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4일(수) 저녁 7시 30분경 촬영한 하기동 성당 모습


시작에 앞서, 제13기 대전 사회교리학교 소개


가톨릭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박상병 신부님, 전의본당 주임)가 주최하는 제13기 사회교리학교가 대전시 유성구 하기동성당에서 열렸습니다. 2015년 3월 4일(수)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사회교리 '학교'가 열린 것이니만큼 1회성 행사가 아니라 총 10차례에 걸쳐서 매주 수요일에 열립니다. 그리고 11번째(5/15 금)는 김종수 주교님이 집전하시는 수료미사입니다. 5월 6일(수)까지 10회 강의 중 7번 이상 참석한 이들에게 수료증을 준다고 합니다.


참고로 13기 사회교리학교와 병행하여 14기 학교도 진행됩니다. 14기는 4월 1일(수)부터 6월 11일(목)까지 열립니다. 이것은 첫 회 수업(수요일)을 제외하고 매주 목요일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열립니다. 대전시 유성구 도안동 성당이 14기 학교의 캠퍼스가 되는 겁니다.


아무튼 필자가 수강료 5만원을 내고 수강신청한 제13기 사회교리학교는 2015년 3월 4일(수)부터 5월 6일(수), 10주 동안 매주 수요일 열립니다. 장소는 침례신학대학교 바로 코 앞에 자리잡은 하기동 성당입니다. 대전 지하철 지족역(침신대 네거리)에서 '하기 네거리' 방향으로 600미터를 걷다가 '하기 네거리'에서 우회전하면 100미터 근방에 성당이 보입니다. 정식으로 주차할 곳은 마땅치 않아도 동네 주위로 대충을 차량을 주차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기동 성당의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톨릭 대전교구 하기동 성당. 대전광역시 유성구 송림로 49번지(하기동 535-1번지)


2015년 3월 4일(수) 저녁 7시30분경 촬영. 이 시간 쯤 하기동 성당에 도착했다.


총 10회 강의 중 2015.3.4(수)의 첫번째 2시간 짜리 강의 제목은 <하느님 사랑의 계획과 교회의 사명>이었고, 강사는박상병 신부님입니다.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성당 2층의 성전에서 열렸습니다. 

2015년 3월 4일(수) 저녁 7시31분경 촬영. 성당 1층 입구를 들어서자 배너게시대가 반겼다.


2015년 3월 4일(수) 저녁 8시, 박상병 신부님의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박상병 루도비꼬 신부님(축일 8.25)은 2005년 1월 25일, 사제서품을 받으셨고, 천안 오룡동 성당에 계시던 2007년 1월, 사제인사발령에 따라, 로마 유학을 명령받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귀국한 이후로 전의본당 주임,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사회교리전공), 정의평화위원회 교육분과위원장 등을 역임했는데, 2013년 2월4일자로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이 되셨습니다. 전임자는 강승수 신부님. 다음 강의노트는 필자의 기억과 기록에 따른 것이기에 다소 부정확할 수 있으며 강의내용과 다른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강의시작 27분전 사진, 2015년 3월 4일(수) 저녁 7시33분경 촬영. 아직 몇 사람 안보이지만, 강의가 시작될 즈음엔 144석의 이 작은 성당이 대체로 꽉 찼다.  본당(하기동) 신자만 100명이고 그 외 20~30명의 다른 성당 분들이 참석했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하느님 사랑의 계획과 교회의 사명


박상병 신부님

시작하기에 앞서서 제 소개를 하고 10주간 과정에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주교님의 명령으로 로마에 가서 사회교리를 공부했던 까닭에 지난 3년 전부터 가톨릭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군인으로 치면) 작대기 세 개입니다. 박상병. 그러나 병장제대했습니다.


오늘 시작하는 사회교리 학교는 총 10주동안의 과정입니다. 선물로 드린 책 <간추린 사회교리>는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에서 2004년 펴낸 책이다. 이것이 기본 교재입니다. 10주간의 과정은 이 책의 목차를 따라서 했지만, 내용은 가르치시는 강사님마다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강의 제목은 <간추린 사회교리>의 책 목차에 맞추려고 했습니다.

