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일

2014년 5월 18일 10시 만수리공소


아버지의 집과 같은 우리나라여야! 

알맹이가 있는 우리 삶이어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 6)

 

오늘 복음서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 최후 만찬 때에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담화중의 말씀으로 요한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서의 저자가 그 최후 만찬장에 동석하여 속기록으로 적어둔 말씀일까요? 그런 게 아닙니다.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기보다는 복음서를 쓴 사람이 묵상록으로 적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거의 70∼80년이 지나자 그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당시 신자들이 까마득한 옛일로만 생각할 수도 있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직접 모시고 살았으며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체험했던 요한 사도가 자신의 그 체험을 이러한 묵상록으로 기록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지금도 예수님께서 생생하게 우리 사이에 계심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전해주는 말씀이 곧 오늘 우리가 읽는 복음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넘어 부활하신 그 단계의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실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오늘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 때 당신 자신에 대하여 계시하시던 그 모습을 회상하면서 그 분의 부활 이후 우리 가운데 계시는 현존 양식과 일치한 상황의 말씀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그분이 하신 말씀실천을 통하여 하느님 안에 함께 살아 있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 또한 그러한 믿음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믿음이란 과연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짚어보기 위해서 오늘의 복음 말씀을 가지고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겠습니다. 신앙에 대한 진단을 하기 위한 세 가지 질문입니다.

 

“길이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하여 단도직입적인 대답을 하기란 사실상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의 삶이란 씨 없는 과일이어서는 아니 된다는 상징적인 말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그 안에 알맹이(核)가 들어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그 삶의 알맹이란 진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란 ‘생명의 씨’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인생이란 씨 없는 수박과 같이 한번 소모되고 끝나는 것이어서는 아니 됩니다. 양계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달걀이 대개는 무정란이라 하여 이즈음 이른바 웰빙 바람을 타고 유정란을 돈 더 주고서라도 사먹는 풍조가 있는데, 하물며 우리 자신이 매일매일 땀 흘려 살아가면서도 그 우리의 삶이 그냥 소모되고 마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찌 한 인생으로서의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러함을 일관하여,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의 참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 그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 자신이 곧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생길이 어느 목적을 두고 있는지를 새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란 곧 우리가 아버지께 가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당신을 통해서라야만 아버지께 갈 수 있다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 6) 하고 단언하신 그 연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고별 담화의 서두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셨습니다. “너희는 심란해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요한 14, 1∼2) 그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 9)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요한 14, 10)

 

이러한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버지란 자녀들의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때문에 아들이 누구인지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 일회적 직선으로 근원으로부터 떨어져서 멀어져만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에로 회귀할 수 있는 것이어야 가장 안정된 삶이 됩니다. 마치 세상에 나가 자아 성취를 하는 많은 아들들이 하루가 저물 때마다 가정으로 돌아감으로써 그 삶이 안정되듯이, 인생의 성취는 곧 하느님께 돌아감으로써 한 인생이 참되게 마무리 될 수 있으며, 아버지의 집에 돌아감을 항상 그 확실한 가능성으로 지닐 때 떠돌아다니는 동안에도 그 삶은 바탕이 있는 삶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아버지 계신 집안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다 아들로서(즉 자녀로서) 자아를 성취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세상이라는 땅이 어머니 같이 우리를 길러줌을 의미합니다만, 이 모든 아들들이 어디서 왔는가를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땅이 즉 세상이 키워주고 있는 이 자녀들을 하늘이 낳아주었음을 깨달아야 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사람 모두를 품어서 길러 주고 있는 땅의 품이 어머니 같다면, 이 모든 자녀를 낳아주기는 아버지 같이 하늘이 하셨음을 퇴계(退溪 李滉) 선생께서 그분의 계명륜(戒明倫)에서 표현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참고하여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乾爲父也라 萬物生焉하고(건위부야 만물생언 : 하늘은 아버지가 되는지라 이 세상 모든 것을 낳고), 坤爲母也라 萬物育焉하니라(곤위모야 만물육언 : 땅은 어머니가 되는지라 이 세상 모든 것을 기른다).

