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성체성혈대축일
2014년 6월 22일 10시 만수리공소
기적은 우리의 손을 통하여!
有錢使鬼神, 그리고 문창극
작년(2013년)의 오늘과 같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제가 썼던 강론원고의 제목을 오늘 다시 그대로 달아서 강론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그 이유는 저와 친분이 있는 서울의 모 어르신께서 이틀 전에 저에게 이메일로 신문 칼럼을 복사하여 보내주셨는데, 그 제목과 내용을 읽고 착잡한 심정이 되어 그에 대한 소회를 말해보고 싶어서입니다. 그 칼럼은 이즈음 유명한 분인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2012년 6월 5일자 중앙일보에 게재된 것이랍니다. 이 칼럼의 제목은 ‘새 깃발’입니다. 저에게 이 칼럼 복사본을 보내오신 어르신께서는 ‘새 깃발 - 때가 때인 만큼 꼭 읽어야…’라고 그 제목에 토를 붙여서 보내오셨습니다. (※ 그 내용 전문은 이 강론 원고에 지면상 다 실을 수는 없고, 원고 끝에 <미주>로 달아놓겠습니다.)
문창극 씨의 2년 전 칼럼을 읽고 어찌하여 제가 작년의 오늘 대축일 해당 강론의 제목을 그대로 달아 강론 준비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부터 드리겠습니다.
작년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제가 쓴 강론원고의 긴 내용을 한 줄로 압축하자면, ‘돈이 전부인 것처럼 된 우리나라 사회 풍조가 인간 서로의 생명을 위협한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빵을 많게 하여 수 천 명을 먹이신 주님의 기적이란 주님의 손에서 우리의 손으로 넘어와서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라고 강론의 끝말을 맺었었습니다. 그래서 ‘돈이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라는 우리네 자조적 속담을 예로 들기 위해서 ‘有錢使鬼神’이라는 조선 말기의 어느 선비가 쓴 한자 용어를 부제로 달아 우리네 모습이 돈 때문에 얼마나 비인간화 했는가를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생명을 함께 나누는 성체 신비를 우리 삶의 방식으로 택한 입장에서 예수님께서 배고픈 군중을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 13) 하셨음을 명심하자”고 저는 강조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저의 작년 강론 내용을 반복하면서 이즈음 요란스레 유명해진 문창극 씨의 칼럼과 연관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문창극 씨는 유명한 외국 교수들과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의 말을 칼럼에 인용하면서 우리 한국의 최근 몇 십 년 간 경제적 급성장을 예찬합니다. “이처럼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방점이 찍힌 역사를 다시 써야한다”면서, 사회과학계의 경제학이 전혀 예측할 수 없을 만큼의 한국 발전 형상은 한 마디로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고 문창극 씨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어디서도 다시는 한국 같은 나라가 나올 수 없을 것 같다”면서,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서구보다는 우리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그 깃발 높이 들어 그들의 길잡이가 되’어야겠다고 역설하여 글을 맺고 있습니다. 서구의 색 바랜 모델의 깃발이 아니라 한국 모델의 새 깃발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문창극 씨의 그 한국예찬을 거부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한국 국민들의 고난과 그 극복의 최근세사를 마땅히 예찬할 수 있습니다. 국민 각자들과 국민 모두의 각 가정 부모님들과 이 시대 이전의 모든 선배들이 이겨낸 각고를 바탕으로 지금 누리는 이른 바 경제적 번영을 말과 글로 충분히 예찬할 정도를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자랑스러운 우리 한국 국민들입니다.
그런데 문창극 씨는 칼럼 전개의 논리에 있어서 궤변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과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한국의 기적이란, 샤머니즘의 시각으로 볼 때 운명이고, 종교적으로 볼 때 신의 섭리인데, 그 이유는 신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기로 예정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회고해보건대 역사의 고비마다 ‘우리는 현명하게도 안보를 먼저 튼튼히 한 뒤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그리고 민주주의를 완성했다’고 그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논조는 참으로 섬뜩한 궤변입니다. ‘운명’이니 ‘신의 섭리’이니 하면서 예정론에다가 한국의 역사를 뜯어 붙이는 논조는 역사발전과 국가번영의 척도를 이른 바 ‘안보’에다가 기준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안보가 먼저이고 그 다음 경제성장에 이어서 민주주의를 하는 것이 순서라는 것인데, 그래서 그는 “이 순서가 거꾸로 됐더라면 지금의 우리가 될 수 없었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 아니겠습니까?