성전 입구에서 무료로 나눠준 것. 10회 전체 수강료가 5만원인데 2만원짜리 <간추린 사회교리> 책을 그냥 주었다. 그리고 기념픔으로 젖병꼭지 재질로 만든 환경컵과 일정표가 배부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10주 동안의 진도에 맞춰서 읽으시길 권장합니다. 사실상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읽으시면서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라고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열번째 시간(사회교리 토크 콘서트)에서 대화하는 식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할테니, 그 때 질문하시고, 생각 나눠주시면 되겠습니다.

시작하면서 여기 오신 분들 가운데 하기동 성당 아닌 분들 손 들어보시겠어요. 하기동 성당이 100분 넘게 신청했다고 하는데, 이 성당 (좌석수가) 12곱하기 12인데(144석) 하기동 성당이 아닌 분들도 많이 오셨습니다. 여기 계신 분 중 사회교리란 단어를 들어보신 분, 사회교리 강의를 들어보신 분들 아직은 많지 않습니다. 그거 들으면 "그거 뭐여?"하면서 잘 모르시는 데, 첫 시간에는 사회교리가 어떤 것인지와 역사를 간단히 설명드리고, 간혹 우리나라는 아직도 이념대립이 강하죠. 좌와 우, 그리고 종북논쟁, 빨갱이, 이러한 얘기가 많고,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거리에서 미사드리고 노동자들과 연대를 할 때, 왜 성직자들이 성당에서 기도나 하지 왜 저러시는가 불편해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가톨릭이 이권이나 영향력 행사를 위해서 길거리에 나서는 것은 아닙니다. 가톨릭 교회 신자수가 (전 국민의) 10퍼센트라고 하지만, 실질적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4퍼센트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2015년 3월 4일(수) 저녁 8시 09분, 강의가 막 시작되는 모습 @ 하기동성당


교회가 걸어가야 할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은 사람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교황으로 선출(1978)되어서 회칙을 내놓는데(1979.3.4), 그것이 <인간의 구원자>라는 첫번째 회칙이고 그 내용 중에 있는 표현입니다. '교회가 걸어가야 할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은 사람이다, 인간이다.'라고 표현하시는 겁니다. 이 말씀은 교회가 세상 일에 관심 갖는 이유는 사회 안에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인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회교리는 어떤 근거로 나오는가? 우선 성경을 통해서 인간은,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인간이 성경은 교회를 뭐라고 가르치는가 설명하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시간 나눠보겠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카롤 유제프 보이티와)

1978년 10월 16일 임기시작하여 2005년 4월 2일(선종, 84세) 끝난다. 후임은 베네딕토 16세이고, 전임자는 요한 바오로 1세이시다. 1920년 5월 18일 폴란드 바도비체에서 태어나셨다. 





보시니 좋았다와 비슷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교회가 걸어가야 할 일차적 근본적 길은 창세기 일장 이장에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이 부분은 너무 잘 아는 부분입니다. 두가지 창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번째 예를 들면, 하느님께서는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 뭘 만드시고, 만드실 때마다 보시니 좋았다고 하시죠. 그리고 여섯째날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한가지를 더 붙이십니다. 바로 우리와 비슷한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신학적으로 이것은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모상은 무엇인가요? 하느님은 무엇인가? 속성과 모습은 무엇인가? 하느님은 뭘까요?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하잖아요. 사랑인데, 그 사랑의 모습으로 인간도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습은 모상인데 그것은 사랑이다.

두번째 보면, 사람은 흙의 먼지로 빚어 만들고 코에 숨을 불어넣으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그러니까 인간의 모습은 두번째는 흙의 먼지입니다. 재의 수요일에 그런 말을 합니다.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사람의 두번째 모습의 흙의 먼지다. 모든 피조물이 다 밟고 다니는 게 흙이기도 합니다. 사제서품 때 엎드리는 이유는 가장 낮은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게 이유입니다. 흙의 먼지라는 건 그렇게 낮은 존재다. 그런데 첫번째 모습과 두번째는 반대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은 사랑이지만, 또 고귀해보입니다. 그런데 흙의 먼지는 정반대입니다. 그렇게 고귀하면서도 별 것 아닌 먼지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 사도들이게 보낸 편지를 보면, (필리 2,6-7)


