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부활대축일의 묵상

2015. 4. 5. 하부내포성지 윤종관 신부

 

죽음과 부활, 동시적 실존 양상!

‘죽을 맛’을 보고나서야!

 

 

우리 모두의 부활을 서로에게 축하합시다!

저의 이 인사말이 빗나간 말이 아닌가 하고 의아해 하실 분이 계시지 않을까요? “오늘 ‘예수 부활 대축일’이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인데, 우리에게 무슨 부활 축하람?”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축하를 드림이 당연하지요! 그래서 우리 모두 예수님을 향하여 축하인사를 환호로 드립시다. “예수님! 축하합니다! 부활하셔서 축하드립니다. 돌아가실 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습니까? 그런데 부활하셨군요! 장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축하합니다!”

 

왜 우린 스스로들에게 부활을 축하하는 걸까


이렇게 예수님께 축하드리면 되는 걸, 왜 제가 우리 스스로들에게 부활을 축하드린다고 인사할까요? 그래서 혹시라도 어느 교우 분께서 이 축하를 받고 쑥스러워 하실 지도 모르겠군요. 제가 놀리는 줄 아실는지요? 또는 기분이 나빠지신 분도 계실는지요? “아니, 내가 언제 죽었었단 말인가?” 하면서 말입니다. 또는 “아니, 나 보기 싫어서 죽어 없어지기 바라다가 살아있는 걸 보고 비아냥거리는 거 아냐?” 하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는지요? 아니면, 오랫동안 성당에 나오시지 않다가 성당에 오신 분께서는 “저 신부가 나 냉담하여 안 보이다가 오늘 나타나니깐 죽은 줄 알았나?” 하고 기분 나쁘신 건 아닐까요?

 

병자성사에 얽힌 일화


전에 제가 있던 본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기에 ‘병자성사’ 받으시라고 여쭈었더니 매우 기분 나빠해 하시더라고요. “아니, 내가 죽을 병 걸린 줄 아시오? 나 빨리 죽길 바라는가 보군!” 하시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교우님들 모든 분께 부활을 진심으로 노골적인 표현으로 축하드립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교우님들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우리 모두의 부활축제


그렇습니다. 오늘의 이 축제는 예수님의 부활 축제입니다만, 동시에 우리 모두의 부활 축제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어찌 그러냐고요? 그 까닭을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콜로 2, 12)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오늘 부활 축제를 우리 모두 자신의 축제로 삼으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세례를 받은 지 오래 된 교우들께서는 오늘 이 축제의 기쁨이 실감 나지 않는다고 말하시겠지요. 하지만 지난 사순절을 열심히 지내오신 교우들께서는 오늘의 기쁨이 곧 세례의 기쁨과 동일한 것임을 실감하실 것입니다.

 

사순절 여정에서 가장 힘겨운 것은 참회


사실 우리는 이 부활 축제를 맞이하려고 사순절의 힘겨운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그 힘든 여정이란 교회의 사순절 관습대로 기도와 참회, 단식과 선행, 그리고 빈번하게 거행되는 전례 참여였습니다. 그 사순절 과정 중에서 가장 달갑지 않은 것이 있었다면 아마도 참회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형식적일 경우에는 그저 ‘판공성사’라는 것을 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고해성사라는 것을 꼭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의 죄를 들추어내어 자백한다는 것은 실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단식과 선행


자존심 상하는 일을 하기란 속된 말로 ‘죽을 맛’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순절의 실천사항으로 강조되는 다른 일들 즉, 기도와 단식과 선행 등은 그래도 해볼 만한 일들이지요. 그것들은 자존심과 상관없는 일들이니까요. 나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것 정도를 기도로 아시는 분들 같으면 기도해서 마음 편해지지요. 그리고 단식이란 건강이나 몸매 가꾸기를 위해서도 기꺼이 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선행을 한다는 것은 명분을 세우기도 하고, 이웃을 돕는다는 것이 나 자신을 즐겁게 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나 자신의 죄과를 꼬치꼬치 살펴서 그걸 잘못한 일이라고 나 스스로 인정해야 하는 일이란 즉 참회하는 일이란, 실로 즐거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히 자존심을 심하게 상하는 일이지요.


