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대축일

2014년 6월 15일 10시 만수리공소


뭐라 말할 수 없는 사랑처럼!


성호를 그을 때마다 세례를 갱신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한 오늘 새삼스럽게 우리 몸에 십자가를 그으면서 큰 소리로 성호경을 바쳐봅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렇게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삼위일체 신비를 경축하여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이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떳떳하게 세상에 알립니다. 사실 우리는 일 년 매일매일 순간순간마다 모든 일 가운데 삼위일체 신비를 고백하며 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성삼위의 하느님 이름으로 세상에 신앙을 증거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쁜 일에나 슬픈 일에나 성삼위의 하느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지금 이 시간도 그렇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이렇게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성호경으로 시작하고 성호경으로 마치며 성삼위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사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부터 이렇듯 성삼위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표식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이제 세상 마치는 날까지 성호경과 영광송을 바치는 기도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이 끝난 다음 천국에 가면, 거기서 하느님을 직접 뵈옵는 지복직관(至福直觀) 가운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던 때에 바치던 다른 기도는 더 이상 필요 없이 성호경과 영광송만을 끊임없이 바치는 것으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안에 우리의 모든 행복 요건이 들어있음을 그때 확실히 체험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삼위일체의 신비에서 행복을 얻게 됨을 고백하는 것이 그 신앙의 바탕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외교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이란 일반적으로 그저 ‘神’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이란 ‘신’이시며 동시에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신 까닭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성부)’라고 부르면서 우리 또한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당부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당부 하셨다 해서 무조건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겠습니까? 아무한테나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 또한 그렇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일까요?

 

저는 사제이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아서 아들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를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을 가끔 만납니다. 그것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서 아버지라 불리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물건을 사러 갔을 때 점원이 저를 그렇게 부르는 걸 많이 당합니다. 전화벨 소리에 수화기를 들면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무조건 ‘아버님!’하면서 친절하게 말을 걸어옵니다. 무슨무슨 통신사라면서 아버님의 핸드폰 공짜로 바꿔주겠다고 아양을 떱니다. 치과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갔는데 간호사 아가씨가 저를 ‘아버님’이라 상냥하게 부르면서 진료의자에 누우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런 말을 들으면서 야릇한 생각이 듭니다. 나도 진짜 저런 상냥한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기분이 언짢습니다. 내가 늙어 보이니까 ‘아저씨’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라고 부르는구나 하여 기분 나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저의 유치한 생각으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우리가 가까이 대하도록 그렇게 당부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 마치 가게 점원이나 통신사 직원 혹은 병원의 상냥한 간호사가 저로 하여금 자기와 가까이 느끼게 하려고 그리 하는 것 같이 말입니다. 저의 이 유치한 생각이 어쩌면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히 깨달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요. 왜냐면, 하느님을 그냥 신(神)으로만 대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정말 친밀하게 ‘아버지’로 만나라는 예수님의 당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은 참으로 우리의 큰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한번 새삼스럽게 생각해 봅시다. 만일 우리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멀리 계시며 두려움의 대상인 신(神)이시라면, 우리를 위해서 별 볼일 없이 홀로 군림하는 어떤 절대자로 요지부동의 형이상학적 존재일 뿐일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인 우리 인간의 처지처럼 세계 공간에 갇혀 계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리고 경외(敬畏)의 대상이시고 또한 변함없이 언제나 같으신 영원불변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한 하느님,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알게 된 하느님은 영원불변하신 형이상학적(metaphysic)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역동적(dynamic)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 영원불변하신 분의 역동성을 삼위일체 신비가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란 곧, 변함없으신 분이시지만 또한 항상 움직이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그릴 수 있겠습니까? 아마 그림으로 그릴 수도 없고, 사진으로 촬영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말로나 글로 이러한 하느님을 다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작년에 스스로 퇴임하신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약 45년 전에 대학의 젊은 신학교수 요제프 라칭어 교수로서 인기리에 강좌를 펼쳤던 그분의 강의록 가운데 제가 읽은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말씀은 삼위일체 신비 앞에 적절한 고백으로 저의 가슴에 새겨집니다. “(삼위일체란 우리가) 너무 잘 알려고 곧장 덤비다가는 못난 소리를 면치 못할 영역이다. 모른다는 것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만이 참 앎이며 헤아릴 수 없는 신비 앞에 경탄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합당한 신앙 고백이 되는 그런 영역이다. 사랑이란 언제나 신비(mysterium)이다. 사랑이란 헤아릴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현실이다. 그러므로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은 그 무엇보다도 신비일 수밖에 없다. 아니 바로 신비 그 자체이다.”(J. Ratzinger,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장익 역), 분도출판사 1974, 122쪽)

 

