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사

제2장. 사도 시대의 그리스도교.  3.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시련


3.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시련


사도시대에는 유다 민족주의가 극렬해지고 있었다. 민족주의의 창궐은 세계 공동체를 지향하는 유다계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은 동족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을 심하게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인 (小) 야고보의 순교(62년)와 예루살렘 함락(70년)은 유다교와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영향력을 약화하거나 상실하게 하였다.



 Saint James the Just


여기서 잠깐 예루살렘 교회 1대 지도자  (小)야고보에 대해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알패오의 아들이다. 사도요한의 형이며 제배대오의 아들인 (大) 야고보와 동명이인이다. '야고보'는 '발꿈치를 잡다'는 뜻이라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小)야고보는 그를 시기하고 경계하던 바리사이파에 의해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바리사이파는 부활절에 야고보를 강제로 끌어내어 예루살렘 성전으로 끌고 가 배교를 강요하다가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게 한 다음 돌로 쳐죽였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는 네로의 박해로 총독 안나스의 손에 순교당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아무튼 이 사건은 AD 62년의 일이다. 그런데 이  (小)야고보는 신약성서 '야고보서'의 저자이며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와 같은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같은 인물로 동일시하고 있단다. 


즉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의인 야고보(Saint James the Just, 혹은 James the Just), 예루살렘의 야고보(James of Jerusalem), 하느님의 형제 야고보(James Adelphotheos), 야고보, 주의 형제(James, the Brother of the Lord)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첫번째 예루살렘의 주교이며 루카복음서 10,1~20에서 언급된 70인 사도 중 첫번째 사람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리스도교는 이후 바오로 사도의 선교로 이방인 사이에 점차 확산되어 유다교적 유대 紐帶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 사이의 대립은 피할 수가 없었다.


⑴ 교회 내분


① 율법논쟁

49년에 교회 내분을 보여주는 사건, 즉 예루살렘 사도회의와 안티오키아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일부 유다계 그리스도인이 이방계 그리스도인에게 모세 율법, 특히 할례 割禮를 강요한 데서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유다 민족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는데, 유다인 입장에서 보자면, 그리스도교가 아직 유다교에 속한 것으로 생각하고 간주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할례 받지 않은 이를 교회에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관습적 거부감이 존재했고 그것은 유다교에 반역하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유다 민족주의의 압력에 굴복한 일부 유다계 그리스도인이 그 증표로 할례를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개혁가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가 이스라엘 국가의 세속적 목적과 연결될 위험을 깨달았다. 할례의 의무화에 대한 요구를 단호히 배격한 것이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예루살렘 사도들과 원로들과 함께 회의를 열어 이에 관해 논의하였고, 야고보는 절충안으로 노아 Noa 계명, 즉 우상에 바쳤던 음식과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 음란한 행동을 금하는 윤리 계명★만은 준수하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교회의 내분은 이후에 베드로가 안티오키아에 들려 바오로와 논쟁한 모습에서 심화되었다.


★ 대홍수의 주인공 노아는 최고의 의로운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는 의로움으로 단죄받은 세상의 파멸에서 화를 면했고, 이 땅과 주민들을 하느님과 화해시킬 수 있었다. 제관계 전승은 이 화해 속에서 노아의 후손 모두에게 미치는 범우주적인 계약을 보았다. 



② 이단 운동

70년 함락 이후 예루살렘에는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 이외에 다른 유다인 공동체가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전례를 수용하면서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실천하였다. 또한 정통 유다교와도 다른 교리의 종교적 행사를 거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다계 그리스도교 또는 유다교 이단은 주로 요르단강 서안지방의 에비온파 Ebionism와 엘케사이파 Elkesaism, 소아시아 지역의 니콜라오파 Nicolaitans와 케린투스 Kerintus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들 특성은 우선 그리스도를 예언자나 위대한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그의 신성을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구원론적 의미를 배척하였다. 또한 바오로 사상과 삼위일체 하느님을 부인하며 윤리적 자유주의를 표방하였고, 물질적 메시아 사상 등을 주장하였다.


⑵ 교회 수난


① 유다인의 탄압

유다교 종파 중에서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몇 차례 충돌하였다. 우선 사두가이파는 지배계층으로서 사도들을 시기하고 감옥에 가두었으며, 또 정치적 목적으로 사도들을 처형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바리사이파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복잡미묘한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히브리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호의적이었지만, 그리스계 그리스도인에게는 적의를 보였다. 이는 그리스계가 성전이나 유다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에 관심이 없는 반면, 히브리계는 성전을 중요시하고 모세율법을 준수하는 유다 사상에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② 로마인의 탄압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로마제국의 마찰은 넓은 의미로 보아 황제 클라우디우스 Claudius (재위 41~54)의 유다인 로마 추방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로마 제국에 일종의 페스트를 퍼뜨린다는 이유로, 시리아에 있는 동포 유다인을 초대하지 못하도록 알렉산드리아의 유다인들에게 특명을 하달했다. 


또한 64년 7월 16일, 로마 폭군 네로 Nero (재위 54~68)는 로마시 일부 지역을 파괴하기 위해 그가 방화하였다는 소문을 막으려고 이 범죄를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전가시켰다. 이것이 통용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 로마 문화와는 다른 그리스도교만의 특수한 생활 습관을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미시아누스 Domitianus (재위 81~96) 황제 때까지 박해는 계속되었다. 


55년간 계속된 그리스도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교회에 대한 박해는 개인적 목적을 성취하려는 폭군의 전횡적 專橫的 행동의 소산이었지, 법적 근거는 없었다. 두 번째로, 박해가 벌어진 지역은 제한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박해는 로마와 소아시아, 팔레스티나 등의 소규모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세 번째로 박해는 로마 제국의 황제나 지방의 통치자들이 반 反 그리스도교적 조처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사회의 혼란을 막으려고 정책적인 결정을 내린 것에 불과하였다. 네 번째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로마 정부와 유다인의 마찰로 인한 부수적 결과였다.



 

도미티아누스 혹은 도미시아누스 황제

AD 51년에 태어나서 30세에 로마제국 11번째 황제가 되었다. 그의 나이 45세가 되던 해인 96년에 살해당했다. 이 자는 자신을 우상화하면서 '주님이자 하느님'(dominus et deus)라고 부르게 강요했다. 많은 이들의 반발 속에서 특히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의 '예수님이 주님이자 하느님'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케리그마에 반대되는 상황에서 '황제우상화'를 반대하는 주요세력으로 몰아 심한 탄압을 가했다. 이후 그는 근위대장과 궁정관리 그리고 마누라(도미티나 롱기나)의 음모로 살해당했다.  이후 로마제국은 오현제의 시대로 들어섰다. 한편 96년은 중국은 후한의 시대이고,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가 삼국을 이루던 시대였다. 





세계교회사(가톨릭교리신학원, 이영춘, 2003 초판)

1장. 역사학의 일반적 개념

2장. 사도시대의 그리스도교

3장. 사도시대 이후의 그리스도교

4장. 로마제국시대의 그리스도교

5장. 고대에서 중세로의 과도기

6장. 중세 전기의 그리스도교

7장. 중세 후기의 그리스도교

8장. 중세에서 종교개혁으로의 과도기

9장. 종교개혁시대

10장. 종교개혁 이후의 가톨릭교회

11장. 현대 가톨릭교회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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