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일

2014년 8월 31일 09시 만수리공소


신앙생활? 그것은 불편한 삶!

반석, 아니면 걸림돌? 



망설이면 행복하지 않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마태오복음서의 전반부 결론 부분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신앙 고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마태 16, 16 참조). 그리고 이어서 우리는 오늘 마태오복음서의 후반부에 진입하는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모두 베드로를 필두로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님 가시는 길을 따를 것인가 오늘 망설이는 입장에 이르렀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우리는 지난주일의 복음 성경에서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 그래서 너는 행복하다.”(마태 16, 17)하고 말씀하신 것을 우선 상기합시다. 우리도 같은 신앙을 고백하여 예수님께로부터 “너희는 행복하다.”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저주하는 예수님

그런데 오늘은 어처구니없게도 베드로가 예수님께로부터 저주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 23) 하는 꾸지람을 들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예수님의 그러한 꾸지람을 듣게 되지는 않을까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꾸지람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 때부터" 참다운 신앙인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마태오복음서의 후반부 서두에 언급된 “그때부터”(마태 16, 21)라는 그 시점에서 그야말로 지금부터 예수님의 길을 기꺼이 따를 신앙의 결단을 보여야만 참다운 제자 즉 신앙인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한 점을 이 복음서의 후반부를 시작하는 이 첫 마디 “그때부터” 라는 말이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때부터”라는 언급을 통하여 복음서는 예수님의 태도변화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시지 않던 말씀을 하기 시작하십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예루살렘에 가실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시골 갈릴레아 주변에서만 활동하시던 분이 이제 서울에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은 당연히 큰 기대를 하겠지요. 큰 능력을 지니신 그분을 따라 서울에 가면 아마 운수대통을 보게 되리라 기대하겠지요.


나는 고통을 받고 죽을 것이다 


그런데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거기 권력 있는 사람들이 나를 잡아 고통을 주고 결국 죽일 것이다”(마태 16, 21 참조). 이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재수머리 없게 김빠지는 소리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세상 사람들한테 비웃음도 당하고 손해 본 것도 많은데, 이 무슨 실망스런 말씀을 하신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모든 것은 사람 꼬드기기 위한 속임수였단 말인가…?

 

예수님의 그런 말씀에 실망하지 않고 그분을 따라 나설 수 있는 제자라면 신앙생활이 미적지근하게 답보상태여서는 아니 됩니다. 5년을, 아니 10년을 신앙생활 했어도 항상 그 턱인 상태라면, 도대체 어쩌자고 신앙을 지녔다 하겠습니까? 


오래된 교우들의 부끄러운 모습들


저는 가끔 교우들의 신앙 태도를 보면서 저분들이 왜 성당엘 나올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성당에 와서 어쩌면 막연한 위로나 기대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신앙생활 했다는 신자일수록 새로 영세한 신입교우만 못한 경우를 저는 흔히 보았습니다. 열정적으로 준비하여 갓 세례를 받고 기쁜 믿음의 삶을 시작한 새 신자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는 나태한 신자들은 대개의 경우 영세한지가 오래일수록 그렇습니다. 단적인 예로써, 영세한지가 오래 된 신자일수록 새 신자들보다 더욱 교리를 모르고, 성경도 더 읽지 않고, 공동체에 참여하지도 않고, 이웃 사랑 실천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사목자로서 영세한지 오래된 교우님들의 재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했습니다. 성경 읽기라든가, 성가 열심히 부르기라든가, 교리서 읽고 발표하기라든가 등등의 교육 프로그램을, 지나온 본당들에서 실행하여보았습니다. 그러나 영세한지 오래된 신자일수록, 그리고 여기 저기 교회 내에서 얼굴이 알려진 신자일수록, 그러한 저의 사목 계획에 대하여 불평하고 반대를 일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하지 않으면서 열심히 하고자 하는 신자들을 훼방하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쓰라린 체험


