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일

2014년 7월 27일, 09시 만수리공소


귀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는 행복으로! 

하늘나라를 발견한 기쁨으로

 



우리는 2주 전 연중 제15주일부터 지난주 연중 제16주일에 이어서 오늘 연중 제17주일까지 예수님의 유명한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말씀을 봉독합니다. 마태오복음서 13장에 수록된 예수님의 그 일곱 가지 비유말씀 가운데 지난 연중 제15주일에는 그 첫 번째의 『씨 뿌리는 비유』와 그에 관한 예수님의 자세한 설명(마태 13, 1∼23)을 읽었고, 지난 주일에는 그 두 번째와 세 번째와 네 번째의 비유 즉『가라지의 비유』와『겨자씨의 비유』와『누룩의 비유』와 그에 대한 예수님의 자세한 설명을 마태오복음서 13장 24∼43절에서 봉독했습니다. 오늘 연중 제17주일에는 나머지 세 가지 비유(마태 13, 44∼48)를 봉독합니다.

 

오늘의 세 가지 비유는『보물의 비유』와『진주의 비유』와『그물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 말씀 다음에 ‘세상 종말’에 관한 말씀(마태 13, 49∼50)과 또 이어서 비유들에 관한 제자들의 이해를 예수님께서 확인하시는 말씀(마태 13, 52∼52)이 덧붙여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우리가 봉독한 부분의 말미에 덧붙여진 내용을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비유의 핵심적 내용은 제자들에게만 알려 주시고 그리고 제자들이 잘 알아들었는지 확인까지 하신다는 점입니다. 오늘 신자들께서 사용하시는 <매일미사>책 7월호(159쪽 오늘의 복음 봉독 시작부분)에는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라고 잘못 적혀 있습니다만, 마태오복음서 13장의 본문에는 앞의 네 가지 비유말씀만 군중들에게 하시고 그 후에는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셔서(마태 13, 36 이하 참조) 제자들에게만 가라지의 비유를 따로 설명하여 주시고 이어서 오늘의『보물과 진주와 그물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 주일에 읽은『가라지의 비유』에 관한 예수님의 설명과 오늘『그물의 비유』에 관한 예수님의 설명이 “세상 종말”(마태 13장 40절과 49절)이라는 표현의 말씀을 보면 종말에 이루어질 하늘나라 성취를 염두에 두고 하신 내용임을 주의 깊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사실『씨 뿌리는 비유』나 『가라지의 비유』나 『누룩의 비유』나 『보물과 진주와 그물의 비유』도 <하늘나라 성취의 날>을 그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이 모든 비유들의 주제인 「하늘나라」는 사실상 이 세상의 끝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려야 예수님의 참다운 제자가 됩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제자들에게만 이 비유들의 내용을 하늘나라의 성취에 관한 것으로 설명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장 9절과 43절) 또는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 16)라고 말씀하시고, 설명을 들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마태 13, 51)라고 확인질문까지 하십니다.

 

우리도 여기서 예수님께 직접 하늘나라의 비유말씀과 그 설명을 들은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끝에 하늘나라가 이룩됨을 알아듣고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살이에만 연연하지 말고 이 세상살이 속에 이미 하늘나라의 삶을 시작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길바닥이건 돌밭이건 가시덤불이건 좋은 땅이건 하늘나라의 씨를 뿌리시는 분이시고, 그 밭에 좋은 밀이건 가라지이건 자라게 놔두시면서 추수의 그 날을 내다보시기에, 세상이라는 바다에 치신 하늘나라의 그물을 끌어올리실 ‘세상 종말’을 상기시키시며, 겨자씨처럼 눈에 띄지 않게 작거나 또는 반죽 속의 누룩처럼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성장을 간파하시는 분이시고, 밭에 묻힌 보물이나 또는 세상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진주와도 같은 하늘나라를 위하여 전력투구할 것을 제자들에게 촉구하십니다.

 

이렇듯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늘나라의 삶을 살아야 함을 예수님께서는 비유말씀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세상에서 현세적 번영만을 추구함은, 그것이 바람처럼 구름처럼 자취 없이 지나는 것이며 또 거품과 같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는, 내일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권세나 경제적 욕망의 누각들이 한 순간 무너져 내리고 거짓과 쾌락의 추한 구렁텅이 속에서 인간이 파괴되는 것을 우리의 주변에서 항상 보아서 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이러한 현세 추구는 수천 년 전 인간이나 오늘의 인간이나 항상 끊임없이 벗어던지지 못하는 굴레입니다.