참회란 실로 '죽을 맛'

 

그렇듯 자존심 상하는 참회란 실로 ‘죽을 맛’입니다. 저는 여기서 ‘죽을 맛’이라는 속된 말을, 가장 꺼리는 일에 대한 우리 인간 누구나 공감하는 느낌의 단적인 표현이라고 봅니다. 얼마나 하기 싫으면 ‘죽을 맛’이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란 그렇듯이 죽는 일과 같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회 즉, 죄의 고백이란 자존심을 지닌 인간에 있어서 최악의 처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아존재(自我存在)를 존중(尊重)하는 마음(心)을 즉, 자존심(自尊心)을 업신여기게 되는 것이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에게 잘못의 탓을 스스로 돌린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일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드러낸다는 것은 죽는 일과 같습니다.

 

죽는 일을 하고 나서야 새로이 일어선다


우리는 그렇듯이 자신의 죄를 자신에게 물어 참회하고 고백하는 과정을 사순절 동안 지내왔습니다. 그야말로 죽는 일을 해온 것입니다. 그렇듯 죽는 일을 하고나서 오늘 새로이 일어섭니다. 나의 죄악들을 그리스도처럼 죽음의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버렸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당신의 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듯이,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처럼 우리를 다시 일으켜주십니다. 사순절 참회의 과정을 지낸 우리의 부활이 그것입니다. 그 사실을 바오로 사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확인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버리셨습니다.”(콜로 2, 13∼14)

 

이렇게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죄를 못 박아 없앰으로써 자존(自尊)의 죽음을 지나온 우리의 다시 일어섬이 곧 세례이듯이, 또한 우리는 그 세례의 과정을 사순절과 부활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반복한 것입니다.

 

자존심까지 없앤 우리의 처지가 곧 무덤이다


우리의 죄 때문에 자존심을 없애기까지 한 우리의 처지가 곧 무덤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그 무덤은 죄악의 찌꺼기랄 수 있는 죽은 몸이 거기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무덤은 비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은 이른바 ‘빈 무덤의 체험’입니다. 그것은 곧 오늘 부활절의 여명에 무덤에 달려갔던 마리아 막달레나와 두 제자의 체험입니다(요한 20, 1∼9 참조).

 

오늘의 이 미사에서 읽은 부분까지의 요한복음서 구절은 그 빈 무덤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도한 내용으로 멈추고 있습니다(요한 20, 9 참조).

 

빈 무덤에 대한 깨달음


그 여명에 무덤을 찾아간 그들이 ‘빈 무덤’에 대한 깨달음을 아직 얻지 못한 반면에 우리는 오늘 보도가 멈춰진 요한복음서의 그 이하 구절(요한 20, 11∼18 참조)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빈 무덤의 허망함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울고 있던 마리아가 정원지기인 줄로 오인하며 만난 예수님께 그 무덤의 시체를 누가 꺼내갔는지 알려달라고 애원하였지요(요한 20, 11∼15 참조). 그러자 평소 자기를 부르시던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채고 나서 그분을 붙잡으려 하는 마리아에게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요한 20, 16 참조). 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요한 20, 17)

 

죄를 벗는 체험, 부활


이 말씀에서 우리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 말씀에서 그분의 부활이 어떠한 것인지 번쩍 깨닫게 됩니다. 부활? 그건 이 세상에서 붙들어지지 않는 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현세를 아직 살고 있는 우리가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체험이란, 죄를 지어본 사람으로서 가능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전과자의 변신체험입니다. 죄를 벗는 체험인 것입니다. 죄를 벗으려면 나 자신의 범죄사실을 자인함에서 비롯됩니다.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함에서 변신을 출발합니다. 그러한 죄고백은 그 자체로 나 자신을 죽이는 일입니다. ‘죄고백’이란 자살 같은 행위입니다. 즉 스스로 죽음을 끌어드리는 행위와 같습니다. 죽음만큼이나 회피하고 싶은 것이 나의 죄악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참회의 고백은 죽음을 건너는 일


