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일 신부님의 [복음의 기쁨] 강의 (2)


<복음의 기쁨>을 읽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



민경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바보의 나눔 재단 사무총장)

2015년 3월 9일(월), 저녁7시부터,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



우표명: 새마을운동 특별우표(1976년)

1. 새마을운동제창, 2. 정신계발, 3. 복지환경, 4. 생산기반, 5. 소득증대


여기서 잠깐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근 우리나라 정부가 새마을운동게임같은 것을 만들려고 해요. 개발도상국에 보급하려는 것이죠. 컴퓨터도 없는 나라인데. 그리고 지금 해외원조에 대해서 우리나라 정부는 <지구촌 새마을운동>이란 이름으로 해외원조를 하고 있어요.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전 국민 잘살기 운동’을 펼쳐나간 것이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가 함축하고 있듯이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을 희망하던 국민의 요구와 ‘조국근대화’를 추진하던 국가의 의지가 결합된 ‘잘 살기 위한 운동’이었다. 1970년에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해방과 분단, 전쟁과 페허, 4·19 와 5·16 등과 같은 한국현대사의 유산들이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산물이었다. (출처. 국가기록원)



정부 국고 투입해 ‘새마을운동’ 게임 만든다···컴퓨터도 없는 나라에 수출해 뭐하려고?

경향신문 2015.3.9. 


농촌은 행복한가?


새마을운동은 농촌만 잘 살사는 운동은 아니었고요. 그런데 현재 정부가 모듈화해서 개발도상국에 전해주려고 한 것은 <농촌 잘살기운동>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새마을 운동이 농촌 잘살기 운동이었을까?를 보았을 때, 궁금함의 출발점은 농촌이 행복한가?입니다. 지금 길 건너 평화방송 별관 2층 한마음한몸 자살예방센터가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나라 자살율이 굉장히 심각합니다. OECD 1위 자리를 놓지 않고 있습니다. 자살문제 그만큼 심각합니다. 그래서 2010년부터 우리 교회와 교구가 자살예방운동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데, 신문방송에는 연예인이나 유명인 사람들이나 도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농촌 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살도 도시보다 농촌이 훨씬 높습니다. 우리나라 자살율 1~2위를 다투는 곳이 충북과 강원도입니다. 농경지역입니다. 저의 궁금함의 출발점은 왜 농민들은 불행한가? 행복하지 않은가?


한국 자살률 10년연속 OECD 1위...  매일경제 2015.7.3


소득은 60배 증가, 부채는?


긴 이야기를 짧게 줄이자면,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소득격차는 90% 가까이 되었습니다. 도시와 농촌이 거의 비슷했죠. 그리고 새마을운동 하는 중간에는 농촌이 도시의 가구별 소득을 앞서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통계인 2012년 말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농촌 가구당 소득이 57%로 떨어져 있습니다. 60%도 안되게 도시보다 가난합니다. 새마을운동을 열심히 했더니 농촌은 더 가난해졌다는 가정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1년에 50만원 되던 소득이 2012년 말 통계로 3,100만원입니다. 가구당 소득이 그렇습니다. 도시는 5,200만 원 정도 됩니다. 그래서 "60배나 늘지 않았어?"하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 겁니다. 50만원에서 3,100만원 된 거니 60배 이상 늘은 겁니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얘기합니다. 새마을운동 하기 전의 농가 부채가 그 당시 한가구당 16,000원 꼴이었는데, 지금은 가구당 부채가 2700만원 수준입니다. 그러나 그런 얘기는 하지 않습니다.


  

우표명. 새마을운동으로 개량된 농촌의 모습(1972)과 환경이 정비되어가는 농촌모습(1973년)


부채가 엄청납니다. 왜 그랬을까요? 새마을운동 하면서 인센티브 정책을 했습니다. 옆마을과 비교해서 옆마을보다 성과가 좋으면 철근 더 주고, 시멘트 더 주고. 그 때는 그게 뭐가 뭔지 모르고 좋아했었죠. 사실은 경쟁구도 자체도 좋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옆마을과 경쟁을 하게 되면서, 인센티브 정책으로 꾸며져 있지만, 실제로는 농가에 도움이 되는 일이나 살림에 도움되는 일 보다는 눈에 보이는 일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 일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고, 새마을운동은 마을 전체를 위한 일들을 해야 하니, 다리를 놓거나, 또한 우리나라 건축을 좋아하는 게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지금도 계속 건축과 토목을 많이 하죠. 그 당시에도 시멘트를 줬던 이유도 시멘트 회사 사장이 남아돈다고 하니까 정부에서 그런 기업 요청을 들어준 것입니다



