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일, 2014년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해미 성지에서 집전하시는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전, 오늘의 전례말씀 묵상
믿음으로 차별없는 세상을
"오로지 믿음만으로"라는 말의 참 뜻은?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
우리는 오늘까지 3주간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를 주일복음으로 봉독하고 있습니다. 지지난주일의 그 유명한 ‘빵의 기적’ 즉 오천 명을 먹여 주신 예수님의 기적(마태 14, 13∼21), 그리고 이어지는 ‘물위를 걸으신 기적’(마태 14, 22∼33)을 지난 주일에 보았는데, 오늘은 이방인 여자의 간절한 청에 의하여 그 딸을 마귀에게서 해방시켜주시는 이야기(마태 15, 21∼28)를 읽습니다. 마태오복음서의 이러한 기적 사화는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물음에 답해야 할 ‘믿음의 고백’을 그 주제로 연재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3주간 동안 마태오복음서를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수련을 거쳐 다음주일인 연중 제21주일에 가서는 베드로와 함께 우리 모두 고백하는 믿음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그 고백이란 곧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마태 16, 16)를 알아보는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 이렇게 고백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에 관하여 제대로 깨닫고 실토할 수 있는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인가 하는 점에 대하여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우리는 어떤 식으로 예수님을 믿는가 하는 물음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일의 ‘물위를 걸으신 기적 사화’를 읽고 나서 우리의 믿음에 대한 진단을 다음과 같은 3단계로 짚어보았습니다.
믿음 진단 3단계 첫째로는, 우리의 믿음이란 사실 베드로처럼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 28) 하듯이 얄팍하게 출발합니다. 즉 “주님이시라면”이라는 조건부를 걸어서 그걸 믿음이랍시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 단계로, 그런 비겁한 의혹의 마음으로 소위 신앙생활이라는 길에 편승합니다. 확연한 신앙이 없으면서도 베드로처럼 배에서 내려 감히 물위를 걸어 주님께 가려는 듯이 신앙의 대열에 끼어드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다급한 상황이 되면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마태 14, 30)하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위기를 모면하고 나서야 감복해서 어느 땐가 주워들은 말로 어줍지 않게 신앙을 고백하는 세 번째 단계에 이릅니다. 마치 폭풍이 사라지고 나서야 엎드려 절하면서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말하던 그 배안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마태 14, 33 참조).
이제민 신부님의 터키 순례기 여기서 저는 오래 전에 인터넷에서 읽은 이제민 신부님의 ‘터키 순례기’의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신자들과 함께 바오로 사도의 복음전파활동 발자취를 순례하면서 묵상한 내용인데,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이 예루살렘이 아닌 이방인의 도시 안티오키아에서 최초로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게 된 사실(사도 11, 19∼26 참조)을 상기하는 가운데 진정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문자답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언젠가 어떤 열심한 신자 한 분이 이제민 신부님에게 진지하게 질문을 하더랍니다. “신부님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까?”하고 말입니다. 그때 이제민 신부님은 “글쎄요.”하고 대답하였답니다. 그러자 그 신자는 매우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랍니다. 그 신자는 “물론이지요. 나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습니다.”하는 답변을 이제민 신부님으로부터 당연히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제민 신부님의 답변 "글쎄요" 그 신자에게 이제민 신부님은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되물었답니다. “내가 신부니까 ‘당연히 믿습니다.’라는 답변을 원하였겠지요? 하지만 나는 당신이 내게 질문을 던지며 생각한 그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모릅니다. 그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믿는다, 안 믿는다고 습관적으로 답변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 대한 고백이 어찌 습관에 의한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질문하며 생각한 그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먼저 설명해주세요. 그래야 내가 답변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반문을 하고나서 이제민 신부님은 그 신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만일 당신이 내게 질문을 던지면서 생각한 하느님이 저 하늘 위에 좌정하여 계시는 분, 착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나쁜 사람에게 벌을 주기 위해 아래를 굽어보시고, 아플 때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불행할 때 불행하지 않게 해달라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것저것 들어달라고 애원할 때 나의 열심 여하에 따라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정도라면, 나는 그런 하느님은 없다고 생각하지요. 나는 ‘그냥 하느님’이 아니라 ‘예수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전능하신 천지의 창조주 하느님’을 믿기 때문이지요.” 그냥 하느님이 아니라, 예수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전능하신 천지의 창조주 하느님
그 신자에게 이렇게 말하던 이제민 신부님은 자기의 이 말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 구약의 지혜서 두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기 때문에 만인에게 자비로우시며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죄를 살피시지 않는다. 주님은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주님이 만드신 그 어느 것도 싫어하시지 않는다.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만드셨을 리가 없다.”(지혜 11, 23∼24)
이러한 지혜서 인용과 더불어서 이제민 신부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혜서가 말하는 하느님은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다. 그런데 전능이란 무엇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전능과 지혜서가 생각하는 전능을 비교해 보라. 지혜서가 말하는 전능은 분명 3 더하기 4를 10으로 만드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자비에 근거한 것이다. 인간에게 미운 사람을 사랑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은 사랑할 수 있지만 나를 없애려고 하는 원수를 사랑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에게는 가능하지 못한 이 사랑을 주님은 ‘하신다.’ 그런 차원에서 주님은 전능하시다. 내가 믿는 전능하신 하느님은 그런 분이시다. 사랑과 미움을 갈라놓는 전능이 아니라 이 둘의 구분을 넘어 사랑하는 사랑, 그것은 전능하신 분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지혜서 저자는 말한다. ‘주님은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주님이 만드신 그 어느 것도 싫어하시지 않는다.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만드셨을 리가 없다.’”