 

톨스토이 우화 <욕심쟁이 아내>


톨스토이의 우화집에 <욕심쟁이 아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외딴 섬 바닷가의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 한 채에 늙은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영감이 그물을 짜고 물질을 하여 근근이 살아가는 부부였습니다. 하루는 영감이 그물을 끌어올리는데, 지금껏 고기잡이를 해왔지만 그물이 이처럼 무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간신히 그물을 잡아당겨 놓고 보니 그물 속에는 아무 것도 없고 다만 손바닥 만 한 고기 한 마리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고기는 번쩍번쩍 빛나는 금으로 된 고기였는데, 그 영감에게 애절하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감님, 나를 바다에 다시 놓아주시면 은혜를 잊지 않고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영감은 그 고기를 먹을 수도 없는 것이고 해서, “그래라. 너 갈 데로 가서 잘 살아라.” 하면서 놓아주고는 빈 망태기만 들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고기잡이에 허탕치고 돌아온 영감의 말을 듣자, 굴러 들어온 복을 내던졌다고 아내는 욕을 퍼부으면서, “이 멍텅구리 영감아, 그러면 매일 양식 걱정하는 처지에 그냥 그 물고기와 함께 바다에 들어가 나오지나 말지, 무슨 주제에 빈손으로 저녁 먹으러 들어오고 있어?” 하는 것입니다. 들들 볶이던 영감은 슬픈 얼굴로 바닷가로 나가 힘껏 고함을 질러보았습니다. “금 물고기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니?”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자 정말 거짓말 같이 금 물고기가 물위로 쑤욱 올라왔습니다. 그리고는 “영감님, 왜 그러세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감은 “마누라가 나보고 없는 양식만 축낸다고 물에 빠져 죽어버리란다.” 하고 슬프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금 물고기가 말했습니다. “영감님, 걱정 마세요. 집에 가보시면 양식이 산더미로 있을 거예요.” 집에 돌아와 보니 과연 양식이 집안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돌아온 영감에게 아내는 “이 멍텅구리 영감아, 먹을 게 많으면 뭐해? 금방이라도 와르르 무너질 오막살이에서 그냥 살고 싶어?” 하며 더욱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감은 다시 바닷가에 가서 금 물고기를 불러 “금 물고기야, 새집 지어 주지 않는다고 쫑알대는 마누라쟁이의 소리가 부뚜막 솥뚜껑 같단다.” 하며 슬프게 말했습니다. 금 물고기가 “영감님, 걱정 말고 돌아가 보세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제는 마누라가 잔소리하지 않겠지!” 생각하며 돌아오는 영감을 보더니 아내는 새로 지어진 큰 기와집 대문 앞에 나와서 눈을 부라리며, “야, 이 무식쟁이 늙은이야, 나는 당신 같은 어부 마누라 노릇을 더 이상 못하겠어. 가서 나도 한번 장관 사모님 되고 싶다고 해!” 하는 것입니다. 또 다시 영감은 바닷가에 나가 금 물고기를 불러 힘 빠진 소리로 그 말을 전했더니, 금 물고기는 “영감님,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 보세요.” 하는 것입니다. 영감이 돌아와 보니, 어마어마하게 큰 대리석 집 마당에 머슴들이 왔다 갔다 하고 부엌에서는 어멈들이 떨그럭 떨그럭 하는데, 대청마루에는 수억 원짜리 밍크코트를 입은 아내가 비단 의자에 앉아 있다가 영감을 내려다보며, “야 이 비렁뱅이 늙은이야,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기어 들어와? 여봐라! 이 늙은이를 마구간에 끌고 가서 두들겨 패라!” 하는 것입니다. 영감은 두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설 수도 없게 두들겨 맞고 나서는 빗자루로 마당 쓸고 마구간 청소하고 밥은 부엌문 앞에서 얻어먹는 마당지기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럭저럭 세월이 지나가는데 하루는 아내가 갑자기 “이 몹쓸 늙은이야, 이제는 장관 사모님이 아니라 여왕이 되고 싶단 말이야!” 하고 고함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감은 바닷가로 나가 금 물고기에게 이 사정을 알렸습니다. 금 물고기의 안심하고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돌아와 보니, 이제는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대궐이 서 있고 군대가 지키는 가운데 문무백관이 나팔소리 맞추어 “여왕 폐하 만세!”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영감은 여왕이 된 아내의 신발이나 닦고 코푸는 휴지를 들고 대령하다가 행동 느리다고 회초리로 맞으면서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런 세월을 얼마간 지냈는데 또 갑자기 여왕 마누라가 영감에게 호통을 치는 것입니다. “야, 이 징그러운 늙은이야, 이젠 여왕 노릇도 지겹도다. 용왕이 되어 바다를 지배하고 온갖 물고기가 내 앞에 머리통을 조아리도록 하고 싶다고 금 물고기에게 전할지니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감은 바닷가에 다시 나가 “금 물고기야, 마누라 광기가 나날이 심해 이젠 여왕도 싫고 용왕이 되어 온갖 물고기를 손아귀에 넣고 싶다는 구나!” 하고 눈물 흘리며 말했습니다. 그 말에 금 물고기는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더니 말없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영감이 힘없이 집에 돌아와 보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궐은 사라지고 다 쓰러져 가는 코딱지 만 한 집에 누덕누덕 넝마 옷을 입고 쪼그려 앉아 먹을 게 없다고 쫑알대는 아내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다시 그 금 물고기를 잡아 보라고 바가지를 긁어대는 아내 등쌀에 매일 바닷가에 나가 그물을 쳐보지만 다시는 금 물고기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세상살이의 욕망은 톨스토이의 이 <욕심쟁이 아내> 이야기와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끝없는 욕망의 종살이에 매인 것이고 결국 인간만 추해지는 것입니다. 그 끝없는 욕망의 종살이 굴레를 끊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세상 욕망의 밭에 묻혀 있는 보물,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진주, 그리고 이 세상 바다에 던져진 그물을 끌어올릴 때 선택 될 좋은 물고기와 같은 하늘나라 결실을 바라보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한 하늘나라는 지금 이 세상에서 볼 때 전혀 승산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나쁜 가라지가 이 세상 밭에 더욱 기승을 부리며 자라고 있고, 하늘나라의 씨앗은 겨자씨처럼 잘 보이지도 않고 반죽의 누룩처럼 섞여 있으며, 땅에 묻힌 보물처럼 그리고 알아 볼 수 없는 진주처럼 눈에 띄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에 마치 밭에 묻혀 있는 보물 그리고 진주와 같은 그 하늘나라를 이 세상에서 벌써 알아보고, “세상 종말”에 있을 성취를 향하여 “가진 것을”을 다 팔아 사듯이 우리 생애를 바쳐 나아가야 합니다. 그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이 무성하게 생장하고 있으며, 그리고 반죽을 부풀리는 누룩으로 이 세상에서 확장되고 있다가 가라지와 나쁜 고기가 제외되는 그 “종말”에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로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들을 들려주시고 따로 제자들에게 설명까지 해주신 다음에 확인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질문에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답게 대답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마태 13, 51)