참고. 그 덕에 농민들은 정말 잘~ 살게 됐나요? (한겨레 2013.3.23일자 기사 중 일부)


새마을운동이 구체화된 것은 1970년 10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정부가 전국 3만5000개 마을에 각각 300여 포대의 시멘트를 무상으로 나누어주면서 시작되었다. 흥미있는 것은 박정희가 각 마을에 막대한 예산을 들여 시멘트를 나누어준 계기가 쌍용시멘트 소유주였던 김성곤이 박정희에게 시멘트업계의 재고과잉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줄 것을 호소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김성곤은 당시 공화당 재정위원장으로 박정희의 정치자금을 관리하는 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였다. “남아도는 시멘트를 부진한 새마을가꾸기운동에 돌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는 박정희의 지시를 받은 당국은 배급받은 시멘트는 반드시 마을 진입로 확장, 작은 교량 건설, 농가 지붕 개량, 우물 개선, 공동 목욕탕 건립, 공동 빨래터 만들기 등 정부가 예시한 20여개의 새마을사업에 한정해서 쓰라는 조건을 달아 시멘트를 내려보냈다.


물자가 귀했던 시절, 뜻하지 않게 시멘트를 받아든 농민들은 여기에 자신들의 자금과 노동력을 더하여 마을의 숙원사업을 해결하려 한 경우가 많았다. 정부 입장에서는 기대 밖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박정희는 이에 내무부에 지시하여 각 마을단위의 사업을 면밀하게 평가하도록 한 결과, 약 3만5000개 마을 중 1만6000곳에서 우수한 성과를 얻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박정희는 이 보고를 바탕으로 전국의 마을들을 주민의 참여도와 사업성과에 따라 기초·자조·자립 마을로 나누어 ‘차별적이고 단계적인 지원’을 하도록 했다. 박정희는 좋은 성과를 거둔 마을 1만6000곳에는 마을당 평균 시멘트 500부대와 철근 1t을 지원하도록 하고, 나머지 1만8000개 마을은 전혀 지원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1971년은 대통령선거와 8대 국회의원선거가 있던 해였다. 여당인 공화당은 지원을 받지 못하는 마을의 반발을 우려했지만, 박정희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며 선별지원을 밀어붙였다. 마을끼리의 경쟁심을 자극한 박정희의 도박은 주효했다. 박정희 식으로 표현하면 “경쟁으로 더욱 잘살아보겠다고 노력을 하는 기운이 방방곡곡에 가득” 차게 되었다. 이런 변화가 꼭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경쟁의 기운이 몰아치는 과정에서 마을을 넘는 공동체적 유대는 파괴되었고, 마을 내에서도 열악한 경제적 처지로 인하여 마을단위의 경쟁에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집들은 마을에서 점점 살기 힘든 처지가 되었다.



1,000배가 넘게 증가된 부채


그래서 전국의 농산어촌 마을에 시멘트를 나눠준 겁니다그래서 자꾸 눈에 보이는 일을 하니까 농민들이 빚을 얻어서 새마을 운동을 한 겁니다그래서 빚이 엄청나게 늘어납니다1,600원에서 2,700만원으로 올라갔다는 것은 부채는 천배가 넘게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소득은 60배가 올라갔다는 것인데요. 그것이 농촌살리기 운동인가요?


임금(급여)은 갑·을 간 합의만으로 이뤄질 수는 없다


그래서 앞에서 레오 13세의 사회교리 회칙인 <새로운 사태>에서 노동자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그들의 급여가 합의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임금 협상을 한다고 했을 때에, 고용주가 갑이 됩니다. 그 때에 을이 되는 노동자가 "난 당신하고 한달에 15만원에 합의하겠습니다. 한달에 15만원만 주세요."한다면, 고용주는 "무슨 소리야 저기 12만원 주면 된다고 줄 서 있는데!" 그러면 합의 맺을 수 있나요? 없습니다.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으니까 노동자는 철저하게 약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노동자 편을 들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왜냐면 그들이 가장 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가 무조건 노동자 편을 든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무조건적으로 노동자 편을 드는 건 아니다


예수님의 정신은 가장 소외되고 가장 약한 이들에게 다가서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당시 가장 약한 사람들을 노동자라고 생각한 겁니다. 임금도 그렇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모든 생활과 문화적인 생활까지 영위하는 수준으로 결정되어야 한다는 글귀가 있는 겁니다.


