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대축일
2014년 6월 8일 09:00 도화담공소
새 인류의 출현
성령강림은 곧 부활신비의 완성적 체현
우리는 오늘의 제1독서인 사도행전 2장에서 아주 특이한 보도를 읽게 됩니다. 사도들이 모여 있다가 성령을 받고 말하기 시작하자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한 가지로 말을 알아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사도 2, 1∼11 참조). 이것을 일컬어 ‘오순절 사건’이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50일째(πεντηκοστη․Pentecost : the fiftieth) 되는 날의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그 내용에 이어지는 보도를 읽어보면 베드로와 그 동료 사도들이 예수님의 50일전 부활 사실을 증언하는 설교를 하자 그 말을 듣고 무려 3천 명이나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사도행전은 보도하고 있습니다(사도 2, 12∼41 참조). 그로써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함께 모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신자들의 공동체 즉 최초의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사도 2, 42 참조).
이러한 일련의 사도행전 보도 내용을 우리가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두 가지 점을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오늘 성령강림 축제란 부활 신비의 완성적 체현이라 말할 수 있고, 두 번째로는 이러한 성령강림의 신비로써 교회가 출범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듯 부활 신비의 완성과 교회의 출범으로써 새 인류가 출현하게 되었다고 저는 덧붙여 말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로, 오늘 성령강림이 곧 부활 신비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사도들의 변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직접 체험한 사도들이 50일이나 지나도록 그 사실을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고 숨어 지냈는데 오늘의 성령강림을 체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 앞에 나서서 예수님 부활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용기를 지닌 사람들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날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함께 일어나 군중을 향하여 큰 소리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설교를 했던 것입니다. 그렇듯이 부활신비는 이제 더 이상 숨겨진 사건이 아니라 만천하에 선포되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강림 사건은 부활신비의 완성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 성령강림은 교회의 출범을 의미합니다. 부활신비의 공개적 선포로써 세계 각지에서 모여온 사람들 3천 명이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되어 함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들의 부활 증언 설교를 들은 그 세계 각지로부터의 수천 명이 한 가지로 마음을 고쳐먹고(개종하여) 신자 공동체 즉 교회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에서 성령강림 사건은 새 인류의 출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분을 직접 뵙고도 그 사실을 증언하지 못하고 50일 간이나 숨어있던 사도들의 용감한 증언 태도와, 그 증언을 듣고 세계 각지로부터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네 말로 알아듣고 한 마음이 되어 즉시 세례를 받을 만큼 변화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이나 듣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가지로 마음을 모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사람, 즉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두 서로의 말을 알아듣고 한 믿음을 지니는 공동체가 된 그 사건은 그야말로 새로운 인류의 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앞부분에서 인류의 두 가지 비극을 읽습니다. 인류가 하느님을 배반함으로써 태초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잃게 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의 역사가 그 첫 번째 인류의 비극입니다(창세 1∼3장 참조). 그리고 두 번째의 인류 비극은 ‘바벨탑 사건’(창세 11, 1∼9 참조)입니다.
인류의 그 첫 번째 비극을 회복한 사건이 오늘 성령강림의 체험입니다. 그것을 오늘 우리가 읽는 요한복음서 20장 19∼23절에서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부활 당일에 한 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여 오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숨결로 성령을 주셨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 22∼23) 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신 바로 그 동작과 같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세 2, 7) 하였듯이, 죄악으로 쓰러진 우리 인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숨결로 성령을 넣어주심으로 죄로부터의 해방을 이루어 주십니다(요한 20, 22∼23 참조).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들의 스승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과 화합할 수가 없었겠지요. 그 반대파들을 무서워하며 용서할 수가 없었기에 어떤 집에 모여 모두 문을 닫아걸고 숨어있었겠지요(요한 20, 19 참조). 그러나 부활하여 오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밖으로 사람들에게 내보내시며(요한 20, 21 참조) 성령을 주십니다(요한 20, 22 참조). 이렇게 성령을 동반한 파견(요한 20, 23 참조)은 이제 불안과 증오를 벗어난 새 삶의 출발입니다. 그것은 용서로써 실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 23) 하고 말입니다. 