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박상병 신부님, 전의본당 주임)가 주최하는 제13기 사회교리학교가 대전시 유성구 하기동성당에서 열렸습니다. 2015년 3월 4일(수)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진행되었습니다. 다음은 밤 9시 15분경 속개된 2교시의 내용입니다. 다음 강의노트는 필자의 기억과 기록에 따른 것이기에 다소 부정확할 수 있으며 강의내용과 다른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박상병 신부님 2교시 | 2015.3.4(수) 09:15~ pm


요한 23세 교황님은 안타깝게도 공의회를 마무리하지 못하셨습니다. 연로하신 상태에서 교황이 되셨고, 공의회 개막 다음해(1963년) 선종하십니다. 그것을 이어받은 분이 바오로 6세 교황님이시고, (1963.6.21~1978.8.6, 80세 선종), 그리고 공의회가 끝난 다음에 『간추린 사회교리』를 펴낸 것이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죠. 이것도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산물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교황청의 기구가 있어야 하겠구나,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퍼뜨리는 기구가 있어야 하겠구나 하는 건의가 받아들여지고 교황청 내에 추기경을 의장으로 하고, 대주교가 사무총장이 되는 기구가 설치된 것입니다.


간추린 사회교리 | 자 교황청 정의 평화 평의회 | 출판사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출간일2005-10-31 | 판형/면수160*225 /양장/ 614면 | 가격 20,000원 

교황청 정의평화평위회가 2004년에「간추린 사회 교리」를 펴낸 이후 이 교리서는 곧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되었다.우리말 책은 2005년 출판되었다. 「간추린 사회 교리」는 천주교회가 지난 한 세기 이상 사회 문제에 대하여 신자들에게 체계적으로 제시해 온 가르침의 핵심 부분을 일목요연하게 엮어 놓은 것이다. 이 교리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데에 반드시 따라야 할 성찰의 원리와 판단 기준과 행동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현대의 복음 선교(1968)

바티칸이 현재 구조조정 중이라고 하는데요. 그 안에서 정의평화 평의회가 성(정의평화평의성)으로 될 움직임이 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은 공의회를 마무리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 하며 권고를 하나 냅니다. <현대의 복음선교>(1968)입니다. (바오로 6세는 '행동하는 교황'으로 불리웠고, 재임 15년동안 다른 종교와의 해묵은 갈등을 치유하는 데에도 앞장선 바 있다. 또한 많은 회칙을 발표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복음의 기쁨>은 재작년(2013)에 발표한 것인데, 이것이 다뤘던 주제와 똑같은 주제로 발표되었던 회칙이 바로 <현대의 복음 선교>(1968)였습니다.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교황권고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복음의 기쁨>이었고, 이미 그 이전에 복음화와 관련된 권고문을 주신 분이 바오로 6세이십니다. 


바오로 6세의<현대의 복음선교> 제 17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장은 책의 제 2부 첫 장입니다. 제2부 복음화란 무엇인가에서 첫 장인 17장은 소제목이 있는 데, <복음화 활동의 복잡성>이라고 되어 있고 본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고 선교한다는 것은 마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그 사람이 성사를 받게 해주면 '복음화 끝, 선교 끝'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한 축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란 게 그 내용입니다. 복음 선교의 풍부하고 복잡하고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파악하면 그르칠 위험이 있다. 다만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에게 세례를 받게 하는 것과 함께 바로 선교는 인류 발전, 인류 해방 이것과 연관이 있다. 세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① 인간적 측면이 있습니다. 복음화되어야 할 대상은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구체적인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24시간 동안 성당에서 기도하고 먹고 마시기만 하나요? 아니죠. 기도도 하지만, 미사를 보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죠. 그래서 사람이 복음화되어야 하는 것은 종교적, 정신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 인간이 많은 일들을 하는 것과 연결된다는 것이고, 인간을 축소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다양한 인간들을 축소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화 활동의 복잡성>

