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진행하는 제109차 사회교리학교가 2월 2일(월)부터 13주간에 걸쳐 <기본과정> 강의를 개최 중에 있다. 서울 중구 명동2가 1번지 가톨릭회관에서 매주 월요일 저녁 7시부터 하루 2시간씩 열리는 이번 강의는 5월 4일(월)을 끝으로 13회의 모든 강의를 끝낸다. 3월 2일(월)은 다섯번째 시간으로 강의제목은 <사목헌장(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이고, 박정우 가톨릭대 성신교정 신부님이 강사로 나섰다. 다음은 제5주차 수업인 2015년 3월 2일(월) 오후 8시경부터 9시까지 열린 2교시의 강의노트이다. 



사회교리 5주차 2교시, 2015-3-2(월)


다음 내용은 강의 정리자의 기억과 기록을 바탕으로 재편집된 것이며부정확할 수도 있습니다따라서 실제 강의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강의에 앞서 박정우 신부님은 가톨릭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간추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여성들의 역할이 교회 내에서 커져야 한다고 강조하신 바 있죠. 그래서 여성 사제가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의견이 나오지만, 제가 보기엔 그렇게 여성 사제의 등장이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워낙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단단하게 말도 꺼내지 마라고 해놓으셔서, 여성 사제 문제가 공론화되려면 더 많은 세월이 지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혹시나 기혼사제는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사실 아직 우리 한국은 성소가 많아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이미 유럽이나 미국은 텅텅 비었습니다. 그걸 잘 모르실 겁니다. 이미 성소가 유럽이나 미국은 1960년대에 급감했습니다. 1960년대가 앞선 강의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큰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가치관의 혼란, 우리나라도 미국의 60년대를 겪게 될 것 같습니다. 60년대 성소가 급감한 이유 중 하나는 '오직 경제' 그것이죠. 

한참 미국이나 유럽이 전후에 잘 나가고 경제가 성장하고 돈을 버는 게 최고의 가치인 사회였고, 성의 문란. 지금 우리나라도 굉장히 심각합니다. 이미 젊은이들, 고등학생 때부터 성관계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대학생들이라면 20대 초반이면 성관계 안하면 뭔가 모자르거나 문제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혼전 성관계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성소가,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데, 성소를 받기 전에 쾌락 중심의 성 문화에 노출된 것입니다. 제가 포담 대학교가 예수회 뉴욕관구에서 운영하는 곳인데, 미국에서 2시간 정도 올라가면 허드슨 강변에 아주 아름다운 포킵시(Poughkeepsie)라고 있습니다. 

허드슨 강변의 포킵시(Poughkeepsie) 전경. 미국 뉴욕주에 있는 도시로, 더치스 카운티 군청소재지다.


거기에 옛날에 예수회 수련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빨간 벽돌로 아주 아름답게 지은 수도원 분위기의 건물인데, 그 건물이 1969년도에 팔렸어요. 성소자가 없어서요. 많을 때는 거기서 400명 이상 예수회 수련자가 교육 받았다고 해요. 제가 갔을 때, 한 20년 전인데, 1994년 미국 갔는데, 그 때 이미 은퇴하신 교수신부님들 공동체에 얹혀 살았는데, 그 신부님들이 그 당시 70대 80대인데, 한국에서는 한번에 30명씩 신부됩니다. 저희가 34명. 저희 반이 신부되었는데, 자랑했더니, "야, 내가 신부될 때 그랬다." 당신이 50년대에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1960년대에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1969년도에 팔아서 지금은 CIA의 건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CIA는 중앙정보국 CIA가 아니라,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 (* Culinary 요리의) 라고 해서, 미국의 유명한 요리학교입니다. 그래서 거기 가면, 대성당으로 쓰던 것이 대 식당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살던 학교(포담대학교?) 내의 예수회 공동체가 커다란 건물 2개를 쓰고 있다가 제가 갔을 때는 한 건물 4층은 학교에 내주었답니다. 학생이 없어서요. 그런데 최근에는 연락해보니, 두 건물 다 학교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CIA(Culinary Institute of America) 뉴욕 캠퍼스의 Roth Hall. 박정우 신부님의 설명을 따라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아마도 이 건물이 대성당이었는데 대식당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을까 추정해본다. CIA 홈페이지 설명에 따르면 이 건물 이름 Roth Hall은 CIA 공동창립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5층 짜리 건물로, 150개의 방을 가지고 있는데, 여러개의 식당과 수업용 부엌, bake shops, 그리고 행정부서 등이 들어서 있다고 한다.