그러한 용서로써 이제 오순절 사건은 드디어 사도들을 사람들 가운데로 나아가게 하시고 서로 통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강림은 곧 부활신비의 완성이자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그 태초의 사건처럼 이제 인류의 새로운 출범, 즉 인류의 재창조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의 그 두 번째 비극을 회복한 사건이 오늘 성령강림의 체험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거스르고 각자 자기들의 주장만을 앞세우다 보니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면서 뿔뿔이 흩어진 사건이 ‘바벨탑 사건’입니다. 분열이 분열을 가속화하고 갈등이 갈등을 중첩시키는 인간들 상호간의 불신과 몰이해는 언어의 불통으로써 그 현실을 반영합니다. 그러한 ‘바벨탑 사건 이후’의 인류가 지닌 불행을 극복하는 하느님의 역사가 오늘 ‘성령강림 사건’으로 이룩됩니다. 즉 다시 ‘하느님의 한 백성으로 재창조되었음’을 오늘의 이 축제로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재창조란, 오늘 제2독서 코린토 1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듯이, 한 몸의 많은 지체와 같이 우리 각자의 하는 일과 처지가 다르면서도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우리 교회 공동체의 일치로써 실현되는 것입니다(1 고린 12, 3∼13 참조). 즉 모두가 자기네 말로 한 마음이 되어 알아듣는 사이가 되는 신비가 오늘의 성령강림 체험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이라 부르는 ‘성령강림 대축일’은 부활 축제의 완성을 이루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위대한 오십일(the great fiftieth day)’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을 기념하는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오십일만의 축제를 ‘해방의 완성을 이루는 날(Asseret)’로 지냈는데, 그렇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진짜 ‘파스카’를, 즉 새로운 삶을 얻은 ‘부활의 축제’를 이 오십일을 통하여 완성하는 이날 ‘성령강림의 축제’로 기념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과 성령을 체험하는 것은 사실상 동일한 체험입니다. 즉 부활과 성령강림은 한 가지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증거 없이 그리스도의 죽으심(묻힘)과 부활승천(일어섬과 들려 올리어짐)을 알 수가 없습니다. 비록 성령강림 사건을 사도행전의 보도대로 오순절, 즉 부활 후 오십일만의 축제일로 삼는 것이 4세기 이후 교회의 전례력입니다만, 실상 초대교회에서 이 부활 시기의 오십일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을 함께 입체적으로 기념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는 요한복음서 20장 19∼23절은, 부활 당일에 한 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여 오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숨결로 성령을 주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서로 알아듣는 사이로, 즉 서로를 용서한 사이로 변화된, 새 인류의 출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성령강림의 축제가 드러내는 최대의 상징은 ‘다 같이 한 곳에 모이는 것(일치)’입니다(사도 2, 1 참조). 다 같이 한 곳에 모이는 거기에 성령께서 모두를 하나로 즉 공동체로 묶어주는(일치의) 기적을 이루어주십니다.
세상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알아들을 만한 말을 하는데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외국어가 아닌 우리 한국어로 말하는데도 부모의 말을 자녀가 알아듣지 못하고, 자녀의 말을 부모가 알아듣지 못하며, 남편과 아내 사이에, 여당과 야당 사이에, 기업인과 노동자 사이에, 영남과 호남 또는 남한과 북한 사이에, 그리고 대통령 및 정부당국과 국민들 사이나 더 나아가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성직자라 일컬어지는 저 자신이 사목을 하면서 교우들로부터 오해를 받거나 말이 통하지 않는 경험을 하면서 참으로 괴롭습니다. 교우님들과 저 사이에 아직 부활의 체험이 이룩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자괴감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우 분들이 개인적으로는 열심한 신앙적 태도를 보이면서도 공동체적 관심을 지니지 않고 뿔뿔이 개인적 편리함과 주장으로 나아갈 때, 저 자신이 아직도 교우들 가운데 몸을 완전히 담지 못한 부덕을 지니고 있구나 하는 자괴감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오실 때 당신의 상처를 토마스에게 보여주시자 그 의심 많던 제자가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는데, 그와는 달리 나 자신의 삶을 혼연히 바친 희생의 상처를 보여주지 못하여 교우들께서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가 하는 슬픈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보여주신 손과 발 그리고 가슴은 그분께서 죽으신 증명입니다. 즉 치명적 상처가 그분이 누구인가에 대한 증명입니다. 저는 사제로서 그분처럼 치명적 상처를 받은 일이 없어서 교우들의 진심을 얻어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때문에 제자들의 변화를 이끌어내신 예수님이시지요.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른 그 부활의 체험 즉 새로운 삶의 성취가 성령강림에 의하여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오로의 말씀으로써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성령으로 부활하게 하신 바와 같이, 우리 또한 그 받아 모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하게 되었다고 로마서 8장 11절에 바오로 사도께서 확언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이루시는 그 성령의 강림을 오순절에 체험합니다.
그러한 성령강림의 오순절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사도들처럼 성령의 체험을 기대하는 가운데 우리 서로 통하는 사이로, 즉 공동체로서의 한 머리에 여러 지체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을 형성해야겠습니다. 그것이 진정 ‘삶의 대화’가 통하는 사이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 공동체가 먼저 <새로운 인류>의 모습을 이 세상에 보여야겠습니다. 그렇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하나가 되는 성령의 역사에 참여하는 오늘 우리 서로가 진실로 통하기를 서로에게 호소하며, 한 세례를 받았음을 갱신하는 우리의 신앙을 고백해야겠습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94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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