17. 교회의 복음화 활동에서 각별히 유의하여야 할 요소와 국면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떠한 것들은 매우 중요하여 단순히 그것들만 복음화 활동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성사와 다른 성사들을 베푸는 것을 복음화라고 규정하려 하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화의 풍부하고 복잡하고 역동적인 참모습을 부분적으로나 단편적으로 규정하려 하는 것은 복음화의 의미를 빈약하게 하고 나아가 왜곡할 위험이 있습니다. 복음화의 모든 본질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으면 복음화의 개념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지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이 특히 강조되었으며, 그 결과 지금도 자주 연구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기쁘게도, 이러한 요소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 특히 '교회 헌장'과 '사목 헌장', 그리고 '선교 교령'의 방향과 일치합니다. (17장 끝)



2015년 3월 4일(수) 오후 9시 15분경 2교시가 막 시작된 하기동 성당 2층 성전 모습


사람이 복음화되어야 하는 것은 종교적, 정신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 인간이 많은 일들을 하는 것과 연결된다는 것이고, 인간을 축소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② 신학적 측면입니다. 창조계획을 회복시킨다는 것은 부정과 싸우고 정의를 다시 세우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불의와 싸우고 정의를 만드는 것이 창조를 완성시킨다는 것, 그것이 신학적 측면입니다. 그리고 복음적 측면에서 사람들이 고생하고 고통받는 데, 그런 고통의 실제 현장에서, 혹은 전쟁터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 믿으세요."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복음적 측면은 '애덕'이고 사랑하는 것인데, 왜 그렇게 힘들고 고통받는지, 현재 고통에 처한 어떤 인간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31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복음화에서는 현대 세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의, 해방, 개발, 평화와 같은 여러 문제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있거나 무시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상기시켰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고통과 궁핍 가운데 있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제 31항은 제3부 복음화의 내용 중 하나로, 소제목은 <인간 발전과 필연적인 관계>)


<인간 발전과 필연적인 관계>

31. 복음화와 인간발전 - 개발과 해방 -, 이 둘은 실제로 밀접히 관련됩니다. 인간은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문제에 종속된 존재이기 때문에 복음화와 인간발전은 인간적 질서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복음화와 인간 발전은 신학적 질서의 관계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창조 계획과 구원 계획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 계획은 불의를 물리치고 정의를 회복하여야 할 매우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됩니다. 복음화와 인간 발전은 또한 사랑의 관계인 복음적 질서의 관계도 포함합니다. 정의와 평화 안에서 참되고 진정한 인간 발전을 증진시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랑의 새 계명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점을 강조하면서, "복음화에서는 현대 세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의, 해방, 개발, 평화와 같은 여러 문제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있거나 무시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상기시켰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고통과 궁핍 가운데 있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다행히도 지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는 열의와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이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나자렛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성취하신 대로, 또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해방의 중요성과 그 깊은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명확한 원칙을 제시하였습니다. (31장 끝)



이것이 몇 몇 교황님들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성전은 거룩한 전통, 주욱 흘러내려온 흐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가난을 더욱 강조해서 말씀하셨는데, 그 전 교황님들은 그것을 안 했느냐하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쩌면 성직자들보다 평신도들에게 더 중요한 게 사회교리입니다. 어쩌면 평신도들이 세상의 창조를 회복시키는 구체적 현장에서 노동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정치가 썪었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계속 혼탁해지기 때문입니다." 라고 얘기하시죠. 


사랑을 실천하는 한 방법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정치가 혼탁하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계속 혼탁하게 될 것입니다. (2013.6.7일 예수회 운영학교 학생들 만남에서도 언급) 그리스도인들도 너무나 쉽게 세속적인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는 십자가를 지고 겸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진정한 승진이며 이를 통해 예수를 닮게 됩니다.