아래 첨부된 PDF 파일은 CIA 뉴욕 캠퍼스 맵 자료이다. 

ny-campus-map.pdf


그리고 수도원은 지금 다 노인들 밖에 안계시고, 성소자가 없으니까 아시아와 가난한 나라들 수도자들이 가서 운영을 한다고 합니다. 더 이상 젊은이들이 없어서요. 새로운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그런데 우리나라도 기본적으로 성소가 줄어드는 추세고 아이를 기본적으로 안낳으니까 없는 거죠. 베이비붐 시대에는 신생아가 100만명이었죠. 지금은 신생아가 45만명이 안됩니다. 그래서 더 문제입니다. 일단 애를 안 낳으니까 신학교에 올 자원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좀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신학교에 오려는 경향이 강했는데, 지금은 부모님이 애를 겨우 한 두 명 있으니까 공부 잘하고 똑똑하면 "무슨 신학교야!, 의사 되던지, 법대 가야지!" 그러시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부산 신학교는 신입생이 적어서 문을 닫고, 대구 신학교로 보냅니다. 지금 인천, 수원, 대전, 여기도 누가 먼저 망하는가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인원이 줄어서 학교 운영이 안되면 학교를 합쳐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전국에 4개였는데, 지금 7개잖아요. 다시 줄어들 것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심각한 현실입니다. 그 전에 조규만 주교님이 어느 수도원 서품식 때 맞춰서 하신 말씀인데, "요즘은 신부 되기가, 신부로 살기가 힘든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계속 이뻐지고 있습니다. 성형 기술의 발달로... " 이런 농담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물질적인 것이나 쾌락이나 사회에서 수많은 유혹거리를 이기고 신학생으로 지망하게 될 새로운 바람이 불지 않으면 앞으로 힘들겠다. 우리 서울신학교도, 과거에는 수원, 대전, 인천 다 서울에서 공부했는데, 이제 서울하고 의정부만 남았죠. 그래서 학교 운영이 어렵습니다. 신학생이 줄어드니까요. 대학로에 나가면, 주로 대학생과 젊은이들 데이트 장소입니다. 한창 피끓는 20대 초에 우리 신학생들 나갔다 오면 싱숭생숭해서 안그래도 힘들게 들어왔는데 참 걱정이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성소 개발, 어렸을 적부터 소질이 있는 아이에게 "너 신부 되면 좋겠다!"라고 말씀 해주시는 것,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본당 수녀님이 "너 신부 되면 좋겠다!"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 때는 제가 "수녀님 저는 장가갈 거에요. 무슨 소리에요. 말도 안돼요!" 그랬는데, 그 말에 계속 남는 거에요. 성소의 씨를 뿌리는 거죠. 지금도 여러분들이 본당에서 똑똑하고 열심한 애들 있으면 "신부 되면 좋겠다."라고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2교시 수업 시작. 2015년 3월 2일(월) 오후 8시 14분경 촬영


이제 여러분이 <사목헌장>을 배웠다고 하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사목헌장 1항입니다. 굉장히 많이 들어오셨고, 앞으로도 자주 듣게될 내용입니다.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사목헌장] 1.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자, 기쁨과 희망이란 단어가 처음 나와서 사목헌장 제목이 되었는데, 이게 무슨 말이죠?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그리고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그리스도 제자들의 것이다.' 즉, 우리 교회 밖에 있는 그러니까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기뻐할 때, 우리도 함께 기뻐하고, 함게 슬퍼한다.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이것이 굉장히 상징적인 문장입니다. 이것이 바티칸 공의회 정신, 사목헌장 정신을 잘 드러내보 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경험하는 것과 교회 밖이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적인 것은 모두 다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영향을 주고 공유할 수 있는 모두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고, 우리 교회 관심사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100주년에서 그런 얘기 하셨죠.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은 바로 인간이다. 

교회가 왜 존재하는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죠. 인간에 대한 관심이 첫번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하고, 그래서 결국 구원이라는 표현은 다른 말로 바꾸면, 특히 사회교리에서 많이 쓰는 용어인데, '인간의 해방, 발전, 완성'입니다. 이런 표현 많이 씁니다. 단지 죽어서 어디 천당가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구원이 되었다는 것은 죽어서 천당을 간다는 좁은 개념이 아니고, 이 세상 안에서의 삶 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가능성,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존귀함. 이런 것들을 발전시키고 성장시켜서 우리가 완성되는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할 때의 그 '하느님 나라'는 어떤 공간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어떤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 자유, 진리, 어떤 정의, 사랑,이런 가치들이 실현된, 그야말로 하느님의 다스림이 그것을 전체적인 것을 다 아우르는 그런 상태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것을 거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가 변화되는 것이 구원이죠. 

