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순교자 대축일

경축이동 2014.7.6 연중 제14주일


자격미달의 후배가 대 선배님을 흠모하는 날 

감춤과 드러남의 역설, 그리고 김대건

 



어제 7월 5일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김대건 신부님의 축일이었습니다. 우리가 9월 20일에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 대축일을 지내는데, 사실상 순교 성인으로서의 김대건 신부님의 축일이 그 9월 20일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103위 모든 순교성인들의 본 축일이 9월20일이지만, 우리 한국교회에서만큼은 김대건 신부님 한 분의 축일을 7월 5일에 별도로 지냅니다. 그 이유는 특별합니다. 김대건 신부님 개인을 더욱 추앙하기 위한 때문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한국의 모든 성직자들에 관계 지어 7월 5일을 특별한 날로 삼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여, 7월 5일은 ‘한국의 성직자들의 수호자 축일’이라 합니다. 이에 대한 의의를 강조하자면, 한국의 모든 성직자들이 김대건 신부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특별히 다짐하는 날이 7월 5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7월 5일을 더욱 교우들과 함께 기억하기 위해서 오늘 주일에 경축 이동하여 지내게 됩니다.

 

저도 한 사제로서 수호자이신 김대건 신부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오늘 새삼스럽게 저 자신에게 다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모든 사제들은 김대건 신부님을 ‘맏형’이라 부릅니다. 한국의 사제들 중에 첫 번째로 사제 되신 분이 그분이시라는 뜻이지요. 한국 사람으로서 사제 된 사람들의 명단이 수록된 연명부가 책으로 발간되어 있는데, 거길 보면 김대건 신부님을 1번으로 하고 저 윤종관은 834번인데, 현재까지 한국인 사제의 숫자가 6천 명 가까이 이르렀으므로 김대건 신부님의 현재 살아있는 아우가 수천 명 되는 셈이지요. 그 수천 명의 사제들이 김대건 신부님처럼 살아야겠다고 오늘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수천 명 아우 신부들이 김대건 신부님을 과연 ‘맏형님’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는가 하고 자신들에게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저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면 솔직히 말하여 자격 미달이라고 부끄러이 고백해야 합니다. 제가 자격 미달인 까닭을 꼽아보자면 실로 여러 가지입니다. 그 자격 미달의 이유를 몇 가지만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저는 김대건 형님처럼 고생을 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김대건 형님께서는 저와 비슷한 나이에 신학생으로 선발 되셨지요. 그분은 15살에, 저는 13살에 신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신학생으로 선발 된 후 수 천리를 걸어서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저는 소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이곳 충청도에서 서울까지 기차 타고 가서 입학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여 그분은 10년 만에 신품을 받았는데, 저는 그보다 좀 더 시간 걸려서 15년 만에 신품을 받았지만, 저는 매년 두 번 이상 방학으로 집에 와서 부모님과 지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학생은 10년 동안 부모님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김대건 신학생은 그 10년 사이에 아버지가 사형 당하시고 어머니는 거지가 되어서 떠돌아다니는 분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주시는 따뜻한 밥 한 숟갈도 잡숴보지 못한 그분이었지만, 저는 사제 되어서도 수시로 부모님께서 주시는 따듯한 밥도 먹고 돈도 많이 타다 썼습니다.

 

김대건 형님처럼 고생하지도 않은 점에서 제가 그분의 아우로서 자격 미달인 두 번째 이유는, 저 자신의 정신 상태가 도저히 그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본질적인 자격 미달이지요. 이 본질적 자격 미달의 까닭이 또한 많지만 딱 하나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사제 되어서 해군의 군종신부로 지낸 일이 있지만 바다를 무서워합니다. 배를 타기가 겁납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은 서해 바다를 몇 번이나 가로질러 가신 분입니다. 저는 큰 군함을 타고 항해하는 것을 무서워하는 겁쟁이인데, 김대건 신부님은 작은 목선으로 한강을 출발하여 15일 동안 서해 바다의 험한 풍랑을 건너 상하이에 가셨다가 주교님과 선배 신부님을 모시고 두 달 동안 표류와 죽을 고비를 넘어 강경 포구에 돌아오신 분이십니다. 저 자신과 김대건 신부님을 비교하기 위해서 그분이 겪었던 일을 친히 쓰신 편지에서 읽어보겠습니다. 이 편지는 천신만고로 만주를 거쳐 육로로 서울에 도착한 당시의 김대건 부제가 주교님과 선교 사제를 바닷길로 모셔오기까지의 경위를 보고서로 쓴 편지의 일부입니다.