행정 업무에 치중하거나 소수 사람만을 상대하는 교회는 결국 병에 걸릴 것입니다. 양떼를 찾아 밖으로 나가지 않고 고립을 자처하는 목자는 목자가 아닙니다. 교회가 폐쇄적이면 부패하게 됩니다. 폐쇄적인 교회는 일년 동안 문을 닫아 놓은 방과 같습니다. 누군가 그 문을 열었을 때 악취가 풍길 것입니다. 수백 만명의 어린아이들이 매일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데도 차를 마시며 고상하게 신학을 논하는 신자들이 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현재의 경제 위기는 경제문제가 아니라 사람보다 돈을 우선시하는 가치의 문제입니다.
프란치스코교황 2013년 5월18일 성령강림대축일 전야미사 강론 중 일부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정교분리의 원칙'에 대해서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 어느누구도 더이상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종교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 일에 대해서 영혼 구원에만 힘쓰는 것은 아니란 걸 확인해주신 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바라는 교회상은 이런 것입니다. 다 같이 읽어볼까요?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
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바라는 교회상, 복음의 기쁨 49항 중 일부)

가난하게 오신 예수님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처럼 되었다고 바오로 사도가 말합니다. 성탄절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가난하게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죄많고 억눌린 사람들과 당신은 하나가 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하늘 저 위에서 팔짱 끼고 위에서 자기 안위만 지키며 바라보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똑같이 이땅에 와서 살고 깨지고 상처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시죠.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입니까? 자기 스승이고 모범이신 예수님이 했던 방식을 따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곳입니다. 그게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표현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탈리아에서 일반 알현 때 하신 동영상을 하나 보여드립니다.
(영상시청.. 교황 알현 현장에서 한 교사가 사회정치 현안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는 의무

(동영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이 참여하는 걸 교황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의무라고 교황님은 말하십니다. 정치는 공동선, 네번째 사회교리 시간에 공동선에 대해 김용태 신부님이 말씀하실 것인데,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꿈과 이상을 완성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조건들, 그것을 이루어내는 사랑의 고결한 형태라고 얘기합니다. 정치가 제대로 되어야지 그 공동선을 잘 만들어내고, 바로 그것이 사랑의 고결한 형태이기에 정치는 그러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는 의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번 교황님 오셨을 때도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2014-8-14)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는 교회의 풍요한 유산인 사회 교리를 바탕으로 한 강론과 교리 교육을 통하여 신자들의 정신과 마음에 스며들어야 하며, 교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 반영되어야 합니다."라고 주교님들에게 당부를 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사회교리의 간단한 역사를 말씀드릴텐데하기동 성당의 수료미사에서는 김종수 주교님이 강론을 하실 것인데요. 주교님이 꼭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첫번째 사회교리 회칙이 뭡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태> 이거 외우셔야 합니다. 이거 자주 물어보십니다. 

왜 새로운 사태인가?

1891년 교황 레오 13세는 <새로운 사태>라는 사회교리 회칙을 발표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과연 교회가 사회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던가? 그것이 아닙니다. 산업혁명과 근 현대로 넘어오면서 세상은 완전히 뒤바뀝니다.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은 농업과 목축, 간단한 가내수공업을 통한 물물교환이나 거래 등의 수준이었죠. 그런데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자본주의라는 게 등장하고 시장이 형성되면서 이 사회가 그 전에는 <윤리신학>이란 분야에서 다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윤리신학이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이전 윤리신학에서 식별하던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러한 현상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교회의 가르침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보면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이란 책을 1776년에 냅니다. 본래 명칭은 국가의 부 <국부의 기원과 성질에 대한 연구>가 원 제목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어떻게 하면 나라가 부유해 질 수 있는가? 입니다. 그전에는 금이나 은을 많이 가진 것이 나라의 부유함이었는데, 그걸 깹니다. 

애덤 스미스 Adam Smith (1723~1790)

출생 1723년 06월 05일 스코틀랜드 커콜디

사망 1790년 07월 17일 (67세) 국적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윤리철학자이다. 후대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의 저자이다. 고전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애덤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경제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며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아담스미스는 많은 시민이나 개인들이 자신의 재산이나 부를 넉넉히 갖고 있어야 하고, 그럴려면 시장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시장에서의 인간, 즉 시장형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빵을 만드는 경우를 보았을 때, 빵을 파는 사람은 그냥 좋아서 내놓는 게 아니고, 더 비싸게 받을고 할 것이고, 더 싸게 사려고 하면서 가격에 의해서 조정이 되면서, 합리적 가격으로 물건들을 사게 되면, 그러면 시민들 부유해지고, 국민들 부유해지고, 그러면 나라가 부유해진다는 게 간단히 <국부론>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수요와 공급이 만나서 정해지는 이 '가격'을 정하는 것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말합니다.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 (1818~1883)

(독일어: Karl Heinrich Marx, 1818년 5월 5일~1883년 3월 14일)는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라인란트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역사학자, 경제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이다. 1847년 공산주의자동맹을 창설했다. 1847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공동집필해 이듬해 2월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과 1867년 초판이 출간된 《자본론》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다. 맑스, 막스, 칼 마르크스 등으로 표기하기도 하나, 외래어 표기법에 준하는 표기는 “카를 마르크스”이다.

