 것은 강요가 아니라 매력 때문입니다. 교종 프란치스코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엄마가 아빠가 성당다니고 하느님 믿는 사람으로 가정 안에서도 하느님 믿는 사람으로서 매력적인 모습을 풍기지 않으면 어떤 자녀가 그 부모를 보고, 성당에 다니겠어요? 주일에만 성당 갔다 오고 6일 내내 싸우고 있는데? 그렇죠? 물론 여기 계신 분들은 안 그렇겠죠. 지금 뭐, 자수할 필요 없습니다. 저는 고해 신부가 아니기 때문에, 또 참회예절하는 것도 아니고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본당을 오랫동안 떠나 있어서 감을 잃었을지 모르겠으나, 자녀들에게 너무 강요하지 마세요. 먼저 부드럽게 사랑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시면 언젠가는 다닐 것입니다. 좋아보이면, 먼저 매력을 보여주자는 얘기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14항에 있습니다.

 

현대 세계의 위기


그리고 현대 세계의 위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배척과 배제의 경제, 사회적 불평등, 소비주의 경제이론, 금융주의의 지배에 대한 경고,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낙수효과 이론 등은 다 틀렸다고 말하는 겁니다


다시 한번 군비경쟁은 어떠한 해결책이 안된다. 거짓된 희망을 준다. 제주도 강정에서 거짓된 희망을 준다는 것도 다시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가톨릭 신자들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아무리 국가가 한다고 해도, 옳지 않은 그리고 국민에게 뻥을 치는 제주 강정기지 건설을 인정할 것인가? 교회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린 그런 가르침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화적인 도전, 세속화, 도시화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다는 것


도시화라는 문제


이것도 좀 어려운 이야기지만 예전에 2천년도에 UN이 가난을 없애자고 얘기할 때는 그 때까지는 '도시화'라는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2013년도에 제가 반기문 사무총장은 2015년 올해 나오는 문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도시화의 새로운 도전'에 대해서도 우리가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비슷한 측면들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들은 교회만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교회와 사회가 지금 현재 세계에서 직면한 진짜 문제로구나. 우리는 못 느낄지는 몰라도, 도시화라는 것, 산업혁명 이후 유럽이 자급자족 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옮겨갔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도 새마을 운동의 여파가 그런 것입니다


통일벼의 해악


농촌이 자급자족 경제에서 시장경제로 바로 옮겨가면서 왜 그렇게 빚을 많이 지게 되었냐면, 시장경제로 바로 편입되면서, 내성이 없었고, 준비할 시간이 없었죠. 옮아가는 단계 없이 바로 바뀐 것입니다. ? 벼를 바꾼 것. 통일벼로. 지방공무원들은 워커로 밟으면서까지 통일 벼 쓰게, 다른 벼 못쓰게 했다고 합니다. 통일벼는 자급자족을 위한 쌀이 아닙니다. 시장용 쌀이어서, 수확량이 많지만, 병충해에 약하고, 화학비료를 쓸 수 밖에 없습니다. 농약을 써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맛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고유의 장 문화. 된장을 발라서 이런 된장을 발라서 맛도 없는 통일벼. 맛도 없어서 안할려고 했지만 정부에서 강제보급을 했죠. 통일벼는 관리에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농민들이 농사짓고 먹고 남은 것을 갖다 팔았는데, 이제는 다 팔고 남은 돈으로 먹을 것을 사서 먹는 겁니다. 자급자족에서 시장경제로 바뀐 것이지만, 그런 만큼의 대비를 못한 겁니다.


최근 10년간 쌀가격 고정, 비료는 3배 가격상승

 

최근 10년 사이에, 쌀 사서 드시죠? 쌀 가격 올랐습니까? 안 오르죠? 심지어 최근 10년동안 20kg 하나에 4만 얼마인데 미세하게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에 비료는 약 3배 가량 올랐습니다. 물가상승율은 얼마였을까요? 쌀값이 물가 만큼은 올라야 농민이 살잖아요? 그게 농가 소득인데, 그런데 쌀값은 동일한데 물가는 오릅니다. 그러면 소비는 더 많아지는데, 비료. 도시 사람들과 농촌 사람들의 소득에 대한 투자는 어떻게 차이가 납니까? 도시 사람들은 기껏해야 직장 왔다갔다하며 차비하고 점심값, 대체로 이게 투자비의 다 입니다. 그런데 농촌 사람들은 훨씬 많이 합니다. 벼농사 시작할 때 씨앗을 삽니다. 농기계 사거나 빌리거나, 사람 사야 하고 비료 사야 하고 물값 대야 하고. 똑같은 소득을 가졌다고 똑같이 남는 건 아닙니다.


