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진행하는 제109차 사회교리 기본과정의 제4주차 수업이 2015223()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2시간 동안 명동성당 옆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에서 열렸다


2015년 2월의 어느 월요일 명동거리. 대부분이 중국관광객들이고, 추운 저녁 날씨에도 길거리로 나선 상점의 직원들은 연신 중국어로 호객하는 탓에 허공에서는 중국어 합창이 들리는 기분이었다. 


이날 강의는 서울대교구 삼양동 본당에서 사목하시는 이강서 신부님. 신부님은 용산철거민 사태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가난한 현장에서 미사와 사목활동을 해 오신 분이다. 특히 용산참사에 대한 범국민 추모제가 끝난 어느 일요일 오전, 평화의 농성장과 사제단 단식기도장에 들이닥친 경찰병력에게 항의하던 신부님은 50미터 이상 질질 끌려가면서 폭행을 당하고 부상에 옷이 찢기기도 했다. 게다가 2012214일에는 제주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16월을 구형받기도 했다. 이유는 제주해군기지 건설에 대한 업무방해, 집시법 위반 등. 20119월부터 12월까지는 4번 체포당하고 세 차례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던 이강서 신부님은 당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셨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사회적 합의가 결여된 것이다. 국책사업이 사회적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국가의 폭력이다

 

다음 내용은 강의 정리자의 기억과 기록을 바탕으로 재편집된 것이며, 부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강사 신부님의 의도나 맥락과는 다른 의미와 표현이 발견될 수도 있음을 참고해야 합니다. 



감기가 심하게 걸려서 듣기 거북할 수 있다는 사회자의 소개로 신부님이 등장하면서 강의가 시작되었다. 다음은 2015 2 23일 저녁 7시에 시작된 이강서 신부님의 명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강서 베드로 신부님(서울대교구 삼양동 본당)


<지상의 평화>(1963)


사회교리가 인기입니다. 사실 130년 역사 안에서 교황님들의 회칙과 사회교리 문헌들은 빠트릴 수 없는 문헌들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배우는 <지상의 평화>(1963)는 반포된 지 약 62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나 지금이나 이 회칙에 대한 평가를 보았을 때, 신자가 아닌 다른 국제학계나 학자들의 입을 빌려본다면, <지상의 평화>는 분량이나 내용이나 주제로나 그동안의 교황님들이 발표한 회칙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평가 받고 있습니다.


2015년 2월 23일 월요일 저녁 6시 48분 경의 가톨릭회관 전경(파노라마)


평화는 무엇입니까?


사실, 우리는 평화에 대해서 많은 생각들을 합니다. 그래서 평화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는 자녀 아이들이나 조카, 손녀, 손자가 만일 여러분에게 평화가 뭐냐고 묻는다면? “평화가 뭐에요?”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평화는 평()자 더하기 화()자야.” 이러실 거에요? 그래서 저는 이 문제를 여러분이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저는 강의 중에 한 두 권의 책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군대를 버린 나라>라는 책입니다. (부제. 코스타리카 사람들의 평화 이야기). 지은이는 아다치 리키야라는 일본인이고, 출판사 검둥소에서 (201178) 번역본(옮긴이 설배환, 정가 13,000)이 출판되었습니다.


군대를 버린 나라- 코스타리카 사람들의 평화 이야기

아다치 리키야 (지은이) | 설배환 (옮긴이) | 검둥소 | 2011-07-08 | 정가 13,000원


여기서 군대를 버린 나라라는 곳은 중남미의 나라 코스타리카입니다. 그 나라는 1987년도 헌법으로 아예 상비군, 정규군을 폐쇄해서 군대가 없습니다. (책 소개를 찾아보면 군대를 폐지한 연도가 1948년으로 되어 있다. 1987년이란 숫자는 내가 잘못 들은 것일수도 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고 싶은 일본의 평화활동가가 군대를 버리고 평화를 이루겠다는 코스타리카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이 책은 정말 군대를 버리고 평화를 잘 수호하는지에 대한 짤막한 책(208쪽 분량)입니다.


