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2014년 5월 11일 09:00 @ 도화담공소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란? 

흩어진 마음들을 모을 수 있는 목소리!

 


오늘 부활 제4주일을 ‘성소주일’이라 하는 이유는, 오늘 미사 전례의 말씀으로 ‘착한 목자’에 관한 요한복음서 10장을 봉독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착한 목자 주일’의 메시지는, 참된 목자와 양들과의 관계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참 목자와 양들과의 관계를 일컬어 우리는 ‘성소’라고 합니다. 성소란 하느님의 부르심을 뜻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양떼를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요한 10, 3∼5)

 

자기 양들을 하나하나 부르는 목자, 그리고 그 목자의 음성을 알고 뒤따르는 양들과의 관계가 곧 ‘성소(聖召)’입니다. 간단히 줄여서, ‘부르시는 분과 따르는 무리’ 사이의 그 관계가 곧 성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자와 양들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목자와 양들의 모습은 “떠돌며 사는 아람인”(신명 26, 5)으로서 목축 생활을 하던(창세 4, 2 참조) 이스라엘 백성의 정서를 전제로 하여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목자는 야수(野獸)들로부터 양들을 지키는 힘을 가진 강한 사람인가 하면(1 사무 17∼37; 마태 10, 16 참조; 사도 20, 29), 양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기울여 그들의 사정을 숙지하고 온갖 조치를 다하여(창세 33, 13∼14) 약한 양들을 안아주고(이사 40, 11), 모든 양들을 자기 딸(자식)처럼 사랑합니다(2 사무 12, 3).

 

이러한 구약성경의 목자에 관한 묘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 있어서 백성의 참된 지도자가 지닌 권위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한 비유인 것입니다. 즉 목자는 양들의 ‘주인’이며 동시에 ‘동반자’였습니다. 목자는 주인으로서 양에 대하여 생사여탈권(生殺之權)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목자는 양을 자식처럼 애지중지(愛之重之)합니다. 주인으로서 양에 대하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목자이지만, 또한 양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노고와 위험 부담을 아끼지 않으며 양의 처지를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목자의 상반된 듯한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나라 근대의 여명에서 선각자이자 민족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쓰신 그 유명한 목민심서의 서문을 인용해보고 싶습니다. “맹자는 목초로 가축을 먹이는 것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것에 비유했다. 그러나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목민(牧民)이라 한 것은 여러 성현들이 남긴 뜻이다.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은 곧 백성을 기르는 것, 즉 목민이다. 내가 책이름을 ‘목민심서’라 한 까닭은 목민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몸소 실행할 수 없는 처지인지라 마음으로라도 목민하고자 ‘심서(心書)’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여기서 다산 선생의 헤아림과 같이, 다스리는 권위란 양육하는 직무와 같은 것이라는 점을, 성경의 목자상(牧者像)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목자는 주인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한편 헌신과 사랑을 그 권위의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같은 고대 근동제국의 왕들은 신(神)으로부터 양떼를 모으고 돌보는 일을 위탁받은 자로 자처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성경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대리자가 보여주는 목자상을 통해서 하느님과 당신 백성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지도자나 왕들을 보내시지만, 근동 제국의 이방인 왕들처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도 목자라는 칭호를 명시적으로 쓰는 것을 구약성경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의 참 목자는 곧 야훼 하느님뿐임을 그 기본 사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지도자들이 목자로서의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1 열왕 22, 17; 예레 23, 1∼2; 에제 34, 1∼10 참조), 목자라는 칭호는 ‘새 다윗’에게만 유보된 것이었습니다. 새 다윗이란 하느님께서 당신 양떼의 통치권을 다시 잡으시고 그 권한을 맡기실 메시아를 뜻합니다.

 

그러한 목자의 권위로 오실 메시아의 시대에 관한 예레미아나 에제키엘 같은 예언자들의 선포는 그야말로 종말론적 희망의 표현이었습니다. 옛 지도자들은 목자로 자처하면서도 자기들의 사명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몸소 양떼를 보살피시어(예레 23, 3) 흩어졌던 것들을 모아들이시며(미가 4, 6) 돌아오게 하시고(예레 50, 19), 이를 지키실 것이라(예레 31, 10; 에제 34, 11∼12)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당신 마음에 드는 목자를 세워 분별력과 지식을 갖추고 양을 다스리게” 하실 것이라 했습니다(예레 3, 15; 23, 4).

 

에제키엘 예언자에 의하면, 야훼를 하느님으로 모시는 목자 즉 ‘새 다윗’ 이외에 다른 목자가 없습니다(에제 34, 23∼24). 그리고 즈기리야 예언자가 말하듯, 장차 올 목자는 “찔린 자”(즈가 12, 10)이신데, 그 목자는 묵묵히 끌려가는 양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흩어진 양을 모아 의롭게 하는 ‘야훼의 종’이라고 이사야 예언서가 지칭한 바 있습니다(이사 53, 6∼7. 11∼12).

