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학교 제 109차 기본과정이 명동성당 가톨릭회관에서 시작되었다. 총 13번에 걸쳐 진행되는 이번 109차 과정은 2015년 2월 2일부터 5월 4일까지 매주 월요일 총 13주간 동안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가톨릭회관 강의실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2월 2일 첫 수업은 3층 대강당에서 열렸다. 


명동성당 건너편 골목 안쪽에 자리잡은 아주 오래된 순대집. 메뉴판에는 없지만, 순대국밥을 주문했더니 식사가 나왔다. 메뉴판에 나오는 순대정식은 7천원(순대국밥에 더해서 순대가 접시에 조금 제공된다)인데, 국밥만 시키니 6천원이고, 아주 맛있었다. 이 골목의 낡고 오래된 건물들은 철거당할 운명인지 골목 곳곳에 철거를 규탄하는 현수막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진에 담지 못해 아쉽다. 다음 기회에. 


2014년 2월 2일 월요일 저녁 6시의 명동성당과 가톨릭 회관 전경. 성당의 종소리에 주위의 여러 분들이 경건하게 종소리를 맞이하는 모습도 모였다.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톨릭회관 6층 621호)에서 주최하는 이번 과정은 선착순 90명인데, 수강료는 5만원이고 2권의 책을 제공한다. 가톨릭 사회교리의 <주제편>과 <문헌편> 이렇게 2권이다. 첫 날인 오늘 교육내용은 <가톨릭 사회교리입문>이다.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이며 양천구 신정동 성당 주임인 박동호 신부님이 강사로 나선다. 다음 주에도 같은 분이 강사를 맡았다. 아래 사진은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 앞에 마련된 안내 데스크이다. 첫날이어서 나눠줄 책이 잔뜩 쌓여있다. 이 일을 준비하시며 애쓰시는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서울 명동 가톨릭문화회관 3층 대강당에서 제109차 사회교리 기본과정 첫 시간이 시작된 것은 2015년 2월 2일 주님봉헌축일 저녁 7시를 막 넘긴 때였다. 이 과정의 주최자이며 총 13회 과정 중 1~2회와 마지막 13회를 주관하는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님이 앞에 서시어 자신을 소개했고, 나눠준 자료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앞으로의 강의장소는 변경될 수 있고, 그럴 경우에는 공지를 한다는 언급도 함께 있었다. 

다음은  2월 2일의 제1회 강의(총 두시간)의 첫번째 1시간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아래 내용은 이 글을 정리한 필자의 기억과 기록을 바탕으로 재정리된 기록이기에, 다소 부정확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실제로 강사 박동호 신부님의 의도와 맥락과 다른 표현이 발견될 수도 있음을 참고해야 합니다. 

(박동호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겸 신정동성당 주임신부님)



사회교리는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생소한 편입니다. 세부적 내용까지 공부를 하자면 방대하지만, 역량이나 사정상 13주에 기본과정을 끝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이 끝나면 심화과정이 마련되어 있기도 합니다.  

(2015년) 2월 16일(월)부터 3월 9일(월)까지 4번의 강의는 교황 레오13세(새로운 사태), 교황 요한23세(지상의 평화), 제2차바티칸 공의회문헌(사목헌장), 교황 프란치스코 권고(복음의 기쁨) 등 교황과 교회가 내놓은 책입니다. 문헌이지요. 그리고 3월 16일(월)부터 4월 27일(목)까지 6번의 강의는 각종 분야에 대한 사항입니다. <인간과 인권>, <인간노동>, <경제생활>,<정치공동체>, <환경생태계>, <세계공동체, 평화> 등에 대한 얘기이죠. 그리고 마지막 13번째 강의일인 5월 4일도 책에 대한 얘기입니다.  (* 참고로 4월 6월 월요일은 강의일정이 없음)

레오 13세(1810년 이탈리아 생). 1878.2.20~1903.7.20 재위


여기에서 소개된 책은 중요한 문헌이라고 여기는 것을 소개한 것이죠. 
교황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1891)는 노동의 현실에 관한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생소합니다. 노동은 경제이며 돈의 문제이며, 이해관계가 첨예한 문제인데, 요한 23세에 대해서는 빨갱이라고 월 가에서는 대놓고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죠. 