코스타리카 초딩의 놀라운 답변


그 책에서 보면 일본인 평화활동가가 초등학교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6학년 한 학급에 들어가서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 평화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그러자 6학년 대표가 손을 들고 주저 없이 답변을 합니다. 그 까닭은 코스타리카의 초등학생이라면 이미 1학년 때부터 평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학교에서 철저히 공부를 한다는 것입니다. 6학년 대표가 말하길 평화는 인권, 민주주의, 그리고 생태입니다.” 


그게 무슨 말일까요? 질문을 던진 일본인에게 그 6학년 아이가 답변한 말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인권이 존중 받고 있는 것이 평화달성의 기표가 된다. 두 번째는 민주주의입니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이죠. 권력의 주체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이 중요합니다. 코스타리카에서는 대학생 1인이 소송을 걸어서 대통령을 탄핵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 나라는 군대가 없으니 전쟁에 대해서 국가가 참여하는 것은 헌법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대한 참전 동의를 요구해왔을 때, 코스타리카 대통령이 그것을 (‘윤리적으로) 찬성합니다. 그걸 보고 있던 코스타리카 대학생이 이 대통령이 자격이 없다면서 탄핵을 요구하는 일들이 지극히 당연한 나라인 것입니다.


대학생 한 명이 대통령을 탄핵하는 나라


또한 코스타리카에서도 민주주의 선거에 18세 이상 유권자는 선거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하는 보통 나라에서는 하루 노는 날입니다. 그러나 코스타리카는 아주 어릴 적부터 선거 훈련을 시킵니다. 그래서 선거일 이전까지 학교에 다니는 초증고 학생들이 사전 투표를 합니다. 입후보한 똑같은 정치인을 대상으로 하는 모의투표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를 위해서 투표용지에 서명하는 것들을 가르칩니다. 대단히 중요한 건 하루 전날 모의투표함을 개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개표 결과는 본 투표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코스타리카 정치인들은 성인 유권자들만을 향해서 선거운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미래의 유권자인 청소년들에게도 한 표를 부탁한다는 겁니다.


세 번째는 경제력으로 넉넉하지 않은 코스타리카는 관광자원으로 먹고 사는 천혜의 자원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광객을 유치하려면 도로를 건설해야 하고 호텔을 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해안가 어민들이 길을 새로 내지 말고 건물을 새로 짓지 말자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원은 우리 것만이 아니고 200년 뒤, 400년 뒤 후손들이 누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되면 그 책임을 질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불편하더라도 이대로 보존하는 게 낫다는 것 그렇게 개발 포기를 결정했다는 것이죠.


간식이 매주 바뀐다. 이 날은 초코칩이 제공되었다. 


이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생태적 가치를 금전적 이익보다 크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이 거의 30(필자가 잘못 들은 걸 수도 있는데, 강사 신부님의 '거의 30년'이란 말씀은 군대폐지 기원을 1987년으로 기산해서 말씀하신 것 같다. 참고로 코스타리카에게 1987년이 갖는 의미는 오스카르 아리아스 대통령이 1987아리아스 평화플랜을 성사시켜 중미 5개국 평화협정을 이끌고 그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는 것이다.)이 다 되어가는 동안 상비군 없이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세계에 손꼽히는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한 나라들은 치안과 안보 분야에서, 미국 같은 나라 혹은 국력에 대비하여 미국 못지 않은 군사력을 겸비한 우리나라도 과연 평화와 안보를 다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닐까?’라는 걸 시사하는 그런 책입니다.


다시한번 묻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평화가 뭐에요?”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변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오늘뿐만 아니라 이 사회교리 과정을 마치고 나서 여러분 자녀들이나 이웃들에게나 또는 후학들에게 내가 생각하는 평화는 이런 거야!”라는 답변을 각자 마련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지상의 평화』의 2가지 배경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지상의 평화 회칙에 대한 2가지 배경 꼭 알아야합니다


첫 번째로 요한 23세라는 작성자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반포된 1963년도 이전까지 인류역사에 발생했던 가장 나빴던 현대사가 있습니다. 최근 요한 23세는 시성이 되셔서 많은 자료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요한 23세의 비서였던 분이 현재 추기경이신데 그분을 회상하며 출간한 자료가 있습니다. ‘그리운 교황 요한 23?’인가 그렇습니다.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교황 요한 23