그래서 교회는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것, 그런 조건을 만드는 것이 공동선이라고 그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갖고 있는 가능성을 쉽게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회 조건들, 그런 제도, 그런 것들이 공동선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완성을 방해하는 것들

한 인간으로 완성되는 과정에서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권의 억압이라든지, 비인간적 여러가지 조건들,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 방해하는 그런 요소들, 그런 것들에서 우리가 해방이 되고, 그것은 내적인 것도 있고, 외적인 것도 있습니다. 내적인 죄로부터의 해방, 욕망으로부터의 해방, 이런 것들도 다 포함하는, 그래서 완성되어가는 그런 모든 과정이 구원의 여정입니다. 그 구원의 여정에 교회가 함께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는 세상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 안에 인류와 더불어 함께 가면서 이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 누룩의 역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만 복받기 위해서, 잘 살기 위해서,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은 "너네들은 다 우리보다 열등해, 우리만 뭔가 혜택을 받아서 짠하고 하느님 나라 들어간다." 이런 것이 교회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같이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먼저 하느님을 알았으니, 세례를 먼저 받았기 때문에, 세상에 봉사하며 그들을 진리로 이끌어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이 뒤에서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죠. 


기쁨과 희망

그래서 제 1항에 그 유명한 <기쁨과 희망>, 현대인, 특히 고통받는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스도인 역시 인간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기억해 두시고요.

2항에서는 인류전체를 향해서 우리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3항은 인류에 대한 봉사, 소제목이 붙어있는 데, 인류가족과 더불어서 우리 인류가 고민하는 문제를 나누고, 복음에서 이끌어낸 빛을 비추어서, 인류에게 구원의 힘을 제공한다. 그래서 교회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서 왔다. 또 구원과 섬김을 위해서 존재한다라고 얘기합니다. 이기 머리말입니다.

그 다음에 서론은 4항으로부터 시작하는데요. 이것도 굉장히 많이 인용되고, 중요한 내용이 담긴 항입니다. 

이러한 임무를 완수하고자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 세대에 알맞은 방법으로 교회는 현세와 내세의 삶의 의미 그리고 그 상호 관계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여기에 줄을 쫙 그어놓으세요. 그리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여기까지 줄을 좌악 그어놓으세요. 이 사목헌장 4항은 역시 굉장히 많이 인용되는 겁니다.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한다.'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한다.' 이게 많이 인용됩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유다인들에게 너흰 하늘을 보고 구름이 끼면, 비가 올거다라는 걸 알면서, 왜 시대의 징표는 알지 못하는가? 이렇게 얘기하시죠. 지금 우리가 사는 21세기, 대한민국 또는 우리 인류가 직면한 문제가 뭔가? 여러가지 징표와 싸인들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과제를 던져주는가? 그런 것들을 우리가 읽을수있어야 하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복음의 빛으로. 지금 가장 큰문제 물질만능주의,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고, 돈 때문에 형제 자매가 총질을 하는, 그리고자식들 돈 빚이 있다고 동반자살하고 있는 이런 현실 안에서 도대체 우린 뭣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복음의 빛을 기준으로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교황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들에게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이런 것을 반성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요즘은 SNS가 매우 활발하기 때문에 교황님 매일 하시는 미사를 우리가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도 하나의 역할이죠. 그래서 각 세대에 알맞은 방법으로 교회는 현대의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답을 해줍니다. 어찌보면 사회교리도 그런 역할을 해 줍니다. 

<새로운 사태>부터 <복음의 기쁨>에 이르기까지

19세기에 노동문제에 대해서 레오 13세 교황님이 <새로운 사태>를 통해서 응답을 해주셨다면,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으로 응답해주시죠. 나름대로 각 교구장님들, 혹은 교회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신자로서 그러나 사회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 양심과 내 신앙에 비추어서, 언론인은 언론인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고, 교사는 교사. 수도자는 수도자로서의 역할을 나름대로 해야 한다는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론에서는 인류가 경험하는 여러가지 급격한  변화. 과학기술은 발달하는 데 기아 빈곤 문맹, 국제적 갈등, 이런 것들에 직면하고 있다. 한편으로 사람들이 뭔가 영적인 것 추구하면서도, 또 한편에서는 종교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이런 불균형을 주욱 얘기합니다.

인류의 보편적 열망은 뭐냐?