 

이와 같은 예언 선포와 같이 종말의 희망으로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목자가 곧 예수님이심을 신약성경은 증언하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서나 히브리서 또 더욱 묵시록에서 이렇게 마지막으로 오신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이 암시되고 있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읽는 요한복음서가 앞서의 모든 성경에 제시된 목자상의 내용을 웅대한 구도 안에 종합하여, 살아 있는 교회를 유일한 목자의 지팡이 아래 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점을 우리는 오늘 이 ‘착한 목자 주일’에 요한복음서 10장 전체를 읽어보며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요한복음서 10장에서 제시되는 목자상은, 왕 또는 무리의 주인으로서 군림하는 목자라기보다는, 아버지의 사랑을 제시하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목자상입니다(요한 14, 20; 15, 10; 17, 8∼9. 18∼23 참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서 10장에서 당신이 그러한 참된 목자이심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분은 유일한 중개자이시며 양 우리의 문이며(요한 10, 7), 양이 목초를 찾아 들어가는 문(요한 10, 9∼10)이십니다. 그분만은 양을 다스릴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으며(요한 21, 15∼17 참조), 양들이 자유로이 우리에 드나들어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민수 27, 17 참조). 그러면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시기 때문에 완전한 목자이십니다(요한 10, 15. 17∼18).

 

오늘 우리는 ‘목자와 양들 사이의 상호 인식’을 이 주일 메시지의 핵심으로 보게 됩니다. 그것은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를 따르지만, 목소리를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요한 10, 3∼5 참조)라는 것입니다. 양들이 몰라보는 사이에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요한 10, 1)라 하셨듯이, 강권을 동원하거나 비정통적 권력으로 또는 무력이나 폭압정책으로 국가를 어지럽히고 국민을 불행하게 하던 사람들이 무슨 지도자인척 행세하던 그 암울한 정치사가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강권을 휘두르던 지도자들은 자기희생을 하지 않고 백성을 희생물로 삼기 때문에 그 치세 하에서는 백성의 마음이 흩어져버리기 마련입니다. 그런 난국의 상황을 일컬어 종말적 징조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세월호 참사와 더불어 국가 통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온 나라에 가득한 상황처럼 그렇습니다. 통치권을 행사하는 지도자의 목소리가 아주 낯설게만 느껴지는 이즈음의 종말적 상황에서, 백성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지도자란 자기 자신이 먼저 희생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런 자기희생의 참된 지도자라야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의 문에 들어오는 목소리의 주인공, 그래서 낯설지 않은 지도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겠지요. 착한 목자와 양들이 서로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통치권자와 국민들과의 사이가 그러해야겠지요. 양들을 하나하나 알아보고 부르시는 그 착한 목자 같은 지도자를 백성이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착한 목자는 자신의 희생으로 모두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분입니다. 그분 자신의 희생으로 모두 함께 사는 새로운 선택의 길이, 곧 부활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요한복음서 10장의 예수님 말씀은 돌아가시기 전의 말씀이라기보다는,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성경 저자가 정리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먼저 죽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그 말씀이 우리의 가슴속에서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오늘 성소자들입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들을 줄 아는 그분의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목자로서의 길을 가고 있는 저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 땀을 흘리는 사람으로서 예수님께서 앞장 서 가신 그 길을 따르는 그분의 양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분처럼 자신을 먼저 희생하여 양떼를 모으듯 자신을 바치는 삶이 되어, 하느님 백성이 모일 수 있기를 목표로 삼는 하느님께의 봉헌된 삶, 곧 수도자나 성직자의 삶을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삶이 정말 그러할 수 있도록, 교우 여러분 또한 한 노선에서 그들을 위한 염려와 기도를 오늘 특히 바쳐야 할 것이고, 그것을 지망하는 신학생들과 수도생활 지원자들을 또한 기억하고 그들을 육성하는 일에 동참하도록 마음을 다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최근 세월호 참사에 의한 우리 사회의 난국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국민의 마음을 잘 헤아려서 엉뚱한 말을 하지 않는 대통령이나 지도자들을 찾아야 합니다. 국민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지도자라면 물러나야 합니다. 국민들의 마음의 문에 들어가려 하지 않고 다른 계책으로 권력을 행사하려하는 대통령이나 지도자들이라면 국민들의 마음을 짓밟고 자신들의 힘으로 모든 것을 차지하려는 도둑이나 강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르는 양들처럼 국민들이 따를 수 있는 지도자들의 진실 된 음성이 들리지 않는 지금의 정치 현실이 오늘 우리의 가장 큰 불행입니다. 믿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들을 국민들이 새로이 찾아나서야 할 판국입니다. 이러한 난국의 현실이 하루 속히 바로잡아지기를 오늘 ‘착한 목자 주일’에 국민적 입장에서 기도해야겠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들려와야 합니다. 백성들의 마음에 들어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새로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교회나 국가나, 거기서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라야 흩어진 마음들을 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우리’가 이루어집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90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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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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