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일

2014년 9월 7일 09시 만수리공소



희망은 믿는 사이에서! 

우리 사이에 하느님 계셔야 ...!



 

어울림의 어려움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가는 가운데 참으로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도 친한 사이에서, 더욱이 사랑하는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 하고 있는 사람에게 타일러주는 일인 것입니다. 한번 스쳐 지나치고 말 사이라면 못 본 척 해도 되겠지만, 늘 상대하며 살아야 할 처지라면 그 사람의 잘못하는 일을 그냥 두고만 볼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욱 사랑하는 사이에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될까 하여 그 잘못을 말해주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 그릇이 넓지 못한 사람일 경우에는, 그에게 잘못을 깨우쳐 주기란 대단한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행여 그 사람과의 사이가 영영 금이 갈 수도 있으니까요.

 

타일러주는 것의 어려움


그리고 공적인 일을 책임진 사람이 잘못을 하는 경우에 그것을 덮어둔다든가 못 본 척 한다면, 그로 말미암아 공동체의 큰 해악에 나 자신도 공조하는 꼴이 될 것이겠지요. 그러한 경우 그 사람과 나 사이의 개인적 인간관계나 공동체에 닥칠 해악 중에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더구나 그 공적인 일을 책임진 사람이 내가 속한 집단의 최고 실력자라면, 그 분에게 그 잘못을 깨우쳐 주기란 어쩌면 나 자신의 희생을 감내해야 할 순교자적 용기가 필요한 일인 것입니다.

 

영화 '명량'과 TV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이즈음 최고의 관람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영화 ‘명량’을 저는 아직도 관람하지 못했습니다만, 10년 전 쯤 시청률이 대단했던 TV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대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이순신 장군의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한 애국애족과 진정한 충성심은 국민들에게 아마 진한 감동을 주었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드라마 가운데 이순신 장군에 대한 조정 대신들 간의 모략을 임금 앞에서 직언으로 맞서던 유성룡 선생의 태도 또한 영웅적으로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생사여탈권을 손에 쥔 절대 권력자 임금 앞에서 신하로서 그 임금의 판단이 옳지 못함을 간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그리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유성룡 선생은 자기 개인의 파멸보다는 나라와 백성을 위급에서 구하기 위한 대의로 그러한 용기를 지녔던 분이라 여겨집니다.

 

공동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대의(大義)


그렇듯이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의 생사여부와 그리고 지도자와 자기 사이의 개인적 입장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가 속한 작은 집단 안에서도 요구되는 대의(大義)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크게 혹은 작게 사람들 사이의 어떤 잘못에 대해서 선의로 지적해서 바로잡아야 할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고민하게 됩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공동체 생활 가운데 그 구성원간의 마음 상하는 일이 일어날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오늘 복음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이러한 오늘의 복음 말씀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마태오복음서의 구조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의(大義)와 마태오복음의 구조

 

마태오복음서에 수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설교 형태의 말씀 다섯 묶음 중, 오늘 우리가 읽는 부분은 그 네 번째 묶음으로 18장의 <공동체 삶에 관한 설교>중 일부입니다. 오늘의 이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 형제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의 이 말씀에 대하여 잘 이해하려면, 이 <공동체 삶에 관한 설교>의 전체 즉 18장 전체 내용과 연결시켜 읽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앞에는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지적하시며 하늘나라의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죄악으로 상해하지 말 것을 강조하신 말씀(마태 18, 1∼9 참조)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되찾는 기쁨으로 하늘나라의 보잘것없는 한 사람의 귀중함에 대하여 하신 말씀(마태 18, 10∼14 참조)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뒤에, 우리가 다음 주일(연중 제24주일)에 읽을 용서의 절대적 필요성이 강조되어 있습니다(마태 18, 21∼35 참조 / 올해의 연중 제24주일은 9월14일 ‘십자가 현양 축일’이므로 본래의 연중 제24주일의 복음인 마태 18, 21∼35를 읽지 않을 것입니다).

