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베드로와 성바오로 사도대축일

2014년 6월 29일 교황주일


보수 베드로와 진보 바오로! 아니, 진보 베드로와 보수 바오로!


젊어서 보수면 가슴이 없고, 늙어서 진보면 머리가 없다?



‘꼴뚜기 보수’ 대행진, 멈춰 세워야 한다.” 라는 제목의 신문 칼럼을 며칠 전에 읽었습니다. 세명대의 이봉수 교수가 경향신문에 쓴 칼럼입니다. 6월 26일자의 글입니다. 이 글의 끝에 이봉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젊어서 보수면 가슴이 없고 늙어서 진보면 머리가 없다’는 말이 있다. 차라리 ‘머리가 없다’는 욕을 먹을지언정 한국의 보수가 저 모양이라면 나는 진보로 늙어가련다.”

 

지금 한국 사회는 극한적 대립 양상으로까지 번진 ‘생각’의 분열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른바 보수 세력과 생각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반대편이라 여기는 사람들을 향하여 ‘좌파, 종북, 빨갱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댑니다. 그리고 한편 진보 세력과 생각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향하여 ‘보수 꼴통’이라면서 비난을 퍼붓습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런 식으로 생각 다른 사람들을 헐뜯게 되었는지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이봉수 교수는 인용한 말 가운데 진보와 보수를 가슴과 머리에 빗대어 평가하고, 늙어가는 자신의 처지에서 머리가 없는 사람으로 비난 받아도 기꺼이 진보의 노선에 서겠다고 말합니다. 이 교수의 이런 자괴적 표현을 제가 굳이 긍정적으로 이해하자면, 그는 나이에 있어 늙어가더라도 생각에 있어서는 젊음을 유지하겠노라는 뜻으로 읽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의 두 사도 축일에 앞의 이봉수 교수가 인용한 가슴과 머리로 두 분 사도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베드로 사도는 보수주의자이고 바오로 사도는 진보주의 같이 여겨집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두 사도의 보습이 바뀌어 보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보수주의자 같고 바오로 사도는 진보주의자 같은 까닭이란, 가톨릭교회 측에서는 베드로를 첫 교황이라 일컬으면서 교회 정통성을 베드로에게까지 소급시켜 말하는 반면에, 상대적으로 바오로를 내세워서 걸핏하면 가톨릭을 비판하는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측의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분 사도를 이렇게 대립적 모습으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내세우는 행태는 보수와 진보의 왜곡된 상호비판에 흡사한 아전인수로 저의 눈에 비쳐집니다.

 

그러나 한편, 베드로 사도가 진보주의자 같고 바오로 사도는 보수주의자 같이 여겨지기도 하는데 그 까닭이란, 두 분이 생전에 보여준 행동 방식에 있어서 베드로는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분이라기보다는 (그분께 죄송한 표현입니다만) 자기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즉각적 반응으로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을 보여준 분이었고, 바오로는 학식을 많이 갖춘 분다운 처신으로 그때그때 머리를 잘 써서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는 (그분께 죄송한 표현입니다만) 꾀 많은 분이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바오로 사도에 비하여 우리에게 전해지는 베드로 사도의 글이 빈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글은 ‘베드로1서’와 ‘베드로2서’ 뿐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글은 그분의 서간만 하더라도 14편이나 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실상을 그 내용으로 하면서 결국 바오로 사도의 활동을 정점으로 하는 편집의 성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신학적 기반을 바오로 사도께서 확고히 다져주셨다 할 수 있습니다. 복음 성경에 있어서도 공관 복음서들은 바오로 사도의 선포에 의한 영향을 많이 받아서 형성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교회 정통 신앙의 소프트웨어는 바오로 사도의 역할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신앙에 관련한 사상체계의 주인공이므로 ‘머리’의 역할을 하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반면에 그 ‘머리’의 역할보다는 몸으로 직접 부딪쳐 신앙을 보여준 분이 베드로 사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가슴’으로 행동한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의 최후는 로마에서 장렬한 치명으로 교회의 반석다운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보편교회(가톨릭)의 위대한 하드웨어를 형성해주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 분 사도께서 목숨을 바쳐 복음을 증거 한 행위의 상징성은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자신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감히 서서 죽을 수 없다면서 머리를 땅으로 향하여 거꾸로 매달려 죽으셨다는 것은 그 의미가 큽니다. 예수님의 최후에 수제자로서 배반을 했다는 자신의 과오와 더불어 그분이 평소 짧은 생각으로 경솔했음을 늘 가슴 속에서 뉘우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중성이 부족했던 자신의 머리를 땅으로 향하게 하여 최후 순간을 맞이하려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티칸 언덕에서 그분 최후의 자리가 보편교회의 중심이 되었지요).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최후는 참수형이었습니다. 바오로를 처형한 사람들은 그분의 목을 베어 머리를 땅에 떨어지게 하였는데, 그 순간 바오로의 머리가 속절없이 스러져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분 머리가 세 번씩이나 움직여서 그 세 곳에 샘물이 솟았다는 로마 성 밖의 ‘세 샘’<Tre Fontane · 三泉>이 상징하는 바가 있습니다. 즉 바오로의 머리가 떨어져 세 곳에 피를 묻힌 자리에서 우리 신앙 증거의 싱싱한 샘물이 솟는다는 상징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두 분 사도를 보건대, 한 분은 행위를 우선하는 열정의 가슴으로, 다른 한 분은 확고한 신념의 머리로, 우리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먼저의 한 분은 그 열정의 가슴을 지녔으면서 동시에 머리처럼 교회의 중심이 되셨고, 다른 한 분은 명석한 신념의 머리를 지녔으면서도 이방인의 사도라는 별칭을 얻었듯이 복음 선포의 경계선이 없음을 몸으로 보여 세상 끝까지 가겠노라는 넓은 가슴의 열정으로 ‘달릴 길을 다 달린’(2티모 4, 7)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이봉수 교수의 말을 인용한 표현을 빗대어서 저는 이 두 분 사도들께서 가슴으로의 진보와 머리로의 보수를 자기 처지에서 모두 보여주신 분이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즉 ‘보수 베드로와 진보 바오로, 그러나 동시에 진보 베드로와 보수 바오로’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분 사이에 갈등이 있었음을 우리는 사도행전과 서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실천함에 있어서 유다 율법과의 저촉 사안에 머뭇거리는 보수성을 보인 반면에, 바오로 사도께서는 그 율법 사안을 과감히 뛰어넘는 진보성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또 한 편, 베드로 사도께서는 당대 유력한 사람들의 세속 권력과의 비타협적 처신으로 오해를 사기도 한 진보성을 보였다면, 바오로 사도께서는 로마시민권을 소지하여 세속 권력을 활용하기도 한 보수성을 보였다고 평가할 여지가 있지요.

