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승천대축일

2014년 6월 1일

땅에 매여 살지 말라! 

부활과 승천, 한가지 신비 


우리는 오늘 교회 전례력에 따라서 부활 신비를 웅대한 입체감으로 체험합니다. 그리고 또한 이 신비의 역동성을 체험합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의 신비 체험인 것입니다. 이 신비 체험을 몸으로 느껴 보고픈 소박한 신자들의 관습으로 오늘 많은 본당 공동체들은 산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면서 야외 미사를 봉헌하기도 합니다. 마치 주님을 따라 산에 올라가 그분께서 승천하신 하늘을 바라보던 제자들의 심정을 함께 가져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세도 공소의 교우 여러분들께서는 농번기에 바쁘게 일하는 이웃 비신자들의 눈에 위화감으로 비추일 것 같은 우려 때문에 또는 세월호 참사 후의 국민적 정서를 감안하여 이렇게 조용히 공소에 모여 오늘의 축제 미사를 봉헌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뒤를 따라 하늘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은 매 한가지로 지녀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사제가 함께 감사송을 바치기 위하여 교우들에게 “마음을 드높이!” 라고 권유하면 모두 “주님께 올립니다.” 하고 환호로 답합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오늘 특별히 우리의 마음을 주님 따라 하늘로 올립시다. 그렇다면 오늘 입당송과 제1독서에 인용된 천사의 질문처럼(사도 1, 11)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는 질문을 우리 자신들에게 던져봅시다.

 

여러분께선 하늘을 언제 쳐다보십니까? 이즈음 벌써 한여름처럼 더위가 계속되고 있어 남부 지방에는 폭염주의보가 발령되었고, 오래도록 가뭄으로 밭의 작물들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농사짓는 여러분께서는 아마 따갑고 마른하늘을 올려다보며 원망스러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승천 대축일에 우리가 쳐다보는 상징적 하늘이란 주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올려 보내는 방향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하늘이란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땅과는 전혀 다른 곳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다른 점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의 발이 딛고 있는 땅이란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땅은 우리가 더불어 씨름하는 대상입니다. 농사짓는 여러분은 늘 이 땅과 씨름하며 사십니다. 그런데 이 땅위에서 우리는 사람들끼리의 씨름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처지에서 우리는 땅위에서 제한된 구역에 매여 살기도 합니다. 즉 땅이란 우리의 씨름 대상이며 그 씨름 공간이고 그런 처지에서 제한된 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땅위의 우리는 서로 땅 싸움을 하면서 삽니다. 자가 소유의 땅이 재산의 기본인 것처럼 우리는 농경문화의 인식에서 ‘땅탐’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래서 ‘땅따먹기 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깃돌을 손가락으로 몇 번씩 튕겨서 자기 구획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 범위의 땅을 차지하는 식의 놀이를 아마 연세 드신 분들께서는 어린 시절에 즐겨 하신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놀이를 빗대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과의 회담 때 NNL을 미국이 땅따먹기 식으로 그었다고 말했다며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새누리당 사람들이 거짓 퍼트린 일이 있지요. 그것이 사실 아니었음을 최근에 그 새누리 당의 고위층이 슬쩍 시인했습니다만, 그 ‘땅따먹기’라는 말을 이번의 세월호 침몰 원인에서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해운업계에서 관료 출신들이 마치 땅따먹기 식으로 자리차지하기로 누적된 비리가 세월호 참사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지적이 그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땅따먹기 식으로 세상에서 경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늘을 두고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따먹기’라는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늘을 봅시다. 거기에는 경계선이 보이지 않습니다. 국가들 사이에 ‘영공’이라는 말로 자기 하늘 범위를 주장하기는 합니다만, 그 영공들 사이를 국제 여객선들이 넘나들면서 운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하늘 높이 인공위성을 먼저 쏘아 올리기를 경쟁하는 국제간에 누구나 실력대로 간섭 없이 그 하늘을 또한 차지하려고 땅위의 인간들이 경쟁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오늘 바라보는 하늘이란 무한한 공간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걸 다른 말로 ‘우주’라 하지요. 그런 무한의 공간에 올라가신 분을 오늘 축제에 기리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주의 주인공처럼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승천의 주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주님의 부활과 주님의 승천은 한 가지 사건이다’라고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자체가 이미 그분의 승천과 동일한 사건입니다. 부활로 부터 40일 만에 승천이 이루어진 것으로 오늘 독서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만 공관복음서가 제시하는 맥락에서는 부활과 함께 승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저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승천에서 보고 싶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하늘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한없이 크신 몸이라는 것입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에도 계시고 땅에도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땅에다가 마음을 붙이고 살면 아니 됩니다. 하늘에 비하면 땅이란 너무나 작은 것이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평소 우리의 마음을 땅 바닥에 떨어뜨리고 삽니다. 이 땅에서 얻을 것이 무엇일까 하고 땅에다가 마음 붙이고 사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는 땅의 소출을 얻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 없이 인간이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 땅을 딛지 않고 허공을 걸을 수 없듯이 인간의 삶이 땅을 그 바탕으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삶의 풍요로움을 땅으로부터 얻고 있습니다. 땅 속에서 무엇을 캐내는 것으로써 그리고 또는 땅을 일구어 얻어지는 열매로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꾸려나갑니다.