로리스 프란치스코 카포빌라 지음, 박미애 옮김, 바오로딸, 2014. (1만원)

 

요한 23세 교황은 재임기간이 6년이 채 안되었습니다. (1958. 10. 28. ~ 1963.6.3) 지금 교종 프란치스코 인기가 드높으신데, 이런 인기를 훨씬 상회했던 20세기 가장 주목받던 교종으로 최초의 인물이 바로 요한 23세셨습니다. 역대 교황님들이 근엄하고 학자풍이었던 것과는 달리, 유머러스하고, 파격적 행보를 하셨을 뿐만 아니라, 출신도 이탈리아의 가난한 농부출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분이, 이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추기경들이 스스로 위로하기를 이미 연세가 78세로 고령(1881.11.25.)이므로, ‘이것은 과도기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시기로, 다음 교황은 누가 되는지가 더 중요한 중간 역할로, 어떤 정치적 색채도 없는 그런 분으로 콘클라베에서 선택한 것이구나!’라는 식으로 간주했던 건데 바로 그런 분이 선출되자 마자, 바티칸 공의회를 하겠다고 하셔서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것입니다,


아조르나멘토 aggiornamento


아조르나멘토를 하겠다고, 그 당시 교황청에서는 요한23세 교종께서 구사하는 아조르나멘토라는 이탈리아 말을 무슨 말인지 몰랐다고 합니다. 우리 말로 표현하면 적응, 변화, 현대화라는 다양한 의미이고, 그분의 행적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말씀이 교회의 창문을 열어라!”라는 것입니다. , 너무 답답하다. 질식할 것만 같다. 창문을 열어라.”라고 하시면서 인류 역사상 역사적으로 가장 혁신적인 교황님이 되셨습니다.


그 분은 교황 대사로서 터키에 주재하신 바가 있었고, 마지막 교황대사의 임기는 프랑스에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외교능력이 얼마나 출중했는가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아그레망이란 것이 있습니다.


아그레망(프랑스어: agrément)

특정 인물을 외교사절로 임명하기 전에 상대접수국에게 이의의 유무에 관한 의사를 조회하는 국제관례상의 제도이다. 이는 일어날 수 있는 분쟁을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파견국은 임명에 앞서 '아그레망(agrément)'의 요청을 선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특정인물이 '만족한 사람(persona grata)'이라고 생각할 때에는 '아그레망'을 부여한다. '아그레망'을 부여한 경우에는 접수국이 그 인물을 외교사절로서 접수할 의무가 생긴다.

 

아그레망이란 외교관이 신임장을 제출하교 해당국 대통령에게 신임을 받는 절차를 말합니다. 그런데 각 나라에 주재하는 대사들 중에서도 서열이 있겠죠. 이 때, 관례적으로 아그레망이라는 신임절차의 주도권은 전 세계 가장 많은 대사를 파견하는 나라에서 갖게 됩니다. 그런 나라가 미국도 아니고, 영국도 아니고 바로 바티칸입니다. 단일국가로는 가장 많은 대사를 파견합니다. 그리고 외교 관행은 대사들 중에 수석대사가 아그레망을 주선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석대사의 위치는 교황대사가 하도록 관례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륜이 낮더라도 우리나라 주한 각국 대사들이 와서 아그레망을 받게 될 때 집전하고 주재하는 게 교황대사입니다.