요한 23세(1881년 이탈리아 생). 1958.10.28~1963.6.3 재위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963)는 세계평화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이것도 첨예하지요. 이것은 우리나라에게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지상의 평화>의 배경이 1963년인데, 사회주의, 이른바 real socialism과 서방사회 이데올로기, 정치경제, 군사적 대치. 무력증강 등의 긴장이 높았던 때입니다. 그리고 우린 그 축소판이죠. 핵무기 뿐만 아니라 무력증강을 올리던 시절 쿠바 미사일 위기, 해상에서 미군과 소련의 대치, (19621027일은 인류가 종말 직전까지 다가섰던 날이다. 쿠바가 구소련으로부터 핵미사일을 반입하려 하자 미국이 해상 봉쇄에 나선다. 양국의 대치에 소련까지 가세하며 인류는 핵전쟁 문턱까지 갔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순간으로 꼽히는 '쿠바 미사일 사태'.) 그런 배경 하에서 교회는이쪽도 저쪽도 편들지 않아서 양 쪽이 서로 달갑지 않아했던 겁니다. 

Just war theory 정전론(正戰論)이란 논리가 있습니다. 즉 정당방위의 목적으로 무력을 사용한다는 정전론인데, 아우구스티누스를 기점으로 암브로시오 성인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성인이 어쩔 수없이 무력을 사용해서 무력집단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당한 전쟁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죽 내려오다가 그것이 요한 23세에 와서 '전쟁은 평화를 담보할 수없다. 전쟁은 평화의 왼전한 실패다.'라는 주장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 배경은 재래식 무기의 충돌보다는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탄으로 알려진 핵무기가 사용된 이후에 세상이 깜짝 놀랐던 것이죠.  

사목헌장은 읽어보신 분 있습니까?

어떤 측면에서 우스개 소리로 한국 천주교회는 타이틀은 천주교회인데, 한국이란 타이틀로 인하여 독특해진다는 것. 기톨릭은 단일한 교리 여겨졌는데, 한국교회는 단일한 교회 체계 가운데 취사선택한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한편으로 든다는 것... 여러분 동의하기 어렵죠? 사목헌장은 헌장입니다. 헌장은 영어로 써놓으면 constitution 즉 헌법과 같습니다. 그것은 최상위 개념이므로, 그 개념에 따라서 하위의 것들이 조정되는것입니다.

사목헌장은 2차바티칸공의회 4개 헌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하나 고백한 헌장입니다. 우리에겐 낯섭니다. 그래서 사회교리가 낯섭니다.

복음의 기쁨은 지난 8월 한국 다녀가신 교황 프란치스코의 권고문입니다. 그런데 권고란 뉘앙스는 '하거나 말거나'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또 '명령'을 하면, '지가 뭔데 명령이야!' 이럴 수도 있죠. 그런데 '권고'를 하면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참 따뜻한 분이야 그런데 안 들어먹어도 되는거죠?

사도권고의 전통은 우리가 신약성경 27권 중에 4개 요한과 사도행전, 요한묵시록을 빼면 나머지는 사도들이 권고 형식으로 쓴 편지입니다. 그래서 교황의 권고는 그러한 전통을 따른 겁니다. 개신교 입장에서는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이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가톨릭 우리 입장은하나로부터 이어오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그것을 드러내는 편지가 교황들의 회칙이라든지, 회전초밥의 회전처럼 돌려가면서 먹듯이, 돌려가면서 읽는것인 거죠. 그런데 권고는 사도가 당신의 사목지.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이렇게 보내듯, 전세계 보편적인 그리스도 교회에 사도로 신앙생활 권고한다 이런 식입니다.

읽어보셨나요? 네. 댓분 그리고 인권, 노동, 정치, 환경, 이런 것들에 대해서 왜 사회라고 말하나요?
사회는 social 공공은 public입니다. 반대는 개인이나 사적 individual, privat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철도는 공공의 것으로 둘 것인가 혹은 사적으로 둘 것인가? 라는 논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공공의 것, 공공재는 public goods 이 됩니다. 그런데, 철도민영화는 사적 영역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이므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 이익, 사익, 사적 이익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죠. 그래서 공익(효과)과 사익(효율)이 대비됩니다.

예를 들어 100원을 투자했는데, 수입이 90원 밖에 안들온다는 쉬운 백분율로 나눠보았을 때 10원이 모자르면 '효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효과'는 그 목적에 맞게 이뤄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벤담의 공리주의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효용입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말하고 있죠. 그런데 사회교리는 이게 아닙니다. 교리는 내적, 영적, 이런 얘기라고 할 수 있는데요. 성당에서 자주하는 내적 회심, 영적 성장. 이런 얘기 많이 하죠. 그런 얘기하는 게 아니라, 공익과 사회의 모습에 대한 얘기입니다.