박정희 시대의 논조가 아니겠습니까? 이 논조에다가 짐짓 ‘친북’이라는 이른 바 색깔론을 문창극 씨는 삽입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보수적 가치가 우세했다면 앞으로는 진보적 가치와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단 조건이 있다. 진보에서 친북은 분리해 내야만 한다. 그래야 순수한 진보가 더 성장할 수 있다. 나라의 균형을 위해서다.” 논조의 이 지점에 이르러 저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의 이 강론 자리에 동석하지 않은 분이지만 문창극 씨에게 질문해야겠습니다. 문창극 씨는 자칭 신앙인이라면서 신의 섭리(하나님의 뜻)를 설파하는 가운데, 그 섭리에 따르기 위해서 ‘안보를 먼저 튼튼히’ 해야만 그 다음으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가 따라온다는 궤변으로 진정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지 않는가? 하느님께서는 국가안보라는 바탕 위에서 먹을 것도 주시고 자유도 주시는 분이신가? 그 순서가 거꾸로 라면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것인가? 국가가 있어야 먹을 것도 생기고 자유도 주어진다는 말인가? 신은 진정 국가안보를 바탕으로라야 사람을 살게 하시는 분이라는 말인가? 이러한 논조에서는 인간학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한 터럭 정상인의 말이라 할 근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전적 용어의 궤변에도 미치지 못하는 억지 강변인 것입니다. 문창극 씨가 신앙인으로서 이스라엘 역사를 입에 달고 강연을 다닌 듯한데, 그는 구약성경을 옳게 읽기나 했는지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국가를 세우시고자 하는 목적에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섭리하시진 않으셨습니다. 가나안 정착 이후 이스라엘은 국가형태(왕조)의 길로 가면서 오히려 하느님을 배반하는 역사를 걸었습니다. 인류사에 있어서도 늘 국가 위주의 노선에서(국가지상주의 nationalism에서) 비극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경제적 이유로 불행한 역사를 기록하여왔습니다. 사회주의다 자본주의다 하는 것들이 다 그런 역사를 읽게 합니다. 안보를 빙자한 통치 행위를 통하여 백성을 압제한 역사가 곧 이스라엘의 왕조사이고 전근대 세계사이며 현대의 남북한 한국사입니다. 그러한 안보를 내세운 국가주의와는 무관하게 죄 없는 백성들이 전쟁터에 내몰리고 희생되었습니다. 그 국가주의는 당연히 백성의 삶을 피폐화하였고, 그에 따라 지배층에 의한 사회구조로 착취와 피착취의 경제구도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경제구도 속에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것들이 갈등의 판도를 이루어왔던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적 판도 하에서 사실상 피압박 층에서부터 함께 살자고 외쳐온 역사가 민주주의의 역사입니다. 그 민주주의의 의식을 늘 짓눌러 온 것이 이른 바 반역사적 안보 타령인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 반성과 더불어 문창극 씨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민주주의가 제일 나중의 일입니까? 역사 발전에 대하여 이러한 질문을 하면 그게 ‘친북’입니까? 역사적 진보를 말하면 그게 북한 정권을 따르자는 것입니까?
여기서 다시 문창극 씨에게 더 심각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 칼럼의 논조는 ‘경제적 번영’이 곧 나라 번영이라는 식인데, 신앙인으로서 “사람이 빵 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기억하십니까? 그리고 자기 강연은 신앙인으로서 교회에서 발설한 것이라면서 자기의 정치적 야망을 표명하는 자리에서 신앙적 소신을 정치적 현실이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변명을 둘러대는데, “나의 나라는 이 세상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기억하십니까?
여기까지 이야기 하고보니, 저의 이 말들이 강론인지 정치 발언인지 혹은 인신공격인지 분별되지 않는다고 하실 분들이 계실 듯합니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정치 현실에 무관심할 수 없다는 뜻의 말씀을 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정치 자체도 복음화 해야 한다고 저는 역설하고자 합니다. 이런 말은 복음을 정치화하자는 것이냐는 반론과는 무관합니다. 정치가 지극히 비인간적 혹은 반인권적인 상황이라면 그걸 깨우쳐주어야 하는 게 복음적 책무라는 뜻에서 정치를 복음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정권 이래로 안보와 경제발전을 빙자하여 국민을 탄압했던 역사를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을 때 세계에서 가장 반민주적인 북한 정권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 될 것이고, 그러한 국민 수준이어야 북한 체제를 이길 수 있는 최상의 ‘안보’가 보장 되는 것입니다.
