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일

2014년 8월 24일 09시 만수리공소


우리가 진정 행복한 까닭은? 

우리 이름이 바뀐 것처럼 그렇게!



가장 중요한 고백


우리는 오늘 미사에서 마태오 복음서의 아주 중요한 대목을 봉독합니다. 그 것은 다름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마태 16, 16)라고 믿어 고백하는 그 자리에 우리 모두 함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주는 내용입니다. 오늘의 복음 성경에서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너는 행복하다! 실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 1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행복한 자들이라는 말씀을 예수님께로부터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도 베드로처럼 신앙을 고백하여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말입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신앙고백으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진정 행복할 수 있는 까닭은 이렇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게 된 거기에 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를 묻고 있는 것 


그렇듯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게 되기에 이른 오늘의 마태오복음서의 이 대목은 이 복음서의 구조상 중간 결론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시작부터 ‘예수님은 누구이신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얻어 나가는 방향으로 말씀들과 사건들이 배열되어 오다가 이제 오늘의 16장 13∼20절에 와서 베드로의 입으로 그 명확한 답이 발설되는 지점에 이르도록 편집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이 복음서의 전반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때부터

 

이렇게 전반부의 결론을 이끌어내고 나서 이 복음서의 후반부로 이어집니다. 그 후반부로 넘어가는 것을 우리는 다음주일의 복음으로 읽게 될 16장 21절에 이어지는 첫 마디에서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때부터”라는 말로 어떤 전환되는 분위기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는 말씀을 하시고는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을 따르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촉구하시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말하자면, 앞서 16장 20절까지의 전반부는 제자들이 신앙을 갖게 하는 훈련 과정이었다면, 16장 21절 이하는 신앙으로 사는 길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후반부의 내용을 다음주일부터 잘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 복음서의 전반부에 대한 중간 결론이랄 수 있는 오늘의 복음 내용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이 복음서의 전반부 내용을 총 집약하여,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하고 고백하기에 이르는 신앙 정립인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오복음서 전반부를 읽어오는 동안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관한 세 번의 강론을 하시고(5∼7장의 ‘산상설교’, 10장의 ‘제자파견설교’, 13장의 ‘성장하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 설교’ 참조), 그 사이 사이에 당신께서 그 하느님 나라를 이루려고 오신 구세주로서의 권능을 지니고 계심을 많은 행적과 기적으로 보여 주시는 바에 대해서 우리는 볼 수 있었습니다(8∼9장과 13장 54∼16절 및 13장 참조). 특별히 우리는 ‘빵의 기적’ 즉 오천 명을 먹여 주신 예수님의 기적(14장 13∼21절)과 ‘물위를 걸으신 기적’(14장 22∼33절) 그리고 ‘이방인 여자의 딸에게서 마귀를 떼어 주시는 기적’(15장 21∼28절)을 통하여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고 믿을 수 있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믿음이란 거저 주어지는 주님의 은총이며 구원을 위한 관건이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빵의 기적’과 ‘물위를 걸으신 기적’이 이러한 <믿음>을 갖게 하는 데에 그 목표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함께 우리도 고백해야


우리가 이렇게 마태오 복음서를 따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수련을 거쳐서 오늘 읽는 16장 13∼20절에 와서는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을 함께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곧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마태 16, 16)를 알아보는 믿음인 것입니다. 오천 명도 더 되는 백성을 풍족하게 먹여 주시는 그분을 보고 “이분은 도대체 누구이신가?” 하고 생각해 보고, 그리고 물위를 걸으시는 그분을 보고 또한 “이분은 도대체 누구이신가?” 하고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러한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구세주이십니다.”(마태 16, 16)하고 대답하는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을 갖게 된 우리는 삶의 전환을 이루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음주일부터 읽게 되는 이 마태오복음서의 후반부에서 보게 될 예수님의 가시는 길에 기꺼이 따라가는 제자답게 삶의 길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성취를 위하여 오신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시라는 것을 믿게 된 제자로서 응당 보여야 할 삶인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란 이제 다른 어떤 대안 없이 그분만을 따라야 한다는 결의에서 시작됩니다.

