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18일 성령강림 대축일 전날, 여러 교회 운동단체와의 만남에서 하신 말씀


삶의 변두리

걸인의 손에 당신의 손이 닿아도 괜찮습니까?


  

 

교회는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곳이 삶의 변두리라면 어디든 가리지 말고 그곳을 향해 가야 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으로 가라! 그곳으로 나가라! 복음을 선포해라! 복음을 증거해라!’(마르 16,15)  그러다 사고라도 당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자기 자신 안에 갇혀 병들어 있는 교회보다는 사고를 무릅쓰는 교회, 사고를 당하는 교회가 수천 배 더 좋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요한묵시록에는 무척 아름다운 장면이 하나 나옵니다. 거기에는 우리 마음에 들어오기 위해 그 문 앞에 서서 애타게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묵시 3,20).

 

묵시 3,20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묵시록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핵심메시지입니다. 이 순간 우리는 자문합니다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몇 번이나 들어오실까? 그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몇 번이나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까?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위해 그분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시도록 몇 번이나 문을 닫아걸었나? 무엇 때문에 자유로운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죄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인간의 틀에 갇혀 지내려 하는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은 매우 중요합니다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신앙은 예수님과이 만남이고,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충돌의 문화, 분열의 문화,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없는 것을 가차없이 버리는 폐기의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백성의 지혜를 대표하는 노인에 대해서, 또 어린이에 대해서 생각해보라고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폐기의 문화에서 이들은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가치의 기준과 판단이 위기를 맞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으로 만남의 문화’, 우정의 문화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형제자매를 만나고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며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어느 면에서 세상 사람 모두가 우리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하느님의 모상이며 자녀입니다. 우리는 정체성을 간직한 채 모든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과의 만남도 아주 중요합니다


가난한 사람과의 만남도 아주 중요합니다. 밖으로 나가면 우리는 곧바로 가난과 마주치게 됩니다.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죽었다는 게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 오늘날입니다. 이것은 무척이나 가슴아픈 일입니다. 오늘날 대표적인 뉴스거리는 어쩌면 추문입니다. 추문이 뉴스거리가 되는 세상인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수많은 어린아이의 이야기는 뉴스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엄청 심각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 앞에서 침묵해서는 안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며 침묵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격식을 따지며 딱딱하게 구는 그리스도인, 차를 마시면서 신학적인 이야기만 즐기는 오직 학문적이고 만사태평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용기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 거리에서 걸인들이 자선을 청하며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걸인의 손에 당신의 손이 닿아도 괜찮습니까? 아니면 그게 싫어서 바닥에 돈을 던집니까? 이 질문의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만지는 것!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그들의 고통을 우리가 짊어지는 것을 문제삼는 것입니다.

 

핵심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난한 사회적 철학적 문학적 범주가 아니라 신학적 범주의 일입니다. 가난은 일차적으로 신학적 범주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 곧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와 함께 걷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고 가난하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드러난 가난, 하느님의 아드님을 강생(降生)의 신비로 우리에게 모셔다 준 가난,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난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가난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그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향해 나아간다면 무언가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곧 주님의 가난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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