저는 <새로운 사태>의 그 글을 보며 가슴 벅찬 경험을 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 이게 교회야! 사람들을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멋있는 얘기를 하는 이게 교회지!” 그러면서 벌써 120년이 지난 그런 문헌이 그당시 가장 약한, 소외된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서는 것이었다는 것. 그리고 첫 번째 등장한 사회회칙이란 데 의미가 있습니다.



2015년 3월 9일(월) 저녁 7시. 강의가 막 시작되려는 모습 @명동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


<어머니요 스승> (1961)


두번째로 말씀드릴 것은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인) <어머니요 스승> (1961)입니다. <어머니요 스승>에서는 교회가 왜 인간의 사회적 생활에, 말하자면 왜 사회교리가 반포되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권력을 갖추는 게 아니라, 백성들의 어머니요, 백성들의 스승으로서 그런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특히 그 이후의 교회문헌, 사회교리 문헌에도 여러 가지 얘기가 나오는데, 사회교리의 목적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는 것입니까? 

 

사회교리는 우리에게 무얼 주려고 하는 것일까


딱 세가지입니다. ‘반성의 원리’, 세상을 보고 성찰할 수 있는 반성의 원리’, 그리고 판단을 할 수 있는 판단기준’, 그것을 바탕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알려주는 행동지침바로 이 세가지를 알려주는 것이 가톨릭 사회교리의 목적입니다.

 

반성의 원리, 판단기준, 행동지침

 

이 세 가지가 시험에 나올 것 같지만, 물론 제가 시험을 보지는 않습니다. 사회교리에서 여러번 나오는 얘기입니다. 교회가 정부 하는 일을 비판하는 게 가능한가? 물론 비판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부와 맞서 싸우려는 게 아닙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정확하게 반성하고 판단할 것이가?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지침을 얻는 것이 가톨릭 사회교리의 특징이고, 그것은 바로 교회가 백성들의 <어머니요 스승>으로서 가르침을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심없는 원조 


그 다음에 원조와 국제적 불균형, 국제 협력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는 사심없는 원조에 대해서, 영어로는 disinterested aid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interest는 흥미, 재미라는 단어로도 보여지지만, 이익이란 뜻, 이자란 뜻도 있습니다. 많은 나라들에 외교를 보면, 다른 나라를 도와준다고 할 때 제일 먼저 그 개발도상국이나 가난한 나라들을 돕기 위해서 움직일 때, 외교적으로 국익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national interest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러지 말자는 것이죠. ‘국익’, 이익을 따지지 말고, 상관없이 사심없이 하자는 말을 교회는 이미 1961년부터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 문헌들, 요새 다 낱권으로 파는가 모르겠어요? 예전에는 <교회와 사회>라고 해서 빨간 색깔로 100주년까지 모아놓은 책이 있었는데, 지금 그게 절판되고, 한국 교회에서 제일 잘하는 게 절판이죠. 다시 내지를 않아요. 참 안타까운 것은 제가 신부인데 우리나라는 미사경본이 없습니다. 미사통상문 밖에 없습니다. 얇은 미사통상문은 있지만 예전에는 두꺼운 책으로 미사경본이 있었는데, 기도문들도 다 있고, 감사송도 다 있고 그런 두꺼운 책인데, 1998년도에 이른바 말마디를 바꾸었죠. 성신을 성령으로, 주를 주님으로 그 때 한번 바꾸면서, 그 때 미사경본을 다 바꾸지 못하고, 미사통상문만 임시로 낸 겁니다