정치와 연관된 이 이야기에서 오늘 대축일의 복음 말씀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봅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 51)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 54∼55)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 58)
저는 오늘의 이 강론을 준비하면서 작년의 강론 제목을 다시 내걸고 묵상했습니다.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속담과 결부하여 우리나라의 최근 역사가 돈이 최고인 것으로 전 국민을 쇠뇌 시켜온 역사라는 우리 모두의 부끄러운 반성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 언급한 문창극 씨의 주장대로 기적과도 같은 우리 한국의 발전상은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뜻합니다. 그 경제발전을 위해서 민주주의도 차후로 미루고 안보를 그 바탕으로 삼았기에 기적 같은 나라를 만들었다고 그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란 어떤 것입니까? 저는 여기서 정치적 시각으로 민주주의를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어떻게 뽑고, 어떻게 해야 북한을 극복하고, 지방행정을 어떻게 잘 하라고 말하는 제가 아닙니다. 제가 굳이 말하고자 한다면, 사람 하나하나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생각이 그 바탕을 이루는 정치과정을 일컬어서 ‘민주주의’라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민주주의를 차후로 미루고 오로지 돈 벌어야 잘 살 수 있다고 “잘 살아보세”하면서 박정희 시대이래 살아왔습니다. 그 “잘 살아보세” 하면서 애들 많이 낳으면 “잘 못 산다”고 불임수술 낙태권장으로 “일하러 가세” 하던 것이 이른 바 ‘새마을 운동’의 근간이었습니다. 생명경시의 바탕을 깔아준 것이 바로 그 “잘 살아보세”의 인구조절이었기에, 인명보다 돈이 먼저인 오늘 우리 부끄러운 인구감소를 예측하게 된 현실의 원인입니다. 그러면서 ‘돈 되는 건 물불 가리지 않고’ 즉 뭐가 올바른 것인지 살피면 국가에 반기를 드는 것처럼 ‘안보’만이 삶의 담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안보를 보장하는 권력에 충성하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면서 그 권력의 부정부패도 너그럽게(?) 넘겨왔습니다. 그 권력에 항거하면 ‘빨갱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세월호 침몰로 수백 명이 수장된 것도 그건 오로지 선장과 승무원의 비겁함과 유병언 이라는 사람과 그 일당들 탓인 것처럼 여론몰이에 생각들이 빨려 들어갑니다. 세월호와 함께 모두의 의식(생각)도 침몰하고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세월호에 관련된 형식적 사과로 눈물을 보인 그 즉시 돈벌이 된다는 원자력 기술 팔이 해외잔치에 급급하고 이어서 들끓는 민심을 아랑곳 하지 않으며 자원외교라는 여행을 하는 이른 바 국가원수의 모습에 찬사를 보내고 있지요.
그러면 오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어쩌자고 제가 이런 말을 이어가겠습니까? 저는 저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서 곰곰이 묵상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어서 그분을 우리 구원해주신 구세주라고 부르는가?”
예수님께서 한 번 죽으셨으면 그만이지 그분이 계속 우리의 구세주인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에 대한 답을 오늘 이 대축일의 복음이 제시합니다. 그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이라고 오늘 복음에서 들려옵니다. 그분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살게 하는 음식으로 먹히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으셔서 우리의 음식이 되셨기에 오늘도 우리는 그분을 먹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가 먹고 마시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이러한 오늘 복음의 대답과 더불어 저는 저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나를 죽여서 다른 사람 하나라도 살게 하는 일을 해본 적이 있는가? 저 자신은 부끄럽게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명색이 사제라면서 교우들이나 이웃 혹은 딱한 처지의 사람 하나에게라도 나의 어떤 귀중한 것을 선뜻 내준 일이 있는가? 생각해보면, 지난 세월에 가끔 헌혈 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피를 다른 사람들이 필요할 때 쓰라고 준 것이니 당신 피를 마시라고 내주신 예수님을 형식적으로 조금 본받은 것이라 할까요? 그러나 언젠가부터 혈압 높고 나이 먹었다고 헌혈소에서 받아주지 않더군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 위해서 나의 호주머니 돈 얼마라도 기꺼이 꺼내보았던가? 어쩌다 사람들과 음식점 식사를 하다가 술 마시고 기분 나서 음식 값 먼저 지불한 일은 있지요. 