아담스 vs. 마르크스


그렇게 자본주의가 인류 역사 안에 경제시스템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1848년에 아담 스미스에 대적할만한 인물, 이른바 우리나라에서는 빨갱이에 해당하는 마르크스, 위대한 철학자이며 경제학자이기도 한 데요. 마르크스가 세상 돌아가는 걸  보니까 자본주의자들이 얘기하는 것과는 다르게 세상이 움직히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보이지 않는 손으로 형성된 가격에 사고 팔면 모든 이가 좋고 풍요로울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더라!' '독점과 과점의 형태가 보이더라!'하는 것이었습니다. 맨 처음에는 10개의 공장이 신발을 만든다고 가정하면, 더 있는 놈(대형 신발공장)이 가격을 다운시켜서, 값싼 신발을 내놓고, 그 다음 주위 신발공장을 죽이고 망하게 하면서 과점을 하고 심지어 독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격을 올려서 폭리를 취하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아담 스미스가 얘기한 것처럼만 움직이지는 않았고, 그리고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한 것 중에도 오늘날까지 유효한 것들이 바로 이 독점과 과점의 형태입니다. 우리나라 통신, 정유, 유통 등은 과점의 형태이고, 소비자들이 합리적 가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점의 형태에서 우린 울며 겨자먹기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합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경제공황을 겪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게 2008년의 경제위기나 계속해서 주기적으로 공황을 겪고 있는 겁니다. 


비참한 노동자

그러한 것들을 비판하며 보니까 마르크스는 노동수익 중에 남는 수익, 그것이 잉여가치이고, 그것이 노동자에게 돌아가야 할 많은 몫들이 있는데, 이것을 자본가들이 다 가져가더라. 그래서 1848년에 '노동자들이여 일어나라 단결하라.'라고 하면서 공산당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길래 마르크스의 말이 먹혔던 것일까요? 우리가 현재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했다고 보는 나라는 영국과 미국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산업화 시대에서도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들었죠. 그런데 공급이 많아지니까 값어치가 떨어지고, (일하고 싶은 데) 일을 할 수가 없는 사람들도 많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형태들이 아주 취약한 것입니다. 그냥 넓은 공간에 난로 하나 놓고 바닥에 남자와 여자가 뒤섞여서 누워있고, 주된 수입은 도둑질과 매춘이었다는 보고서들이 올라가는 겁니다. 그리고 약한 사람들, 남자들은 임금을 깍으면 저항을 하니까 누구를 선택하게 되죠? 바로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이나 아동에 대한 착취가 생기는 겁니다. 때로는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어떨때는 아침 9시부터 다음날 아침 9시까지 24시간을 일했다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1700년대, 1800년대 산업화 과정의 영국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19세기 글래스고 지역에 대한 영국 정부의 보고서(강의스크린)에는 산업혁명을 통한 기계와 인간의 전도현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 글은 강의 당시 스크린에서 보여준 내용과 비슷한 것이고, 출처는 유시민의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이다.