교회 전례서는 성경과 마찬가지


교회 전례서는 성경과 마찬가지고 품위가 있고 권위가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전례서라고 하면 그 앞에 일러두기, 그러니까 미사경본 총지침, 미사에 관련된 전례교육법 그런 문항을 제일 앞에 두고, 미사와 관련된 모든 기도문, 통상문과 그 밖에 필요한 부속들을 다 갖춘 걸 전례서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 중에서 미사통상문만 쏙 빼서 제대에 올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미사통상문은 전례서가 아닙니다. 매일미사는 더더욱 아닙니다.  사회교리 문헌들도 좋은 글들이 많은데, 요즘 나온 <복음의 기쁨>도 좋지만, <새로운 사태>, <어머니와 스승>, <지상의 평화>가 다 좋은 글들입니다. 지금에도 유효한 글들입니다. 그런데 절판이 되어 안 팝니다.


<지상의 평화> 1963


지상의 평화는 교회 인권헌장


이것은 이른바 교회 인권헌장으로 불리웁니다. 그런데 그 당시가 1963년이기 때문에, 냉전시대였고, 일촉 즉발의 순간으로 전쟁 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 시대에 있었습니다. 베를린의 위기와 쿠바의 핵미사일 등, 그래서 교회는 이 땅에 지상의 평화가 있어야 한다는 제목으로 문헌 제목을 <지상의 평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평화를 이루기 위한 첫번째 조건으로 모든 사람의 권리가 완전히 보장되고 우리가 그 인권을 영위하는 것임을 밝히는 뜻으로 <지상의 평화>의 앞 부분은 인권에 대한 얘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처음부터 전쟁 이야기나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교회의 인권헌장이라고까지 얘기할 수 있게된 사정입니다. 가끔 우리가 인권이라고 하면 머리에 빨간 띠 두르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는데, 아닙니다. 인권이란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는 는 것입니다.

 

인권이란 최소한을 요구한다


인권이란 정의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요구하는 권리나 자격을 인권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 취급도 못 받는구나 생각해도 틀리지 않다는 겁니다. 인권은 최대한의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기 위한 최소한의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당연히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복음의 기쁨>에도 그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서구적인 인권 개념은 본래 인간의 존엄성에서 출발한 겁니다. 그런데 서양의 인간의 존엄성은 사실상 서양세계를 그리스도교 문명이라고 보았을 때, 서구의 인권 개념은 창조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태어났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난 것이죠. ‘내 안에 너 있다.’가 아니고,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신 것입니다.


내 안에 너 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모상성, 신적 모습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모든 사람의 인격 안에 하느님 모상이 살아 숨쉬고 있어서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고 하는 것이 교회가 말하는 인간 존엄성의 핵심이고 출발점입니다. 바로 거기서부터 교회는 인권을 얘기하는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회가 인권을 말하는 데 교회까지 말하고 그래? 그런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원래는 교회가 더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뿌리를 알고 있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해. 누군가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왜 존엄합니까?” 그런데 할 말이 없죠. 우린 그냥 그렇게 배웠어요. ‘존엄하다고.’ 서양 사람이면, 인간의 존엄성을 2천년간 존엄해왔다고 말할 수 있나요


원래부터 교회는 '인권'에 대해 할 말이 많다


그러나 교회는 할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모습을 만들었습니다. 당신의 모습대로. 우리 안에 당신의 모상이 있으니까, 살아 숨쉬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제 <지상의 평화>는 그런 인권에 대해서도 많이 이야기하고 있고, 특히 <지상의 평화>는 최초로 가톨릭 성직자와 신자들을 넘어서서 선의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까지를 대상으로 한 회칙이라고 하는데, 항상 교회 문헌을 보면, 첫 장을 넘기면 책 제목이 있는데, <복음의 기쁨>이라고 쓰여져 있고, 원래는 한 줄 띄고 해야 하는데,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즉 이 <복음의 기쁨>이 어떤 책이냐.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책이로구나.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 글의 수신자가 나와 있습니다. 누구한테 보내는 것이냐. ‘주교와 신부, 부제, 봉헌 생활자와 평신도에게 보내는누가? 우리말 순서라서 이렇게 쓰여져 있는 것인데요.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교황 권고



그런데 이 뒤에 보면 이것이 이탈리아 말로 쓰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상의 평화>는 '모든 주교와 신부와 봉헌생활자와 모든 평신도들 그리고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가 수신자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교회의 교종들의 모든 회칙은 이 양식을 다 따릅니다. ‘그리고 선의의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갑니다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지상의 평화


PACEM IN TERRIS


 1963. 4. 11.