알현 에피소드


이것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 분이 교황대사를 역임하면서 아그레망 절차를 많이 집전하신 겁니다. 특이 터키는 이슬람국가입니다. 그곳에서 교황 대사를 하실 때에도 종교적인 반복과 서로 융통성이 없다고 보여 지는 이슬람의 국가 대사들과도 교분을 갖게 됩니다. 특히 적성국가인 동구권이나 소련과도 인연을 맺게 됩니다. 이 분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군인으로 참전했던 군대경험이 있으셨던 교황님이셨습니다. 본명이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추기경님은 교황이 되셨을 때, 자신을 알현하러 온 군대의 상사가 있었답니다. 그 분이 선임하사였던 예전의 군복을 입고 알현을 하러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익살스럽게 알현하러 온 선임하사가 앞에 서자, 요한 23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웃으면서 거수경례를 하셨던 일화가 있습니다. 어찌보면, 그럴 이유가 사실 없죠. 그건 과거이고, 지금은 교황 직분으로 알현하는 자리였지만, 그런 파격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이 분이 교황이 되고 나서 알현한 분 중에 아주 구설수에 올랐던 한사람 예방 받습니다. 그 사람은 소련 공산당 제 4대 서기장 니키타 흐루시초프(1953.09~1964.10)의 딸이었습니다. 그 딸이 로마에 와서 교황님 알현을 신청한 겁니다. 그 때 교황청은 발칵 뒤집혔죠. 무신론자이고 그리스도교를 공식하는 소련 총서기장의 딸, 그 사람이 무슨 이유로 교황님을 만나나? 설령 아무 이유가 없더라도 그 교황님이 공산주의자의 딸을 만난다는 것을 공산주의를 단죄했던 교황청이 알현한다는 것에 대해서 당시 서방국가는 주목하고 있었고 당연히 거절할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 흐루시초프(흐루쇼프, 크루시체프1894417~ 1971911

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Nikita Sergeyevich Khrushchev,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

영어로 크루시체프로도 알려졌으며, 러시아 전문가가 거의 없던 국내에서 냉전 시절에 일본어 표기(フルシチョフ)의 영향인지 흐루시초프라고 불렸다. 때문에 영어책이 번역될 때, 별개의 인물인 양 크루체프라는 이름으로 오역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러시아어 원어 발음은 흐루쇼프([xrʊˈɕɕof])에 가깝다. 출처. 엔하위키 미러


그런데 이런 예상을 깨고 알현을 합니다. 이것이 당시 가장 큰 뉴스토픽이 되었습니다. 이런 분이 생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를 선언하고, <어머니요 스승>(MATER ET MAGISTRA, 1961. 5. 15.)이란 회칙을 써내고 두 번째가 <지상의 평화>(1963.4.11.)라는 회칙입니다. 그리고 이 <지상의 평화>를 작성하게 된 두 번째 배경을 아셔야 합니다.

 

<지상의 평화>가 반포되기 직전에 전 세계를 전쟁상황으로 몰고 간 거대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것이 지금은 역사 안에서 가물가물하겠지만, 19621014일에 발생한 쿠바 미사일 위기사태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빙산의 일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전에 1961년도 전조가 있었습니다. 독일의 동-서독. 지금은 1989년 통일하서 경계선이 무너졌지만, 당시에는 경계선이 있었죠. 베를린이 수도인데, 지리적으로 동독에 자리해있었습니다. 그렇게 베를린이 동독에 있었지만, 반쪽이 나서 한쪽은 동구권, 한쪽은 서구권으로 갈라져 있었죠. 서로 으르렁거리는 대치상태였고, 그 당시 1961년도에 동독, 소위 공산권 독일에서 일방적으로 장벽을 쌓았습니다. 그게 베를린 장벽입니다. 1961년도의 베를린 장벽은 볼셰비키 혁명 이후로 공산화된 소련과 서방 세계사이의 불편한 감정이 지속되다가 결정적으로 가시화된 냉전의 주요 사건이었습니다.


2015년 2월 23일 오후 7시경 촬영한 강의장. 강사 신부님이 등장하기 직전 소개하는 장면(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까닭


그러면 왜 베를린 장벽이 생겼을까요? 2차세계대전 당시, 옛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이어 프랑스, 영국을 침공하죠. 그러면서 영국과 프랑스가 연합하여 독일에 대항하는데, 소련이나 미국은 팔짱끼고 움직이지 않았죠. 초기에는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합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레닌그라드 전투, 모스크바 전투를 통해서 독일은 유전확보에 노력을 기울였고, 당시 소련은 참전을 하게 되면서 어마어마한 사상자 냅니다. 예를 들어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감옥 등에서 벌어진 유다인 학살은 약 600만명으로 추산됩니다. 그러나 그 학살의 숫자에는 순수 유다인만 포함되지 않고, 공산주의자, 집시, 소수민족들도 포함되지만, 그러한 민간인 학살을 통틀어서 보통 유다인 학살이라고 말해지기도 합니다.