 

그러나 땅과 관련하여 동물과 달리 우리가 참으로 인간다운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 딛고 있는 발밑의 땅만을 땅이라 하지 않고, 살아가며 차지하는 영역을 일컬어 땅이라 하며 그 위에 가치를 부여하는 땀을 흘릴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땅 거죽만 보는 존재가 아니라, 땅속까지 깊이 탐색하여 그 땅속이 품고 있는 값어치를 찾아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땅을 일구고 거기에 씨를 뿌릴 줄 알아 거기서 생명의 신비를 만날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땅의 끝을 향하여 눈길을 멀리 펼칠 줄 알기에 모험의 발걸음을 띄워놓을 때도 있고, 그렇기에 땅 끝 너머에까지 상상의 나래로 마음의 여행을 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땅 끝이 맞닿은 거기에 땅을 덮는 하늘을 느낄 줄도 아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과 씨름하는 한 삶을 인간의 한 생애라 하며, 그 땅과의 상대를 끝마침이 곧 몸을 땅에 묻는 것이지만, 그 때 이 땅을 떠난다고 의식하는 존재가 됩니다. 즉 땅에 의지하여야 하고 땅을 떠날 수도 없는 몸을 지닌 존재이기에, 땅과의 관계를 마치게 되는 시점에 몸이 땅으로 돌아가더라도, 몸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인간 실체는 이 땅 끝 너머에까지 덮은 하늘을 향하면서 땅(세상)을 떠난다고 의식하는 존재가 인간자신입니다. 이러한 모든 내용을 종합하여 본다면, 인간은 땅에서 거저 얻어먹지 않는 존재이며, 그 반대로 인간의 삶의 질을 땅에 입혀줌으로써 그 땅의 가치를 더할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라 불립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진정으로 땅에서 거두는 것은 땅 자체의 열매가 아니라, 땅과 상대하여 형성하는 인간 자신의 삶 자체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란 결코 땅에 묻혀 스러져버리는 것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즉 이 땅에서 영위하는 삶이 허무하게 없어져 버릴 것이라면 인생이란 처음부터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희로애락의 굴절들을 내 생애의 씨줄 날줄로 삼았는데 그것을 어느 날 이 땅속에 다 묻어버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이 땅과 씨름하여 얻은 내 생애의 그 값을 어느 날 한꺼번에 빼앗길 수야 없지 않습니까? 땀 흘려 가꾸고 추수한 알곡을 어딘가에 잘 거두어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디가 거기이겠습니까? 하늘입니다.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나라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에페 1, 20∼21) 즉, 우주보다도 크신 분이 부활하신 그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땅은 모든 것을 담지만 하늘은 모든 것을 덮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환경보존을 외치면서 인간들의 오물로 땅을 더럽히고 있음을 반성하지요. 땅은 인간들의 모든 더러움을 마다하지 않고 담아주고 있지요. 그러면서 땅은 인간들로부터 훼손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은 인간들의 죄악을 담기 위해 상처받고 있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곧 인간의 죄악이 세상을 더럽히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지럽고 시끄럽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세상에 가득하다 하더라도 세상을 덮고 있는 하늘은 고고할 뿐입니다. 인간의 소란이 하늘로 퍼져간들 하늘은 항상 하늘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하늘이 되셨습니다. 돌아가시고 땅에 묻히셨던 그분께서 일어나시어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분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당신 제자로 삼으실 분이십니다. 그분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16∼20)

 

그래서 부활의 체험을 또 다른 날 체험하는 축제가 ‘승천 대축일’입니다. 하늘을 보는 축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 얻을 것을 찾아 땅에다가만 눈을 깔고 서로 부딪치며 다투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다운 까닭을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땅 끝 너머의 하늘까지 눈길을 뻗어야 함을 세상 사람들에게 말해줍시다. 오늘 이 승천 신비는 곧 부활의 새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 땅의 테두리에 갇혀 사는 존재가 아님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하늘로 오르시는 그분을 바라보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서, 하늘을 허공으로 보지 말고 그 하늘로부터 그분의 지배력이 이 땅을 덮게 됨을 알아보라고 말하였습니다(사도 1, 10∼11 참조).

 

그러므로 천사들의 깨우침을 따라 우리도 주님 오르신 하늘을 본 사람답게 그분께서 행사하시는 구원 권세를 이 땅 위의 사람들에게 말해줍시다. 이 땅위의 것만을 보지 말고 우리가 본 저 하늘을 보자 하면서 거기에서부터 내려 볼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의 삶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 삶을 체험하고 증거 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변화는 성령강림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음주일의 축제가 그것입니다. 성령강림 또한 다른 날 체험하는 동일한 부활의 신비사건인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93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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