 

[…(전략) 서울에 다다라 (…) 필요한 교우 이외에는 제가 온 것을 통 알리지 아니하였고 어머니에게조차 제 입경(入京)을 알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 공경하올 페레올 주교님과 선교사제들을 영접할 만반 준비를 하고 서울에 집도 한 채 사놓았고 또 1백 46량을 주고 배도 한 척 장만하였으며 떠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우 사공들이 듣고 겁을 집어먹을까 두려워 어디로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긴 저들은 무서워할 만도 합니다. 대저 그들은 한 번도 먼 바다로 나가 본 적이 없고 또 대부분은 배질을 해 본 일조차 없었던 까닭입니다. (…) 모든 준비를 갖춘 다음 교우 열한 명을 데리고 배에 올랐는데 그 중에 네 명은 사공이었고 나머지는 바다를 본 일조차 없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비밀리 또한 신속히 하느라고 좋은 사공을 구할 수도 없고 다른 물건을 장만할 수도 없었으며 심지어 필요한 것까지도 버렸습니다.

이리하여 2월 24일에 출범하여 바다로 나갔습니다. 바다를 보고 교우들은 이상히 여기며 서로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아무 말도 묻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내게는 감히 묻지 못하였습니다.

순풍을 만나 하루를 항해한 후 무서운 폭풍우가 우리를 엄습하여 밤낮 사흘 동안 그치지 아니하니 들리는 말에는 이 통에 강남배 30여 척이 파선되었다 합니다. 풍파가 심하여지니 우리 배는 물결에 밀려 무섭게 까불어 거의 가라앉을 것 같았습니다. 배가 너무 작고 먼 바다에 나가는 것이 아닌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우리 배 뒤에 달고 오던 종선(從船)을 떼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위험이 급박하여 오므로 돛대 두 개를 베어 버리고 식량을 바다에 내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배가 약간 가벼워져서 세찬 바람에 불려 산더미 같은 물결 사이로 나뭇잎처럼 밀려 다녔습니다. 사흘 동안을 굶고 나니 교우들은 몹시 쇠약하여져서 이제는 살아날 희망을 잃고 슬퍼하며 아이고 이젠 다 죽었구나! 하고 울며 부르짖었습니다. 나는 천주 다음으로 예로부터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성모 마이아의 상본을 그들에게 보이며 “두려워하지 마시오. 자,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 곁에 계셔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말과 또 이와 비슷한 말을 하여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을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나도 병이 들었습니다만 억지로 음식을 먹고 일을 하며 겁을 밖에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사공 우두머리로 온 사람이 미리부터 세례 예비를 하던 이였기에 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얼마 아니하여 키가 성난 물결에 부러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돛을 함께 묶어서 물속에 집어넣고 바(網)로 붙잡아 매놓았었습니다. 그러나 곧 바가 끊어져 돛이 떨어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리를 나무와 함께 묶어서 물결과 싸워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끊어져 나가니 이제는 사람의 도움은 바랄 수 없으므로 다만 천주와 동정 성모 마리아께 의탁하면서 기도를 드리고 잠을 자기 시작하였습니다. (… 이하 생략)]

 

김대건 형님(당시는 부제)의 이어지는 편지를 이 강론 원고에 지면상 다 옮길 수가 없습니다만, 그분의 이러한 모험적 항해는 그 후로 한 주간 이상의 표류와 해적의 위협을 거듭 당하다가 그분의 지략으로 지나는 중국 선박의 도움을 받아 중국 우송(吳淞)이라는 포구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로 강제 송환 조치를 당할 번 하였는데 김대건 부제의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외교수완으로 상하이에 도착하게 됩니다. 거기서 다른 선교사 신부를 만나 배 안에 모시고 김 부제부터 먼저 고해성사를 보고 다른 교우들도 고해성사와 감사의 미사를 함께 봉헌합니다. 그런 후에 이제 조선 교구의 제3대 교구장으로 부임하실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나중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주교 되심)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몇 주간 지나 8월 17일에(1845년) 상하이 근교 긴가항에서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 주교님에 의해 사제품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8월 말에 교구장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님을 비밀리에 그 배에 모시고 조선을 향해 출범하게 됩니다.