주교와 사제들을 향한 권고

 

그리고 이 부분이 신부님들이 잘 얘기 안하려고 하는 겁니다. 주교와 사제들을 향한 권고 76-109항. 제가 권고라고 썼지만, 혼내고 있어요. 특히 개인의 자유와 휴식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고 있다(78)’는 현상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 신부님들 알고 계십니까? 웃으시는 분들은 경험이 있으신 분들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일부 신부님들이 지구에서 신부님들 어디 가시면서, 지구연수하면서 일본으로 동남아로 가십니다. 가실 수도 있지만, 너무 여가생활에 집착하는, 월요일에 장례가 나면 안하려고 하는, 월요일은 신성시되는, 그렇게 너무 개인의 자유에 지나친 관심을 갖는 그런 신부님들이 간혹 가다가 계십니다. 이 부분은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이 본문 내용은 사목자들, 주교님과 신부님들을 상대로 하는 겁니다.

 

88 실천적 상대주의의 위험. 복음의 현실주의의 사회적 측면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 다른 이들의 육체적 현존과 끊임없이 만나야 한다는 겁니다. 신부가 성사집전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육체적 현존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90 "번영의 신학"의 위험

이것은 주교회의에서 다시 이야기한 것입니다. 왜 또 얘기하신 것인가요? 이것이 2013년 말에 나왔는데, 내가 작년에 말했는데, 한국교회에서 그런 모습 안보여서 말씀하신거죠. 다시 여기서 조심해야 한다고, 한국교회는 번영의 시기가 더 있으니까 하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93 영적 세속성에 대한 경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복음의 기쁨>에도 있는 표현이고, 주교회의에서도 다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말이냐면, 신부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면 정말 가난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가난이란 게 물질적 가난, 정신적 가난도 중요합니다. 왜? 욕심을 갖지 않는게 중요하니까요


가난한 사람을 위한 가난한 교회


예를 들면 강남의 OOO동 일대는 주민의 25%가 성당에 다닌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박OO 신부님 본당 지역은 복음화율이 4% 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통상 복음화율이 전 국민의 10%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울 안에서도 그렇게 편차가 큽니다. OOO동과 OOO동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상대적으로 좀 더 경제수준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박OO 신부님이 계셔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계층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교회는 굉장히 많이 중산층 이상, 부유층의 교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일부러 교황님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인데, 실제적으로 무슨 일이 있는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신부님에게 라면 한끼 대접하고 싶은 가난한 사람


예를 들어서, 가난한 사람이 신부님한테 밥 한끼 대접하고 싶어서 신부님을 찾아갑니다. 가난한 사람도 그럴 수 있습니다. 라면 한 끼를 대접하고 싶어서, 혹은 이 분이 신부님께 라면 한끼를 얻어먹고 싶을 수도 있는거죠. 성당을 찾아갔는데, 신부님이 없어요. 어디가셨어요? 하니까, 없다고 합니다. 골프치러 나갔다고 합니다. 골프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 혼자 골프치러 가지 않습니다. 본당의 누군가가 모시고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반복되다 보면,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내가 신부님을 만나려면 골프를 모셔야 하나? 호텔에서 먹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면 성당에 발걸음을 옮길 수 없고, 신부님 주변에 다가갈 수가 없게 됩니다


신부님의 항변은 정당한가


신부님들이 아니 내가 다른 사람들보고 늘 오라고 그랬어. 그런데 오지 않았어. 라고 이야기했다고 하는 게 거기서 끝난 게 아니라, 실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오지 못하게 하는 행동을 스스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스스로 그런 교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다른 데에서 강의할 때 복음의 기쁨 갖고 얘기할 때, 신부님들이, 그리고 한국교회가 우리가 다 좋아하는 교종 프란치스코께서 말씀하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기를 바라신다면, 신자 여러분이 도와줘야 합니다. 뭔가 신부님에게 밥 한그릇이나 뭔가를 대접하실 수 있는 분들은 그러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조금이라도 여유있는 분들이 신부님을 점유하고 있는 동안, 신부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갈 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신부가 가난한 이에게 갈 수 없는 이유