 

소크라테스, 공자나 붓다와 다르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여러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 혹은 인류의 역사에서 만나는 여러 현인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나 붓다나 공자와 같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예수님을 그러한 현자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한 인물 정도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자 구세주로 알아보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그래서 세상에서 누가 알려 주기 때문에 얻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이 믿음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총인 것입니다. 그 믿음은 ‘살’과 ‘피’에서 체험되는 게 아닙니다. 즉, 믿음이라는 은총은 세상경영(정치영역)의 경험칙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고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은총을 우리는 세례로써 얻게 되었지요. 마치 시몬 바르요나가 예수님께 그러한 신앙을 고백한 후 예수님께로부터 <베드로>라는 이름을 얻었듯이,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세례명을 얻은 것처럼, 우리는 우리 신앙 때문에 <다른 새로운 나>로 변화 된 것입니다. ‘시몬’에서 ‘베드로’로 이름이 바뀌듯이 말입니다.


변화된 베드라는 반석이 되었다

 

이렇게 변화된 믿음의 사람이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교회가 그 위에 세워집니다. 그 믿음은 세상이 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듯이, 그로써 하늘나라의 열쇠가 이 믿음의 반석에게 주어집니다. 그 하늘나라의 열쇠란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그 열쇠란 이 세상에서 벌써 하늘나라의 문을 열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성취하시고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으로 형성되는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에 하늘나라를 열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늘나라를 열게 되는 그 열쇠가 오늘 신앙을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누구이겠습니까? 그는 믿음을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의 믿음은 곧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우리의 이 믿음을 고백한 대표자이지요. 이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의 믿음을 규합한 교회를 대표한다는 의미로 베드로는 이 교회의 반석입니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심으로써 이 교회 안에 하늘나라의 일이 이 세상에서부터 이룩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 19)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

 

이렇듯,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의 오늘날 후계자를 우리는 교황이라고 합니다. 교황이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뜻은, 그것이 교계제도적인 세습에 의한 의미가 아닙니다. 지난 주간에 방한하여 우리 곁에 며칠 계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만나면서 우리는 그분이 베드로 이후 제266대 교황이라는 의미로 감동을 얻은 게 아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방한 기간 중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 여러 말씀을 하셨지만, 그분께서 한국을 떠나 로마로 향하시는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던 중에 짤막하게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그분 방한의 총결산 같은 표현이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사람들의 고통 앞에 ‘중립’이란 없다.”는 말씀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슨 ‘정치적 중립’이란 게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었지요.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노란 리본을 내내 가슴에 달고 계셨던 교황님께서 리본 때문에 정치적 중립에 오해를 받을 수 있지 않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분은 그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보면서 마음이 끌리는 대로 행동하실 수밖에 없다는 그분의 대답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고통 받는 우리 사이에 내려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듯이, 교황님께서 또한 우리 한국인들이 지닌 역사적 고뇌의 현장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함께 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즉, 이 땅의 현장에서 하늘의 뜻이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그리스도)란 이 땅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곧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일과 동일하게 성취하시는 분이시기에 ‘구세주’입니다. 그러한 구세주의 행업은 세상의 눈으로만 보는 이른바 ‘정치적’이라는 것과는 그 본질이 다른 것입니다. 이 땅위의 일과 하늘에서의 일을 동일하게 보는 믿음이 곧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를 일컬은 하늘의 열쇠를 받은 ‘반석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한 ‘반석의 하늘나라 열쇠’의 역할을 방한 기간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서 우리는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몇 년 사귀다가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분이 교황님의 방한 행적을 본 후 저에게 전화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입니다. “교황님 오신 며칠 동안은 우리 한국에 하느님 오신 며칠이었습니다.”라고…

 

오늘 복음 성경에서 우리의 대표로서 믿음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이 베드로라는 반석으로 교회를 세우신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어떠한 악의 세력도 파괴할 수 없게 보존하시며, 그로써 이 세상에 벌써 하늘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렇듯이 베드로와 함께 고백할 수 있는 이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하늘나라의 삶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삶, 우리가 진정 행복한 까닭이 그러한 하늘나라의 삶에 있습니다. 그렇듯 행복한 삶에로 우리의 삶이 바뀌었음을, 우리는 세례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로 증명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 세례명을 새로이 지녔듯이 말입니다. ‘시몬 바르요나’가 반석 ‘베드로’로 이름 바뀌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유의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신 사실입니다(마태 16, 20 참조). 그것은, 곧 이어 마태오 복음서 16장 21절 이하의 이 복음서 후반부에서 제자들의 그리스도 추종으로 전환되는 국면으로 보여야 할 실천적인 삶으로써,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세상에 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이란 깨달음뿐이 아닌 ‘실천’이어야 함을 이 복음서는 우리가 다음주일부터 읽을 후반부에서 알려줄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실천’으로 우리 이름을 실제로 바꿔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읽은 복음서 내용에 이어서 다음주일에 읽을 마태 16, 21∼27을 붙여서 읽으시면 그 내용을 더욱 잘 알아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09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