 

그렇게 주교님 모시고 귀국하던 항해는 앞서 중국으로 건너오던 항해보다 더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그 겪은 고난이란 배와 함께 모두 바다에 수장 될 정도로 연속된 폭풍 속의 항해였습니다. 계절적으로 연거푸 몰려오는 태풍을 맞이하는 항해였습니다. 그래서 목적지로 삼았던 곳으로부터 1천리도 더 떨어진 제주도에까지 표류하다가 10월 12일에 강경 포구에 도착합니다. 상하이를 출발한지 한 달 반 만에 조선 땅에 상륙한 것입니다.

 

강경에 도착한 김대건 신부님은 교구장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과 함께 강경에서 비밀리 신앙생활 하던 구순오라는 신자 집에 유숙하며 조선 땅에서의 첫 미사를 봉헌하셨지요. 그때의 미사는 사실상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님의 착좌미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을 페레올 주교님은 편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사공 두 사람이 우리를 등에 업어서 순교자들의 땅에 내려주었습니다. 내 취임은 그리 찬란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모든 것을 은밀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구장 주교님을 착좌하시게 해드린 김대건 신부님은 또 바삐 서울로 올라가게 됩니다. 페레올 주교님이 한동안 강경에 머물러 계시며 교구장직을 수행하시게 되었으니 강경의 구순오 댁은 조선교구의 임시 교구청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동안에 김대건 신부님은 서울에 올라가 교구장님을 모실 준비를 하게 되었고, 다블뤼 신부님은 부여군 은산면(당시 공동면)의 산골 거전리 교우촌에 가서 조선말을 익히게 됩니다. 몇 개월 후 교구장 주교님께서 서울에 올라가시고 이어서 김대건 신부님께 다른 선교사 신부들이 바닷길로 조선에 입국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명을 내리게 됩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주교님의 명을 받들어 황해도 앞바다에 고기잡이로 내왕하는 중국 어선들을 통하여 항해의 가능성을 타진하러 갔다가 관헌들에게 체포됩니다. 모진 고문과 문초를 받으며 해주에서 서울로 압송되고 끝내 사형 언도를 받아 1846년 9월 16일에 서울 한강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장렬하게 치명하십니다. 사제 되어 1년 만에 생을 마감하신 것이지요.

 

이러한 김대건 신부님의 짧은 사제 생활과 후배인 저 자신의 삶을 비교하면 그분의 아우로서 제가 자격 미달인 두 번째 이유에서 한없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바다를 무서워하는 저는 김대건 신부님의 그 용감함 앞에 부끄럽지만 더욱 그분을 감히 우러를 수조차 없는 까닭이 있습니다. 저는 해군의 거대한 함정을 타고서도 불안해 하지만, 김대건 신부님은 아주 조그만 조각배 목선으로 서해 바다를 풍랑 속에 가로지른 분입니다. 그분은 그 위험한 풍랑의 바다에서 함께 승선한 교우들을 격려하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도로써 신앙에 의지하여 죽을 위험을 이겨냈습니다. 그분의 그러한 신앙에 비하면 저는 사소한 일에서도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어려운 상황을 원망하곤 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그 신앙적 태도를 저는 후배로서 감히 우러를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김대건 신부님의 아우라고 감히 말할 만큼 자격을 갖추지 못한 세 번째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은 사제 되고 1년 만에 26세로 기꺼이 생명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제 된지 40년이 되었고 나이가 70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분보다 40배의 세월을 사제생활하고 세상살이를 거의 3배 가까이 했습니다만, 사제로서의 삶에 있어서 아직도 형편없이 연약하기만 하고 하느님과 교회 앞에 내보여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분은 편안한 거처에 지낸 분이 아니고 정처 없이 늘 돌아다니며 순간순간 잡혀죽을 위험 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편안한 거처가 보장된 처지에서도 저의 처지에 대한 불만스러움을 표출하고 좀 어려운 일은 피해가는 비겁함의 소지자입니다. 사제가 되어 교회와 신자들을 위해 많은 일을 오래오래 하고픈 꿈인들 김 신부님께서 없으셨겠습니까? 그러나 그분은 딱 1년 사제생활에 닥친 죽음을 흔쾌히 받아드려서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그에 비하여 저는 교회의 일이라면서 사실은 나 자신의 욕망에 따라 이러저러한 일을 벌려나가며 교우들 앞에 생색을 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에 유익이 되는 일에 나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려는 진실한 신앙적 자세를 늘 지니고 있는지 자문해보면 사실상 행동으로 답을 드리지 못하고 있는 저 자신입니다.