 

앞서 인용한 이봉수 교수의 말을 뒤집어 읽어서, ‘젊은 가슴이라면 진보이고 늙은 머리라면 보수이다’라 할 수 있겠지요. 이 말에 더 의미 확장을 하자면, ‘가슴은 열정이요 머리는 지혜’라 할 수도 있지요. 열정이 없으면 앞을 향하여 위험하지만 개척정신(개혁지향성)의 발을 내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엔 이른바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데, 그건 기실 ‘비겁한 안주’라 할 것입니다. 그런 태도가 ‘보수 꼴통’이라는 비웃음을 사는 기득권 집착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없으면 현실을 간과하여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그건 진정한 진보가 아니라 ‘파괴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데, 그건 기실 ‘위험한 짓’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 태도가 ‘극좌’라는 비웃음을 사는 무모함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 자체만을 고집하여 사실상 지혜롭지 못한 비겁한 태도를 속된 말로 ‘잔머리 굴린다.’고 평합니다. 그 비겁한 잔머리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집착에 대한 고발에 맞서서 이른바 색깔론으로 근거도 없이 ‘종북, 빨갱이’라 삿대질을 합니다. 우리 한국 사회의 정치적 갈등을 직시하자면, 그렇듯이 진정한 열정의 가슴과 참 지혜의 머리가 상실 되고 비겁한 잔머리와 무모한 투쟁의 가슴이 맞부딪쳐 공동체라는 국가사회가 참담한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한 몸의 머리는 썩고 가슴은 악의에 차 있다면 그게 정상인의 몸이 아니지요. 그러한 우리 국가사회라는 공동체가 비정상의 중병에 걸려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두 분에게서 우리는 고유한 특성(개성)을 소지한 사이에 통합적 어울림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두 분은 얼핏 서로 다른 노선을 가는 행보로 각자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공동의 목표 하에 합일을 이룬 분들입니다. 그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습니다. “할례 받은 이들을 위하여 베드로에게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주신 분께서, 나에게도 다른 민족들을 위한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주셨다.”(갈라 2, 8) ‘할례 받은 이들’이란 율법을 숭상하는 유다인들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베드로 사도는 주로 유다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그 자신의 회심 이후 유다교의 시각을 뛰어넘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수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점은 바오로의 회심을 기점으로 이방인 세계로의 복음 선포의 영역이 넓어져 감을 사도행전(9장 이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요즘의 우리 시쳇말로 글로벌화 하는 복음 선포의 기수가 바오로였습니다. 그러한 바오로의 넓은 시각에 의해서 복음전파의 무대가 유다교 영역을 뛰어넘어 세계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결국 교회의 주춧돌 베드로 역시 세계의 중심부(로마)를 향하여 투신하게 되고 범세계적(보편적) 교회의 반석으로 세계인들의 눈앞에서 장렬하게 신앙을 증거 하는 이른바 첫 교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전에 발탁된 수제자로서 초대교회의 수장이었습니다. 그분은 오늘의 복음 성경에서와 같이,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알아 본 신앙고백으로써 교회의 반석이라고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인정받은 분입니다(마태 16, 15∼19 참조). 그러한 베드로 사도는 그 후 예수님의 행보에 대해서 미덥지 않은 반응을 보이고(마태 16, 21∼25 참조), 더욱 예수님의 수난 현장에서 그분을 배반하기까지 했으며(마태 26, 69∼75 참조), 예수님의 부활을 적극 믿지도 않았고(루카 24, 11∼12 참조), 성령강림 후 자신의 사도적 사명의식을 실천에 옮기면서도 유다인들의 율법 테두리를 적극 뛰어넘지 못하다가(사도 9, 9∼11, 18 참조) 바오로로부터 그 우유부단을 비판받기도 했습니다(갈라 2, 11∼14 참조). 예수님을 향하여 선뜻 물 위를 걸어가는 용기를 보이면서도 믿음이 흔들리는 베드로였는데(마태 14, 22∼33 참조), 이러한 그 분의 성격은 촌사람다운 겁쟁이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따라 나서서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요한 13, 37 참조),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사람에게 칼을 뽑아 그 귀를 자르는 객기(?)를 부리기도 하다가(요한 18, 10 참조), 정작 자신에게 위기가 닥치자 비겁한 배신의 태도를 보인 베드로였습니다(요한 18, 15∼27 참조).