그렇다면 참회의 고백이라는 것은 일종의 죽음을 건너는 일입니다. 여기서 죽음과 같은 죄의 고백은 곧 부활의 단초가 됩니다.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부활이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렇습니다. 죽음과 부활은 ‘동일 지평에서 동시에 한 꼭지 점’의 일인 것입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동시적이자 동일한 실존 양상입니다. 동시적 실존 양상! 그게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제가 책을 읽고 깨달은 이야기를 해봅니다.

 

달라이 마라, 예수를 말하다


부활을 ‘환생’에 빗대어 달라이라마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이며 불교를 세계적으로 대표하는 지도자 달라이라마를 가톨릭의 베네딕도회 수도사제들이 초청하여 런던의 한 대학에서 사흘 동안 세미나를 개최하고 발행된 강연집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강연집은 ‘달라이라마, 예수를 말하다’라는 책입니다. 불교 지도자의 지혜로 성경의 복음서를 강의한 내용을 세미나 기록형식으로 수록한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그 불교 지도자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이해한 내용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앞서 제가 말한 ‘죽음과 부활의 동시적 실존 양상’이라는 표현은 저 달라이라마의 말을 원용한 것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전부인 ‘부활’을 말하면서 달라이라마는 불교의 ‘환생’에 대한 설명을 곁들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환생을 믿는 사람에게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곧 환생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환생은 죽음 다음에야 올 수가 있습니다.”


부활은 환생이 아닙니다

 

이러한 달라이라마의 말을 듣고 거기 세미나를 함께 하던 가톨릭의 수도사제 로렌스 신부가 한 마디 했습니다. “부활(復活)은 환생(還生)이 아닙니다.”라고요.

 

가톨릭 사제의 그 이의제기에 대하여 달라이라마는 대답했습니다. “물론 저는 윤회(輪廻)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영적으로 성장을 해나가면, 그의 육체까지도 더욱 더 미묘해집니다.”

 

이 달라이라마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의 예수님의 몸은 육체적인 몸입니다. 부활은 했지만 아직 하느님 아버지께로 승천하지 않은 몸은 미묘한 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올라간 후의 몸은 영적인 몸입니다.”

 

달라이라마의 이러한 설명은 불교적 표현입니다만, 저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신 죽음과 부활의 길을 따라가는 데 있어서 좋은 힌트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미묘한 몸’이 되는 것이고 승천은 ‘영적인 몸’이 되는 것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육체적 몸은 영적 단련으로 달라진다 


우리는 아직 이 세상에 머물면서도 부활한 몸이 될 수 있다는 힌트가 그것입니다. 이점에 관하여 달라이라마의 불교적 설명으로는 사람마다 영적인 진화의 단계가 있어서 아주 평범한 상태에서부터 출발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상태로 옮겨간다고 합니다만, 이러한 관점에 따라 우리의 육체적 몸은 영적인 단련을 통하여 달라지는 변화를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실제로 사람마다 풍기는 외양의 차이점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은 외양에서 그 마음과 삶의 상태가 험악함을 드러내기도 합니다만, 또 다른 한 사람은 그 외양에서 기품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그런 차이점은 그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렇듯이 어느 한 사람이 예전 같지 않게 외양이 달라진 경우를 볼 수도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대하기 싫던 사람의 모습이 어찌 된 영문인지 경건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라서 가까이 하고 싶은 모습으로 변화된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는 그간에 마음의 단련과 삶의 개선을 이룬 사람임이 확실합니다. 같은 육체일지라도 사람마다 풍기는 것이 다른 한편, 한 사람의 몸일지라도 예전 같지 않게 달라진 그 기품은 미묘한 변신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달라지는 몸의 미묘함