당신의 기도나부랭이나 들어주는 하느님은 존재하시는가 이러한 설명에 이어서 이제민 신부님은 그 신자에게 들려주었던 자기 자신의 대답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이런 하느님이 있는 것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예’하고 답변할 것이다. 그분은 사랑이시기에! 그분은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기에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주님이시기에! 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기도나부랭이를 들어주시는 정도의 하느님이 계시는 것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그런 하느님은 없을 뿐더러 그런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기에! 예수의 하느님, 성서의 하느님,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아니기에! 나의 과제는 나의 하느님을 예수의 하느님으로 만들어 믿는 것이다. 사랑과 미움, 이웃과 원수, 추종자와 박해자, 성과 속, 유다인과 이방인을 갈라놓는 벽을 허문 ‘사랑’, 하느님을, 은총의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과제는 예수의 하느님, 성서의 하느님, 교회의 하느님을 나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관습이 아니라 내 온 몸으로 주님의 존재에 고백하는 것이다. 저 토마스처럼, 저 바오로처럼!”
그렇습니다. 이제민 신부님의 이 설명을 들으면서 저는 오늘 이방인 여인의 딸이 마귀로부터 해방되는 은사를 예수님께로부터 받게 된 그 까닭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이방인의 도시 안티오키아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신자들이 그들 사이에 ‘유다인이다’ 혹 ‘이방인이다’ 하는 그런 차별이 아니라 모두가 이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최초로 고백했다는 사실은 오늘의 우리도 또한 진정 그렇게 고백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고 이제민 신부님이 강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마침 오늘 이 주일의 말씀전례 성경에서 이미 이사야가 이방인 그 모두도 바른 길을 걷고 옳게 사는 그들이 거룩한 산에서, 즉 주님의 집에서, 기쁜 나날을 보내게 될 보편적 구원을 예언한 내용처럼(오늘의 제1독서 이사 56, 1∼7 참조), 또한 바오로 사도는 로마의 신자들에게 역설적으로 자기 동족 유다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전하고 있습니다(오늘의 제2독서 로마 11, 13∼32 참조).
그러한 보편적 구원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 오신 분이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마태오복음서는 오늘의 이방인 여인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역설적으로 그 이방인 여인의 믿음 고백을 유도하심으로써 오로지 우리의 믿음 그것만으로 진정 사람 사이의 모든 차별과 얽매임의 굴레가 모두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오직 그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스런 백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오늘의 복음 마태 15, 21∼28 참조).
믿음 만으로만 구원된다면 그래서 ‘믿음만으로 구원 된다’는 마르틴 루터 이후 개신교의 이른바 종교개혁 노선의 왜곡된 믿음주의가 여기서 눈을 떠야 합니다. ‘믿음만으로(sola fide)’라는 말은 선행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 사이의 신분이나 처지나 과거 행실에 따라 하느님께서 구원을 베푸시고 안 베푸시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란 거저 베푸시는 것이므로 그 하느님의 자비 그것만을 의지하는 우리 신앙적 자세가 먼저 요청된다는 뜻으로 우리는 ‘믿음만으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오늘 예수님께서 이방인 여인의 거듭된 간청에도 불구하고 계속 거절하시면서 이른바 믿음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사람들과의 대비로, 그 여인의 믿음을 확인케 하는 과정에서 역설적 반응을 보이시고는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하고 선언해주신 것입니다(마태 15, 28).