 

그러자 제자들은 “예”하고 대답하였습니다(마태 13, 51). 우리도 그 “종말”의 질문에 대하여 들을 줄 아는 귀, 그리고 볼 줄 아는 눈이 있는 제자들이라면 “예”하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그런 대화가 있던 날 이후 오늘 까지 아직 그 “종말”의 순간은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하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 대답 자체가 종말의 대답이어야 합니다. 그 종말의 대답 같은 것이 곧 한 순간의 “새 것과 옛 것”(마태 13, 52)의 판가름이 됩니다. 그 “예”라는 대답은 곧 결단의 표명입니다. 결단 표명, 그것이 곧 ‘종말’의 태도입니다. 다시는 바꿀 수 없는 대답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다운 깨달음의 경지에서 나온 대답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보이는 눈으로 간단한 답을 할 수 있는가 하고 나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Yes”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마태오 복음서의 13장에 수록된 예수님의 ‘하늘나라 비유’를 알아들은 제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일 것입니다. 그런 제자는 톨스토이가 들려준 우화의 마지막 허망한 종말 같은 처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종말은 지금 우리 각자의 결정적 순간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 종말이란 하늘나라를 발견한 지금 이 순간순간의 우리 삶이어야 합니다.

 

그 결정적 순간의 마음이란, 보물을 발견한 기쁨이어야 합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01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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