그렇듯이 달라진 몸의 미묘함은 살아생전 부활의 징후를 엿보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신이 곧 부활은 아니겠습니다만, 우리의 몸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몸의 그러한 달라짐이란 마치 투박한 돌을 갈고 닦아 아름다운 조각품을 만들 듯이 사람이 자신을 단련하여 그 모습을 변화시킨 것을 뜻합니다. 일면 다른 사람으로 재탄생한 것이지요. 그것이 곧 부활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한 부활의 길로써 하늘(영의 세계)에 이를 경우를 우리는 영적인 몸으로의 변화라 할 것입니다.

 

부활이란 파스카 (건너감-지나감)


그렇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길에 대하여 설명하는 달라이라마에게 가톨릭의 로렌스 사제가 말했듯이 그것은 윤회라기보다는 부활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달라이라마의 말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유일무이한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영적인 변화의 길을 가신 분이 아니고 본래의 당신 모습으로 가신 분이시겠습니다만, 우리 인간들은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경로처럼 나 자신의 죽음을 거쳐서 새로운 영적 상태의 몸으로 거듭나는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 여기서 그 거쳐 갈 죽음이란 곧 부활의 필연적 과정인 것입니다. ‘부활’이란 본래적으로 ‘파스카’ 즉 ‘건너감-지나감’이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이는 단련의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여 ‘지나감’으로써 우리 부활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달라이라마에게 말한 로렌스 신부의 확신적 고백을 저 자신의 고백으로 삼아 말하고 싶습니다. “부활(復活)은 환생(還生)이 아닙니다.”라고 앞서 말한 로렌스 신부께서 설명한 다음과 같은 말이 그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새로운 눈을 가져야


“죽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세상에 일정한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죽은 후의 예수님은 다르게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사후에 마리아 막달레나와의 만남이 그렇듯이, 이제는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아야만 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존재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새로운 눈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죽어서 부활하고 승천하기까지의 중간단계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예수님은 거기에 적혀 있는 것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로렌스 신부님의 말씀대로, 십자가 이전의 예수님은 그 옆에 있던 일반 사람들의 눈에 보이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이후의 예수님 즉 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서고 우리 곁에 계시지만 그분의 모습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새로운 눈을 가진 이들 뿐입니다. 그분은 십자가 이전처럼 육체의 손으로 붙잡아 만져서(한정적으로-물체로써) 확인할 수 있는 분이었지만, 십자가 사건 이후의 그분은 언제 어디서고 새로운 눈 즉 영신적(신앙적) 깨달음으로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내 아버지 하느님이시고 너희의 아버지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가신다던 분이시기에, 즉 하느님과 합일 되신 상태의 분이시기에, 즉 성령을 통해 존재하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언제고 어디서고 만날 수 있게 되셨음이 곧 그분의 부활입니다.


새로운 참 자아로 예수님을 되찾아야 


그렇듯이 그분을 만나는 것이 곧 부활의 체험입니다. 이 세상 모든 죄악의 찌꺼기를 다 없애버린 우리라면, 즉 우리 또한 죄악에 죽고 다시 새로운 삶으로 일어선다면, 그분의 그 부활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활에로 건너가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죄악을 참회하는 사순절을 다 지나고 이렇게 새로운 날 곧 부활의 날을 맞이한 것입니다. 세례로써 그리 하였고, 참회로써 그리 하였습니다. 우리 자존심의 저 밑바닥 아래에 내려가는 ‘죽을 맛’ 같은 참회로써 우리는 새로운 나의 참 자아를 예수님과 함께 되찾은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우리 부활입니다.

 

부활한 우리 서로 축하합시다!


원문출처: 하부내포성지 다음카페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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