인류의 보편적 열망은 무엇인가? 그래서 세계 공동체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일치하고 협력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이 각자 책임이 있고 어떤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이름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가 열망하는, 인류가 고민하는 여러 문제에 답을 줘야 한다. 라고 서론에서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소명과 교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1부. <인간의 소명과 교회>에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이야기를 하는 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하느님의 모상이란 게 어떤 의미인지, 죽 보시면서, 인간의 양심, 자유 이런 주제들을 주욱 다루는데 제19항부터 무신론을 얘기합니다. 이미 언급한 처럼, 인간이 존엄하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을 우리가 전제할 때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생명의 복음>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날 죽음의 문화가 만연되어 있는데, 왜 그런가? 그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할 때, 왜 인간은 존엄한가? 하느님을 닮은 존재이다. 그러면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 아니면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함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설명하기 힘들어요. 만약에 무신론자들 혹은 진화론을 신봉하는 자들이라면, 인간은 원숭이보다 조금 머리좋게 진화된 고등동물에 불과하다고 볼 것입니다. 요즘은 머리 좋은 동물이 또 있습니다. 돌고래가 머리가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침팬지가 더 좋다는 이들도 있고, 어찌되었든,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초월적 특성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조금 더 진화된 동물에 불과하죠. 그러면 뭐가 됩니까? 우리도 동물실험을 하듯이, 인간도 조작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잊어버린 사람에게는 인간의 존엄성도 없다라는 것입니다.

영국 최초로 이종배아 실험에 성공한 내용을 보도한 영국의 The Times Online의 2008년 5월 20일자 보도.

뉴캐슬 대학 연구팀은 같은 해 4월 영국 최초로 이종배아(Hybrid Embryos)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발표 이후에, 영국 의회는 동물과 사람을 교잡하는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찬반투표를 실시했으나, 압도적 표차이의 결정으로 연구를 허용했다고 한다. 이 연구는 소의 난자와 인간의 유전자를 결합한 사이브리드(Cybrid.세포질 교합배아)를 이용한 것이로, 암소의 난자에 인간의 피부세포 DNA를 주입한 것이다. 연구팀에 따르면 이 배아는 인간과 동물의 성질을 모두 갖고 있으며 3일동안 생존했다고 밝혔다. 


英 인간+소 배아 성공…半人半牛 현실로? ... 더 사이언스 2008년 4월 3일자

그래서 지금 영국에서 배아실험하면서, 다른 동물의 난자나 정자를사람과 섞기도 하고, 지금은 난자를 다른 사람것과 함쳐서, 미토콘드리아 이상 있는 사람 것을 빠버리고 그걸 섞어서 두개의 난자를 이용한 아기를 낳게 한다든지, 여러가지 실험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인간 생명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인간 생명까지도 조작의 대상이 되는 물질로 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무신론이 1960년대에 여러가지 그런 나름대로의 주장을 하는데 여기서 반박을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21항 보면, 무신론에 대한 교회의 태도가 나옵니다. 

21. 무신론에 대한 교회의 태도

[사목헌장] 21. (생략) 무신론의 치유는 한편으로는 교리의 올바른 제시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와 그 구성원들의 완전한 삶에서 기대하여야 한다. (이하 생략)




만들어진 신-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은이) | 이한음 (옮긴이) | 김영사 | 2007-07-20 | 원제 The God Delusion (2006년)


진화생물학자인 도킨스의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전 세계 과학계와 종교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자연적 지성이 있다는 신 가설에서 신이 만들었다는 태조 우주까지, 창조론의 주요 쟁점들에 대해서 지은이는 자연선택을 근거로 반박 이론을 제시하며 창조론의 허울과 실상을 밝히겠다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소개된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인사회)'의 추천글은 다음과 같다. 신은 없다! 모든 종교는 틀렸다! 『이기적 유전자』로 저명한 진화생물학자 도킨스는 수많은 과학적 논증을 펼치며 신이 없음을 입증하고, 오히려 신을 믿음으로써 벌어진 참혹한 전쟁과 기아 그리고 빈곤 문제들을 일깨운다. 신의 거부는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가치인 진정한 사랑을 찾는 일이다. 신이 없어도 인간은 충분히 열정적이고 영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주목하라. 신의 존재를 의심하라’라는 저자의 메시지에는 이제껏 신의 이름 뒤에 가려진 인간의 참 모습을 깨닫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있는 셈이다.


끊임없이 교회가 쇄신하고 정화됨으로써, 그리고 성숙한 신앙의 증거를 통해서, 신자들이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신앙의 풍요로움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무신론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어찌되었든 
교회는 무신론을 완전히 배격하지만,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모든 사람은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을 바로 건설하는 데 힘을 합쳐야 한다고 진정으로 선언합니다. 무신론자라고 죄인 취급하고 상대하지 않는다는 게 아닙니다. 인류를 위해서 함께 협력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인간, 완성된 인간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을 바라보자. 그 분은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오셨고, 그 길을 알려 주셨다. 그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인간 공동체

그 다음에, 2장 <인간공동체>에서 처음 23항이 시작되는데, 24항을 보세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항목입니다. 동그라미를 쳐주세요. 나중에 다시 읽어보시는데, 특히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굉장히 좋아하시고 많이 인용하신 곳입니다. 

