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8주일

2014년 8월 3일 09시 만수리공소

내 자식은 내가 먹이듯이 

당신의 백성을 당신이 직접 먹이시는 분 


우리는 오늘 유명한 ‘빵의 기적’ 즉 오천 명을 먹여주신 예수님의 기적을 마태오복음서에서 봅니다. 우리가 지난 3주간동안 마태오복음서 13장에 수록된 예수님의 하늘나라 비유말씀을 주일복음으로 봉독하여왔었는데, 오늘부터 3주간 동안에는 예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기적 세 가지를 마태오복음서에서 듣게 됩니다. 앞서 우리가 3주간동안 하늘나라의 실현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면, 이제 3주간동안에는 그 하늘나라를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암시해주는 표징을 보게 됩니다. 앞서 비유말씀에 대하여 예수님의 제자들만 그 의미를 알아듣게 되었듯이, 이제 예수님의 권능을 드러내주는 기적 세 가지를 통해서도 예수님이 과연 누구이신가를 알아보게 되는 사람들은 곧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3주간 후 연중 제21주일에 가서는 예수님을 곧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마태 16, 16)라고 알아보는 믿음을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가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오천 명을 먹여주신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 어떤 것을 깨닫게 되겠습니까? 이 ‘빵의 기적’에 관해서는 이야기 할 것이 많습니다. 당신을 따라온 군중을 굶겨 되돌려 보내시지 못하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에 대하여 강론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배고픈 민생고를 충분히 해결해주실 수 있으신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에 관하여 강론할 수도 있고, 그와 연계하여 이 세상의 배고픈 사람들을 위한 교회의 현세적 사명에 관하여 강론할 수도 있는데, 그런 차원에서 더 구체적으로 굶주리는 북한 동포나 우리 사회의 불우이웃을 돕자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취지하에 그에 걸맞게 예수님께서 어떤 기적능력으로 빵을 많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자들과 함께 잡수시고자 준비해 오셨던 음식을 내놓으시면서 거기에 모여왔던 사람들이 각자 가지고 왔던 도시락 빵을 모두 내놓도록 설득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서로 풀어놓아 같이 먹음으로써 결국 모두 먹고 남았다고 강론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해석으로는, 세계의 부자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돈과 식량을 내놓는다면 굶주리는 수십 억 빈민들이 함께 먹고도 남을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게도 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오늘의 ‘빵의 기적’에 대하여 그럴싸하게 매력적인 해석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마치 아름다운 경치의 사진을 보고나서, 아름다운 경치를 보았으니 실체인 그 아름다운 곳에 더 이상 가볼 필요 없다고 만족해하든가, 실제 노래를 부른 가수의 노래가 멋있다는 평가보다 오디오 기계 성능이 좋아 소리가 멋있다고 하는 격이나 비슷합니다. 그것은 알맹이를 빼고 껍데기만 보는 식입니다.

 

오늘의 ‘빵의 기적’은 세상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자는 것을 그 본질적 의미로 삼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세상에서 이웃사람들의 굶주림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먹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사랑 실천에 관한 강론을 이 기적 이야기에서 꺼낼 수는 있습니다만, 그것이 이 기적의 본질적 메시지는 아닙니다.

 

우리가 이 ‘빵의 기적’을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이 마태오복음서 내용이 엮어나간 사건들 사이에서 이 기적이야기가 위치한 지점을 보면서 전후의 내용 관계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난3주간 동안 읽었던 일곱 가지 비유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그 말씀하시던 장소를 떠나 고향에 가셨다가 고향사람들이 당신을 믿지 않으므로 거기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이 떠나셨습니다(마태 13, 53~58참조).

 

마태오복음서 4장 12∼13절에 의하면,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 가셔서 악마의 유혹을 이기신 다음에 고향 나자렛에 가시려다가 요한 세례자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고향에 가지 못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 후 갈릴레아 지방을 돌아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제자들을 규합하시어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고향에 다시 가셨지만 고향사람들은 그분을 배척했습니다(마태 4, 14~13, 58의 내용).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활동하시던 갈릴레아 지방에서조차 공개적으로 활동하시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부신 활약을 보고, 또 그분의 하늘나라 선포 말씀을 듣게 된 주민들의 심상찮은 민심 동향에 대하여, 그 지방의 영주인 헤로데가 사찰력을 동원하게 됩니다. 마태오복음서 14장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이 자기한테 죽음을 당한 요한 세례자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하여 모종의 대책을 강구합니다(마태 14, 1∼13참조). 이러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레아 지방에서마저 활동하실 수 없으심을 아시고 다시 거기를 떠나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 곳’으로 가셨습니다(마태 14, 13).

 

그리고 이어서 마태오복음서는 ‘외딴 곳’에서 일어난 오늘의 ‘빵의 기적’을 수록하고 있습니다(마태 14, 14~21참조). 우리는 이 ‘빵의 기적’을 오늘 읽고, 그 다음 이어서 ‘물위를 걸으신 기적’(마태 14, 22∼33)을 다음주일인 연중 제19주일에 봉독할 것이고, 그 다음주일인 연중 제20주일에는 ‘이방인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시는 기적’(마태 15, 21∼28)을 읽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다음주일인 연중 제21주일에는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 16)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 봉독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하늘나라 선포와 그 성취의 징표인 기적들을 체험한 신앙으로 그런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신앙을 고백한 제자가 된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마태오복음서의 후반부 여행을 하게 될 것입니다(마태 16, 21 이후).