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히 여기지 않고 아주 밑바닥으로 오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는 것. 하느님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세번째,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 보시니 좋았다, 하루하루 만드신 걸 보시고, 그런데 창세기 2장을 보면, 사람이 혼자 있는게 좋지 않다고 합니다. (창세기 2,18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그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 마지막은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한 몸이 되는 데 둘은 알몸이면서 부끄럽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몸으로 강의한다고 하면 미쳤다고 하겠죠. 부끄러운 겁니다. 그러면 알몸이면서 부끄럽지 않은 관계는 부부사이, 어릴적 아이와 부모님, 즉 온전한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때 부끄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혼자 있지 않고 남녀도 함께 있을 때 보기 좋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세번째 인간의 속성은 인간이 함께 있을 때, 공동체로 있을 때, 아름다운 존재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모상, 흙의 먼지, 그리고 함께 있을 때 아름다운 존재 이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거기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성부는 하느님의 모상, 성자는 흙의 먼지, 성령은 함께하는 공동체를 대입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써넣은 겁니다.

뱀의 유혹 방식

예수님은 흙의 먼지 모습을 계속 보여주십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아버지는 나에게 다 주신다고 하고, 아들도 그것을 아버지에게 받지만 또 다시 돌려주며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걸 계속 유지하고 이끌어주는 게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습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처럼 저 세개의 속성이 우리 안에 각인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 모습으로 살아갈 때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의미있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왜 죄악이 많이 일어나는 겁니까? 그게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흔히 원죄라고 합니다. 선악과를 먹은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이 일어났는지 들어다봐야 합니다.

창세기 제2장을 보면, 모든 열매에서 다 따먹어도 되지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것은 먹지 말아라. 그것을 먹는 날 너는 죽는다. 


창세기 2, 16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대화 자체를 끊어버려라

그런데 (3장 1절에서) 뱀이 뭐라고 하죠? "야, 너네 하느님이 아무 것도 먹지 말라고 했다며?" 그래서 비교를 해보면, 하느님은 다 먹어도 된다고 하지만,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했는데, 뱀은 어떻게 대화하죠? 아무 것도 먹지 말라고 했다며? 그렇게 유혹합니다. 그렇게 유혹은 터무니없이 오지 않습니다. 뭔가 우리가 걸려넘어질 수 있는 상황을 만듭니다. 그런 유혹이 올 때 대화 자체를 끊어버리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터무니없이 오지 않는 유혹을 살짝 맛 봅니다. 그러며 한발자국 악으로 다가갑니다. 그러면서 죄에 빠집니다. 뱀이 이브에게 접근했을 때, 대화를 시작합니다. 그것은 이마 유혹에 빠졌다. 그것은 하느님이 나쁜 존재일 수 있다는 의혹입니다. 유혹에 빠졌음이 드러나는 게 창세기 3,3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3, 1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3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선과 악을 아는 게 오히려 중요한 게 아닐까?

여자는 한 단어를 빼고, 한 단어를 첨가합니다. 하느님은 모든이라고 했지만, 여자는 그 단어를 뺍니다. 그리고 먹지 말라고 했지, 만지지 말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선과 악을 아는 게 왜 문제인가?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이 오히려 중요한 건 아닐까? 그런데 성경에서 선과 악이 붙어 있으면 어떤 의미냐면, 전부라는 뜻이 있습니다 모든 것, 이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의 의미입니다. 

선과 악을 안다고 할 때, 성경에서 몇가지 단어들은 예수님이 나는 아버지를 안다, 너희는 아버지를 모른다는 '머리로 알고 모르고'가 아니라, '아버지와 하나이다'입니다. 그래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다는 건 전부를 아는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인간이 전부를 알 수 있나요? 없다고 하죠. 전부를 알 수 있는 존재는 하느님 뿐입니다. 그래서 선과 악을 아는 나무열매를 먹으면 안된다는 것은 너희는 하느님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 하느님의 모상인 동시에 흙의 먼지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열매를 먹는 날 죽을 것이란 것은, 결국 흙의 먼지처럼 죽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올라서지 말라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부끄러워한다는 건 사랑의 관계가 깨졌다는 것

