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명절
2014년 9월 8일 10시 만수리공소
우리는 세상의 떠돌이들
떠돌이들의 기쁨도 슬픔도 ... !
감사와 축복이 있는 날
예로부터 ‘五月農夫 八月神仙’이라는 말이 있듯이, 한가위(秋夕)는 일손을 멈추고 쉬는, 1년 중 가장 즐거운 명절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보름달만큼이나 여유롭고 환하게 둥글고 넓은 마음으로 모두 함께 얼싸 안는 정감을 서로에게 선사하는 날이지요. 그래서 이 날은 감사하는 날이요, 축복을 나누는 날입니다. 이 날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음이 조상의 음덕(蔭德)이요, 서로가 한 핏줄임을 눈으로 살갗으로 느낄 수 있음이 부모형제의 사랑임을 확인할 수 있어 그 감사의 날이 되고, 그 나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는 그 감사에 꾸밈도 아낌도 없는 마음들이 주고받는 것, 그런 축복의 날입니다.
이러한 감사와 축복의 아름다운 날을 찾아 간직하고 매년 이렇게 즐거울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전통을 우리는 우연의 관습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1년 4계절을 우주만물의 생성현상 속에 숨어있는 원리에서 읽을 줄 알았던 깨달음으로 이 명절을 간직해온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조화를 우리네 삶 속에 투영할 줄 아는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네 삶이 아무렇게나 또는 거저먹기로 혹은 내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의 이 명절은 참으로 그리스도 신앙의 바탕을 이루는 지혜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 인간의 땀으로 이 땅에서 드러나게 하는 조화로운 관계가 농경문화적 삶의 표현으로 이 명절을 우리 민족이 고유하게 보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늘과 사람과 땅, 즉 天地人의 조화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상의 음덕으로 이어받은 우리의 축복은 곧 하느님이 아니시라면 그런 일을 이루어줄 ‘근원’이 어디에 있으며, 결실을 맺게 하는 그 축복의 밭인 이 땅(우리가 사는 곳․場所)을 우리 인간의 땀으로 적시게 할 ‘때(時間, 季節)’를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고는 이 풍요로움을 즐길 수 있도록 누가 조화를 부려주겠는가? 그리고 혼자 해서 살아 갈 길을 마련 할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깨닫는 우리 인간이 공동의 삶을 이룰 줄 알게 하신 하느님이 아니시고는 우리 인간들 안에 그 공동체 본성을 누가 심어주었겠는가? 이렇게 오늘 이 명절에 우리는 확신할 수가 있어, 오늘은 특히 하느님께 감사하는 날인 것입니다.
오월 농부, 팔월 신선
다시 말하여 ‘五月農夫’처럼 부지런히 세상에 나가 일할 수 있었던 우리가 ‘八月神仙’처럼 우리 인간의 꾀를 잠깐 접어두고 감사할 수가 있는 날이 오늘인가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명절은 歸鄕省親의 날이듯이 또한 歸本省天 즉 본원(本元)으로 돌아가 하늘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의 감사가 이루어지는 ‘귀본(歸本)의 날’이라 말하고 싶습니다(歸本은 眞寂<진적>의 本元으로 돌아감<참 고요로 돌아감>, 즉 僧侶의 죽음을 뜻하는 佛敎 用語이지만 저는 여기서 인간이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뜻으로 쓰고 싶습니다).
이 명절에는 오곡백과가 익는 때이므로 시식(時食)도 새로움(本元)으로 돌아갑니다. 햅쌀로 밥을 짓고 떡과 술을 빚어 제사를 지내고 나누어 먹습니다. 햅쌀로 만드는 한가위의 떡은 ‘오려송편’이라 하는데 다른 말로 신도(新滔)송편이라 합니다. 그리고 햅쌀로 빚은 술을 신도주(新稻酒)라 합니다. 햅쌀떡, 햅쌀술이라는 뜻이지요. 이러한 햅쌀로 이 명절을 준비하는 우리의 이 명절풍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하느님 백성이 햇곡식으로 하느님께 감사하는 정신과 일치시켜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돌려 드립니다.