베네딕토 16세께서 젊은 시절 교수로서 피력했던 이러한 논지는 “믿음이란 철학과 같이 ‘사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들음’에서 오는 것이다.”(앞의 책 62쪽 참조)라는 맥락에서 읽혀져야 합니다. ‘사색’은 내가 하는 것이지만 ‘들음’은 상대방이 던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은 비유로 하느님의 신비를 그분에게서 받아들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면(사색하다보면) 바다가 나에게 던지는 말(들리는 메시지)이 있습니다. 바다는 언제나 변함없는 그 바다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바다는 항상 엄청난 역동성으로 생명력을 분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산(山)을,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면 같은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찬란한 태양 아래서도, 절망 같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의연하게 언제나 자기 자리 그 변함없는 웅자(雄姿)의 산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산들은 봄여름 꽃들과 짙은 신록의 풍요를 자랑하는가 싶다가 가을 단풍의 휘황한 향연도 잠깐이고 이내 낙엽 지면 벌거벗은 나무들로 송곳같이 하늘을 찔러대면서 매서운 칼바람을 백설의 냉소로 맞서는 그 변화무쌍과 불변성을 한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불변성의 웅대함과 동시에 변화무쌍의 역동성으로써 샘물을 뿜어서 내를 이루어 주고 풍성한 생명의 씨를 키워주고 있다는 사실을 큰 산의 품에서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선을 올려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언제나 내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무너지지 않는 불변의 그 하늘이지요. 그러나 따사롭게 쏟아지는 햇볕, 아니면 불길한 구름으로 얼굴을 가리기도 하면서, 로맨틱한 변화의 달빛에 대한 백그라운드로 반짝이는 별들의 신비스런 운항을 수놓아서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하다가도, 간혹 사나운 바람 소리 또는 천둥 번개로 우리에게 경고를 보내기도 하고, 촉촉한 빗방울로 우리 생명의 밭을 풍요롭게 하여 주기도 하는 변화무쌍으로 저 높은 하늘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다가옵니다.

 

이렇듯이 대자연도 그 불변성과 동시에 변화무쌍의 역동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데, 그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야 절대자로서의 영원불변성을 지니시면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역동성(움직임)을 활발히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하느님은 꼭 한 분으로 절대성을 지니시지만 성삼위로 역동성을 지니신 분이시기에 ‘삼위일체’이시라고 불리어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하신 하느님과 함께 행복합니다. 그분은 연약한 우리와는 전혀 다르게 움직이지 않으시는 영원불변의 절대자이시지만 항상 흔들리는 우리의 연약성을 어떤 식으로든 다 품어주실 만큼으로 역동적이신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그분이 ‘한 분’이시라는 그 영원불변성은 우리에게 ‘신비 그 자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성삼위이시라는 그 역동성 또한 ‘신비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성삼위’라는 역동성의 신비는 우리에게 아주 친밀하게 체험됩니다. 어찌하여 그럴까요? 그 역동적 신비의 원리는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먼저 알려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 그것을 해야 하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사랑하면서도 사랑이 무엇인지 말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 ‘사랑’이라면 그게 한 마음에서라야지 쪼개져 두 마음 또는 세 마음에서 비롯되어서는 참 사랑일 수 없으면서, 사랑 때문에 마음이 찢어지기도 하는 것처럼, 그래서 이 우리네 사랑의 체험이 그렇듯이, 뭐라 말할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라칭어 교수(베네딕토 16세)의 말대로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시기에 그분에 대해서 뭐라 말하기란 잘못 덤비는 짓일 뿐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께서 이미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듯이 말입니다(1요한4, 8 참조). 이에 대하여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가 읽듯이, 이미 하느님 친히 당신 자신을 일컬어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신 분이라고 계시하셨습니다(탈출 34, 6 참조).

 

그렇다면 우리 각자 한번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각자의 아버지를 연상해봅시다. 아버지는 나를 생겨나게 한 뿌리이기 때문에 누가 뭐라 하여도 나의 아버지란 나에게 가장 위대한 분이요 이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큰 권위를 가진 존재입니다. 그렇다 하여 아버지의 그 권위는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있어 바위처럼 장중하고 변함없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자식을 위해서라면 속절없이 스러지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확고한 사랑이 항상 가득 넘쳐나고, 그러면서도 자식이 나아갈 길을 분명하게 그리고 가장 믿을 수 있게 가르치고 자식의 삶 속에 살아 있는 좌표로 존재하는 분이 아버지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이렇게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요? 변함없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는 나를 향한 사랑의 역동성이 항상 물결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한 분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는 또 언제나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피와 땀 그리고 목숨까지 내주시는 분으로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 분은 곧 한 분 성자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또한 나에게 항상 용기와 위로를 주시고 삶의 길 즉 진리의 깨달음과 사랑으로 나를 지탱시켜 주십니다. 그 분이 곧 한 분 성령 하느님이십니다.

 

이에 대하여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그 확신을 당부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2코린 13, 13)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말씀으로 늘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앞뒤 인사를 전합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미사전례의 앞뒤에 이러한 인사를 사제와 신자들 사이에 나눕니다. 그것은 곧 삼위일체 안에서의 우리 삶에 대한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고백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 성호를 그을 때마다 우리는 사실상 세례를 갱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신앙을 우리는 주일마다 성대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주일미사에서 신앙고백으로써 우리의 세례를 갱신하는 것이지요. 세례 받은 하느님의 자녀들만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란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그러한 하느님 신비에 대한 믿음을 오늘 모두 고백하면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우리의 세례를 갱신합시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95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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