19세기 중엽의 영국은 전 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도시에 살았다. 그런데 그 도시라는 것은 도무지 사람 살 곳이 아니었다. 하늘은 시커먼 매연으로 뒤덮여 있었고, 뒷골목에는 치우지 않은 쓰레기가 넘쳐 흘렀다. 식수를 공급하거나 쓰레기를 수거하는 등의 공공서비스는 급속한 도시 인구의 팽창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물과 공기는 오염되어 콜레라와 장티푸스, 호흡기 질환이 주기적으로 밀어닥쳤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국부를 증진시켰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문명화된 야만의 상태'에 집어 던졌다. 글래스고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영국 정보의 한 보고서는 글래스고의 한 노동자 주거지역의 실상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1만 5천~3만 명이 사는 그 지역은 좁다란 길과 네모꼴의 구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구획 사이에 쓰레기 더미가 있었다. 이곳은 겉보기에도 무척 역겨웠지만, 그 내부의 불결함과 비참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밤에 합숙소를 찾아가니 마룻바닥에 사람들이 빽빽이 누워있었다. 보통 열다섯 내지 스무 명의 남녀가 옷을 입기도 하고 벗기도 한 채 뒤엉켜 누워 있었다. 가구라고는 전혀 없었고, 사람 사는 곳임을 알려주는 것은 벽난로의 불꽃 뿐이었다. 이런 사람들의 주된 수입원은 도둑질과 매춘이었다. 


새로운 기계의 발명은 노동자들에게 또 다른 재앙이었다. 새로운 기계들은 노동자들을 단순한 부속물로 전락시켜 극히 간단하고 규격화된 작업만을 강요했다. 그리고 고용주들은 다루기 힘든 남자들 대신 여성과 어린이를 싼 값에 고용했다. 여성과 아이들은 최악의 근로조건에서 일하면서도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특히 어린이들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당시 영국 정부는 '빈민 구제법'에 의해 빈민 자녀를 수용하였는데, 자본가들은 이 어린이들을 "선도하고 열심히 일하는 습관을 길러주기 위해" 정부로부터 넘겨받았다. 그러나 이 어린이들이 빈민구제라는 훌륭한 명분 아래 받은 '혜택'은 하루 14시간 이상의 긴 노동과 20분간의 짧은 식사 시간이었다. 기계장치에 휘말려 손발이 잘리고 관리자들에게 '심심풀이'로 린치를 당해 불구가 된 어린이들의 이야기는 당시로서는 그리 희귀한 것이 아니었다. 



여성과 아동 착취

또한 여성과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에 대해서는 <1833년 영국 의회에 제출된 아동 고용에 대한 보고서>에서 그 사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 열한 살짜리 소년 토마스 클라크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우리가 졸 때는 그들이 가죽끈으로 때렸습니다... 나는 6시 조금 못되어서, 때로는 5시에 공장에 나가 밤 9시까지 계속 일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룻밤을 꼬박 일했으며...우리는 스스로 그렇게 했습니다. 돈을 벌고 싶었으니까요. 그저께는 아침 6시부터 ... 다음날 밤 9시까지 계속해서 일했고... 나는 지금 밧줄공장에서 일합니다... 내 동생이 나를 돕고 있습니다. 그 애는 꼭 일곱 살입니다. 나는 그 애한테 아무것도 안 주는데... 만약 내 동생이 아니라면 일 주일에 1실링씩 줘야 합니다...나는 아침 6시에 그 애를 데려가서 밤 8시까지 데리고 있습니다.



왜 공산당에게 달려갔나?

그런데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하니 우리 편에서 이야기해주는가 공감하며 많은 노동자들이 그 쪽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시절에 사실상 많은 풍요가 있는데, 부익부와 빈익빈이 심화되면서, 그것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1700년대와 1800년대까지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하니까 이것은 사회주의 이론은 교회가 보기에 위험했던 것입니다. 유물사상으로 물질이 모든 걸 결정한다는 것이니, 그것은 교회의 가르침과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제 여태까지 윤리신학이 해결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겠구나 해서 1891년 레오 13세가 첫번째 사회교리 회칙인 <새로운 사태>를 발표하게 된 것입니다. 

공산당은 교회 가르침과 다르다

그러면 교황님이 이걸 혼자 발표하고 끝낸 게 아닙니다. 그 이후로 교회는 전통으로 현대 세계에 대한 교회의 회칙을 반포하게 됩니다. 그래서 레오 13부터, 비오 11세, 요한 23세,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2세 등 100년이 넘는 사회교리 문헌들이 정치, 경제, 노동자, 전쟁, 평화, 환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아래 대표적인 회칙에 나오는 내용들이 그런 것입니다.