진리, 정의, 사랑, 자유를 토대로 하는 

모든 민족들의 평화에 대하여 

사도좌와 더불어 평화와 일치를 누리는 존경하는 형제들인 

총주교, 수석주교, 대주교, 주교, 그 밖의 지역 직권자들에게 

가톨릭 세계의 모든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그리고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회칙



교황의 회칙과 사도의 권고


그런데, <복음의 기쁨>에는 왜 안 들어갔어요? 교회의 전통인데요? 왜죠? 이건 회칙이 아니거든요. 이것은 사도 권고입니다. 회칙은 사도권고, 사도좌권고보다 품격 높은 글입니다. 거의 교회법과 같은 수준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죠. 회칙(回勅)은 법 같은 느낌이 있는데, 원래 돌다란 뜻이 있죠. 돌 회()자입니다. 모든 사람이 돌려보라는 뜻에서, 회칙(回勅)이란 이름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회칙 수준의 문헌에서 지금은 항상, 수신자로 그리고 모든 선의를 가진 사람들에게란 표현이 다 들어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도 다 쓰고 계시고, 베네딕토 16세 교황도 계속 그런 표현을 쓴 바 있습니다. 그렇게 수신자의 폭이 얼마인가에 따라서 이 문헌이 좀 더 장엄한 문헌인지 아닌지 캐주얼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인권에 대해서 많이 얘기하고 있고, 정치참여의 권리나 군비 축소에 대해서 <지상의 평화>는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군축에 대해서는 축소를 넘어서 무장해제까지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목헌장에서도 나옵니다.


사목헌장 1965


쁘로그레시오(progréssĭo)


사목헌장에 등장하는 단어 발전은 뭐냐면, 라틴말로 쁘로그레시오(progréssĭo)라고 하는 데요. 영어로 비슷한 말이 Progress진전이란 뜻이 있지만, 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목헌장의 발전에 해당하는 '쁘로그레시오'는 어떤 맥락이냐면, 빈곤을 극복하고. 더불어 잘사는 측면이기 때문에 그것은 발전이나 개발로 번역되어야 하고 그러면 영어로 development로 번역을 합니다. Progress로 번역하지 않습니다.

 

쁘로그레오는 Development


발전은 모든 사람의 인간성 실현을 말합니다. 그것은 다시 한번 모든 사람이 인권을 풍요롭게 누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한번, 중심은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전쟁없는 상태만도 아니고, 무력간의 균형도 아니고, 정확하게 평화는 정의의 실현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특히 방금 전 얘기했던 <지상의 평화>에서 교회는 군비축소라는 것은 단순히 축소가 아니라 진정한 무장해제를 이루어야 정말 평화가 온다. 그게 참 평화가 온다고 얘기한 것과 지금 여기 <사목헌장>에서는 단지 평화는 세력유지만도 아니다.


평화는 정의의 실현


평화는 정의의 실현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걸 연관시킨다면, 왜 오늘날까지도 제주도 강정땅에서 많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때로는 잡혀가고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교회는 평화를 위해서, 지금 강정에 기지를 짓는 게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 기지를 짓는다고 한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거기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는 겁니다. 만약에 제가 그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저는 반 교회적 신부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교리가, 역대 교황이, 사목헌장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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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헌장은 그냥 교종 한 분이 한 얘기가 아니고, 공의회 문헌입니다. 공의회 결정사항입니다. 거기서 평화는 정의의 실현이라고 말합니다. 평화는 무기로 만드는 게 아니라고, 무력으로 이루는 평화는 참 평화가 아니라고 직접적으로 얘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정에서 그렇게 미사 드리고 하는 것이 원래 교회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지, 잘못 생각해서 아니 저분들, 왜 신부님, 수녀님들은 왜 강정이고 밀양가서 저러는거냐. 그렇게 말한다면, 복음적으로 사시는 분들을 욕하는 것이 됩니다우리의 무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이 될 겁니다. 우리 주변에 아직 몰라서 그런 분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많이 알려주셔야 합니다. 복음이 원래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고, 원래 교회가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지를 알려줘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