선물도 주지 마세요. 진짜로. 저한테도, 다른 신부님한테도. 적어도 신부들에게 교구가, 적어도 서울교구는 먹고사는데 지장 없게 해 줍니다. 좀 죄송한 이야기지만, 요즘처럼 직장 구하기 힘든 세상에서, 제가 직장에 다니는 건 아니겠지만, 교회가 신부들을 먹여 살려줍니다. 왜죠? 먹여살려줄테니 열심히 일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정의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신부님 오늘 저희가 좋은 거 한번 대접해 드릴게요.”라고 하면서 좋은 데로 끌고 다니면, 가난한 사람들이 성당에 올 수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신부님 곁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신부님들에게 대접하지 마라


그래서 여러분이 <복음의 기쁨>을 신부님들이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은 신부님들에게 대접하지 않는 것, 좋은 곳에서 대접하지 않는 것, 그 대신 좋은 방법이 있다면, "신부님 오늘 저와 어디 좀 가실래요?"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힘들어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간다면, 그것이 진정 신부님을 대접하는 것이고, 그것이 <복음의 기쁨>에서 말하고자 하는 영적 세속성이 아니고, 영적으로 충만한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복음의 기쁨이 되는 생활입니다신부님들이 교황님에게 계속 혼나지 않게 하려면 여러분이 도와줘야 합니다. 내가 혹시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난 절대 신부님을 대접하지 않는다. 사순시기에 꼭 해보세요.

 

95 관리자적 기능주의 경고

또 이것은 무엇입니까? 행정이나 하고 있고, 통계나 내고 있고, 이건 무슨 얘기일가요? 이것은 일반 신부님들이 통계 냅니까? 아니거든요. 통계 내는 분들은 새 건물에 계시는 분들인데, 우리같은 9급 공무원들이 아니고, 고위급 공무원들, 이런 분들이 통계자료 내시는 겁니다. 통계 자료에만 매몰되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그러한 내용들도 직접적으로 들어있습니다.


95항에 보면, 영적 세속성은 또한 통계와 기획과 평가에 매달리는 관리자의 기능주의로 표현되며, 그 주요 수혜자는 하느님 백성이 아니라 오히려 제도로서의 교회입니다.

 

지금 이건 뭐에요? 관리자, 기능주의, 이건 신부님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누구한테 하는 얘기인가요? (수강생. 수녀님들?) 수녀님들도 아닙니다. 보라색 모자. 주교님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당신들이 하는 것도 영적 세속화라고 말하시면서 많이 혼내고 있는 겁니다. 특히 80, 83, 86, 92, 97, 101, 109항에서 계속 댓구로 반복해서 나오는 게 있습니다. 여기 표현을 보면, 86항에 보면, '희망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80항을 보면, '우리의 선교 열정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니다.', 그런 식으로 줄줄히 나와 있습니다. '복음화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92항은 '공동체를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97항에 '복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계속 나오는데요.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인가, "빼앗지 않도록 합시다"인가?

 

그런데 이것의 원문 이탈리아어를 보면, 재귀용법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라고 말한다면, 빼앗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누군가 빼앗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신부님들한테 복음화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라고 말하면 신부님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것은 안 뺏기도록 지키고만 있으면 되는 거죠? 그렇죠? 그런데 원래 이탈리아 말에서 이 표현은 재귀용법으로 쓰여진 것이기때문에, 그 동사의 주어도 우리에요. 목적어도 우리입니다. 뭐냐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서 복음화의 기쁨을 빼앗지 않도록 하자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면, 복음화의 기쁨을, 선교의 열정을, 복음화를, 공동체를 빼앗기는 것도 신부들이지만, 빼앗는 것도 신부들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빼앗기고 빼앗는 것이란 뜻입니다. 메시지가 굉장히 센 겁니다. 신부님들을 대놓고 혼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소극적입니다. 이건 그게 아니라, '넌 그렇게 살면 안돼!'라고 강력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영어로도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빼앗는 주체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영적 세속성이란 것은 뭐냐면,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개인의 영광, 인간적인 영광,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 영적 세속성이란 것입니다. 바로 주교님과 신부님들에게 이런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굉장히 보수적인 분


그리고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구이게 먼저 다가가야 하는가(48), 가난한 이들과 벙든 이들, 자주 멸시당하는 무시당하는 이들, 우리에게 보답할 수 없는 이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이게 지금, 프란치스코 교종님께서 처음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아니죠.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자주 멸시당하는 이들, 무시당하는 세리, 죄인들, 창녀들에게 예수님이 가고 함께 있고 받아들여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을 교종께서 다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분은 혁신적인 분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혁신적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굉장히 보수적인 것입니다, 복음의 가치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회적 의미에서 진보라고 말하지만, 본래 교회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신다는 측면, 복음에 충실한 분이신 겁니다.