24.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소명의 공동체적 특성

 

[사목헌장] 24. 만민을 아버지로서 돌보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한 가족을 이루고 서로 형제애로 대접하기를 바라셨다. “한 사람에게서 온 인류를 만드시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신”(사도 17,26)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은 똑같은 하나의 목적, 바로 하느님께로 부름 받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첫째가는 가장 큰 계명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을 이웃 사랑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된다.……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로마 13,9-10; 1요한 4,20 참조). 날로 더욱 서로 의존해 가는 사람들에게 또 날로 더욱 하나로 합쳐지는 세상에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더욱이 주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제가 하나인 것처럼……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22) 하시며 성부께 기도하실 때 인간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시야를 열어 주셨으며, 진리와 사랑 안에 있는 하느님 자녀들의 결합과 신적 위격의 결합이 지닌 어떤 유사성을 가리켜 주셨다. 이 유사성은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바라신 유일한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지 않으면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이것은 뭐냐면, 사람은 결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완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혼자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 혼자서는 안된다. 우리가 이웃 사랑의 계명,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면서, 사랑의 계명에 있어서, 다른 형제, 다른 사람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얘기하는데, 특히 24항에 보면, 주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제가 하나인 것처럼……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22) 하시며 라고 하시며 우리 시야를 넓혀 주셨는데, 진리와 사랑 안에 있는 하느님 자녀들의 결합과 신적 위격의 결합이 지닌 어떤 유사성을 가리켜 주셨다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라

이게 무슨 말이냐면, 삼위일체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 삼위가 일치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일치하는 게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위격의 '격'은 인격과 똑같은 단어를 쓰고, 독립된 존재입니다. 독립된 지성과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인데, 삼위일체 하느님 이 세 위격이 통교하며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인간 역시 다른 인격과 소통하고, 다른 인격과 일치하는 그런 체험 없이는 결코 왼성될 수 없다. 자신이 누군지 알 수없다. 그래서 여기 표현을 보면, 이 유사성은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바라신 유일한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지 않으면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자신을 아낌없이 다름 사람에게 내어줄 때만 자신이 누구인지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 한 인간이 성장하고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실 많이 들은 얘기에요.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핵심은 자기를 내어주는 것,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주는것. 우린 사랑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24항에 자기를 아낌없이 내어주지 않으면 자기를 완전히 발견할 수 없다. 자기가 누군지 알 수 없다. 성장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께서 만드실 때, 더불어서 살아가도록,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몸의 신학>이란 곳에서 남성과 여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또 남녀가 아니더라도, 인격과 인격이 온전히 서로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체험 안에서만 성장할 수 있고, 완성될 수 있고,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고 계속해서 강조를 하십니다. 그래서 더불어 살아가는 게 가장 기본입니다. 그래서 사회교리의 기본 원리 중 하나인 <연대성의 원리>가 중요한 겁니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만드셨다. 

공동선에 대해서

그 다음에 제26항. 공동선의 증진. 귀에 못박히도록 공동선에 대한 얘기를 듣습니다. 모든 정치의 목적은 공동선의 증진이다. 공권력의 목적은 공동선이다. 국가의 최고 목적은 공동선이다. 공동선에 대한 정의를 여기서 다시 정리합니다. 

26. 공동선의 증진

[사목헌장] 26. 날로 더욱 긴밀해지고 점차 전 세계로 확산되는 상호 의존성에서, 공동선은곧 집단이든 구성원 개인이든 자기완성을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는오늘날 더욱더 전 세계적인 것이 되고 거기에 온 인류와 관련되는 권리와 의무를 내포하게 되었다. 어떠한 집단이든 다른 집단의 요구와 정당한 열망, 더욱이 온 인류 가족의 공동선을 고려하여야 한다. (이하 생략)


그래서 모든 인류가 공동선을 위해서 애써야 한다. 그래서 여러분도 공동선 정의를 다시 한번 봅니다. 요한 23세가 쓰신 회칙 <어머니와 스승>, <지상의 평화>에서도 공동선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만 여기서 다시 정리를 해줍니다. 집단적인 것도 있고, 개인적인 것도 있는데, 자기 완성을 충만하게 그리고 쉽게 하도록 도와주는 모든 사회생활의 조건의 총화이다. 다 합친 것이다. 거기서 중요한 개념은 완성, '자기 완성'입니다. 여러분이 한 인간으로서 자기완성을 위해서 뭐가 필요하죠? 일단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본적 권리들이 존중받아야 합니다. 교육, 의료, 이런 기본적 조건들이 채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회 조건들, 가장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그것을 각 개인의 영역도 있지만, 공동선의 가장 중요한 주체는 국가입니다. 왜? 극가가 힘이 제일 세니까. 공동선을 실현하려면 돈이 들어요. 의식주, 교육, 다 돈이 필요합니다. 

