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로마제국 시대의 그리스도교(서기 300~450년)



1.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리스도교



“이제부터 모든 로마인은 원하는 방식으로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다. 

로마인이 믿는 종교는 무엇이든 존중을 받는다.”

- 밀라노 칙령 -



(1) 콘스탄티누스의 전환


① 콘스탄티누스의 등장


 

콘스탄티누스 1세(272~337).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여 박해를 끝내고 정식종교로 승인했다. 압류재산을 돌려주고 국가 보상정책도 정했다. 325년에는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해 기독교 발전에도 기여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Constantius Chlorus와 헬레나 Hellena의 아들로 285년경에 나이수스 Naissus(세르비아의 Nisch)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니코메디아에 있는 디오클레시아누스의 궁전에서 보낸다. 


교재에는 285년 태어났다고 되어 있지만,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인터넷의 유력 사이트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출생연도를 272년 혹은 273년으로 기술하고 있다. 아무래도 272년이 정설로 보인다.  

위키백과. 콘스탄티누스 1세   네이버캐스트 새로운 로마를 세운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가 제국을 4분 통치하면서 293년에 로마제국 서부지역의 제2정제 正帝 Augustus 막시미아누스 치하에서 제2부제 副帝, Caesar로 임명되어 골 지방과 브리타니아 지방의 통치자가 되었다. 


하지만 디오클레시아누스가 은퇴하면서 예상과 달리 자기 아버지가 아닌 젊은 갈레리우스를 제1정제로 임명하자 니코메디아 황궁을 빠져나와 갈리아에 있는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리고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다음 해에 사망하자 갈리아의 군대들은 306년 7월 25일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선포하였다. 그 후 콘스탄티누스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강력한 군사력으로 로마제국의 서부지역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당시 이탈리아와 아프라키를 지배하고 있던 막센티우스와의 정권투쟁을 계획하였다. 그는 막센티우스를 그리스도교의 박해자가 아니라 서부지역의 폭군으로 규정하여 주민에게 자유를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이탈리아로 출정하였다. 하지만 그는 로마 티베르 Tiber 강의 밀비오 Milvio 교橋에서 막강한 상대방 군대와 마주쳤고, 자신의 군대로는 로마를 점령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전투 전에 발현發顯 또는 꿈을 통하여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군대는 그리스도교 신의 가호와 구원의 표징을 받았다. 그로 인해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 승리를 바탕으로 그는 서부유럽 전체를 차지한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고, 세계적인 지도자가 되는 첫 단계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 312년 10월 28일 로마의 원로원은 콘스탄티누스를 최고의 통치자로 추대하였고,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의 신인 그리스도를 보호신으로 공경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그리스도교로 전환한 것은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는 길을 연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대승전과 그리스도교로의 전환에 대해서는 상이한 기록과 견해에 대한 몇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문제는 밀비오교 전투 직전에 꾼 콘스탄티누스의 꿈이 진실된 것인지의 여부이다. 둘째 문제는 콘스탄티누스의 전환에 대한 동기를 종교적 체험의 영적 결과로 보기보다는 순전히 황제의 정치적 책략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의 내적 변화는 매우 긍정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 이유는 황제가 일신교적인 미트라 Mitra 태양신의 신도로서 어느정도 종교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가 참된 종교라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또한 그가 접하고 있는 상황들, 특히 그의 가정 분위기가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이었기에 그의 그리스도교로의 전환은 내적으로 준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성태,『세계교회사Ⅰ』, 218~222쪽 참조. 




(2) 국교의 성립


① 로마 황제의 친 그리스도교 정책


밀비오교 전투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에서 두 달동안 지낸 다음 313년 봄에 밀라노로 갔다. 거기서 그는 동부지역 황제 중 하나인 리치니우스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공동으로 ‘밀라노 관용령’이라는 교서를 선포하였다. 이것은 동부 로마제국의 집정관들에게 제국 내의 여러 종교에 부여된 기존권을 그리스도교에도 승인하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관용을 베풀도록 지시하는 것이었다. 이후 리치니우스가 동부지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면서 로마지역에서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완전히 종식되었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재위 중, 그리스도교에 물질적 특혜와 법적 특권을 부여하였다. 313년 그는 로마주교, 즉 교황에게 라테라노 Laterano 궁전을 기부하였고, 후에 이곳에 콘스탄티누스 대성당(지금의 죠반니 대성당)이 건립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베드로 대성당, 예루살렘의 무덤 성당, 베들레햄의 예수성탄 성당이 건립되었다.



 

라테라노 궁전과 콘스탄티누스 대성당(현 죠반니 대성당)의 모습. '라테라노'라는 지명은 로마제국 초기 라테라누스 가문의 저택에서 유래한다. 밀비우스교 전투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는 이 저택을 소유했다가 교황에게 기증하였고, 궁전 옆에는 대성당이 세워졌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봉헌보다 10여년 이상 빠르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이교도 제관들에게 부여했던 면세특권을 그리스도 성직자에게도 부여하였고, 특히 주교에게 국가의 사법권을 이양하였다. 따라서 살인자를 제외한 원고와 피고는 주교에게 그들의 소송을 제기하여 중재와 판결을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밖에도 주일과 교회 축일을 공휴일로 규정하였고, 몰수된 교회의 재산에 대한 반환조치를 취하였다. 더 나아가 321년에는 교회가 상속권을 갖는 법을 제정하여 신자들이 그들의 재산을 교회에 기증할 수 있게 하였다. 


② 교회의 발전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여러 황제가 교회정책에 대한 상이한 태도를 보이는 가운데, 테오도시우스 1세 Theodosius Ⅰ(재위 379~395)는 친 그리스도교 정책의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380년 2월에 황제는 「가톨릭 신앙에 대한 칙령」(De fide catholica)을 반포하여 동부지역의 국민들에게 니케아 공의회의 전통신앙을 받아들이도록 명하였다. 황제는 그리스도교 이단자들에게는 교회 설립과 종교 행사를 금지시켰고, 정통교회로 돌아오도록 강권을 발동하였다. 392년에는 또 하나의 법령을 반포하여, 모든 그리스도교 이단의 가르침을 대역죄에 해당하는 벌금형에 처하였고, 이교 우상숭배의 종교행사는 모두 중형 重刑에 처하는 금령을 내렸다. 이러한 反이교정책과 親그리스도교 정책 이후 이교 신앙은 국민의 공적 생활에서 점차 사라졌고,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교회가 성장하고 대중화된 이면에는 문제점들도 커지고 있었다. 그것은 황제가 교회에 정치적으로 관여함으로써 교회의 세속화를 가져온 황제-교황주의 Caearo-Papism로서, 그 실질적 내면은 교권의 약화를 예기하는 것이었다.

 


제4장 로마제국시대의 그리스도교  1.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리스도교 (끝)



세계교회사(가톨릭교리신학원, 이영춘, 2003 초판)

1장. 역사학의 일반적 개념

2장. 사도시대의 그리스도교

3장. 사도시대 이후의 그리스도교

4장. 로마제국시대의 그리스도교

5장. 고대에서 중세로의 과도기

6장. 중세 전기의 그리스도교

7장. 중세 후기의 그리스도교

8장. 중세에서 종교개혁으로의 과도기

9장. 종교개혁시대

10장. 종교개혁 이후의 가톨릭교회

11장. 현대 가톨릭교회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