 

그리고 (제4장은)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얘기하고 있고, 발전이 인간과 인류 전체를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이것도 처음 들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선 사회교리 강의에서 이미 공부하신 내용입니다. 그렇죠. <민족들의 발전>에도 있었고요. 그래서 이것은 종교가 직접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193)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에서는 가난한 이들을 먼저 선택해야 한다는 거죠. 제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정말 그렇게 노력해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 가난한 사람들도 다닐 수 있는 교회, 물론 부자들도 성당에 다니는 겁니다. 그게 맞죠. 하지만, 의사는 몸이 성한 사람에게는 필요하지 않다고 했어요.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죠. 부자들을 배척하는 것, 부유한 자를 배제하는 것. 이것은 교회의 모습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지금 부유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가난한 이들이 겪는 고통을 못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늘 자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가난한 이들을 '먼저'.선택하는 것 문화사회정치철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에 속하는 겁니다. 


특히 세상의 부는 계속 증가하는 데 계속 굶어죽고 있습니다. 그래서 (202) 가난의 구조적 원인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7-215 참조) 그러면서 공동체 와해의 위기를 진단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가난한 사람들, 노숙자나 중독자들입니다. 그리고 난민도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는 계속 늘어난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LDC(least developed countries)라고 합니다. 최빈국이란 표현인데, 1971년 최빈국이 24개 국가였는데,50년이 지난 현재 49개 나라가 최빈국입니다. 인류가 끊임없이 가난한 나라 도와주고 있다고 뻥치고 있는데, 결국 가난한 나라의 숫자가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2020년까지 가난한 나라의 숫자를 반으로 줄이자. 그래봐야 유엔 결의해봐야, 50년 걸려 제자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실제로 바라보면 놀랄 것들이 많습니다. 말에 속으면 안되고, 기사에 속으면 안됩니다. 


ldc_list_2014.pdf



공동선, 사회평화, 이러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고요. 처음 책에는 잘못된 표현들 '때는 시간보다 중요하다'는 말도 안되는 표현들이 있었는데, '시간은 공간보다 중요하다'는 것이고요. 2쇄부터는 바뀌었는데, 일치가 갈등을 극복한다 이런 것들. 그리고 특히 사회와 함게 교회가 나아가기 위해서  계속 사회적 대화를 해야 한다는 걸, 평화를 위해서 사회적 대화를 해야 한다는 걸 뒷부분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거듭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교종 프란치스코가 굉장히 혁신적인 분 같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치에, 그동안 말해왔던 것들에 가장 충실하신 분이시고, 예전에 있던 얘기들 계속 꺼내서 계속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경제, 평화, 정의, 다 보셨죠? 앞에서 다 나왔습니다. 경제정의, 평화, 발전도 정의, 발전을 위해 연대해야 한다. 연대는 이미 그리스도교의 형제애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연대라고 한다라는 것은 이미 <간추린 사회교리>라는 문헌에 있는 내용입니다. 처음 한 얘기가 아니고, 굉장히 혁신적인 분이 아니란 겁니다. 오히려 교리를 살고 계시고, 기존의 있던 사회교리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는 것도 이미 나온 것이고, 우리의 시선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필요하다는 것, 성전에 매몰되어 사는 영적 세속성을 물리치기 위해 현실세계에서의 실천할 필요가 있다는 것, 복음 안에서 참 기쁨을 찾는 우리는 하느님 백성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 선교하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자는 것 등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015-3-9 월요일 밤 912분 종료

 


2015.3.9(월) 밤 9시30분. 명동성당 앞에 모셔진 성모님



2015년 3월 9일(월), 가톨릭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진행하는 제109차 사회교리학교의 여섯번째(6주차) 강의가 열렸다. 서울 중구 명동2가 1번지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에서 열린 6주차 강의는 민경일 아우구스티노(바보의 나눔 재단 사무총장) 신부님이 강사로 나섰다. 강의 주제는 교종 프란치스코의 <복음의 기쁨>이고, 다음은 오늘 강의 중 2교시(약 55분)의 후반부이다. 


위 내용은 강의 정리자의 기억과 기록을 바탕으로 재편집된 것이므로 실제 강의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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