자기완성을 위해 도와야

가난한 나라들은 국가가 그런 역할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물론 기본적으로 그런 재화가 부족할 수도 있지만, 특히 아프리카 같은 나라는 국제원조를 수없이 해줘도, 정부가, 권력을 쥔 사람이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그것을 제대로 투자하지 않고 딴 주머니 차고 비리를 저지르고 하기 때문에, 도로도 닦고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짓고 해야 하는데, 잘 안되죠. 그래서 공동선은 그런 재화들을 잘 활용하고, 또는 제도를 잘 만들어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완성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조건들을 만들어주는겁니다.

가난한 나라 아이들은 학교를 못 다닙니다. 왜? 축구공 꿰매야 하고, 커피열매 따러 다녀야 하고, 코코넛 열매 따러 다녀야 하고, 물 기르러 가야 하고, 자기 완성을 위한 교육 혜택 받지 못하죠. 공동선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 사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선 이루기 위해 각자 개인이 해야 할 역할도 있지만, 집단적으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정부, 큰 힘을 쥔 집단입니다. 그래서 여기 공동선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는 것이죠.

거대한 역설 - 왜 개발할수록 불평등해지는가

필립 맥마이클(지은이) | 조효제(옮긴이) | 교양인 | 2013-03-29 


개발의 렌즈로 본 자본주의 문명 비판서. <거대한 역설>은 지난 수백 년간 세계를 움직여 온 정치.경제적 흐름을 ‘개발’이라는 관점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독창적인 역사서이자, 환경과 에너지 위기, 슬럼 확산과 식량 위기 등 현재 세계가 처한 전방위적 위기를 진단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의 대안을 구상하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문명 비판서이다. 

미국 코넬대 교수이며 국제 개발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필립 맥마이클은 이 책에서 ‘개발’과 불평등 확대의 내적 관계를 총체적으로 파헤친다. 번역은 한국의 대표적인 인권학자로서 오랫동안 NGO(비정부기구)와 개발의 문제를 연구해 온 성공회대학의 조효제 교수가 맡았다. 





그 다음에 제 27항에 보면,  27. 인간 존중

[사목헌장] 27. 실천적이고 더욱 긴급한 결론을 내려서, 공의회는 인간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저마다 이웃을 어떠한 예외도 없이 또 하나의 자신으로 여겨야 하고 무엇보다도 이웃의 생활을 고려하여 그 생활을 품위 있게 영위하는 데에 필요한 수단들을 보살펴야 한다가난한 라자로를 조금도 돌보지 않았던 저 부자를 닮아서는 안 된다. (이하 생략)


부자와 라자로는 왜?

연대성의 원리를 강조합니다. 우리가 물론 교리시간에 또 성당에서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사회교리에서 다시 이 측면을 강조합니다. 가난한 라자로를 돌보지 않았던 부자. 성경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우리가 보통 성서를 읽으면 그런데 부자가 뭘 잘못했지? 성경에 보면 부자가 특별히 잘못한 게 없어요. 그냥 거지가 부잣집 앞에서 구걸하고 있었고, 종기가 나서 강아지가 핥는 얘기도 있지만, 부자가 그 라자로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죽어서 라자로는 아브라함 품에서 편안하게 안식을 누리는 데, 부자는 뜨거운 불구덩이 지옥에서 고생하고 있죠. 우리가 최후의 심판의 기준에서 누군가 목 말랐을 때 굶주렸을 때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그게 무서워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 보다는, 기본적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다. 그리고 우린 이웃에 관심 갖고 사랑을 줘야만, 나 자신도 행복하다는 적극적 메시지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교리, 특히 사목헌장에서 연대성의 원리, 이웃에 대한관심, 특히 이웃이 고통당할 때, 불의에 시달릴 때, 우리가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한다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나만, 내 가족만 위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운보 김기창

착한 사마리아 사람, 1952~53년

(The Good samaritan)

비단에 채색, 76*63

루카복음 10장 30절~37절 참고



사마리아인의 사랑과 관용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아예 원수처럼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과 유다인의 관계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인들에게 무시당해요. 혼혈이라고. 순수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유다인 중 한사람이 강도 쓰러졌을 때, 유다인의 지도자라는 사제나 레위인 등이 그냥 다 지나쳤죠. 그런데 원수처럼 취급당하고, 무시당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 사람을 구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그것이 이웃 사랑에 대한, 사랑사랑 계속 얘기 하는데, 나랑 전혀 상관없는 사람, 그러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쉽지는 않죠.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요구이고, 그것이 하느님 나라로 가는, 또 한 인간으로 성장하고 해방되고 발전되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공의회는 굉장히 열린 태도로 계속해서 대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28항 같은 경우는 반대자에 대해서도 존경과 사랑을 가져라. 관용과 대화, 그리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죠. 

