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일 2014년 8월 10일 인생 풍파에 늘 함께 하시는 그 분! 그래서 베드로의 모험 같은 우리의 믿음
우리는 지난주일에 유명한 ‘빵의 기적’ 즉 오천 명을 먹여 주신 예수님의 기적을 마태오복음서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빵의 기적’에 즉시 이어지는 ‘물위를 걸으신 기적’(마태 14, 22∼33)을 오늘 보게 됩니다. 다음 주일 즉 연중 제20주일에는 마태오복음서 15장 21∼28절에서 이방인 여자의 딸에게서 마귀를 떼어 주시는 기적과 그로 말미암아 믿음이란 거저 주어지는 주님의 은총이며 구원을 위한 관건이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마태 15, 21∼28 참조).
사실 다음주일의 복음 내용이 <믿음>을 그 주제로 삼고 있는데, 오늘 ‘물위를 걸으신 기적’의 내용 또한 <믿음>을 주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지난주일의 ‘빵의 기적’이 이러한 <믿음>을 갖게 하는 데에 그 목표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3주간 동안 마태오복음서를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수련을 거쳐 연중 제21주일에 가서는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을 함께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곧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마태 16, 16)를 알아보는 믿음인 것입니다. 오천 명도 더 되는 백성을 풍족하게 먹여 주시는 그분을 보고 “이분은 도대체 누구이신가?” 하고 생각해 볼 것이고, 그리고 물위를 걸으시는 그분을 보고 또한 “이분은 도대체 누구이신가?” 하고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음주일에 가서 읽어야 할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보면서 그러한 믿음이 곧 우리 구원의 관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이란, “이분이 도대체 누구이신가?”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이십니다.”(마태 16, 16 참조)하고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달 전부터 하늘나라 비유 말씀을 주일복음으로 들으면서 그 비유들을 알아들었던 제자가 되어, 그 하늘나라의 성취를 위하여 오신 분이 곧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지난 주간부터 보는 기적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일의 ‘빵의 기적’에서 우리가 중점적으로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당신을 따르는 백성을 직접 먹여주시는 분이 곧 이 백성의 하느님이시고, 그렇게 영원히 배고프지 않게 하실 잔치를 베푸시는 그 때가 곧 메시아가 오시는 때인 것임을 우리는 ‘빵의 기적’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러한 메시아는 어떤 위대한 예언자의 수준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오늘의 ‘물위를 걸으신 기적’에서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하여 그분은 어떤 위대한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오늘의 ‘물위를 걸으신 기적’에서 깨닫게 됩니다. 즉 오늘 보는 이 기적은 예수님의 神性을 알려주는 기적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우리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제자들이 고백한 믿음을 동시에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고백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마태 14, 33)라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 그분은 곧 하느님이시라는 깨달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밤새도록 풍랑을 저어 가던 제자들이 물위를 걸어오시는 분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비명을 질렀습니다(마태 14, 26). 그 때 예수님께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마태 14, 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나다(ego eimi : It is I)”라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한테 전화를 걸 때 상대방에게 자신을 흔히 어떤 식으로 알리고 있습니까? 우리 교우님들 중에 어떤 분들은 저에게 전화를 걸어 무조건 “신부님, 저에요.”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대지 않고 무조건 “나요” 하는 이러한 경우는 무슨 경우입니까? 자기의 이름을 대지 않아도 상대방이 자기 목소리만 듣고 자기인 줄을 잘 안다고 생각해서 그러겠지요. 아마 그런 경우란 아내가 남편에게 그리고 남편이 아내에게 또는 부모가 자녀에게 전화하는 경우가 아니겠나 싶습니다. 그렇게 자기 이름을 댈 필요조차 없는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이름은 물론이고 자기 직책까지 대는 사람이 있으면 참 우습겠지요? 만일 무슨 장관 직위에 있는 윤종관이라는 아들이 자기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면서 “아! 나 윤장관입니다.” 한다면 참 웃기는 녀석이겠지요? 버르장머리도 없는 아들이겠지요. 하긴 저의 이름이 ‘윤종관’이니까 그 가운데 글자 하나만 바꿔서 ‘윤장관’이라 해도 저의 부모님은 ‘윤종관’으로 들으시겠지요. 지금은 이미 세상 떠나신 분들이라서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요. 저는 그러한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저를 잘 아시는 어르신이나 선배 신부님들께 전화를 할 때는 성을 빼고 “저, 종관입니다.”합니다. 동생에게는 “나 형이다.” 합니다. 그러나 제가 누구인지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후배들에게라도 “저, 윤종관입니다.”하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공식적인 경우나 또는 저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화 할 때는 저의 처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제 이름에다가 ‘신부’라는 말을 붙입니다만 어색하고 쑥스럽습니다.