 

여기서 우리가 한번 되짚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열매를 맺으면서 그 안에 씨를 넣어 준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씨란 하늘의 능력 즉 아버지의 능력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성취하는 것을 열매라 한다면 그 열매가 지닐 수 있는 씨와 같은 생명력을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근원이 있어야 하고 그 근원의 생명력을 우리 삶의 성취 속에 지니는 것은 곧 우리 삶이 발사된 일회적 소모성의 삶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아비 없는 자식처럼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4월 16일 진도 앞 바다에서 여객선이 침몰하여 수백 명의 생명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건 나이 먹은 사람들이건 여행길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생명들을 기다리는 식구들의 심정을 우리는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망연자실(茫然自失)…! 모든 국민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참사 현장의 48시간 동안 국가가 없었다.”고들 말합니다. 그 희생자들이 돌아올 나라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 유가족들은 물론이려니와 국민들이 ‘우리나라’가 과연 존재 하는가 하는 망연자실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튼튼한 집안, 뼈대 있는 집안의 자녀들은 무엇인가 확실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들의 심정으로는 죽을 위험에서 살아 돌아갈 아버지의 집이 없는 신세들인 것처럼 절망을 체험합니다. 집을 떠난 자녀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다면 그 객지고생으로 절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습니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집, 그곳은 넓은 어깨의 아버지가 나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믿음의 집입니다. ‘우리나라’라는 국가가 그런 믿음의 집이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나라’가 이즈음 국민의 가슴에 느껴지지 않는 듯 망연자실의 체험입니다. 국민의 삶을 돌보아야 할 책임을 진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서 국민들의 망연자실이 분노로 변하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 하고 서로에게 질문할 정도입니다. 이런 절망스런 질문은 부모에게서 버림 받은 자식의 심정 같은 토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께 돌아감”을 말씀하신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로부터 깨달음을 얻습니다. 아버지가 곧 근원이요 동시에 회귀점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사신 삶 전부가 곧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여정이었습니다. 그 여정의 도착점이 곧 그 분의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삶의 영역이 곧 “아버지 안에”(요한 14, 10) 있는 것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그분의 삶 자체가 아버지께 돌아가는 길, 즉 아버지께로 향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그 여정, 즉 그 길의 이정표를 제시하는 바탕, 달리 말하여 삶의 진리가 그렇듯 삶 자체로 드러나는 것이었고, 그래서 아버지와 동일하게 지닌 생명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길로 삼고, 그분을 진리로 삼고, 그분의 생명을 함께 삶으로써 문득 우리는 아버지께 돌아온 체험을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일컬어서 당신께서 아버지께 돌아가신다고 말씀하신 그분과 함께 그분을 통하여 우리도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살아오면서 고뇌와 절망 속에서 한두 번쯤, 아니 수없이, 좌절한 체험이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지치고, 하고자 하는 일에서 번번이 실패하고, 옳은 일에 모든 희생을 바쳤지만 그것이 우습게도 무위에 그쳐버렸고, 병고나 세상의 각박함과 주변의 배신적 분위기에 직면하여 절망하고 있을 때, 모든 사람을 믿을 수 없다 말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실망하고, 하느님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절망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깁시다! “나는 길이다. 나는 진리이다. 나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사신 삶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기억합시다. 길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앞날을 뜻합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의 처지가 어떻든 무너지지 않는 영원불변의 바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앞길을 향한 우리의 발길을 전진시킬 수 있습니다. 앞날을 향하여 움직여 나아가는 사람이 생명 있는 사람입니다. 가는 길이 험하다 하여도 당신 자신을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제시하신 그분과 함께라면 아버지께 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아버지의 집으로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객선 침몰의 대참사 현장에서 속수무책으로 생명을 건져내지 못한 국가관리 체계에 대하여 절망하는 그 수백 명 희생자 가족들의 심정을 어느 누구도 쓰다듬어 줄 수가 없습니다. 이 같은 절망의 현실이 또 다시 벌어져서는 아니 되겠다는 통절한 깨달음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한 깨달음은 참사의 근본적 이유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앞서 돈 때문이었다는 깨달음이어야 합니다. 생명보다도 돈을 숭상하는 우리 모두의 모습에 대한 한없는 부끄러움이 그 깨달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의 안위가 아니라 자신의 권력에만 급급해하는 정치인들에게 나라를 맡긴 국민 모두의 각성이 따라야 합니다. 그런 정치 권력자를 향한 국민의 분노는 그래서 우리 모두의 자신들을 향한 분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지켜 나갈 길은 돈만 보이는 방향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알맹이란 돈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알아보는 삶이 인생(사람의 삶)입니다. 최우선적으로 사람을 서로 알아볼 수 있는 길을 함께 가는 가운데 삶(생명)의 진리가 있음을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삶의 알맹이는 ‘사람’입니다. 그런 뜻에서 ‘사람’을 ‘씨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자리가 마련된 아버지의 집”(요한 14, 1 참조)과 같은 곳이어야 하는, 즉 사람이 사는, ‘우리나라’여야 합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91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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