28. 반대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

[사목헌장] 28. 사회, 정치, 종교 문제에서 우리와 달리 생각하고 달리 행동하는 사람들까지도 우리는 존경하고 사랑하여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친절과 사랑으로 그들의 사고방식을 더 깊이 이해할수록 그들과 더욱 쉽게 대화를 할 수 있다. (이하 생략)


관용과 대화를 요구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는데,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라. 그리고 누가 오류를 저지른다고 했을 때, 그 오류와 오류를 저지른 사람은 구분해라. 죄와 죄 지은이는 구분하라는 얘기 보통 하죠. 그런 메시지도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설사 누가 비난받을 일을 했다고 해도, 그 사람 내면을 다 알 수 없다. 우리가 꿰뚫어 볼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 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 그래서 여러분이 혹시나 누군가 미워한다면 그게 내가 보고 판단한 게 다일까? 생각해보세요. 내가 모르는 그 사람만의 사정은 있지 않았을까? 다른 요인은 있지 않았을까? 시간이 흘러 나도 똑같이 행동하지 않을까? 사람은 변하는데, 나도 그렇게 잘못할 수있다. 열려있는 마음, 관용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 있고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윤리를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개인주의를 극복해라. 책임감을 갖고 공동체에 참여해라.

본당에서 본당 신부님들이 반장, 구역장 해달라고 하면 도망다니시잖아요. 그러나 참여하고, 민주 사회 안에서는 '시민사회운동'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도 사실 나서기 싫어하고 조용히 살고 싶어하는 그런데 그게 좋은 건 아니다. 사회교리는 자율성을 지니고 있고, 공동선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공적 영역에서 봉사히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모두가 개인적인 일에만 몰두하면,공동체의 봉사와 헌신이 중요성이 외면되는 것이죠.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구원

바티칸 공의회 특징이 그것입니다. 개인의 구원이 아니다. 공동체의 구원이다. 나 혼자 공을 쌓아서 하늘나라에 가는 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도와주고 서로 헌신하면서 함께 가는 것이다. 형제애가 굉장히 중요하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계속 강조하십니다. 올해 1월달 평화의 날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현대판 노예 근절하자.' 우리는 성서에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형제 자매이다. 공의회 문헌도 계속 얘기하는데, '내 형제를 내 노예로 삼는다?' 인신을 매매하고 아이들 납치해서 강제노동하고, 여성들의 성을 착취 하고, 그런 것을 한탄하시면서 국가와 NGO 등이 힘을 합쳐서 그런 현대판 노예를 근절하자. 모두가 다 형제자매이지 어떻게 노예로 삼을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형제애, 연대성 이런 것을 강조한 게 제 2장입니다.

전 세계의 인간활동

제 3장에서는 <전 세계의 인간활동>이 제목이고, 인간이 갖고 있는 능력, 재능 이런 것이 다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래서 다 존중한다는 것. 과거에는 교회가 갈릴래이 사건 아시죠? 과학에 대해서 교회 영역을 침범하면서 교회가 얘기한 걸 비판하니까,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 적도 있습니다. 특히 심리학, 프로이트 등이 모두 다 무신론을 바탕으로 접근하는 것이기에 과거에는 종교적 언어로 설명한 것들을 '다 미신이다!, 과학이 종교를 대체할 것이다.'라는 과학만능주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시대가 흐르면서 과학이 인간의 모든 문제, 초월적 문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과학과 종교는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니다. 각자 바라보는 지평이 다르고 각자 이야기하는 언어가 다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과감하게 역시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류발달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면 좋은 것이다. 즉,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다만 그것이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것일까? 그것이 인간을 억압하고 전쟁에 남용되는 무기 등으로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또 생명과학의 발달로 인간의 생명을 조작하는 것 등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된다는 차원에서 이야기합니다. 즉 우리 지능 통해 하는 것들을 일단은 긍정적 바라본다는 점에서 과거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현대 세계 안의 교회의 임무

그 다음에 제 4장은 <현대 세계 안의 교회의 임무> 입니다. 교회와 세계가 어떤 관계인가? 교회의 목표는 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이라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이란 표현 많이 쓰죠. 이 세상의 구원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종말론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원과 심판은 '종말론'과 관련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종말론적 목적을 가지면서, 즉 인간의 구원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지,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 여정 안에서 교회는 이 세상의 누룩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생명을 인간 사회에 전달하는 것이다.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좀 더 인간이 살만한 인간다운 세상으로 만드는 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타종교와도 협력할 수 있고, 무신론자들과도 협력할 수 있다. 