유럽에서 독일에 의해서 인종 학살이 벌어진 끔찍한 숫자죠. 그런데 전쟁기간에 한 나라에서 자국민이 전투원 비전투원 할 거 없이 독일에 의해서 죽어간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련입니다. 1천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처음은 소련은 설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혀 준비도 안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소련은 상호불가침조약까지 맺었던 히틀러가 소련같은 먼 나라에 올 리가 없다고 생각하다가 허를 찔린 것입니다. 그처럼 무방비 상태에서 받은 타격이었기 때문에 손해는 심각했습니다. 이렇다 할 전쟁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소련의 겨울이 무척 추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화위복을 마련해주었던 것입니다. 독일 탱크들과 독일 병사들이 러시아의 추위를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독일의 모든 장갑차와 탱크들의 기름이 얼어서 가동이 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독일의 진군했던 병력은 10분의 1도 살아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소련은 원한을 품습니다.


소련과 미국이 2차세계대전 참전국이 된 이유


사실 미국 입장도 연합국으로 제2차 세계대전 참여 이유가 하등의 없었습니다. 미국 입장은 전쟁 물자를 영국에 파는 것만으로도 어머어마한 이윤을 남기는 장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의도적으로 개입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일반여객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미국과 런던을 오고 가는 여객선에 전쟁물자를 실어 보내겠다고 공표를 합니다. 그러자 독일은 그 여객선을 군수선으로 간주하서 격침시킨다는 경고를 보냅니다. 미국은 그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승객 천명을 실어서 의도적으로 보내고, 예상대로 그 배는 대서양 한 가위에서 격침이 됩니다. 미국 언론들은 어떻게 나왔겠습니까? 당연히 독일을 응징하겠다고 말하겠죠. 그래서 보란 듯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말미에 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과 저항했던 영국 프랑스 연합군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4자 연합국으로 확대되고 유럽 전쟁터가 동부, 서부, 남부 전선 등으로 나눠집니다


소련은 북쪽에서 압박을 가해왔는데, 프랑스 쪽을 저지하고 있던 독일은 마지노선을 지키느라고 에너지를 많이 쏟았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냐면, 1945815일 태평양 전쟁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지만, 유럽의 전투는 그 전에 끝나죠. 베를린이 함락되고, 히틀러는 벙커에서 자살을 하죠. 연합군이 베를린을 함락하는데 어느 나라가 베를린을 함락했을까요? 최종적으로 히틀러가 결사 항전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그 순간에 소련이 탈환을 한 겁니다. 그리고 항복을 받아냅니다. 다른 나라 연합군은 열심히 싸우는데, 소련이 항복을 받아낸 겁니다. 그렇다면 독일에 대한 전리품이나 점령국가의 우선적 권리는 누가 갖겠습니까? 그런데 나머지 세 나라의 연합군은 소련의 승전국 권리를 제한합니다. ‘너만 이긴 게 아니고, 우리가 함께 싸워서 네가 탈환한 거잖아!’ 이런 논리를 폅니다.


소련이 베를린을 접수했지만 ... 


입장을 바꿔서 만약 소련 대신 독일을 함락하고 베를린을 접수한다면 똑같이 얘기할까요? 사실 독일은 소련이 해방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국가가 지분을 요구한 겁니다. 그래서 독일을 반으로 나눈 것입니다. 동독을 소련에게 내주고, 나머지 반은 3개 연합국이 권리를 얻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5050은 아니었고, 동독의 영토는 이아니고, 동독 영토는 거의 4분의 1 크기입니다. 서독의 영토가 거의 4분의 3인 겁니다. 그래서 베를린도 강짜를 놓아서 나눈 겁니다. 서방 3개국이 요구한 것이죠. 왜 그런 걸 요구했을까요? 소련은 공산혁명에 성공한 나라죠. 노동자들이 집권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서방세계는 이 소련 혁명세력이 유럽을 강타할까봐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주도권을 쥐고 해결할 줄 알았는데, 소련이 최종적으로 해결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필사적 막지 않으면 유럽은 50년 안에 빨갱이 천지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 결과가 패망한 독일을 나누고, 마치 사자가 먹이를 잘라먹듯, 소련과 3개국 연합국이 잘라먹는 기형적 나라가 된 것입니다.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2차 대전이 종결됨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전쟁, Cold War가 시작된 것이지요. 1945년부터 시작이 되어 끊임없이 힘겨루기를 하다가 베를린 장벽으로 가시화된 것입니다. ‘이제 너랑 나랑은 완전 끝이다. 아예 담을 쌓고 살자!’ 이것이 소련과 미국의 자존심 대결로 이어진 것입니다.