우린 신앙을 얘기하다보면, 나와 하느님 관계 많이 얘기하죠, 그런데 가톨릭에선, 나와 사회의 관계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연을 안 맞은 것 같죠. 더러운 세상이니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는 운동이 실제로 있었죠 중.세 때에 사막으로 가는겁니다. 인간들끼리 얽힌 더러운 세상을 벗어난 은수생활 그걸 나쁘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하느님은 사람만 창조한 건 아닙니다. 참이슬만 먹으라고 창조한 게 아니고, 다른 피조물과 함께 창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은 구세주, 구인주가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맨날 아무리 말을 해도 '궁극적으로 이런 거 아니냐?' 이렇게 말씀하시는 건 전제하는 겁니다. 사는 건 누가 삽니까? 내가 사니까. 즉 신앙과 나만 강조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사람은 생각하고, 성찰하고, 판단하고, 책임집니다. 그게 윤리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회로 연장되면 복잡해집니다. 서있는 자리가 다릅니다. 노동자의 입장과 경영자의 입장이 다릅니다. 그래서 빠지는 게 상대주의입니다.

노동자 입장에서 생활임금이 필요합니다. 집에 빈봉투를 가져가는 건 제정신인가요? 내가 노동하는 이유는 내 참이슬만 생각하는 게 아니고, 가족의 돼지껍데기를 생각해야 하고, 미래를 위한 약간의 저축까지 포함하는 것 그래서 그것을 생활임금이라고 합니다. 

1979년과 1980년 마가릿 대처와 레이건 대통령이 영국과 미국에 등장하면서, 노동의 유연성. 산낙지도 아니고, 그렇게 노동계약에 따른 계약임금. 얼마 줄테니 받고 일할 래? 그렇게 계약임금이 사용자 입장에서는 괜찮은 겁니다. 내가 왜 가족까지 책임져. 그럴 수 있죠. 그 개념으로 가면서 노동자의 생활임금 주장과 대립. 다 일리가 있습니다. 일리. 상대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실천적 상대주의가 교회안에 들어와있다면 엄청난 참화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부정하는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린 하느님을 절대라고 믿고, 하느님 뜻과 가르침을 신앙으로 배우는 데, 세상에 절대가 어디있냐?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만, 세상은 다르잖아. 그런 갈림길에서 그 때 그때 정하는거에요. 그래서 교황은 우려하는 겁니다. 사회교리를 할 때, 모든 사회교리는 사회학에서 가르치는 것과 다릅니다. 근거가 성경이며, 몇가지 원리들과 가치가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그것에 대해 교회 내 많은 분들, 어떤 신부님과 어떤 수녀님 분들도 '일방적으로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라고 말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리인가? 교도권으로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가르침은 무어인가? 우린 하느님을 모른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 하면 안되요. 그런 분은 그리스도교를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려는 사람입니다. 우린 하느님의 진리를 지저스 크라이스트가 몸으로 보여줬음을 믿는 종교입니다. 난 그거 안 믿고 싶은 데. 그러면 안 들어와야 하는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걸 다 알아? 그런 분들이 있다는 겁니다.

레벨라시오. 우린 계시종교입니다. 사도들이 그걸 전승하는겁니다. 우린 예수님이 하느님을 온존히 드러낸 분이고, 그 예수님이 당신의 생각, 말, 행적을 글로 남긴 게 성경이며, 그 사도로부터의 일을 성전을 통해 만납니다. 교회의 미스테리움은 삼라만상의 신비를 예수님이 알려주셨다는겁니다. 절대진리란 걸 선포하는 데, 세상에 절대적인 게 어디있어? 그렇다면 안하면 됩니다. 

불교는 끊임없이 용맹정진으로 깨닫는 것이라면, 우린 이미 하느님이 아드님을 통해 보여주셨고, 우린 그것을 끊임없이 선포하는 겁니다. 사회교리는 교도권이란 교회 가르침, 그 터전인 성경과 성전, Holy Tradition 그런 것을 통해서 끊임없이 전승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구약성경을 볼 때 그것이 private하고 individual 합니까? 그것은 공동체의 순례여정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그렇게 읽나요? 어떤 분들은 그냥 개별 구절에 꽂혀서 자신의 삶의 지침으로 삼는 식이죠?

창세기의 에덴도 그렇습니다. 그곳에 아담과 이브와 뱀 그리고 나무와 꽃이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그것은 집단의 범죄였습니다 바벨탑도 집단이 탑을 쌓습니다. 카인이 혼자 자해한 게 아니고, 저 뒤의 마카베오까지 철저히 공동체적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홀로 기도하죠. 그러나 항상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자!" 사람들에게 가는 겁니다. 변모축일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이 훤하게 변하니까 여기다 천막칩시다. 요즘말로 야영하는거죠. 그런데 예수님 내려오시잖아요, 예수님의 단독 행동은 없어요.주변 사람들이 몰려 있어요. 사람들과 프라이빗한 대목은 십자가 아니었을까요! 밤 중에 기도하러 간 건 잘 몰라요. 다만 기도하러 가셨다니까 그런가 보다 합니다. 성경조차도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데, 우리나라 교회는 이렇게 보는 데 인색합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구약과 신약에서 당신 뜻을 계시하는 콘텐츠가 사적이고 개인적이지 않다는 것이죠.