이렇게 전화를 통하여 자기를 알리는 경우는 사실상 그 처지대로 매우 예의를 갖추어야 또한 상대방에 대한 존중인 것입니다만, 아주 잘 아는 사이 즉 매일 거의 함께 지내다시피하며 사랑하는 사이에는 그저 “나에요.” 혹은 “접니다.”하고 말하지요. 전화가 아니더라도 아마 퇴근하는 남편이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을 때 안에서 아내가 “누구세요?” 한다면 요즘 젊은 남편은 “자기, 나야.” 하고 말하겠지요. 이러한 사이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다.” 하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제자들과 당신이 이렇게 가까운 사이라는 의미이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성경에서 자신을 “나다.”라고 이름 없이 말씀하는 분은 하느님뿐이십니다. “나다(I am 혹 It is I)”라는 문구는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밝히실 때 쓰시는 문구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소개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탈출기 3장 14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하느님께 당신 이름을 알려 달라고 모세가 간청합니다. 그 때 하느님께서는 “나는 곧 나다(I am who I am)”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32장 39절에도 보면, 하느님께서 “보아라. 내가 바로 그다. 나 말고는 하느님이 없다.”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I, and I alone, am God : no other god is real.). 그 외에도 이사야 예언서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나다.” 라고 소개하십니다(이사 41,4 ; 43, 10.10.13.25 : 46,4 : 48,12 : 51,12 : 52,6 참조).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여 편집된 마태오복음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예수님을 곧 하느님이신 분이라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장면을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께서 모세나 엘리야에게 나타나실 때를 연상할 수 있도록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탈출 3, 1∼6 : 19, 9 : 33, 18∼23 참조)나, 또는 엘리야에게 나타나셨을 때(1열왕 19, 11∼13 참조)에 모세와 엘리야가 즉시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당황하며 겁에 질렸던 것처럼,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이 즉시 알아보지 못하고 겁에 질려 있었다고 마태오복음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시현(示顯)을 접했을 때에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에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나타나실 때에도 제자들은 매우 당황해 하였습니다(마태 28장과 루카 24장 참조). 그러한 상황을 강조하는 복음서는 이렇게 나타나시는 분이 곧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다.” 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베드로가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 28) 하고 말씀드린 것을 우리는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너라.”(마태 14, 29) 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위를 밟아 걸어갑니다. 이렇게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천길 물속을 무서워하지 않은 베드로는 그러나 거센 바람에 부딪쳐서는 그 믿음이 흔들려 물에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하고 부르짖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시며 그의 허약한 믿음을 지적하시고 함께 배에 오르셨을 때에 풍랑은 가라앉았다고 복음서는 말해주고 있습니다(마태 14, 30∼32).
그리고 이 기적사화의 결론으로, 복음서는 그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분 앞에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 14, 33) 하고 신앙을 고백한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우리 인간이 스스로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태도와 또 한편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당신을 알려주시는 것에 대하여, 그것을 믿음과 계시라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우리 인간에게 알려주시는 것을 ‘계시(啓示)’라 하고, 그 계시에 대하여 인간이 응답하는 것이 믿음 곧 ‘신앙(信仰)’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도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존재이지만, 하느님 당신 자신을 친히 알게 해주시는 것을 계시라 하는데, 오늘의 복음성경에서 그런 장면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 계시지 않은 배를 타고 밤바다를 항해하며 풍랑에 시달리는 제자들은 곧 우리 인생 같습니다. 물위를 걸어오시는 분을 목격하고 당황해 하듯이 우리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인생의 숙제들을 만나면서 고뇌합니다. 그러한 때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계심을 알려주십니다. “나다”(마태 14, 27)하고 말입니다. 인생풍파의 한 가운데에 그렇게 주님께서 늘 함께 계심을 알려주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향하여 선뜻 물위를 걸어가듯이 우리는 세상풍파 속에서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파에 시달리면서 믿음이 약해지고 그 세상 바다에 빠져들곤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베드로처럼 “주님, 구해주십시오.” 한다면, 주님께서 손수 당신 팔로 우리를 건져내시어 베드로의 배인 교회에 이끌어들이시고, 그 배의 항해를 함께 하여 세상의 바다를 건너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한 교회의 배를 함께 타고 가는 당신의 백성이 아니고서는 당신의 은총을 아무렇게나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다음주일에 읽을 복음(마태 15, 21∼28 : 이방여인의 딸을 마귀로부터 해방시켜주시는 기적 참조)의 서술과정이 암시하고 있습니다만, 결국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이 ‘믿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그 자체가 이미 주님께서 주시기 때문에 얻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이니시어티브는 본래적으로 하느님께서 쥐시고 계시는 것이고,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한 믿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 당신이시라고 하는 점을 우리는 오늘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베드로처럼 주님을 향하여 감히 물위를 걸어가는 모험에 나선 처지입니다. 베드로의 그 모험,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항상 허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베드로처럼 주님의 손길을 바라며, “주님, 믿음을 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살겠습니다.” 하고 간구하는 삶으로써 주님과 함께 이 세상 바다를 건너가는 교회의 배를 타고 항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주간에 교황님을 우리 한국 땅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교회의 배를 함께 타고 세상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우리들이라는 믿음의 체험일 것입니다. |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05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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