'쇼아'와 '홀로코스트'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성경에 등장하는 번제물이란 뜻을 가진 히브리말은 쇼아’(ha-Shoah, השואה)입니다. 이 말 쇼아(‘홀로코스트와 함께) 2차 대전 당시 학살당한 유다인을 일컫는 관용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차 대전이 끝나고 모든 그리스도교 신학자들과 수많은 학자들은 극도의 혼돈 상태에 빠졌습니다. 지금까지 고도의 문명을 발전시켜온 인류는 인간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살아왔는데, 그런 인간의 가장 추악한 면모를 그대로 본 것입니다. 하느님은 어디 계셨냐고 묻는 말에 답변할 사목자나 신학자가 없었습니다. 시인이나 문학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서정적인 시나 소설을 쓸수 없다는 말까지 나왔던 것입니다.


UN 인권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


인간이란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뼈아픈 성찰, 그래서 만들어졌던 것이 국제연합이었고, 그래서 제일먼저 시작한 것이 인권선언이었던 것입니다. 1948.12.10에 반포합니다. 2차대전에서 경험했던 인간성의 가장 추악한 면모를 다시는 재연하지 말자. 역사 안에서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는 차원의 역진 방지장치를 해야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 세계 인권선언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그 조항이나 문맥들이 정말 뛰어난 선언으로 유명합니다. 최초로 유엔이 만들어지고 인권 선언을 채택한 과정에서 여러 국가들의 갑론을박이 있었습니다. 그 논쟁의 핵심이 뭐였냐면, 적정한 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 노동할 수 있는 권리, 치료받을 권리, 교육받을 권리 이것을 사회적 권리라고 합니다. 공산권은 이것이 인간의 기본권이기 때문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서방국가는 그런 것까지는 필요 없다. 신체가 구속당하지 않을 자유권, 어디든 갈 수 있는 이주권, 내 자유를 침해받지 않는 고유한 권리, 이것이야말로 그대로 자유권이죠. 이것이 더 소중한 기본권이니 이것만 확보하면 된다고 갑론을박을 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절충이 되어서 현재 남은 것이 바로 세계 인권선언입니다. 어찌 되었든, 이 정도라도 갖게 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사건으로부터 생겨났던 것입니다.

 

'세계인권선언'과 <지상의 평화>의 관계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교종 요한 23세의 <지상의 평화>에 인간의 권리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세계인권선이 망라하는 주옥같은 권리들 중에서 빠트렸던 사회적 권리들까지 교황님께서 직접 언급했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세계 인권선언>이 잘 다듬어졌어도 완전치 못한 측면이 있었는데, <지상의 평화>를 통해서 다 망라해지고 완성되었다는 평가를 내렸던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대체적 배경입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는 여러분 좀 아시죠? 미국의 마이애미 주 밑으로 40km 근방에 있는 쿠바라는 나라. 1950년대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에 의해 공산혁명이 성공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에게 쿠바는 휴양지였고, ‘하바나하면 담배로 유명하고, 먹고 살기 좋은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가 공산화 되면서 미국인 소유 땅들이 몰수되고 국유화됩니다. 게다가 미국인 지주들이나 미국에서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이 쫓겨나게 되면서 미국은 쿠바에게 원한을 품게 됩니다.


