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3일(토)

가톨릭성당 미사 강론



 성경을 듣는 시대가 아니고 읽는 시대에 와있습니다.

편지 안에서 갈 길과 지표를 찾아야

오소서 성령님 (교중. 새로 나게 하소서)
오늘은 크리스토소모 축일입니다. 흔히 금구(金口), 황금의 입이라고 하지요. 그만큼 설교를 잘하신 분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코린토 1서의 말씀입니다. 

 제1독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0,14-22
14 사랑하는 여러분, 우상 숭배를 멀리하십시오. 15 나는 여러분을 슬기로운 사람으로 여겨 말합니다. 내가 하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16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17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18 저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희생 제물을 먹는 이들은 모두 제단에 동참하는 이들이 아닙니까? 
19 그러니 내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이 무엇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우상이 무엇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20 아닙니다. 사람들이 바치는 제물은 하느님이 아니라 마귀들에게 바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마귀들과 상종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21 여러분이 주님의 잔도 마시고 마귀들의 잔도 마실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식탁에도 참여하고 마귀들의 식탁에도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22 우리가 주님을 질투하시게 하려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보다 강하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코린토 교회에 보낸 편지죠. 물론 다른 공동체들도 그 당시 많은 문제 있었고, 바오로 사도는 그런 공동체들에게 여러 가르침과 지침을 편지로 써서 보냈습니다. 바오로사도 서간은 대부분 그런 내용입니다. 저는 오늘날에 바오로 사도가 그런 편지를 써서 보냈다면 어떤 내용으로 써서 보냈을까 생각해봅니다. 코린토에 이런 저런 내용 써서 보냈는데, 우리에겐 어떤 내용을 써서 보냈을까 하는 것이죠. 아마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아주아주 너무너무 겁나게 잘 하고 있다고 간단하게 써서 보냈을 수도 있을겁니다. 

하지만 한 두가지 써서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초대 교회공동체에서 그들의 가르침, 그들은 복음을 통해서 많이 듣고 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 그리고 사도들이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죠. 그런데 사실 그들 공동체와 우리들의 공동체는 여러가지로 차이가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도 그렇지만, 사는 시대가 다르고, 종자 자체가 다릅니다. 그러나 또 비슷한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편지를읽으면서 우리는그들에게 보냈던 편지들안에서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말씀들을 발견할 수 있기에 갈 길과 지표를 그 편지들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 모든 것을 성경이 다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데 왜 우리시대 모든 걸 설명할 수 없을까요? 그건 당연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 시대, 그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듣는 시대가 아니고 읽는 시대에 와있습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은 성경에 비추어, 성경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것입니다. 이 공동체에도 성경말씀 안에서 여러가지 것들을 발견해야 합니다.

오늘 학생들 체육대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침에 강복을 주러 나왔더니, 학생들 백여명이 나와있을 줄 알았더니 스무명 정도 와있더군요. 이것은 시골 전체 백명 되는 교회의 학생들 숫자죠. 그래서 제가 보좌신부님께 어떻게 갈거냐 하니 본당 봉고차 한대 쓰고, 나머지 시내버스로 가겠다고 합니다. 참 기특합니다. 학생들이 시내버스를 이용해서 가겠다는 것 기특합니다. 여러분 그렇죠. 여러분도 성지순례 갈 때, 신부님 시내버스타고 갔다 올게요.해미성지 가는데, 시내버스 타고 간다고 그러죠.  

우리 본당에는 젊은이들이 필요없나요? 학생부나 중고등부가 필요없는 것인가요? 좀 바뀌어야 되겠죠. 본당에 더 큰 차를 사야,  버스 정도 사야, 보좌신부와 저랑 둘이서 행사 있을 때마다 짐을 나르고 그러면, 좋겠죠? 본당신부와 보좌신부가 알아서 했으면 좋겠다. 이런 결심들을 새롭게 하고 하는 중입니다. 잘 생각했죠. 앞으로 본당에 일이있을 때, 저와 보좌신부가 더 열심히 해야 겠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 본당에 대해 편지를 쓴다면 아주 적극적인 무관심에 대해서 쓰지 않을까 싶습니다. (끝)

2014-9-13(토) 오전 10:30.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기념일.

방경석 알로이시오 주임신부 @대전교구 전민동 성당.


이 글은 강론 말씀을 필자가 재구성한 것이기에 실제 말씀과 다를 수 있습니다.

또한 본문 내의 성경구절은 글의 구성을 위해 삽입된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aint John Chrysosto, 344/354?-407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활동한 총대주교, 교회학자, 교부. 같은 이름으로 금구, 얀, 요안네스, 요한 금구, 요한금구,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크리소스또모, 크리소스또무스, 크리소스똠, 크리소스토무스, 크리소스톰, 한스, 후안 등이 있다. 

 

<출처. 매일미사 2014년 9월 13일>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4세기 중반 터키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나 독실한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았다. 수도자들과 함께 엄격한 극기 생활을 하던 그는 또한 은수자를 본받아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의 시간을 보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자선과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사제가 되어 주로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 임명된 그는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악습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지어 황제나 황후에게도 잘못된 점을 거침없이 지적하였다. 그 때문에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유배되었다가 5세기 초에 선종하였다. 탁월한 설교로 ‘금구’(金口: 황금의 입)라고도 불리는 그는 설교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오늘의 묵상... 오늘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금구’(金口)라는 별칭이 붙었듯, 성인은 교회 역사상 으뜸으로 꼽히는 설교자입니다. 그의 설교가 지닌 표현의 탁월성과 내용의 뛰어남에 대해, 그리스도교에 비판적 시각을 가졌던 18세기 영국의 역사가 기번도 그의 기념비적 저술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다음과 같이 찬탄합니다. “이 그리스도교 웅변가의 우아하고 풍부한 어휘를 자유롭게 다루는 솜씨, 수사학과 철학에서 얻는 장점을 감출 줄 아는 사려 깊음, 아무리 익숙한 주제라도 다양하게 그려 내는 은유와 비유, 끊임없이 쏟아 내는 개념과 이미지들, 미덕을 위해서만 불태우는 능력, 진실과 극적인 재현 능력으로 악덕의 어리석음뿐 아니라 비열함까지 파헤치는 재능에 대해서는 모든 비평가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한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위대한 설교자로서 자신의 수사학이라는 학식의 그릇에 하느님의 말씀을 조금도 왜곡하거나 희석하지 않고 온전히 담았습니다. 그의 설교는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크나큰 위안을 주었으며, 부자와 권력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며 거침없이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의 삶 또한 자신의 설교 내용에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권력의 중심지에서 주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재능에 반해 발탁한 왕실에조차 비위를 맞추는 법이 없었고, 권력자들의 부패와 위선적 신앙을 끊임없이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음모에 밀려 쫓겨나고 유배 생활을 하였지만 결코 굴하지 않는 가운데 주님과 교회에 끝까지 충실했습니다. 그가 진정 위대한 설교자였던 것은 뛰어난 언변만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설교 한 구절을 마음에 새기며 그의 모범을 기려 봅니다. 


“나는 진정 내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성경 말씀을 굳게 붙들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지팡이요 보호자이며 잔잔한 항구입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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