나의 소중한 것을 양보한 것이 아니고 그건 체면상 혹은 기분풀이로 한 것이지요. 이런 회상을 하다 보니 저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처절할 만큼 손해 본 체험이 없음을 부끄럽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은 앞에 문창극 씨의 칼럼을 빗대어 우리 사회를 비판한 것을 무색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대축일 메시지와 더불어 오늘 우리가 또 반성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은 마침 6·25를 기억하는 주간의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로 남북통일 미사를 겸하고 있습니다. 정치권의 완고한 사람들은 북한 동포를 위한 발언에 대해서 걸핏 하면 시비를 걸어옵니다. ‘종북’이니, ‘친북’이니, 더 나아가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북한 동포를 생각하자는 것은 체제를 넘어서 서로 ‘사람’이고 더욱 서로 ‘한 동포’라는 까닭에 그렇다 하더라도 사상이 불순하다는 식으로 몰아세웁니다. 저는 수십 년 전 젊어서부터 남한의 사제 한 명이라도 죽음을 무릅쓰고 비밀리에라도 북한에 들어가 그곳 신자들 찾아본 일이 없이 무심하게 남한에서 편하게(?) 신앙을 영위하는 우리 교회라면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저 스스로 그런 시도를 해보지 않았지요. 철저한 안보 교육으로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백 수십 년 전 서양 선교사들은 비밀리에 조선에 밀입국하여 목숨 바쳐 신자들을 돌보았는데 말입니다. 말도 다르고 생활 방식도 다를 뿐만 아니라 철저히 생소한 문화를 감수하면서 더욱 외양이 달라 쉬 들켜 잡혀 죽을 처지에서 서양 선교사들이 그리 하였거늘, 동포로서 북녘의 신자들을 찾아보러 가고자 하는 시도가 나를 포함한 남한의 사제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서도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 후대의 사람들이 뭐라 평가할지 생각하면 섬뜩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비겁하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우리이기에 경제적 안위를 번영의 구가로 예찬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 시대를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더욱 국가주의에 매몰된 안보의식으로 사람 생명이 하나하나 소중함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우리들인 것 같습니다. 그 소중한 생명들이 매몰되는 것을 목도하면서도 메마른 시선으로 주위의 체면에 안주하고 있는 나 자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매번 미사성제에 나누는 빵이 하나이면서도 여럿이 나눈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생명에 한 몸이 되는 것이라고 설파하는 오늘의 바오로 사도 말씀(1코린 20, 16∼17참조)은 그래서 더욱 저 자신을 부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 몸이요, 이는 내 피의 잔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나의 입으로 외우면서 성체를 축성하는 사제라면 나 자신의 몸과 삶의 전부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것이어야 함을 평소에 그리도 잊고 살면서 정치인들의 완고함만을 탓한다는 것 자체도 부끄럽지요. 하지만, 해야 할 말은 그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일깨움의 채찍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깨우침이 절실합니다. 성체의 신비에 있어서 그 본질적 핵심은 ‘나눔’이라는 깨우침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먹일 것이 없음을 실토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 13)하셨음을 기억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빈약한 것(빵 다섯 개)을 주님의 손에서 떼어 제자들에 주시자 그것을 제자들의 손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니 모두 함께 먹고 엄청나게 남았습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어 먹고 마신 처지라면 또한 우리 자신의 손에게서 작은 것이면서도 소중한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건너갈 때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기적은 문창극 씨가 말한 한국의 경이로운 경제발전과 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벌어들여야 하는 돈의 기적이 아니라 사람들을 살리는 기적이어야 합니다. 그런 기적은 우리 손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기적입니다.
아래<미주>
[문창극 칼럼] 새 깃발 - 때가 때인 만큼 꼭 읽어야…
새 국무총리 후보가 2012년 6월 5일 중앙일보에 올린 칼럼입니다.
※ 위와 같은 메일 제목으로 저의 지인 어르신이 아래 글을 보내셨습니다.