여러 차례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기도 하고, 공산화된 쿠바는 미국 입장에서 적성 국가가 되었지만, 그 이전의 상태처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나라로 만들려고 여러 가지 공작을 펽칩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사례로, 20019.11 사건이라는 미국 테러와 흡사한 방식으로 항공기 한 대를 쿠바로 보내서 쿠바 미사일에 의해 요격되었다는 가공할 사건을 CIA에서 조작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건이 밝혀집니다. CIA는 대학생들을 모집해서 그들을 쿠바로 가는 것처럼 서류를 위조합니다. 그리고 실제 비행기가 아니라 세탁된 비행기에 그 학생들이 탄 것처럼 꾸며서 무인비행기를 쿠바로 보냅니다. 쿠바 상공에서 요격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나리오가 좀 어색했던 것 같습니다. 들통이 나는 데는 당시 소련의 KGB도 역할을 합니다. 미국은 그렇게 쿠바를 침공할 명분과 빌미를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무산이 됩니다


그래서 쿠바는 알았습니다. 미국이 우리를 먹으려고 하는구나. 그래서 카스트로는 자구책을 만듭니다. 공산화된지 몇 년이 안 된 상태였기 때문에 소련에 원조를 요청한 겁니다. 지금 자주국방을 할 돈도 없고 실력도 없으니 좀 도와달라고 한 것이죠. 그래서 쿠바의 해안선을 따라 미사일 기지를 만들려고 하는데, 미국의 고공 정찰기인 U2기를 통해 그것이 드러납니다. 미국이 보기에, ‘쿠바에 무슨 대륙간 미사일 기지가 있어? 그럴 실력이 안 되는데?’라고 의아해합니다. 그런데 막상 소련의 흑해에서 배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그 배에는 핵탄두 8개가 실려 있었고, 이미 대서양 중간까지 항해하고 있던 것이었어요. 그러자 미국은 발칵 뒤집히고, 그 대륙 간 미사일 거리는 워싱턴까지 떨어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의 핵무기 개발 성공 


전 세계적으로 핵무기를 처음 쓴 나라는 미국입니다. 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탄두를 떨어뜨리는 일련의 프로그램이 맨하탄 프로젝트.’입니다. 루스벨트가 승인했던 것인데, 핵개발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삼고 싶었고, 다른 나라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소련은 주눅 들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죠. 그런데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고, 일본에 핵탄두가 두 군데 떨어질 때 다음 세 번 째는 모스크바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소련은 우리도 보유하지 않으면 미국의 희생양이 될 것임을 알았기에 , 1년도 안 되어 핵개발에 성공합니다. 미국은 이런 결과가 나올지 몰랐습니다. 자기들 나라만 핵탄두를 가지고 먹고 살고 싶었는데, 소련과 핵탄두 가지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까지 이르른 것입니다. 자기 나라에서 남의 나라에 뿌렸던 핵탄두가 워싱턴에 뿌려지는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제3차 세계대전? 긴급했던 순간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에는 미남인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리고 케네디를 둘러싸고 매파가 있고, 비둘기파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 흐루시초프가 핵탄두의 반출을 허용했고, 그것이 쿠바에 당도하면 뻔하지 않는가? 그러니 경고를 하십시오! 화물선을 돌리지 않으면 전쟁으로 간주하겠다. 그 미사일이 쿠바에 도착하기 전에 소련의 네 군데에 선제적으로 핵공격을 하겠다.’는 조건부 선전포고 얘기를 한 겁니다. 그렇게 통보를 하죠. 그랬더니 흐루시초프는 맘대로 해. ! 우리도 가만있지 않아.’ 그래서 워싱턴 정가의 모든 정치인을 다 대피시킵니다. 전쟁은 초읽기 상태로 들어갔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실제로 55백만명이 죽었는데, 그것이 목전에서 이제 미국이나 소련 사람들 뿐만 아니라 유럽도 온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전 세계가 경악하고 이 전쟁의 공포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던 게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였던 것입니다.


요한 23세의 위대한 중재


그 때 교종 요한 23세가 느닷없이 모스크바에 전화를 해요. 서기장 흐루시초프에게, “우리 한발씩만 서로 양보합시다!” 그러자 흐루시초프가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케네디가 양보하면 나도 양보할 의향이 있다!” 그래서 요한 23세는 다시 케네디에게 전화를 합니다. “소련에서 양보할 용의가 있단다. 미국에서 먼저 물러나면 된다. 그러니 신중하게 결정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바티칸에서 라디오를 통해 전쟁이 아닌 평화가 필요하다는 담화문을 발표합니다. 그런 연유로 상호간 한발씩 양보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면서, 전쟁은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시초프의 딸을 만나준 알현 사건이 고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이죠. 소련 측에서 요한 23세의 전화를 받을 이유가 없는데 말이죠. 거기까지가 배경입니다.