 

대의(大義)는 곧 믿음


그런데 오늘의 말씀에 대하여 간단히 요약을 하자면, 더불어 사는 사이에서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모두의 바람직한 관계를 도모하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방법에 대하여 저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살이 가운데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떠받쳐주는 가장 중요한 바탕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저는 ‘믿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 ‘믿음’이란, 우리가 늘 입에 달고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정작 ‘진실 된 사랑’으로 드러나게 하는 그 ‘알맹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진정의 믿음이 없으면 사랑도 거짓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혼율 세계 제2위라는 우리나라의 실정에 대하여 저는 혼인하는 남녀들이 그 흔한 ‘사랑’을 그야말로 말초적 놀음과 다를 바 없이 ‘흔해빠진 사랑’으로 착각하는 탓이라 생각합니다. 그 ‘흔해빠진 사랑’에는 진정 ‘믿음’이 없습니다. 사랑한다면서도 상대방의 작은 단점 하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이가 부부랍시고 엮어졌다가 식은 죽 먹듯이 헤어집니다. 거기에 무슨 서로의 믿음이 있겠습니까? 진정 사랑한다면 상대방의 단점까지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단점을 사랑하는 그것이 곧 나의 상대방에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부족한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상대방의 단점에 대하여 그것을 그 상대방의 인격에 녹아 스며든 아름다움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상대방의 단점을 그 인격의 아름다움으로 여겨 사랑함은 이미 그 상대방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의 발로입니다.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곧 만남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것은 별개의 인격체가 만나는 관계인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사이에서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와 전혀 다른 그 사람들을 인정하는 거기에 늘 바탕으로 깔린 것은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의 관계로 더불어 사는 무리를 일컬어서 ‘공동체’라 합니다. 그러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 간에 저지른 어떤 불미스런 일이나 상대방에게서 내가 당한 손해나 혹은 서로 바라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서로 탓하거나 공동으로 책임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마지막 단계로는 ‘용서’라고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용서란 인격의 전체적 교감


그렇다면 그 용서란 어떤 식으로 하는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베푸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거지에게 한 푼 주는 그런 것과 같은 것이 결코 용서라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란 한 편의 다른 편에 대한 승리나 패배가 아닙니다. 참된 용서란 인격의 전체적 교감으로 이루어지는 상호의 동반승리와 같은 쾌거인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즈음의 우리나라 시사적 정치 사정에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과거 친일행적을 한 사람들에 관하여 어떠한 역사적 평가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은 민족 구성원 전체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친일행적에 대한 평가의 잣대란 단순논리로 세우기에 앞서 우리에게는 너무너무 역사적 고민을 많이 해야 할 만큼 그것이 복잡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민족정기 바로 세우기와 더불어 민족 공동체의 화합을 도모해야 할 살아있는 역사와 미래에 대한 과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양면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진실의 인정과 그에 따른 공동적 참회의 마음을 전제로 하고, 민족 구성원 모두에게 있어서 어느 한 편과 다른 편으로 갈라져 서로 피해자 혹은 가해자 의식의 싸움이 아닌 공동의 해결과제로 인식하는 마음에서, 다시는 그러하지 않을 미래를 향한 재출발의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어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 민족 구성원 모두가 그 문제 앞에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동반 승리가 곧 용서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침몰이 끼친 영향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국민들 사이는 심한 분열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세월호의 침몰과 더불어 지금까지 국민 간 신뢰(믿음)의 침몰이 가중되어왔습니다. 그것이 더 큰 비극입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나라를 책임진 사람들(국가 원수와 정치 지도층)이 도대체 국민들에게 미덥지 못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밝힐 것은 명명백백 밝히면 될 일인데, 40여일 단식하는 사람을 모욕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국가적 재난이 어느 개인들의 사안인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고, 권력층은 책임선상에서 자신들이 감추어야할 것이 많은 양 비겁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그에 따라 서로의 생각들을 비난하기만 하는 적대적 분열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비겁한 사람들인가 하는 참담한 자괴감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귀성(歸省)의 의미


내일은 한가위 명절입니다. 고향과 부모님 그리고 혈족의 뿌리인 조상을 기억하며 찾아가는 귀성(歸省)의 행렬이 오늘 이어지고 있습니다. ‘귀성(歸省)’이라는 말의 뜻을 제가 책에서 찾아보았더니, 歸鄕省親이나 歸鄕省墓를 줄여서 쓴 말이라 합니다. 歸鄕이라 하면 글자 그대로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뜻하지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집으로 돌아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homing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 돌아감은 생각만 해도 벌써 가슴을 고동치게 합니다. 그 집은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계시며 형제들과 이웃들의 반가운 얼굴들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그래서 고향에 돌아가면 성친(省親)하게 됩니다. 피붙이를 살펴 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歸省이란 날아갔던 기러기가 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춘거추래(春去秋來), 즉 봄에 뜻한 바가 있어 험한 세상으로 떠나가 흘러 다니던 숱한 날들의 땀을 가을바람에 날리며 이제 그만 돌아오는 날개 짓으로 행렬을 지어 반가운 무리 속에 합류하는 것이 귀성행렬이지요. 봄에 뿌려진 씨앗들처럼 뿔뿔이 세상 땅에 던져졌던 자식들이 가을에 거두어지는 한 무더기의 볏단처럼 험한 세상에서 얻은 값진 수고의 열매로 큼지막한 덩치가 되어 부모님 품속으로 고향의 가슴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歸省인 것이지요. 그러나 올해의 한가위에 우리 중에는 부모님 품속으로 고향의 가슴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도 앞바다에 수장된 자녀들이 있습니다.