 

그리고 김대건 형님처럼 불꽃같은 삶으로 선뜻 내 목숨을 내놓을 만큼 뜨거운 신앙이 나에게 있는가? 부끄럽게도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끔 저에게 스스로 질문해봅니다. 김대건 형님께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그 멀고먼 길 만주 벌판을 수없이 헤매는 동안 추위와 배고픔과 강도와 맹수의 위험 속에 몸을 던지면서 조국 동포의 구원을 위한 길을 걸었고 끝내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당하기까지 했는데, 나는 북한의 동포 교우들이 60년 넘도록 사제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어둠 속에 죽어 가는 현실을 알면서도 선뜻 나서서 그들을 만나보러 가려는 결단을 하지 못한 주제에 김대건 형님의 아우 자격이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오늘 그분을 수호자라 일컫는 한국의 사제란 말인가?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침 본래의 연중 주일로는 제14주일인데 그 복음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네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 25) 하느님의 뜻은 ‘감춤’과 ‘드러남’의 역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마태 11, 27) 하느님 뜻의 역설을 다 알고 계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슬기로운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들에게 하느님의 뜻이 먹혀들어가게 되었다는 식의 예수님의 이런 역설적 깨우침을 들으면서 문득 김대건 신부님과 연관 지어 생각해봅니다. 김대건 신부님께 죄송한 표현이 되겠습니다만, 그분이 곧 ‘철부지’였던 것 같습니다. 만주 벌판에서 수없이 넘었던 죽을 고비, 그리고 서해 바다를 겁도 없이 가로지르는 대담성…, 그리고 더 나아가 10년 고생 도로아미타불 된 아까운 청춘의 마감…! 그분의 이런 생애는 세상에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사람들의 삶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그야말로 ‘철부지’(?) 같습니다. 그분의 모든 것이 ‘무모함’ 그 자체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그 ‘철부지’라는 것은 좋은 뜻으로 이해하자면 ‘순진무구함’을 뜻합니다. 한편 ‘철부지’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리를 분별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저는 ‘순진무구함’의 뜻으로 오늘 예수님 말씀 가운데 ‘철부지’의 의미를 읽고 싶습니다. 그런 순진무구에 하느님의 뜻은 거울처럼 반사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세상사에 찌들지 않은 어린이의 마음이 가장 정직하지요. 그렇듯 하느님 뜻을 정직하게 반사하는 마음속에 참 신앙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철부지’라는 말을 영어로는 ‘mere child’라 합니다. 그것은 순진무구(純眞無垢)의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실제로 순진무구의 어린이 양심에서 우리는 인간이 곧 하느님의 모상(模像 imago Dei = image of God)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하느님을 보고 싶다는 분에게는 “사람을 보면 하느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곧 ‘하느님의 모상’(창세 1, 26∼27 참조)이니까요.

 

어린이에게는 부모님의 말씀은 가장 신뢰성이 있지요. 그렇듯이 우리의 순진무구한 마음이라면 하느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받아드릴 자세일 것입니다. 그런 순진무구의 자세로, 젊은 사제 우리의 첫 사제이자 나의 맏형님이신 김대건 신부님께서 불꽃같은 삶을 기꺼이 바쳤다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왜 그리 하셨을까요? 한 마디로 ‘슬기롭게(영악하게)’ 세상살이를 택하신 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분께서 몇 년 만 더 활동하시다가 순교 하셨더라면 그 유업이 우리 교회 천만년대의 보배가 되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만, 그분은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 길, 업신여김을 당하는 그 길을, 가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신앙을 증거 하고, 오늘의 후배 사제들이 그와 같은 길을 가도록 한국의 모든 성직자의 수호자답게 만고에 빛나는 섬광 같은 불빛으로 짧은 생을 바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아우답게 사제의 길을 가려면, 그분처럼 찰나를 가장 값지게 사는 태도로 가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세상사와 바뀔 수 없는 한 순간 떳떳한 선택의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참 삶’은 섬광 같은 것일 수 있어야 한다고 오늘 김대건 형님께서 우리 아우들에게 깨우쳐주십니다. 사형 직전에 큰 소리로 외친 그분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곧 저와 같은 아우사제들에게 하신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나의 최후 시각이 당도하였으니 여러분은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내가 살아온 것은 오직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내가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여 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하여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그분의 후배로서 그분의 이런 태도를 그대로 본받으라고 일깨워주는 오늘, 그래서 ‘한국 성직들의 수호자 대축일’입니다. 자격미달의 후배가 이렇게 대선배님을 흠모하는 오늘, 부끄럽기만 합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98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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