그런데 여자가 뱀의 유혹에 빠져들며 모든 이란 말 빼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고 말하니 뱀은 "아싸! 걸려들었구나!"하면서 "안 죽어, 하느님처럼 될거야, 그래서 못 먹게 한거야!" 하고 미끼를 툭 던집니다. 그래서 그걸 따서 먹었죠. 혼자만 먹은 게 아니라,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악과를 먹은 다음에 자기들이 알몸인 걸 알고 무화과 나무로 두렁이를 만들어 가렸다고 합니다. 그들은 원래 알몸이면서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사랑의 관계가 깨졌다는 겁니다. 그것은 올라섰다는 것이고,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그래서 함께 더불어 살기를 포기했다는 겁니다.

너 어디 있느냐?

성경에는 여러가지 형태의 고발이 있습니다. 그게 잘못한 사람을 벌주려는 고발이 아니라, 너가 지금 어디 있는지 보고 다시 돌아오라는 고발입니다. 하느님이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하고 물어봅니다. 부끄러워서 숨었다고 하는 걸 보면, '하느님 앞에서도 부끄러워하니, 하느님도 날 짓눌르겠구나!' 죄의 결과가 들어온 겁니다. 하느님이 바라신 건 무엇인가요? 먹지 말라는 걸 먹었는데, 당신처럼 된 게 아니라 뭔가 이상한 기본이고 잘못 된 거 같습니다. 하지 말라는 짓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통회하고 회개하라는 게 하느님의 고발이 가진 참 뜻인데, 안타깝게도 아담은 여자에게 탓을 돌립니다. 그러자 여자는 뱀에게 탓을 돌립니다. 


창세기 3,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16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17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고약한 아담

그런데 아담이 고약합니다. 하느님에게까지 탓을 돌립니다. (창세기 3,12 중에서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죄의 밑바탕, 내면에서 관계가 끊어지는 것, 그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알몸이 부끄러운 것도 남녀 관계가 끊어진 것이고, 하느님을 피해 숨은 것도 그런 것입니다. 내가 위로 올라서려고 하니,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이 세가지 관계가 다 깨지는 겁니다. 

죄지은 인간에게 하느님이 원하신 것

그런데 하느님이 다 끝내자라고 할 수도 있는데 벌을 주시면서도 소명을 주십니다. 평생 땀을 흘려서 먹고 살라는 노동의 소명과 여자에게는 출산의 고통을 줍니다. 그것은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만듭니다. 즉, 창조를 해갑니다. 그리고 여자의 출산도 생명의 창조입니다. 노동과 출산은 창조의 일이 담겨져 있고, 벌같아 보이지만, 그것을 통해 창조의 원래 모습을 회복하자는 소명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고통이 들어갑니다. 이것이 신비롭습니다. 그래서 묵주기도 중 고통의 신비가 있어요. 무엇을 위한 신비입니까? 흙의 먼지로 내려가기 위해서도 고통이 필요하고, 그렇게 내려가야 함께 살 수 있고 원래 창조의 질서로 회복될 수 있다는 겁니다.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모습이다.

협력이 구원의 역사

그래서 교회가 말하는 노동의 의미에는 육체건 정신이건, 힘든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는 창조를 완성하는데 협력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노동이 숭고한 일이 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협력이 그래서 구원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으로 넘어가기 전에 딱 두 명(아브라함과 성모님) 얘기할 께요.

아브라함의 경우

아브라함은 75세 때, 정든 고향을 다 버리고 떠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길을 떠나고 돌아보니, 땅은 주시는 거 같은 데 새끼는 안 주는 거 같아요. 그런데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천막 밖으로 불러내고, 하늘을 보라고 합니다. 별이 있습니다. 네 후손이 저렇게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라고 합니다. 


창세기 15장 5~6절

5 그러고는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정의는 그대로 따르는 것

아브라함이 그러자 "언제요. 빨리 줘봐요!"라고 하지 않고, 그냥 "믿습니다!" 라고 말하고, 그러니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롭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정의라고 합니다. 정의는 하느님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따른다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의심하고 의로움이 깨졌습니다. 아들 이사악을 얻은 것은 25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입니다. 길고도 잔인한 세월이지만, 아브라함은 믿습니다. 그렇게 믿음의 성조가 됩니다. 