이러한 현상을 체험한 저에게는 쓰라린 과거가 있습니다. 이십여 년 전에 도시의 본당에서 사목할 때의 일입니다. 영세한지 오래 된 신자 가운데 저의 사목 활동을 비난만 하던 분이 인근의 다른 본당에 주일미사를 다니면서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는데, “내가 뭐 신부보고 성당 다니나? 하느님보고 다니지! 피곤하게 늘 무얼 하라고 볶아대는 신부를 피해서 차라리 다른 성당에 다니는 게 마음 편하지!” 하더라는 것입니다. 저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면 우울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그 일로 매우 우울하던 그 시절에 저와 오랫동안 교분을 맺고 지내는 사이의 불교 조계종 스님한테서 고무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불교계의 개혁 의지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조계종의 여러 본사들 중에 충청도 모 본사와 영남 지방 모 본사에 대하여 총무원 측에서 연간 수십 억 원씩 불교 신자 재교육비로 상납금을 강제 납부토록 조치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대상 본사들이 신자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서는 재정을 쓰지 않고 시주나 받고 불공 드려주고는 절간 확장불사나 일삼는 바람에 그런 절의 신자들일수록 신앙 수준이 저급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의 사제관에서 대화를 하던 그 스님이 우리 본당 주보에 실려 있는 성경 공부 교재를 보고는 불교에서도 바로 이런 일들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천주교회의 사목 활동 방법론에 대하여 세세하게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생활, 그것은 세상에서 불편한 삶


이러한 과거의 기억과 더불어 오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의 편의를 위한 어떤 것을 비는 기도만을 드리는 것 정도가 참 신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신앙을 잘 못 알고 있는 ‘자기기만’인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세상을 살면서 신앙인이기에 괴로워해야 할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듣기 거북한 말이 되겠습니다만, 신앙 때문에 세상살이에 괴로움이 더욱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그것은 세상에서 불편한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굳게 지닐수록 세상과 긴장 관계에 놓인다는 것입니다. 팽팽한 긴장으로 세상과 대결해야만 그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마태오 후반에서 방향 전환하시는 예수님


오늘 마태오복음서의 후반부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긴장에로의 방향 전환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태 16, 21).

 

그렇습니다. 베드로처럼 신앙을 확실하게 고백할 줄 알게 되었다면, 이제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여정을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붙들면서,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 22) 하는 베드로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 23).

 

믿음의 길을 훼방하는 것은 사탄의 짓이다


신앙인이라면서 믿음으로 걸어갈 새 삶의 길을 훼방한다면 그것은 사탄의 짓이겠지요. 인간이 하느님을 향한 생각으로 행동할 때 그것을 믿음의 삶, 즉 ‘하느님의 일’에 열중하는 삶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현세적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신앙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능력으로 배신을 하는 사탄의 행위일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제자들을 신앙훈련 시켜서 나아가고자 하신 하늘나라에로의 행보에서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현세 영리의 도모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사제가 신자들에게 인기 얻으려면


언젠가 저는 후배 신부님과 대화하는 가운데 그분의 다음과 같은 사목자로서의 자조적인 말씀을 듣고 공감하여 답답한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 후배 신부님의 답답한 심정토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제가 신자들에게 높은 인기를 얻으려면 정작 하느님의 뜻과는 달리 세상살이 방식에 익숙한 신자들의 공감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떤 절박한 삶의 곤궁에서 참 삶을 모색하기보다는 편리하게 즐기는 삶이 오늘날 사람들의 추구일 뿐, 그래서 부담스럽게 신앙의 핵심 사항을 강조하다보면 신자들이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짊어지고 가신 십자가, 그리고 우리 또한 그분처럼 각자 짊어지고 가라 하신 십자가란 무엇인가? 따지고 보면 그 십자가란 참으로 불편한 것입니다. 그 불편한 것, 더욱 고통스런 것, 더 나아가 죽음으로 향한 그 십자가를 이 시대에 우리는 과연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역겨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앙인으로 자처한다면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고통스럽다 해서 피하고 타인들에게 전가하는 짐을 뜻합니다. 그러한 사이에 불행이 따르고, 죄악이 세상을 지배하기에 이른 현실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분노하고 미워하게 되는데, 여기서 인간들이 자초한 벌을 우리는 하늘이 내리는 불행이라 착각합니다만, 그 착각 즉 하늘의 벌을 막아내기 위한 방어책이 곧 먼저 자기희생을 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인가 미신행위인가