교회는 내가 나가면 마음이 편해져. 그 사람에게 마음만 편하게 해줄려고 교회가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복음을 세상에 전하고, 복음이 현재가 될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게 교회가 할 일입니다. 개인적인 심적 평화만 주는 건 아니라고 <복음의 기쁨>에서 말하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사목헌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족들의 발전 1967 

(Populorum Progressio)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여기서도 쁘로그레시오라는 라틴말로 쓰여졌지만, 영어로는 Development로 번역하는 겁니다. 평화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로서의 경제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에서 경제 얘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말하는 분배정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그런 말이 <복음의 기쁨>에 처음 얘기한 게 아닙니다. 경제정의에 대해서 교회는 벌써 50여년 전에 언급을 하고, 민족들의 발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집단으로서의 국가나 그것을 이야기하면서도 발전의 중심이나 주체는 항상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을 교회는 놓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발전권 선언에 대해


제 대학원 졸업논문에서 <유엔의 발전권 선언>과 <가톨릭 사회교리>를 같이 보았다고 했는데, 특히 <민족들의 발전>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겁니다. ‘발전권 선언이라는 것은 뭐냐면, 개인의 권리일뿐만 아니라 국가의 권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 UN발전권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1967년에 발표한 교회가 20년이나 앞서가고 있습니다, 유엔의 발전권 선언이란 문헌은 1986년 문헌입니다. 그랬었던 것이죠. 지금은 물론 교회가 발 맞춰가기 바쁜 때가 되었지만, 교종 프란치스코께서 어쩌면 세상을 더 이끌어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1967년의 문헌이나 이전의 문헌들을 본다면, 교회가 세상을 앞질러 가고 있습니다. 발전이 다시 한번 경제성장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이것은 UN에서도 유효한 이야기입니다


인권중심의 해외원조


지금도 경제학자들, 개발경제학자들 중 많은 분들이 발전이란 것이 결국 경제성장이 아니냐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 특히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원조도 성장중심의 해외원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국제사회에서는 벌써 50~60년대의 옛날 패러다임입니다. 국제사회에서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인권을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외정책이나 해외원조 정책은 그런 데에 발맞춰갈 생각이 없어보입니다.


발전은 평화의 새로운 이름


<민족들의 발전>에서는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발전은 평화의 새로운 이름이다.’ 조금 아까 <사목헌장>에서 평화는 뭐라고 그랬나요? ‘평화는 정의의 실현이다.’ 그런데 <민족들의 발전>에서는 발전은 평화의 새로운 이름이다.’


발전은 정의의 실현

 

그러니까 발전이란 정의의 실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발전은 평화의 새로운 이름이고, 그 평화는 정의의 실현이니까. 그런 겁니다. 국제사회가 우리나라 정부는 발전을 이야기하면서 경제성장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아니야 아니야, 발전이란 것은 모든 사회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정의의 실현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우린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단 정의의 실현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쉬는 시간의 정의는 휴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10분간 쉬겠습니다. (계속)


참고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교황 바오로 6세의 민족들의 발전(1967. 3. 26)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이 나온 지 16개월도 채 되지 않아 발표된 매우 중요한 사회회칙이다. 바오로 6세는 1960년대 초, 남미와 아프리카를 방문하고 그들 대륙이 겪는 심한 곤경을 직접 보고”(4) 이 회칙을 발표하였다고 한다. 회칙에 앞서 교황청에 정의평화위원회를 설치했고 이 회칙은 그 이후에 발표되었다. 회칙은 후진국이 가난한 원인을 후진국 내부에서가 아니라 선진국과 관계에서 구조적으로 생긴다고 본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간식이 매주 바뀐다. 오늘은 뭔가? 쿠키는 쿠킨데?



2015년 3월 9일(월), 가톨릭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진행하는 제109차 사회교리학교의 여섯번째(6주차) 강의가 열렸다. 서울 중구 명동2가 1번지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에서 열린 6주차 강의는 민경일 아우구스티노(바보의 나눔 재단 사무총장) 신부님이 강사로 나섰다. 강의 주제는 교종 프란치스코의 <복음의 기쁨>이고, 다음은 오늘 강의 중 1교시(약 55분)의 후반부이다. 



위 내용은 강의 정리자의 기억과 기록을 바탕으로 재편집된 것이므로 실제 강의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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