 

귀성(歸省)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

 

어찌 해야 하나요…?! 지난봄에 잠깐 집을 나섰는데 가을이 되도록 아직 돌아오지 않는 자녀들을 기다리는 그 부모님들의 처지를…! 한가위 휘영청 떠오르는 달 속에 그 자녀들 얼굴이 반사되진 알을까요…?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면, 대통령도 장관들도 국회의원들도 슬프지 않을까요? 이 한가위,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이라면서 그래서 모든 민족이 함께 슬프지 않을 수 없을까요…? 그렇다면 그 가족들이 보상금 더 타내려고 한가위 보름달을 처연히 바라보는 것일까요…! 보름달의 얼굴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귀성(歸省)하지 못한 세월호의 아이들


한가위 명절인 내일은 마침 9월 8일 ‘성모 성탄 축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생각해봅니다. 아들의 주검을 가슴에 안은 어머니를 생각해봅니다. 그 성모님의 가슴 같은 마음이라면 돈을 담아 넣고자 하는 가슴일까요? 자녀를 안아보고자 하는 가슴 아니겠습니까?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에 한 민족이라면 모든 사람들에게서 읽혀지는 같은 사연이 새겨진, 그런 가슴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민족 공동체이니까요!

 

우리는 정말 민족 공동체인가


여기서 우리의 민족 공동체라는 것이 도대체 함께 살 수 있는 공동체인가 하는 관점에서, 더불어 앞날을 설계할 수 있을 만큼의 공동의 희망이란,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진실이어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서로 믿을 수 있어야 함께 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잘못한 것이 있으면 타이름을 들을 수 있는 사이, 그러므로 더욱 자기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사이, 거기에 우리는 서로가 형제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한 공동체를 예수님께서는 제시하십니다. 먼저 잘못 했던 것에 대한 처벌만을 과제로 삼자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한 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음이 큰 문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참으로 큰 문제 꺼리이므로 어찌하든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개인 간의 내밀한 양심의 대화방으로부터 두 세 사람의 우정의 마당에로 이끌어내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8, 16 참조: 교회에 알리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말씀은 마태오복음서 저술 당시의 교회 사정과 그 역할을 반영한다. 이에 관한 자세한 해설은 정양모 역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신약성서 마태오 복음서 18, 15∼18의 주석을 참조 할 것). 이러한 우정의 마당에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끝내 공동체의 판단에 맡기라는 것입니다(마태 18, 17 참조). 국가적 과제는 그래서 국회에서 국민 여론을 취합하여 논의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서(파란 지붕의 어느 방에서) 누구누구 몇 사람이 논의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공동체의 방식

 

이렇게 예수님께서 문제 해결의 방식으로 제시하신 공동체의 방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을 고백했던 베드로에게 하셨던 그 똑같은 말씀의 방식입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 18 = 마태 16, 19 참조).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 19∼20). 이 말씀은 믿음으로써 해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믿음이란 인간끼리 만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가운데 주님이 계신 믿음을 일컫는 것입니다. 인간끼리의 믿음이란, 그것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져버릴 수 있는가를 우리는 많이 체험하여왔습니다.


기도는 주님과 함께 함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들 사이에서,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과의 사이에서라도, 그 사이에 하느님 계심을 볼 줄 아는 관계를 설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이를 기도하는 사이라고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함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함’입니다. 거기에 하늘나라의 일로 우리의 사이에 관계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인간의 나약성으로 빚은 잘못이란 서로 타일러 부끄러움 없이 진실의 빛으로 개선할 수 있는 형제들의 삶, 곧 하늘나라 질서의 삶을 형성해주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 저희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라고 기도하며, 우리들 사이에 아버지 하느님이 계신 나라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느님 나라 곧 용서의 나라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우리는 오늘의 복음 말씀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 즉 다음주일의 마태오복음서 18장 2135절에서 읽을 것입니다(다음주일은 ‘삽자가 현양 축일’이므로 연중 제24주일의 복음인 마태 18, 21∼35를 읽지 않습니다만, 교우님들께서는 그 구절을 성경책에서 찾아 읽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한없이 용서하시는 하느님처럼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 내용입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11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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