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9일 성령강림 대축일 미사 강론
새로움, 조화, 그리고 선교
성령의 조력과 은총 없이는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성령강림대축일에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에 성령을 부어주신 사건을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체험합니다. 예루살렘의 다락방이 성령으로 가득찬 사건은 장차 온 세상으로 확산될 성령강림을 위한 출발점이 됩니다. 그것은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은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오순절이란 고대 이스라엘의 연중 순례 축제 중 하나입니다. 팔레스티나에서 밀의 추수가 끝나는 시기에 거행되던 추수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추석과도 같은 민족의 큰 명절인 것입니다. 탈출기 23장 16절에 보면 “너희는 밭에 씨를 뿌려 얻은 너희 노동의 맏물을 바치는 수확절을 지키고, 밭에서 너희 노동의 결실을 거두어들이는 연말에는 추수절을 지켜야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오래된 명절인 오순절에 이루어진 그 일은 아주 오래된 과거입니다. 그 2천년 전의 오래된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현장을 가깝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그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사도행전은 그 해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사도 2,1-11)
성령 강림
1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2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4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5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6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7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9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10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11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불꽃 모양의 혀들
위의 성경에서 보면, 사도들은 어느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거기서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 들여와 집 안을 가득 채운 소리입니다. 두 번째로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각 사도 위로 갈라져 내려앉은 “불꽃 모양의 혀들”입니다. 이 소리와 불꽃 모양의 혀들은, 성령께서 사도들을 외적으로만 아니라 내면의 깊은 곳, 즉 마음과 정신까지 모든 것을 사로잡으셨음을 드러내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표징입니다.
모든 것을 사로잡으셨기 때문에, 사도들은 저항할 수 없이 그 성령에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힘으로 놀라운 일을 벌이신 것입니다. 이를 두고 루카는 “성령께서 표헌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고 묘사한 것입니다.
이윽고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그곳에 모인 많은 이들이 제자들이 저마다 자신의 지방언어로 알아듣고 있는 현장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한국사람, 중국사람, 일본사람, 미국사람, 독일사람, 이탈리아 사람 등등이 저마다 자신들의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독어, 이탈리아어 등으로 알아듣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그것을 알아듣는 그 현장에서도 어리둥절하면서 놀랍고 신기한 상황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그것은 정말 어찌된 일인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토대로 해서 성령의 활동에 관련된 새가지 단어에 대해 묵상할 수 있습니다. ‘새로움’, ‘조화’, 선교‘가 그것입니다.
1. 새로움
새로움은 언제나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두려움을 품게 만드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관리되고 통제되는 상황에서 우리 계획과 확신과 취향에 따라 우리 삶을 구상합니다. 그렇게 우리 삶을 계획하고 설계할 때 우리는 안정감을 느낍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집니다. 우리는 어느 단계에까지 하느님을 따르고 영접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단계에까지’ 따른다는 것은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완전히 그 분께 맡기는 의지가 부족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매 순간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데 우리는 순간순간 주저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의 발걸음을 새로운 길로 인도하실까 봐 두려워합니다. 또한 당신의 지평을 향해 우리 자신을 열게 하시려고 제한되고 닫혀 있고 이기적인 우리의 지평 밖으로 우리를 나가게 하실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모든 구원의 역사를 보면, 하느님은 당신을 계시하실 때마다 당신 백성을 변화시키고 당신에게 전적인 신뢰를 두라고 요구하면서 새로움을 가져다주십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새로움을 가져오십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 모든 이들의 비웃음을 샀지만, 그 방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만을 믿고 고향을 등지고 떠났습니다. 모세는 파라오의 권세에 맞서면서 자유를 향해 백성을 이끌었습니다. 두려워하며 다락방에 숨어있던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갔습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신선함이 필요할 때나 싫증을 느낄 때마다 새로움을 찾지만, 이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삶에 가져오시는 그 새로움이야말로 우리에게 참되게 실현되는 것이고 참되게 기쁜 것이며, 참된 고요함이 담긴 선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선(善)만을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질문을 던져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이루어주시는 놀라운 일을 향해 열려있는가?”
“성령이 가져다주시는 새로움을 두려워하며 나 자신을 닫고 있는가?”
“하느님이 가져다주시는 새로움이 주는 새로운 길을 걷기 위해 용기를 낼 수 있는가?”
“자신을 방어한다는 핑계로, 새로움을 받아들일 능력을 잃은 쇠약한 틀에 갇힌 건 아닌가?”
2. 조화
겉으로 보기에 ‘성령’은 교회를 무질서하게 만드시는 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다양한 은사와 선물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활동 아래 이 모든 은사와 선물은 형언할 수 없는 풍요로움을 이루어줍니다. 성령은 일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치는 획일화와 다른 것입니다. 일치는 모든 것을 조화로 이끈다는 뜻입니다. 교회에서 성령이 이루시는 것이 조화입니다. 교부의 말씀을 인용해봅니다. “성령은 그 자체로 조화이십니다.” 저(Pope Francis)는 이 표현을 좋아합니다. 성령은 조화 자체이십니다. 그분만이 서로 다르고 다양하고 여럿이게 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일치시키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다르고 독특하고 차별화되면서 특권적으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 마음 속에서 조화로운 일치보다는 개별적인 배타성에 갇혀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간적 계획에 따라 일치를 이루고 싶어할 때, 우리는 어느새 전체를 획일화하고 단순한 일치를 선언하는 것만으로 일을 마무리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이끄심에 우리 자신을 내맡긴다면, 풍요롭고 서로 다르고 다양해도 결코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교회의 친교 안에서 다양성의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은사를 받고 직무를 수행하는 목자의 인도를 받으며 교회 안에서 함께 걸어가는 것에서 성령의 활동이 뚜렷이 드러납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성이며 모든 그리스도인, 모든 공동체 그리고 모든 단체가 지녀야하는 본질적 특성입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 줍니다. 함께 걷지 않고, 서로 평형을 이루며 길을 걷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회 공동체를 벗어난다면, 사도 요한이 그의 둘째 편지에서 경고한 것처럼, 우리는 그 안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과 일치할 수도 없게 됩니다.(2요한 9절 참조)
요한의 둘째서간(2요한) 9절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이제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온갖 형태의 배타주의를 극복하면서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조화에 열려있는가?”
“교회에서, 교회와 함께 생할하면서 나 자신을 성령의 이끄심에 내 맡기고 있는가?”
3. 선교
새로움과 조화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묵상해야 할 단어는 선교입니다. 옛 신학자들의 표현을 보면 “영혼은 돛단배에 비유할 수 있고, 성령은 배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돛을 부풀리는 바람에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선물은 바람의 밀어붙임과 추진력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교회 선교의 원동력, ‘성령’
실제로 성령의 조력과 은총이 없다면 우리는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성령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십니다. 또한 교회가 영지주의적 성향에 빠지거나 자신의 울타리에 갇혀 자기 신원만 보증하는 삶에 빠져들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아가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고 증거하며, 신앙의 기쁨과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오는 기쁨을 나누도록 부추기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교회 선교의 원동력입니다.
2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사건은 아주 먼 옛날의 일이 아닙니다. 그 사건의 현장에 우리는 갈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이루어진 성령강림 사건은 하나의 시작점, 계속 이어가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선물이 모든 이에게 전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
‘보호자’ 성령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 곳곳을 누빌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성령은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기 위해 삶의 변두리까지 찾아가도록 독려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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