성모님의 경우

마리아 성모님은 어떱니까? 하느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천사는 마리아 집으로 들어가서,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하자, 마리아는 '몹시' 놀랍니다. 천사가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라고 얘기를 하죠. 그 때 마리아가 "뭔 헛소리요~?" 합니까? "뭣이여 시방,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 데 무슨 애를 배는거야!" 그러나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믿음은 때로 우리에게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말씀이 진실로 이뤄지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는 데까지 기다리는 걸 말합니다. 믿음은 때로 우리에게 많은 시간을 요구합니다. 우리를 계속 유혹하고 시험합니다. 그런데 이 두 인물, 아브라함을 통해 구약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성모 마리아님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실 통로를 마련한 겁니다.

예수님과 광야, 그리고 이단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시고, 병자도 낫게 하고, 마귀도 쫓아냅니다. 광야에서 유혹을 이겨내는 예수님을 보며, 예수님은 하느님이잖아요. 우리같은 사람은 "그렇게 못해욧!"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이단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참 하느님인 동시에 참 인간입니다. 먹고 마실 때는 인간이고 동시에 온존히 하느님이십니다.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의 육체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사람이 그런 것처럼 인성과 신성이 하나인 분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모습은 아담과 하와가 받은 유혹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혹의 핵심은 너가 하느님이 될 수 있다, 올라설 수 있다는 것. 그런데 그것을 말씀으로 이겨내십니다.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루카 4,16-30, 마태 13,54-58 ; 마르 6,1-6)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스크린에 보여지는 글, 루카 4,18-19 함께 낭독함)


이것은 희년 선포라고도 하고, 예수님의 취임 연설이라고 할 수 있어요. 두루마리를 펼치고 말씀하시는 거죠. 이 일을 예수님은 시작하십니다. 이 말씀이 너희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얘기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와 있다라고 얘기하시죠. 그런데 하느님 나라가 분명히 와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우린 그것을 갈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죽은 다음에 갈 곳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재미는 없지만, 마일리지를 쌓는 것처럼, 주일미사 10마일리지, 평일미사 20마일리지, 레지오 30마일리지, 그렇게 쌓는 게 그다지 재미는 없지만 천당에 가야 하니까 포인트 쌓아가듯 신앙생활을 한다는 겁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전서 13장(1절~13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13장은 '사랑'이란 소제목을 가진 사랑의 찬가인데요. 주욱 말하고 끝에서 뭐라고 하냐면, 1코린 13장 중에서,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지금은 뿌연하다, 어렴풋하다


그러니까 지금은 뿌연합니다. 그런데 내가 개인적 종말이 왔을 때, 맛들이고 갔을 때 그 뿌연함이 하느님 앞에 가면 선명하게 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어느 프랑스 신학자의 말인데요. '살아있을 때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죽어서 부활은 없다!'는 겁니다. 즉  너희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와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맛들여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여러가지 비유가 있죠. 밀알의 비유, 내가 흙의 먼지로 밑에 내려갔더니 누군가가 살아나더라. 이게 하느님 나라인가? 이렇게 맛들이면서 순례의 여정을 나아가는 것이죠. 또 한가지 중요한 잣대는 어떻게 하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25장 최후의 심판(31~46절) 중 34~40까지 참고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유일한 기준


하느님 나라를 만나고 차지하는 데 이게 유일한 기준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기준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일부터 길거리 찾아다니며 빵 주고, 교도소 찾아다니고 해야 하나? 물론 그래도 좋습니다. 그런데 왜 배고픈 사람, 헐벗은 사람, 나그네, 아픈 사람들, 왜 죄짓고 감옥에 가는 사람들이 생길까? 이런 사람들이 안 생기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게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겁니다. 적선 베푸는 것처럼 그 사람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일도 함께 하며 두가지를 함께 할 때 하느님 나라를 만나고 맛들여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작년이죠. 교황님 오셔서 8월 15일 미사 때, 비인간적인 경제모델을 거부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에 오시기 전에 교황청의 당부는 교황님의 방한을 이벤트로 여기지 말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황님의 강론 말씀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가난을 만들어내는 이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을 언급하신 겁니다. 


