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수'란 무엇인가?(斬首, Decapitation, Beheading) (2부)

참수의 기술(Technology)

2020년 3월 23일 작성

단두대, 기요틴(Guillotine)

기요틴(Guillotine)은 한글로 기요틴, 단두대, 재단기, 잘라내는 기구 등의 의미가 있다. 타동사로 단두대로 (~의) 목을 자르다. (편도선을) 잘라내다, (종이, 금속 등을) 재단기로 베다 등의 의미도 있다. 또한 the guillotine라고 하면 그 자체로 참수형을 뜻한다. 애초에 프랑스어가 어원이라서 철자는 영어와 프랑스어가 같은데, 발음은 다르다. 강세는 공통으로 앞에 있으며, 영어는 러틴, 불어는 요틴이다.  


 
핼리팩스 지베트(교수대)의 복제품이 실제 처형장소였던 핼리팩스 성모마리아 성당의 지베트 거리(Gibbet Street)에 전시되어있다. (2008년 사진) 
By Paul Glazzard, CC BY-SA 2.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2556074


기요틴의 초기버전에는 [핼리팩스 교수대(gibbet)]와 스코틀랜드의 [메이든]이 포함된다. 
핼리팩스 교수대는 영국 웨스트요크셔(West Yorkshire)주에서 13세기(1286년)부터 17세기까지 사용되었다고. 메이든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Edinburgh)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 지베트(Gibbet)는 교수대를 뜻하지만 핼리팩스의 마을 이름이며, 메이든(Maiden)은 '처녀'란 뜻이면서 예전 스코틀랜드의 교수대란 뜻)

단두대(기요틴)의 근대적 형태는 프랑스 혁명 바로 직전에 고안되었는데, 사람의 훈련된 기술이 없이도 신속하고 고통없이 처형하려는 목적때문이었다. 그래서 단두대를 사용하는 참수형은 처형의 일반적인 방식이 되었다.

머리가 절단되었어도 10초 동안 의식상태를 유지한다는 식의 말은 현대에 들어와서 나온 이야기다. 일례로, 1905년 보우리우스 박사(Dr. Beaurieux)는 랑귀르(Languille)라는 죄수의 참수형을 목격하고 기록을 남겼는데, 머리가 절단되었어도 시각을 잠시나마 유지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프랑스인들은 처형식에 모여들었을 때는 일종의 엄격한 예식(a strict code of etiquette)을 목격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3개월 수감 끝에 단두대에서 처형된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 1768~1793, 혁명당시 정치가 장폴 마라의 암살자, 미모로 인해 '암살천사'라는 별명있음)의 처형식에서 조수 역할을 했던 르그로(Legros)는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진 이후에 처형당한 샤를로트가 눈을 깜빡이는지를 알아보려고 얼굴을 때렸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기요틴은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에서 사용되었으며, 비록 어떤 경우에는 총살형이 이용되기도 했지만 1970년대까지 평상시와 전쟁시의 모든 경우에 정상적인 판결에 따른 사형 집행의 방법으로 남아있었다. 프랑스는 1981년 사형제도를 폐지했다. 

 
1983년 개봉 프랑스 영화 당통(Danton). 프랑스 혁명에 이어 로베스삐에르는 공포정치를 실시하며 이에 대립하는 당통을 단두대로 처형한다. 제라드 드파르디외가 당통역을 맡았다. 

질로 폰테코르보(Gillo Pontecorvo) 감독의 영화 [알제리 전투] (The Battle Of Algiers, La Battaglia Di Algeri, 1966)에서 보이듯이, 프랑스가 통치하던 시절의 알제리에서도 기요틴이 사용되었다. 바티칸에서도 기요틴이 얼마 전까지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반입해온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1870년 경 교황은 그 단두대의 사용권할을 주장했으며, 교황청이 자기관할권 내의 사형을 폐지한 이후로는 여전히 사형제를 시행하는 경우를 비난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확실한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독일의 팔바일(Fallbeil, 단두대)

독일의 여러 주에서도 기요틴같이 생긴 장치로 팔바일(falling axe, 떨어지는 도끼)이란 단두대를 17~18세기에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서독에서 사형제가 폐지된 1949년 이전에는 단두대의 사용이 일반적인 처형 수단이었으며, 공산주의 국가 동독에서는 1966년까지 팔바일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나찌 독일(Nazi Germany)에서의 팔바일은 일반범죄자와 반역을 포함한 정치범에게도 적용되었다. 나찌에 대항하여 뮌헨 대학교 학생들과 지도교수가 구성한 비폭력 저항그룹 백장미단의 저항운동(White Rose Resistance Movement)은 1942년 결성되어 1943년 2월까지 전단을 만들어 뿌리는 일로 나치에 대항하다가 여선 번째 전단을 대학교에 뿌리던 숄 남매(Sophie & Hans Scholl)가 학교 경비에게 발각되면서 일원 전체가 사형당한 사건이었다. 이때도 회원들 모두가 참수형을 당했다. 

 
미하엘 베르호벤 슈미트 감독의 1982년작 [백장미](The White Rose)와 마크 로드문트 감독의 2005년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 (Sophie Scholl : The Final Days, Sophie Scholl - Die letzten Tage). 둘 다 독일영화이다.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단두대의 처형집행을 무조건적으로 실시한 건 아니었다. 가장 유명한 독일의 사형집행관 요한 라이히하르트(Johann Reichhart, 1893.4.29 ~ 1972.4.26)는 바이마르 공화국(1918~1933)의 초기에 사형을 집행하면서, 그 시대를 통틀어서 까다로운 절차를 전문적으로 유지할 것을 고집했다. 그러나 1933년부터 1945년 사이에는 약 16,500명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단두대로 처형되었다. 이 숫자에는 독일과 나치가 점령한 국가의 저항군들이 포함되어 있다. 저항군들은 일반 군대에 편성된 세력이 아니었기때문에, 일반 범죄자로 구분되었으며, 대체적으로 독일로 압송해와서 처형했고, 당시 참수형은 총살형에 비해서 불명예스러운 죽음으로 간주되었다.

참고로 요한 라이히하르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3,165명의 사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사형집행인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924년 집행관이 되어 바이마르 공화국과 독일 제3제국 치하에서 사형을 집행했다. 이 중 대부분이 1939년~45년에 집중되어 있으며, 스스로의 기록에 따르면 이 기간에만 2,876명의 사형이 집행되었고, 유명한 백장미단의 사형도 그가 집행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일은 나치가 망한 뒤에는 점령군 측에 고용되어 1946년 5월까지 나치 전범 156명을 처형했다는 사실이다. 

2020년 3월 23일 마감

참고자료: 위키피디아 영어 'Decapitation'(https://en.wikipedia.org/wiki/Decapitation) 외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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