 

<지상의 평화>는 한편의 아름다운 교향곡이라는 평가도 얻고 있습니다. 교향곡이라고 하면, 보통 4편으로 이뤄졌지만, 이것은 5편으로 이루어진 교향곡이라는 평가입니다. 원문은 1시간 10분이면 다 읽습니다. 꼭 한번씩 읽기를 권장합니다.


2015년 2월 23일 오후 7시 16분경 촬영한 강의장 모습(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



<지상의 평화>에 특징 몇가지

 

<지상의 평화> 회칙이 지금까지 반포된 여타 교황님들의 회칙과 특별히 달랐던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선의의 모든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황청에서 교황님이 내리시는 회칙은 천주교 식구들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추기경, 주교, 사제, 부제, 수도자, 평신도들에게 들으라고 얘기했던 거지, 교회 울타리 밖은 아무 관계가 없었던 것이죠. 교회 식구들에게 얘기했지만, <지상의 평화> 이 회칙 때부터는 모든 선의를 가진 자들이 범위에 포함됩니다. 이 회칙에 동의하거나 같은 의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경청해달라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국가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회피합니다. 우리는 국가와 정치 공동체라는 말에 큰 구별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한 국가 안에서 단일한 하나의 정치공동체를 상정합니다. 그러나 한 국가 안에 2개의 국가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연방국가입니다. 또는 어떤 국가는 본디 이름은 자기 것이지만, 식민 국가를 겪고 있어서 진정한 국가를 회복하지 못하고 정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정치공동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에서 막 등장한 신생국가들과 약소국가들을 보면서 국가라는 고전전 정의로 다 담을수는 없구나,’라고 생각하기에 정치공동체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인류'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인종이란 표현을 그동안 써왔는데, 인종이란 범주는 그 당시만 해도 유럽인들이 인류를 대표한다고 봤어요. 그러나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아메리카인도 있죠. 그런데 유럽 우월주의는 자신들이 세계의 전부라는 신화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 한계를 극복해 보시자고, <지상의 평화>라는 회칙으로 인종이란 용어를 폐기하고 인류란 표현을 쓴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경제적 권리를 옹호했다는 것. 조금 전 잠깐 언급한 바 있는데요. 자본주의에서 내세우는 인간의 법적 정치적 권리와 사회주의에서 강조하는 사회적 권리를 모두 담고 있다는 겁니다. 특히 생존권, 먹는거 입는거, 집 그런 권리, 의료, 정당한 사회적 봉사를 받을 권리 등을 교황님이 회칙에서 언급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회칙이후로 바오로 2세의 회칙 <노동하는 인간>(1981)에서 노동하는 인간의 더 발전될 권리가 바로 <지상의 평화>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상의 평화> 회칙의 후반부에 가면 세계 공동체의 권리가 나옵니다. 당시에 UN이 있었죠. 그 당시에, UN을 통해서, 단지 한 국가가 할 수 없는 강력한 공권력을 국제정부의 역할로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UN을 통해서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것이 그러한 업적으로 본 것이고요.


으로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누가 힘써야 하는가? 모두가 다 애쓰고 힘써야 하지만, 역할에 있어서 개인과 개인, 개인과 정치공동체. 국가간, 나아가 세계 공동체가 다 고유하고 특별한 역할을 나눠서 갖는데. 그중에서 가장 특별한 역할을 갖는 자가 바로 가톨릭 신자라는 것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앞당기기 위해 여러분을 하느님이 부르셨다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평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를 위해서 신자와의 평화로운 관계를 무신론자들과도 협력해야 한다고 교황님께서 구체적으로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15년 2월 23일 오후 8시 15분경 휴식시간에 촬영(가톨릭회관과 명동성당)



2015년 2월 23일(월) 저녁 7시~8시07분까지, 명동성당 옆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

제109차 사회교리 기본과정 4주차 강의 <지상의 평화> , 이강서 신부님 강의 1교시 끝.


위 내용은 강의 정리자의 기억과 기록을 바탕으로 재편집된 것이며, 부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강사 신부님의 의도나 맥락과는 다른 의미와 표현이 발견될 수도 있음을 참고해야 합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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