1. 새로운 사태(교황 레오13세의 회칙, 1891)
2. 사십 주년(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1931)  
3. 어머니요 스승(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1961)
4. 지상의 평화(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1963)  
5. 사목헌장(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1965)  
6. 민족들의 발전(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1967) 
7. 노동하는 인간(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1981) 
8. 사회적 관심(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1987) 
9. 백 주년(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1991)  

간추린 사회교리가 나온 까닭

그래서 이것을 100년이 지난 다음에 여러분에게 나눠준 <간추린 사회교리>는 시대마다 중요한 것들을 맞같게 발표한 것인데, 100년이 지났으니, 100년(새로운 사태 백주년, 1991)을 정리한 게 교재로 제공한 <간추린 사회교리> 책입니다. 간추렸는데 400페이지입니다. 그만큼 방대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기때문입니다. 사회교리가 그렇다면 교황님들의 가르침들로만 이루어졌나? 그건 아닙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도 이 내용이 남겨져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크게 네편입니다. 이것은 교황청에서 발간한 것이고, 가톨릭 신자라면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들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구성

저는 신학교 때 나와서 낱권으로 가지고 있는 것인데요. 지금은 한 권으로 묶여져 나옵니다. 그 중에서 제 1편은 무엇입니까? 1편은 신앙고백입니다. 내용은 뭐냐면, 사도신경을  풀어놓은 것이고, 그것이 400페이지입니다. 우리가 뭘 믿고 있는가? 사도신경은 그냥 우리 신앙을 아주 엑기스로 비문처럼 짧게 묶어놓은 기도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 입니다. 

2편은 성사편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오늘날 기념하는가? 즉 제2편의 제목은 <그리스도 신비의 기념>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일곱가지 성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3편이 믿고 기념하는 데 어떻게 사는가?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제목이고, 4편이 믿고 사는데 힘떨어져!, 그래서 힘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죠? 기도해야죠.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기도>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제3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3편은 2개 부분(제1부와 제2부)로 나눠져 있습니다. 하나는 십계명(제2부)입니다. 그리고 그 앞부분인 제1부가 <인간의 소명: 성령 안의 삶>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존엄성(제1장), 인류공동체(제2장), 하느님의 구원: 법과 은총(제3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겁니다. 거기에 (제2장에) 인간과 사회, 사회생활 참여, 사회 정의 등 사회 교리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교리서 안에 있는데 그동안 안 가르친 겁니다.

왜 사회교리주간을 만들었나

그런데 다행히 2011년부터 한국주교회의에서 사회교리를 이상하게 받아들이거나, 신자들이 모르고 있다고 여겨서 대림 2주일부터 2주간을 사회교리 주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가톨릭교회 교리서, 그리고 교황님의 여태까지 가르침 등이 사회교리의 주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011년 12월 4일 인권주일을 맞이하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인 이용훈 주교는 제30회 인권주일 담화문이며, <'사회교리 주간' 제정에 즈음하여>라는 부제와 <정의와 사랑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소명> 제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오늘날 교황님께서도 많이 얘기하시는 것으로, 우상은 무엇일까? '돈'이 나오죠. 돈이 맞습니다. 돈이 오늘날 굉장히 큰 우상이지만, 그 이전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제 주장인데요. 내가 만든 하느님을 믿는 겁니다. '하느님은 이래주셔야 해. 하느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고, 내가 듣기 좋은 말을 들어주셔야 해' 하면서 내가 하느님을 만들고, 내가 만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뭘로 발전하냐면, 교회는 내가 만든 교회를 다니려고 하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얘기를 교회는 해줘야 하고, 내 바램을 들어줘야 하고, 그래서 교회에서 다른 얘기를 하면, "왜 교회에서 그런 얘기, 불편한 얘기를 왜 하십니까?"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무서운 우상입니다. 


"내 이름은 야훼. 있는자 그대로이다."