그 후배 신부님과 나눈 이 대화는 결론적으로, 우리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의 대가로 당하게 될 불행을 막고자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미신행위와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액운을 면하자고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하여 귀신을 달램으로써 위로를 얻으려 하는 그것과 같지 않은가 하는 씁쓸한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미신과 같은 얄팍한 기복신앙을 뛰어넘는 우리 자신의 희생적 행위가 있어야 적어도 삶의 참다운 향상이 이루어진다는 그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일의 복음서에서 신앙 고백하는 시몬의 이름을 예수님 친히 바꿔주시면서 ‘반석’(베드로)이라 부르셨던 사실과는 달리, 오늘은 그 ‘반석’을 ‘걸림돌’이라고 부르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충격을 받습니다. ‘반석’은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바탕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교회의 반석이 걸림돌로 변하게 되었는가요? 예수님의 이러한 지적을 저는 지난 8월 14일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에서 연설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 속에서도 공감하게 됩니다. 교회가 복음적이지 못하고 세속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교회 자체가 이미 걸림돌이 돼버리는 현상을 교황님께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핵심이다


“저는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핵심에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그 자리에 있습니다. 나자렛의 회당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직무를 처음 시작하는 자리에서 이 점을 명확히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이 장차 올 하늘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심판을 받을지 드러내 밝히실 때, 여기에서도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봅니다. 번영의 시대에 떠오르는 한 가지 위험,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저 또 다른 ‘사회의 일부’가 되는 위험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신비적 차원을 잃고, 성체성사를 기념하는 능력을 잃으며, 그 대신에 하나의 영적 단체가 되는 위험입니다. 이 단체는 그리스도교 단체이며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을 가진 단체이지만 예언의 누룩이 빠진 단체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당하시게 될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가 반대하고 나서자 그에 대해서 “너는 걸림돌이다.”고 하셨듯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여야 복음적임을 망각하고 세상에서의 번영을 추구하는 유혹에 빠진 교회라면 그거야말로 ‘걸림돌’이지요.

 

스캔들은 유혹의 돌부리


‘반석’과 ‘걸림돌’은 한갓 ‘돌덩어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쓰임새로 보아서는 천양지차입니다. ‘걸림돌’이란 ‘스캔들’(scandal)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서의 원문 그리스어의 ‘스칸달론’(skandalon)이 그것입니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유혹의 돌부리’입니다. 교회가 반석(페트로스·petros)이지 못하고 세상에서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로 바뀌었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있을까요? 세속의 정치 문화적 또는 경제적 추세로 교회의 바탕이 흔들린다면 그게 곧 ‘스캔들’입니다. 교황님의 지적대로 ‘예언의 누룩이 빠진 단체’로 전락한 교회라면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유혹의 돌부리’일 뿐일 것입니다. 


믿음을 고백한 베드로라면, 서울(예루살렘)에서 즉 세상 권력의 중심부에서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듯, 그 중심부의 (권력과 번영의) 밖으로 내던져져 배척받는 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돌은 곧 하느님의 집을 짓는 머리돌이 되어 그 위에 참 교회를 형성할 것입니다. 그 믿음의 머리돌과 함께 맞추어 쌓아지는 벽돌들처럼 한 무리가 되는 교회, 그것은 세상에서의 고난과 배척을 감수하여 예수님과 함께 가는 사람들로써 형성될 교회인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따라 예루살렘 곧 새 삶의 나라로 가는 우리가 주님의 참다운 제자로서 형성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구성원들에게는 짊어져야 할 십자가 즉 세상에서의 괴로움을 감내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여 살아가야 함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촉구하고 계십니다. 


 

출처: 가톨릭성지 하부내포 공식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110




부여외산면 만수리공소 담당 하부내포 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주임 신부

1947년 6월 충남 부여 출생. 1960년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에 입학가톨릭대 신학부를 거쳐 1974년 12월 사제가 되었다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 석사와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해 해미 본당 초대 주임으로 6년간 성지를 조성했고, 2001년 안면도 본당이 설립되자 대전 도마동 본당 주임과 대전 서구지구장직을 2년 만에 끝내고 자청해 갔다열악한 환경의 안면도 사목 6년을 마친 윤종관은 2007년에 버려지고 잊혀진 하부내포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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