여인의 믿음과 차별없는 세상 여기서 우리는 보게 됩니다. 차별 없는 세상이 시작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는 그 이방인 여인의 절실한 믿음을 오늘 보게 됩니다. 그 이방인 여인과 같이 누구라도 주님의 작은 자비 즉 부스러기 같은 것이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 믿음으로써는 사람 사이의 모든 차별과 편견과 굴레가 사라지고 모든 이에게 이루어지는 보편적 구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로지 주님께 향한 믿음이라면 연약한 처지에서도 주님의 위대한 사랑이 모두에게 베풀어진다는 깨달음의 믿음을 우리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그 믿음이 부스러기 같이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오로지 주님만을 향한 믿음이라면 거기 새로운 세상이 담보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우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묵상과 더불어 저는 어제 서울 광화문 앞에서 한국의 윤지충 바오로 등 124위 치명자들의 시복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하신 강론 말씀을 특별히 가슴에 담고 오늘 해미 순교지에서의 교황님 미사에 참석하러 갑니다. 교황님의 어제 말씀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목이 특별히 저의 가슴에 새겨집니다.
“이 땅에 믿음의 첫 씨앗들이 뿌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당신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요한 17,14 참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됨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것은 박해를 의미했고, 또 나중에는 산속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게 됨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즉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들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
또한 순교자들은 그들의 모범으로, 신앙생활에서 애덕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 증언의 순수성이었고, 세례 받은 모든 이가 동등한 존엄성을 지녔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대의 엄격한 사회 구조에 맞서는 형제적 삶을 이루도록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을 분리하는 데 대한 그들의 거부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형제들의 필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들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에게 뻗치는 도움의 손길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요구하시며, 그렇게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교황님의 이러한 말씀 가운데 더욱 저의 가슴에 특별히 강열하게 각인되는 몇 마디가 있습니다. “세례 받은 모든 이가 동등한 존엄성을 지녔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순교자들이 보여준 애덕(사랑)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애덕의 삶을 살기 위해서 박해시기의 교우들이“나중에는 산속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게 됨을 의미했습니다.”라고 교황님은 치명자들의 삶의 방식을 기억하셨습니다. 어제 시복되신 그 124위 가운데 황일광(시몬) 복자께서는 내포에서 하부내포의 홍산 지방 산골에 이주하여 사셨습니다. 그렇듯 산골의 교우촌에서는 교우들 끼리 ‘모든 이가 동등한’ 사이가 되어 살았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우리 하부내포성지 지역의 산골 교우촌들을 교황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산골 교우촌에서는 모두 ‘믿음으로 차별 없는 세상’을 살았습니다.
어제 이렇게 말씀하신 교황님께서 오늘은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 미사를 해미순교자들의 치명 터에서 집전하실 것입니다. 어제의 시복식을 통하여 ‘복자’로 이름을 기억해드릴 수 있는 124위 가운데 불과 5위만이 해미순교자로 이록되고 있습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신앙인들이 그 이름을 남겨놓지 못하고 해미이서 치명하셨습니다. 그 이름 알 수 없는 무명의 치명자들에 관해서도 교황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오늘의 이 경축을 통하여, 이 나라와 온 세계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마음에 품고 기리고자 합니다. 특별히 지난 마지막 세기에,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쳤거나 그분의 이름 때문에 모진 박해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이름 없는 순교자들을 기리며 기억합니다.”
교황님께서 함께 기리며 기억하신다고 말씀하신 ‘무명’의 치명자들을 우리는 해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무명 치명자들’, 그들이 오늘날에도 살아 존재하며 신앙을 증거 하고 있음을 저는 우리 교우님들 사이에서 보게 됩니다. 드러나지 않는 희생을 치르면서 각자의 처지에서 신앙을 실천하는 사람들, 칭송의 대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형제들의 필요에 지대한 관심”으로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에게 뻗치는 도움의 손길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요구하시며, 그렇게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하느님께 실천으로 응답하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 교우님들 가운데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서 저는 ‘오늘날의 무명 순교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요?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오로지 믿음만’ 있으면 그것으로 사는 사람, 그 모습 아니겠습니까!
오늘 복음 성경에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이방인 여인의 모습, 그 여인 같은 ‘오로지 믿음’으로의 절절한 신앙적 자세는 교회의 자리 어느 위치에 있는가의 신분 구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모습입니다. 다만 “어떠한 믿음인가?”에 대하여 삶으로 보여주는 묵언(黙言)의 답이 곧 ‘참 믿음’입니다.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마태 15, 28)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저 자신에게 하면서 해미순교성지의 교황님 미사에 달려갑니다. |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08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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