신앙은 하느님 뜻에 의해 우리가 변화되는 것이지, 내 뜻과 내 바람대로 하느님이 움직여주시고 변화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더 무서운 우상입니다. 하느님을 내가 조종하고 하라는 대로 하느님이 움직여주시길 바라는 마음. 바로 이 때 의로움은 무엇입니까? 하느님 말씀에 흔들리지 않고 믿으면서 따라가는 것, 그것이 기본입니다. 이것이 안되면 그 믿음의 자리에 다른 녀석이 들어와서 나를 흔들어댑니다. 그것이 우상이고, 먼저 그래서 내가 만든 하느님, 내가 원하는 듣고 싶은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을 믿는가? 아니면 성경에 있는,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신, 즉 모세에게 하느님은 "내 이름은 야훼. 있는자 그대로이다."

난 누굴 믿고 있나

있는 자 그대로의 하느님을 진정 믿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부분만 해주는 하느님을 믿는지 늘 신앙생활하며 계속 물어봐야 합니다. 뭔가 하느님의 말씀이 내게 감동과 평화를 주기도 하지만, 때로 예수님은 '불을 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의미없는 분열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 삶을 막아버리는 것들과 사람들을 정화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부분을 신앙생활 가운데 늘 곱씹어보시길 바랍니다. 과연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인가? 이것은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월 가를 점거하라(영어: Occupy Wall Street, OWS)

2011년 미국 뉴욕 주 뉴욕 월 가에서 진행되었던 시위이다. 2011년 9월 17일 미국 사회의 경제 불안과 부조리에 항의하는 "고학력 저임금 세대" 30여명이 월가에서 처음 시위를 벌였다. 구호는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이들은 미국을 경제위기에 빠뜨리고서도 수백만 달러의 퇴직금을 챙겨 떠나는 월가 최고경영자들에게 분노했던 것이다. 뉴욕은 세계 최대 강대국 미국의 경제수도이며, 월 스트리트는 그 뉴욕의 경제중심거리이다. 사실상 지구상의 경제수도의 핵심 경제중심가에서 발발한 시위이다. 미국의 가을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사람들은 아랍의 봄(2011년 이집트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촉발됨)과 5월에 시작된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과 비교하기도 한다. 당시 월가 시위를 모델로 다른 도시에서도 점령시위가 확산되었는데, 보스턴, 워싱턴,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샌디에이고 등 다른 대도시에서도 시위가 일어났으며, 미국을 넘어 세계 각지로 확산되어 2011년 10월 15일 캐나다의 증권거래소 앞에서도 같은 시위가 열렸으며, 대한민국의 서울특별시 여의도, 서울역 등지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출처. 위키피디아)

황금송아지와 월스트리트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날 가장 큰 우상은 '돈'입니다. 세계금융무역의 중심지인 뉴욕의 월 스트리트의 금송아지 조각이 있죠. 그것은 성경에 나옵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온 신을 보여달라고 하니까, 아론이 금붙이 줘 봐! 아론의 표현대로라면 '불에다 쑤욱 넣었더니 쑤욱 나왔다'고 해요. 성경에서 송아지는 풍요로움을 상징합니다. 그것도 금송아지입니다. 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만들었을까? 이 사람들은 과거 이집트에서 파라오와 이집트 문명을 보았습니다. "와! 우리가 저런 나라를 꿈꿔야 겠다. 거기서 종살이를 했지만 저기가 센 거야. 저 황금덩어리!" 그런 생각을 한 겁니다.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에 가보면 어마어마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걸 본 거에요. 

그런데 모세에게 십계명을 준 하느님은 나는 너희를 종살이하던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낸 이다. 그런데 이집트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이 되려고 하니, 다른 사람과 같이 살려고 하지 않고, 억누르려는 그 곳에서 신음하며 종살이를 했는데, 그걸 듣고 모세를 통해 끌어왔는데, 어떻게 너희들이 그걸 추구하려고 하냐? 그래서 하느님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려다 말고 화를 내죠. '이 백성은 참으로 뻣뻣한 백성이다.' 그래서 모세가 내려외서 십계명을 깨고 다시 계약을 맺을 준비를 합니다.