새 깃발
요즘처럼 답답한 현실에서 우리에게 힘을 주는 소식들이 있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뉴욕대의 토머스 사전트 교수가 서울대에 부임한다. 그의 부임이 뉴스가 아니라 그가 한국을 택한 이유가 관심을 끌었다. 그는 “한국은 경제학자라면 꼭 한번 연구해 보고 싶은 나라”라며 “한국 역사와 경제는 기적 그 자체”라고 말했다. 중국의 인권 변호사로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미국으로 옮긴 천광청(陳光誠)이 첫 공식 회견을 했다. 그는 “중국 정부는 서방의 민주주의를 그대로 모방할 수 없다고 하나, 한국과 일본처럼 동양에도 모범적인 민주주의 나라가 있다”면서 중국은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말들을 뒷받침해 주는 통계도 발표됐다. 한국이 인구 5000만 명 이상에, 소득 2만 달러 이상의 나라인 20-50클럽에 가입한다는 얘기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다. 앞선 나라들은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다. 모두 선진 강국들이다. 가슴이 뿌듯하지 않은가. 감사하지 않은가.
밖에서 보는 우리와 안에서 생각하는 우리는 너무 다르다. 거울을 보지 않고는 자기 얼굴을 알 수 없듯이, 밖을 통하지 않고는 내 모습을 잘 모른다. 밖에서는 우리를 부러워하며 배우고 싶어 하는데, 정작 안에서는 세계 최악의 나라인 북한을 배워야 한다는 주사파들이 판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 아니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를 얼마나 비하하면서 지내는가. 백조인 줄 모르고 미운 오리라며 괴로워하는 꼴이다.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들어 놓고도 지지리도 못난 때를 잊지 못해 거기에 얽매여 있는 게 우리 모습은 아닌가.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고난과 부끄러운 시절이 있었던 것을 부인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 시절을 극복하고 이처럼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방점이 찍힌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그리고 그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한국의 이 같은 성취는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한국의 발전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갖는 공통된 질문이다. 하버드대의 새뮤얼 헌팅턴 교수는 문화적인 접근을 했다. 한국의 발전은 일본·중국·싱가포르 등과 같이 유교문화의 덕이라고 했다. 물론 그것도 한 요인이다. 어떤 사람은 새마을운동을 원동력으로 꼽는다. 그러나 그뿐일까? 세계 구석구석으로 보따리를 들고 다닌 무역 일꾼, 나라를 지킨 군인, 아이들 교육에 온몸을 바친 부모들…. 발전 요인을 찾자면 수천, 수만 가지가 넘을 것이다. 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한 작업일지 모른다. 사회과학에서 가장 과학화되었다는 경제학조차 불과 몇 가지 요인만을 감안한 모델이라는 것을 만들어 그것으로 경제현상을 설명·예측하려 한다. 그러니 어떤 경제학자도 금융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다. 하물며 한국의 발전 같은 총체적 현상을 몇 가지 요인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기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이 세상 어디서도 다시는 한국 같은 나라가 나올 수 없을 것 같다.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말한다. 샤머니즘으로 본다면 운과 운명이요, 종교적으로 말한다면 신의 섭리다. 신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기로 예정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모른다. 기나긴 세월 고난을 겪은 우리가 불쌍해서인지, 아니면 어떤 사명을 맡기기 위해서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뒤돌아 보면 역사의 고비마다 우리는 현명했다. 안보를 먼저 튼튼히 한 뒤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그리고 민주주의를 완성했다. 이 순서가 거꾸로 됐더라면 지금의 우리가 될 수 없었다. 우리로서는 이러한 결과를 감사히 받아들이고, 책임 있게 처신을 해야 한다.. 지금의 결실을 어느 한 계층이나 세력이 독점해서는 안 된다. 여기까지 오는 데 모두가 참여하고 애썼기 때문이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우리를 ‘동방의 등불’이라고 불렀다. 일제 탄압을 받던 고난의 시절이었는데도 이미 우리의 싹을 보았던 것 같다. “그 등불이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세계는 경이로운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경제발전과 성장이라는 면에서 우리는 일정 궤도에 올랐다. 이제는 가치 있는 공동의 삶에 신경을 써야 한다. 지금까지 보수적 가치가 우세했다면 앞으로는 진보적 가치와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단 조건이 있다. 진보에서 친북은 분리해 내야만 한다.. 그래야 순수한 진보가 더 성장할 수 있다. 나라의 균형을 위해서다. 과거 우리와 비슷한 길을 걸었던 아시아·아프리카 나라들이 고난 속에서 성장한 우리를 지금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제국주의 역사를 가진 선진국들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 구미 선진국들은 금융위기, 포퓰리즘, 정신의 쇠락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그들의 깃발은 이미 색이 바랬다. 우리가 새 깃발을 만들어야 한다. 번영과 행복, 자유와 책임, 개인과 전체가 조화된 나라, 그 깃발 높이 들어 그들의 길잡이가 되자.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96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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