요엘 예언자의 헤아림
우리의 그런 마음을 오늘 제1독서의 요엘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헤아려주고 있습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준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요엘 2, 23∼24)
그러한 마음은 하느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 첫 농사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떠돌이 같은 우리가 고생하는 것을 굽어 살피시고,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 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주님께서 주신 이 땅의 햇곡식을 이렇게 가져왔습니다.”(신명 26, 1∼11 참조)
마음을 돌릴 줄 알아야 참 행복
그렇습니다. 떠돌이 생활의 고달픔(객지설움)을 고향 부모님 품안에서 녹일 수 있는 심정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 돈 벌고 출세하자면서 얼러붙은 객지에서 얼핏 얻은 게 많다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한 삶의 완결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세상 것 모두는 근본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귀본(歸本)할 줄 알아야, 즉 ‘마음 돌릴 줄 알아야’ 참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험한 세상을 살다가도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어, 즉 부모님의 품과 고향이 있어 행복을 깨닫는 계기가 우리의 명절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견지에서 인생의 완결을 향하여 돌아갈 수 있는 자세가 종국적으로는 신앙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 자세를 가다듬도록 오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루카 12, 21 참조). 저는 어제 오후에 인근에 사시는 노인 가정 세 곳을 찾아가보았습니다. 과일 상자 하나씩 세 개를 오토바이 꽁무니에 싣고 명절 인사를 하러 갔지요. 한 가정의 노부부께서는 자녀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인지 조금 쓸쓸해 보였지만, 할머니께서 나물을 다듬고 계신 표정은 들떠 있는 듯 했습니다. 두 번째의 가정에 가서는 자녀들과 손자들이 와서 떠들썩했습니다. 그 가정의 즐거운 분위기를 제가 방해하는 것 같아서 인사만 하고 후딱 나와서, 세 번째 가정에 갔다가 거기서는 그 가족들에게 잡혀서 부침개와 술을 얻어먹고 오토바이를 음주운전해서 돌아왔습니다. 세 가정의 부모이신 노인들의 공통적 표정은 자녀들 돌아옴에 대한 행복이었습니다. 그 노인들 시골에서 밭에 일하며 사시는 분들이지만, 행복한 부자들이지요. 자식농사 잘 지은 부자들…!
사람으로 부자가 되어야
그렇습니다. 재산으로 부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부자이어야 하는 걸 명절에 즐거운 가정에서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어리석은 부자이기보다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들을 저는 어제의 세 가정 노인들에게서 보았습니다.
그런 반면에 자녀들이 돌아오지 않는 가정의 부모님들을 생각해봅니다. 사정들이 있어서 그런 가정들 있겠지만, 세월호 희생자들 가정은 한가위 보름달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볼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즈음 그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심정을 백분지일 정도 공감하는 심정입니다. 저와 7년 동안 함께 살아온 애견이 2주 전에 실종되었습니다. 그 녀석은 매어있거나 갇혀 있으면 용변을 한없이 참습니다. 그래서 밤에는 우리 공소 마당의 대문을 닫아놓고 그 녀석을 풀어줍니다. 그 녀석 어디에다 일을 보았는지 7년 동안 제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깔끔한 놈입니다. 2주 전 비오는 날 밤이었는데, 우리 공소 뒷마당의 쪽문을 제가 단속하지 않은 탓에 그 녀석이 외출을 한 것입니다. 동네 구멍가게 주인과도 친하게 지낸 그 녀석은 그 가게에 가서 햄 조각을 얻어 입에 물고 자랑스레 돌아오기도 하던 버릇이 있습니다. 그날 밤에도 그 가게에 가서 그 주인에게 아양을 부렸다고 합니다. “이제 그만 네 집에 돌아가라”면서 가게 주인이 문을 닫은 게 그 녀석에 대한 마지막 소식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요즘 보신탕 개 값이 비싸서 손을 탄 것 같다고 말입니다. 어떤 불량한 손에 끌려가지 않았으면 틀림없이 집에 돌아올 그 녀석입니다. 그런데 2주간을 기다려도 오지 않습니다. 그 녀석의 빈 집을 볼 때마다 슬프고 분합니다. 작년 한가위 밤에 저와 그 녀석 단둘이서 공소 마당에서 달구경을 한 일이 있습니다.
▲ 작년 한가위 밤에 함께 달구경한 애견 ‘오카미’
▲ 그 녀석 새끼 낳아 끌어 안고 있는 모습
▲ 그 녀석 새끼들 젖먹이던 모습
오까미를 잃은 슬픔
그래서 이 한가위 날 그 녀석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저의 애견과의 사연이 이러할진대, 세월호 희생 자녀들의 부모 심정…, 이 명절에 어떠할 지요…! 이 명절의 한 하늘 아래 사는 입장에서 그 부모님들과 가족들의 마음을 상상해보면서 기도합니다.
“주님, 한가위 명절인 오늘이 마침 9월 8일 ‘성모 성탄 축일’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아드님의 시신을 가슴에 안으셨던 성모님처럼 슬픈 어머니들의 가슴에 주님께서만이 주실 수 있는 위로를 내려주소서! 인간들은 인간들의 슬픔을 서로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만이 그 슬픔들을 아시지 않습니까…! 즐거움만이 아니라 슬픔도 우리 인간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깨우쳐주소서! 명절에 끼리끼리의 즐거움에만 취하지 말고 이웃의 슬픔도 함께 할 수 있는 인간들이 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모두 세상에서 떠돌이들입니다. 함께 떠돌면서 즐거움도 슬픔도 함께하게 하소서! 아버지의 집에 돌아갈 때까지…!”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12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 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 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가톨릭노트 > 신부 윤종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교, 그것은 과거의 일이 아닌 오늘의 삶이어야 (0) | 2014.09.21 |
---|---|
[성십자가 현양축일] CROSS, 모순의 표지, 그러나 모순을 사라지게 한다 (0) | 2014.09.14 |
희망은 믿는 사이에서! ... 우리 사이에 하느님 계셔야 (0) | 2014.09.07 |
신앙생활? 그것은 불편한 삶! (0) | 2014.08.31 |
우리가 진정 행복한 까닭은? .. 우리 이름이 바뀐 것처럼 그렇게! (0) | 2014.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