특히 교회가 인류사회에 봉사해야 하는데, 특히 가난한 사람을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인류 사회에서 벌어지는 분열과 싸움 이런 것을 극복하고 모든 인류가 하나의 형제자매로 일치하는 일치의 표징이 되어야 한다.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하시는 역할들이 그런 것이죠. 교황님이 되시고 나서 벌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화해를 위해서 애를 쓰신다든지, 여러 타 종교지도자들을 모아놓고, '우리는 한 형제다. 함께 걸어가자. 인류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지 않냐! 환경문제, 평화문제, 기아, 질병 등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협력하자.' 이것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인 <사목헌장>에 다 나오는 이야기이고, 그 정신을 실천하시는 것이죠. 

마르크스의 비판에서 찾는 교훈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

(독일어: Karl Heinrich Marx, 1818년 5월 5일~1883년 3월 14일)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라인란트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역사학자, 경제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이다. 1847년 공산주의자동맹을 창설했다. 1847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공동집필해 이듬해 2월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과 1867년 초판이 출간된 《자본론》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다. 맑스, 막스, 칼 마르크스 등으로 표기하기도 하나, 외래어 표기법에 준하는 표기는 “카를 마르크스”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그래서 
종교생활과 일상생활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제 43항을 보면, (43.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인간 활동에 주고자 하는 도움), 마르크스가 종교를 비판할 때, 왜 비판하냐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그 사람이 병에 걸려서 아픈데, 고통이 심한 데 아편을 먹으면 고통은 멈출 수 있지만 병이 낫는 것인가요? 이 사회가 이 세상이 문제가 있고 불의와 비인간적인 여러 조건들이 있는데, 그런 것을 개선해야 하는데, 종교는 그런 것을 개선한다기 보다는, 그냥 나중에 천당 가서 보상받으니까 참아라. 그래서 비판당했던 것이죠. 그러나 사목헌장은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비록 영원한 하느님 나라 추구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현세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이 세상을 열심히 살아야 하느님 나라도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어려움을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공동선을 위해 애쓰는 이 과정이 한 사람, 한 사람이 해방되는 것이고, 그 모든 과정이 구원의 여정이다. 그런 것 전혀 없이 달랑 천당간다? 그런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기 때문에, 하느님나라 가치를 배워서 이 세상 안에서 더 열심히 살도록 촉구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의무, 인간의 해방과 발전을 위해서 애쓰는 삶을 잘 살도록 신앙이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앙생활 하면서, 이 세상의 불의와 모순에 대해서 눈 감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세속은 평신도들의 고유 영역이다라고 강조합니다. 평신도들이 시민으로서, 각 분야의 전문가로서 그 세상의 어려움들,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하느님의 법 복음의 가치를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그런 평신도들에게 그리스도 메시지를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침과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2부의 대강 줄거리

여기까지 1부 인간, 공동체, 인간의 활동, 세계 안에서 교회 역할 이게 제1부입니다. 그 핵심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2부는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것인데, 그걸 여러분이 앞으로 주제별로 배우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몇가지 언급한다면, 제2부 제4장 <정치적 공동체 생활> 부분에서 제 74항 <정치 공동체의 본질과 목적>, 그리고 제76항 <정치공동체와 교회> 여러분들에게 강조합니다. 나중에 읽어보시면 합니다. 

정치공동체의 본질과 목적이 뭐냐? 공동선이다. 그렇다면 공동선을 제대로 실현 못하는 권력, 도덕적 힘이 결여된 그런 권력은 결국 권력을 누릴 자격이 없다. 저항권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74항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6항에서는 정치 공동체와 교회와의 관계를 얘기합니다. 왜 교회가 사회에 참여하고 간섭하는가에 대한 비난을 많이 합니다. 분명히 여기 <사목헌장은>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정치나 종교나 모두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것이다. (76항 중간에 보면)

교회가 언제나 어디에서나 참된 자유를 가지고 신앙을 선포하고, 사회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며,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기 임무를 자유로이 수행하고, 그리고 다음 구절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이 요구할 때에는 정치 질서에 관한 일에 대하여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정당하다. 

인간의 기본권이 훼손될 때, 영혼의 구원에 관계될 때는 정치 질서에 대해서도 잘잘못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 기준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권력을 얻거나 이익을 얻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위해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의 기본권이 훼손될 때는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한 기본적 입장입니다. 그 밖에도 중간중간에 사목헌장의 핵심 내용 다 들어있습니다. 꼭 들어보시고, 12개 문헌 중 4대 헌장은 전례헌장, 교회헌장, 계시헌장, 그리고 사목헌장은 꼭 정독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9시 종료

강의가 끝난 직후,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 앞의 십자가. 2015.3.2(월) 밤 9시 03분 촬영



위 내용은 강의 정리자의 기억과 기록을 바탕으로 재편집된 것이며부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실제 강의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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