2014년 8월 15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강론에서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빕니다."라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계를 ‘1대 99 사회’로 몰아가는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에 대해 이전 교황들과 달리 매우 적극적인 비판을 제기해왔다. 



그리고 오신 날 저녁에 한국 주교님들과 만나서 이런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중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중심에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또한 복음의 시작과 끝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셨다고) 나자렛 회당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마지막 날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우리 모두가 심판 받을 때 적용될 “규범”을 알려주십니다. 거기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한국 주교들과 만남. 2014.8.14(목) 서울,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강당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그래서 이제 사회교리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입니다. 이것은 1962년부터 65년까지 4년간 열립니다. 이게 언제 열리냐면 그당시 어떤 일이 있었냐면, 요한 23세 교황님이 보편공의회를 열겠다고 했을 때, 이런 반응입니다. "뭐여. 뭔 일 있는겨?" 

그런데 공의회 설명하는 방법 중 이런 게 하나 있어요. 얼마 전 요한바오로 2세와 요한 23세 교황님이 성인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우린 요한 23세를 잘 모릅니다. 성인 품에 오를 때 우리가 아는 것인데, 심사과정에서 기적을 요구합니다. 하나의 기적을 요구합니다. 불치병이 낫다든지 여러가지 형태 기적이 있죠. 그런데 요한 바오로 2세는 기적이 있었고 인정되었지만, 요한 23세는 기적없이 성인 품에 오릅니다. 그것은 제2차바티칸 공의회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모르면 우린 중세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요한 23세 교황님께서 편지를 보내죠. 전 세계 주교들에게. 이번 공의회의 논의 주제를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현대 세계의 오류에 대한 단죄'라는 답변이 옵니다. 세상은 늘 문제투성이고 교회는 이를 혼내줘야 한다는 겁니다. 세상을 향해서 "이건 악이야, 이것은 죄야!, 그리고 교회는 깨끗해." 그렇게 성과 속을 분리하려는 게 교회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걸 보고 다 치워버립니다. 그러면서 교황님은 앞으로 공의회는 사목 공의회가 될  것입니다. 현대 세계에 어떻게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달할 것인지 고민하는 공의회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조르나멘토. 적용, 적응입니다. 무엇에 대한 것인가?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을 죄악시하는 게 아니고, 죄가 있는 세상이라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지 연결하자고 한 게 성과였고, 4년동안 열리면서 가톨릭 교회를 완전 뒤집어놓습니다. 

예전에는 미사중에 왜 묵주기도만 했나?

단순한 예가 십자가를 향해서 벾에 붙은 제대에서 신부가 십자가를 향해 바라보며 혼자 떠듭니다. 그것도 라틴어로 합니다. 그럼 신자는 뭐해요? '묵주기도 하는겨'. 그래서 예전 신앙생활 하시는 분 중에 그런 분이 계시죠. 그런 성과와 전반적 지향은 현대 세계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그 중에 그 결과물이 바로 문헌입니다.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준 겁니다. 이것은 그냥 받아들여도 되는 안해도 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성전(聖傳)과 같습니다. 

성경과 성전(거룩한 전승)

개신교는 믿음의 원천을 성경 하나만 봅니다. 그러나 가톨릭은 성전, 즉 거룩한 전승도 인정합니다. 공의회 회칙도 성전에 포함되고, 우리 믿음의 근원입니다. 여기에 네 개의 헌장이 있습니다. 그 중 네번째가 바로 사목헌장입니다. 오늘날 세계 안에서 교회가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그 1장이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 즉 세상이 기뻐하는 게 교회가 기뻐하고 세상이 슬퍼하는 일에 교회도 슬퍼하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뭘 할 때, 왜 정교분리 있는데, 왜 그러냐고 하지만, 정교분리는 결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서로 전혀 신경쓰지 말라고 분리시킨 게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는 그런 게 아닌데, 오도되고 이상하게 풀어낸 겁니다.  15분 쉬었다가 다시 하겠습니다.(8시 57분 휴식)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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