 

그러므로 이렇듯 오늘의 ‘빵의 기적’에 대해서는 마태오복음서의 내용에 따라 그 앞뒤 이어지는 맥락을 짚어보아야 그 의미를 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복음서 내용들의 맥락 속에서 오늘의 빵의 기적은 “예수님이 과연 어떠한 분이신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암시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되살아난 요한 세례자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분이 곧 구세주이심을 그 분이 행하시는 이 기적에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분의 이 기적능력은 그 분이 누구이신가를 알려주는 표징입니다.

 

위대한 예언자였던 모세가 자기 자신과 같은 예언자가 오리라는 예언을 한 일이 있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신명 18, 15) 이것은 지금껏 압제 속에 살아오던 곳을 떠나 광야에 나가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을 영도하던 모세가 그 광야에서 굶주리게 된 백성에게 하늘로부터 내린 만나를 먹게 하였던 것(탈출기 16장 참조)을 상기시키며 예언한 것인데, 그처럼 이제 새롭게 형성되는 하느님 백성에게 외딴 곳 즉 광야에서 직접 하늘의 음식으로 먹여 주시는 구세주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는 것이 오늘의 ‘빵의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사실 외에도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다 지방 과부에게 음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주었다는 기적 이야기(1열왕 17, 8∼16 참조)와 엘리사 예언자가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기적 이야기(2열왕 4, 42∼44 참조)를 기억할 수 있는데, 오늘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이나 먹여주신 예수님은 더욱 위대한 예언자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는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읽은 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그날 즉 구세주가 오실 날에 큰 잔치가 벌어지리라고 예언했습니다(이사 55, 1∼3 그리고 이사 25, 6∼8 및 65, 13∼14참조). 그러므로 오늘 외딴 곳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수천 명의 백성이 실컷 먹고 남게 하여주신 이 사건은 그야말로 구원의 때 즉 메시아의 때가 도래했음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노예 살이를 벗어나 광야로 갔을 때 하느님 친히 그들을 만나로 먹여 주신 사실을 상기하면서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해방하신 백성을 광야(외딴 곳)에서 친히 먹여주시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 메시아는 우리가 매일 먹어도 또 배고프고 썩을 음식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점을 우리는 미사 드릴 때마다 확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 때 우리에게 주신 성체를 미사 때마다 받아 영하는데, 이러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음식을 주신 그 최후만찬에서 하시던 예수님의 행위를 오늘의 ‘빵의 기적’에서도 기억하게 됩니다. 그 행위는 곧 “빵을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오늘의 마태 14, 19와 최후 만찬시의 마태 26, 26 그리고 미사 통상문 특히 제1양식 성체 축성문 참조)라고 묘사되고 있는 예수님의 행위입니다. 이 ‘빵의 기적’에서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기억하게 되며, 그러므로 미사를 통하여 하느님 백성이 누리는 풍요함의 체험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외딴 곳에 몰려온 수천 명의 군중처럼 우리도 이렇게 모여온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즉 우리는 세상사의 번잡함을 떠나 이렇게 모여온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주일미사에 모여온 여러분을 각자 헤쳐 나가 세상의 음식을 사먹게 하시지 않으십니다(마태 14, 15∼18).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처럼 구원을 이루는 이 잔치에서는 주님께서 아무러한 값을 치루지 않고서도 푸짐하게 먹게 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 백성이 당신의 백성이기 때문에 당신의 것으로 직접 먹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당신께 제사를 바치기 위해 광야에 나온 백성(탈출 3, 12 및 탈출 5, 1 참조)을 당신 친히 먹여주신 분이 곧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버이가 자기 자식은 어느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고 자기가 직접 벌어 먹여줌으로써 사랑하듯이, 그렇듯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에서 얻는 것으로가 아닌 하느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으로 그분의 참 사랑을 얻고자 해서 모여온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주일미사에 모여온 백성의 공동체는 세상과는 다른 광야에 따로 모인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 거기에 친히 이 백성을 먹여주시는 주님을 우리는 뵙는 체험을 합니다.

 

그래서 외딴 곳까지 당신을 따라온 백성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마태 14, 16 참조), 교회로 하여금 신자들에게 당신의 것을 주도록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우이웃을 향한 교회의 활동이란 단순히 어떤 자선구호활동으로서의 의미보다는 더 심오한 하늘나라의 모습을 세상에 심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나라를 심기 위하여 세상의 풍랑을 헤쳐 가는 우리의 노고 가운데 주님께서는 언제나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다음주일의 복음에서 ‘물위를 걸어오시는 분’(마태 14, 22∼33 참조)을 ‘주님’으로 알아보는 신앙을 고백할 것입니다. 홍해의 바다 한 가운데를 맨땅으로 밟아 건너던 그 백성의 신앙 고백이 그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03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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