 

예수님의 이러한 수제자 베드로가 바오로와의 관계에서 점점 변화를 보였다고 저는 평가합니다. 베드로의 그러한 촌사람 모습이 바오로와의 갈등 아닌 갈등 체험을 통하여 속된 말로 배포가 커진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사실상 예수님과의 인연에 있어서 훨씬 후배인 바오로와의 관계로써 촌사람 행색에서 세계무대의 사람으로 변모되고 결국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서 교회의 ‘반석’임을 장렬하게 보여준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이러한 관계를 저 나름으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싶습니다. 즉, 우직하고 사려 깊지 못하면서 순수한 열정의 가슴으로 사도의 길을 걸었던 베드로가 머리 좋은 바오로의 박식하고 결단성 있는 깊은 사려를 따라 명실 공히 교회의 수장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두 분의 관계 속에서 바오로 역시 스스로 사도단에 늦게 편입(?)하여 예수님의 직제자들보다도 더욱 뚜렷한 복음전파의 족적을 남긴 분이 되었고, 속된 말로 더 나아가 교회의 브레인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유다교의 근본주의적 신봉자로서 복음 선포를 저지하려던 사울이 그리스도 체험의 순간에 변모하여 복음 선포 내용(케리그마)을 확고하게 확립해 놓은 바오로라는 이름의 사도입니다.

 

그래서 이 두 분의 사도를 일컬어, 한 분은 하드웨어로서 또 다른 한 분은 소프트웨어로서 세상을 복음화 하는 역할을 하는 사이라고 저는 평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어울리는 파트너가 이 두 분이십니다. 이 두 분의 모습과 역할에는 서로 다른 개성을 드러내는데, 서로의 사이는 동일 목적 하에 모습으로는 보수와 진보를 각자 지니면서, 역할로는 서로 보수와 진보의 역할 바꿈을 하는 관계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의 신앙이 탄탄한 2천년의 노정에 그 선명성을 지녀올 수 있었다는 역사 관망의 시각을 저는 지니고 싶습니다. 그 2천년 교회사 가운데 우여곡절이 많았다 하더라도(교회의 분열상과 세계사적인 비판이 따르더라도) 그 모든 노정은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요즘 어느 누군가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용어로 해괴하게 갖다 붙인 표현이지만) 오늘 두 사도들을 기리는 축제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두 분 사도들의 행업은 그래서 성령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부언하여, 두 분 사도의 모습과 역할에서 보수성과 진보성을 상호 교차적으로 관망하고 감사하는 것처럼, 이 나라의 대립적이고 악의적인 보수와 진보가 극복되고 어우러지기를 또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파트너십을 본받는 우리가 되게 해주시기를 기도하고 싶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는 열정의 젊은 가슴으로, 그리고 지혜를 교환하는 연륜의 머리로, 서로 복음 선포에 하나가 된 사이였습니다. 우리도 그리하면 얼마나 좋으랴…!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97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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