위령기도 할 때, 어둠의 구렁텅이에서 나를 붙잡아주시고, 시편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맥락은 유배간 이스라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개겨서 시련을 겪지만, 우리가 다시 하느님 뜻에 충실히 돌아가면 우릴 어둠의 골짜기에서 구해두신다는 게 이스라엘 당시 백성들이 담은 뜻입니다. 우리가 비록 개겨서 이 꼴이 되었으나, 진심으로 하느님께 돌아가면 그 분은 외면치 않으신다. 이스라엘 공동체성의 회복과 하느님께 돌아가자는 겁니다. 물론 각자각자의 개인적 신앙으로 읽을 수 있으나, 이런 맥락이 있다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시랑하라고 할 때? 여러분 사랑하나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이 맥락. 참 많이 등장하는 데, 그 대상은 고아, 과부, 논부쳐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이 탈출기에서 엄청나게 고통 겪죠? 어느정도 냐면, 하느님이 3장에 보면, 하느님이 듣습니다. 구약 하느님은 초월적, 절대적, 범신론적, 무한한 하느님이 아니고, 인격의 하느님입니다. 짜잔히고 끝내는 게 아니고 내려오시는 하느님입니다. 내가 신음소리 들었다. 너희들이 고아이고 가난했고 떠돌이 때 살피지 않았느냐? 예언자 말도 다 그렇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짓이 있는데, 적어도 너희 사이에서는 그러지 마라. 그래서 50년 되면 다 내놓으라고 하죠. 50년간 빼먹을 만큼 빼먹었으니까 말이죠. 그리고 7년 지나면 땅도 놀리라고 하죠. 구약성경의 이런 행위와 관련해서도 공공의 맥락, 시회적 맥락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회교리에서는 사랑과 애덕을 구별합니다. 애덕은 안 들어봤는데, 까리타스는 많이 들어봤죠? 사랑 아모르와 까리타스를 구별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덕'으로 끼리타스라고 합니다. 사회, 정치적 애덕이란 말. Social and political caritas.

마태오 25장 뭐죠? 길에서 생활하시는 분들이 있죠. 서울 길거리에. 댁에 데려가실 수 있습니까? 과거에는 가능했죠. 농경정주사회엔 동네에서 태어난 공동체 안에서 이뤄지던 일이지만, 도시공동체에선 아무 관계가 없죠?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서울교구 113만 되는 데, 60만 가구라고 볼 때, 한 분씩만 책임져도 해결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등장하는 겁니다. 사회정치적 애덕. 사회적 제도를 만드는 것. 그것도 사랑의 실천입니다. 

길거리에서 잠자는 분들을 새로 일어서게 하거나 사회 복귀하게 하거나 하는 일. 그걸 개인이 할 수 있나요? 사회가 합의해야 하고, 정치적 과정이 생깁니다. 어떻게 하죠? 토론, 협의, 검증해야죠? 그것도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우린 경제는 경제인에게, 정치는 정치인에게, 종교는 종교인에게 그러면 여러분은 뭐죠? 개인은 생업에?

과거에는 쫓아만 가면 되었습니다. 왕정에서 전문가 소수의 집단, 종교,정치, 군사 등 전문가들 10프로 미만의 것들과 평범하거나 천한 90프로의 구성원은 따라가죠. 그러나 민주사회는 다릅니다. 콩나물 사러가는 것도 민주적 과정입니다. 지금은 내가 주체이기때문에 따지는 겁니다. 

근대와 전근대의 구별은 거기 있는 겁니다. 나와 사회가 주체인가 아닌가? 사회! 사회와 공공이란 것. 사회보다 더 큰 조직 있나요?  국가. 국가는 사회보다 앞설 까요?



2015년 2월 2일 열린 제109차 사회교리 기본과정 1강의 첫번째 시간은 50여분이 지난 7시 55분 끝나고 5분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위 내용은 이 글을 정리한 필자의 기억과 기록을 바탕으로 재정리된 기록이기에, 다소 부정확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실제로 강사 박동호 신부님의 의도와 맥락과 다른 표현이 발견될 수도 있음을 참고해야 합니다. 


Posted by 편집장 슈렉요한
,