어쩌면 구약에서부터 내려오면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알 신이라든지, 이방의 신들은 풍요를 낳게 하는 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유다가 왜 망했는가? 그 풍요로움을 주는 우상들을 섬기다가 망하고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게 된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또 와서 보니까, 이번 주 복음입니다, 성전에서 그 짓거리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아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 문제다

돈이란 오늘날의 우상만은 아닌 겁니다. 옛날에도 그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왜 가지려고 하는가? 남들 위에 올라서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돈이란 건 얼마전 교황님이 말씀하시길 "돈은, 사탄의, 악마의 부산물이다." 돈의 우상화를 경계하시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떨어트려 놓아야 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계속 말씀하고 계시고,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비극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한국 현대사의 큰 아픔들

오늘날에도 이 돈으로 인해서 그리고 다른 권력 등을 통해 우상화를 하면서 빚어지는 아픔들이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대표적 일이고, 제주도 해군기지, 동북아 평화의 문제, 비정규직 노동문제, 환경 문제인 4대강이나 핵발전소, 이걸 막기 위한 언론과 방송, 여러가지 역사문제, 이런 것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아프게 갖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분들을 이제는 여태까지 설명드린 것은 바로 이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기도만 열심히 하고 나만 착하게 살면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떠올려 보면, 사제와 레위인은 부정 탈까봐 초주검이 되어있는 저 사람을 피해 갑니다. 그런데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마리아인은 끌어안고 치료해주고 여관에 데려가고 돈까지 주고 갑니다. 이 질문은 무엇을 뜻합니까?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그가 계명에 대해서 잘 설명을 합니다. 한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게 율법과 계명의 정신이다 등등 설명하고 잘난척하다가,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자, 그러자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면서, 끝부분에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고통받고 울부짖고 아픈 사람들을 무관심하게 넘겨버리는 것은 굉장히 우리 신앙에 위험을 주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처음에 로마 밖으로 가서 하신 미사입니다. 람페두사란 곳이고, 이탈리아 최남단 섬인 람페두사에서 첫 바깥 미사를 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난민으로 유럽대륙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인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배에 타고, 바다에 빠져죽고 도착해서는 수용소에 갇힙니다. 그런 아픔이 있는 곳이 람페두사 섬인데, 거기서 드린 미사입니다.


참극 … 476명 승선 … 사망 294명 … 실종 10명 … 구조 172명

"재판에서 드러나는 것들은 그냥 '현상'을 모았을 뿐 그건 '진상'이 아니다" -소설가 김훈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눈을 떠야 한다. 우리가 눈을 뜨지 않으면 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 박민규 '눈 먼 자들의 국가'

가족들은 말한다. 그날 이후 시간이 멈췄다고. 오늘은 10월 16일이 아니라 184번째의 4월 16일이라고… "지겹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자식이 어떻게 지겨울 수 있습니까"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시인 진은영 

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저 : 김애란, 김행숙, 김연수, 박민규, 진은영, 황정은, 배명훈, 황종연, 김홍중, 전규찬, 김서영, 홍철기

| 출판사 : 문학동네 | 발행일 : 2014년 10월06일 | 정가 5,500원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라는 한 시인의 말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 그리고 무관심으로 돌아가려는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마르틴 뇌밀러는 독일 신학자가 "왜 우리가 이 인류 역사안에서 600만이라는 사람들을 홀로코스트, 즉 집단학살 했는지 과연 왜 그랬을까"를 반성하며 독일 국민들에게 촉하는 글을 썼습니다.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 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를 위해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시를 통해 독일인들이 무관심과 침묵으로 있던 것을 반성하게 한 글입니다. 제가 몇 년 전 이 글을 읽고 바꾸어보았습니다. 용산, 밀양, 강정, 그리고 4대강 등 우리가 그 사람이 아니기때문에 무관심으로 돌려버리는 게 많았습니다.

교황님의 호소를 우리가 귀담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는 능력을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는 능력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끊임없이 기억하게 하고, 그 관심으로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보기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해준 것이 내게 해준 것이란 말씀을 삶의 중요한 가치임을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인간이 무엇인지 사회교리가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이며 흙의 먼지이면서 동시에 함께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첫 사회교리 책이 <새로운 사태>라는 것도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2015년 3월 4일(수) 밤 10시 06분 강의종료
위 강의노트는 필자의 기억과 기록에 따른 것이기에 다소 부정확할 수 있으며 
강의내용과 다른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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